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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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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다이성은 가마쿠라 시대에 요새로 사용되던 아오바산에 다테 마사무네가 건설한 성이다. 에도 시대에는 다테 씨의 본거지이자 무쓰국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여러 차례 지진과 화재로 파괴되었으나, 보신 전쟁 동안 오에쓰 열번 동맹의 거점 역할을 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일본 제국 육군의 기지로 사용되었으며, 1931년에는 오테몬과 와키야구라가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1945년 센다이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현재는 센다이 시립 박물관과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 등이 위치해 있으며, 일부 성벽과 건축물이 복원되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22년 후쿠시마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과 다테 마사무네상이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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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성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아오바 성
다른 이름센다이 성, 고조로
로마자 표기Aoba-jō
로마자 표기Sendai-jō
로마자 표기Gojō-rō
유형언덕 위 일본식 성
위치센다이, 미야기현, 일본
좌표38°15′08.92″N 140°51′22.16″E
지도Japan Miyagi#Japan
건축 정보
건설 시작1601년
건설자다테 마사무네
재료(정보 없음)
높이(정보 없음)
재건축다테 다다무네
해체1871년
현재 상태석벽, 토루, 해자
소유권(정보 없음)
일반 공개 여부
문화재 지정국가 지정 사적
재건축된 것외관 대수문 옆 망루
역사적 맥락
사용 시기에도 시대
기타
아오바 성 외관 대수문 옆 망루
아오바 성 외관 대수문 옆 망루

2. 역사



센다이성은 게이초 시대에 다테 마사무네가 축성한 이후 폐번치현과 폐성령까지 약 270년 동안 다테 씨 역대 거성이자 센다이 번의 정청이었다. 2대 번주 다테 타다무네 시대에 완성되었으며, 약 2만 평의 대규모 성이었다.

센다이성은 지진 등으로 인한 피해를 여러 차례 입었으나 수리를 거듭했으며, 오슈에쓰 열번 동맹의 맹주로서 보신 전쟁을 겪었지만, 한 번도 전화를 입지 않고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육군 용지로 사용되면서 많은 건축물이 해체되었다. 오테몬(大手門), 와키야구라(脇櫓), 巽문 등은 국보(구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미야기현 지사 공관 정문으로 전용된 토라노몬(寅の門) 부재만 남아 있다.

센다이 성터의 토지 권리 관계는 복잡하다. 센다이시 소유 구획(아오바야마 공원)은 일부이며, 미야기현 고쿠진자와 도호쿠 대학 소유 구획이 많아 본마루(本丸)와 니노마루(二の丸) 안에 경계가 존재한다.

"아오바조(青葉城)"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미야기현 고쿠진자는 "아오바조(青葉城)" 또는 "'''아오바조토(青葉城址)'''"라고 칭한다. 반면 센다이시는 "아오바조(青葉城)(아오바조토(青葉城址))"가 아닌 "'''센다이조아토(仙台城跡)'''"라고 칭한다. 2003년 국가지정 사적 "센다이조아토(仙台城跡)" 등록 이전에는 "'''센다이조토(仙台城址)'''"라고도 칭했으며, 현재도 아오바도오리(青葉通) 지하도 안내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동일 성터에 여러 안내 표기가 존재하며, 양쪽을 병기하기도 한다.

미노마루의 센다이시 박물관 주변에는 호리(堀)와 이시가키(石垣)가 남아있다. 아오바야마(青葉山) 산길을 오르면 산 정상에 축성된 본마루의 거대한 이시가키(石垣)가 나타난다. 본마루에서는 센다이시 중심부, 센다이 평야, 그리고 날씨가 좋으면 태평양까지 조망할 수 있다. 북쪽 니노마루 터는 도호쿠 대학 부지이지만, 동쪽 일부는 센다이시 소유 아오바야마 공원이다.

공습으로 소실된 오테몬(大手門), 오테몬와키야구라(大手門脇櫓), 도베이(土塀)와 메이지 시대에 소실된 본마루 고텐(本丸御殿), 문, 야구라(櫓), 도베이(土塀)의 목조 복원 계획도 있다.

센다이성은 근세 다테 가문의 본거지였다. 근세 이전 아오바야마에 성이 있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와키리성 전투(岩切城合戦) 기록에 나오는 "고쿠조성(虚空蔵城)"이 현재 센다이성 위치에 있던 산성이라는 설도 있다.[5]

다테 마사무네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을 얻어 칠대(千代)에 성을 옮기기로 하고, 1600년(게이초 5년) 12월 아오바야마에 올라 성터를 잡기 시작했다.[5] 그리고 지명을 '''센다이'''(신자체: 센다이)로 개명했다.

센다이가 새로운 거점으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센다이 부근은 육로("해도", "산도")와 수로(나토리 강·히로세 강)가 발달한 교통 요지였다.

# 이와데야마 성은 도요토미 정권의 다테 씨 봉쇄 정책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성이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약속("백만 석 어묵붙")이 실현될 경우, 이와데야마 성은 새 영토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센다이성이 계획되었으며, 기타메 성 개축안도 검토되었으나 시간 문제로 센다이가 최종 선정되었다.[4]

마사무네가 축성한 센다이성은 본마루와 서의 마루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천수대는 있지만 천수각은 없었다. 이는 시대 유행에 역행했지만,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가 "일본에서 가장 뛰어나고 견고한 성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로 견고했다.

산 위 본마루는 왕래가 불편하여, 다테 타다무네는 1638년(칸에이 15년) 니노마루를 조영하고 이듬해 거처를 옮겼다.[5] 니노마루는 히로세 강 안쪽 평지에 위치하여 다테 가 당주 거주 및 정무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오테몬 옆 아오바야마 기슭에 사노마루도 조성되었다. 이후 본마루 사용은 줄고 니노마루가 센다이성 중추가 되었다.

2. 1. 센다이 번 성립 이전

아오바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위치한 아오바 성은 초기 가마쿠라 시대 무쓰국의 명목상 국사였던 시마즈 씨의 한 분파가 요새화된 거주지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지자무라이 (jizamurai)인 고쿠분 씨가 지배했으나, 이후 다테 씨에 의해 멸망했다.[5]

2. 2. 에도 시대

1601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 지역을 방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오바산을 "센다이"로 개명했다. 센다이 번의 초대 다이묘다테 마사무네는 언덕 기슭에 본성(本城)과 산노마루(三の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5] 산노마루와 수많은 문을 포함한 성의 공사는 1637년 다테 타다무네에 의해 완료되었다.

완공 후, 이 성은 다테 씨의 본거지이자 도쿠가와 막부 아래 무쓰국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센다이 성은 1616년, 1648년, 1668년, 1710년 등의 지진과 화재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 1710년부터 1868년 사이에는 6차례 이상의 큰 지진이 발생했지만, 큰 피해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에도 시대를 통해 센다이 성은 화재나 지진으로 여러 차례 건물이나 성벽의 일부를 잃고, 그때마다 재건되었다.

발생년도사건
1646년 (쇼호 3년)지진으로 성벽과 누각에 피해[5]
1668년 (칸분 8년)지진으로 성벽에 피해[5]
1804년 (분카 원년)니노마루 소실 (1809년 (분카 6년에 재건)[5]



보신 전쟁에서도 센다이가 전장이 될 일은 없었기 때문에, 센다이 성은 창건 이래 한 번도 공격받지 않고 요새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2. 3. 메이지 시대

1873년(메이지 6년) 「전국 성곽 존폐의 처분 및 병영지 등 선정방」에 따라 센다이 성은 존치하는 성으로 분류되었다.[5]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센다이 성에는 근정청(勤政庁)이 설치되었다.[5] 1871년(메이지 4년)에는 도호쿠 진대가 센다이 성을 본영으로 주둔했다. 이때 본마루가 파괴되어 석재와 목재는 병영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후 도호쿠 진대는 센다이 진대로 개칭되었다. 나아가 진대 제도가 사단 제도로 바뀌면서 제2사단이 설치되었다.

막말에는 다테 요시쿠니가 친(親)도쿠가와 연합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보신 전쟁 동안 오에쓰 열번 동맹의 중추 기지 중 하나였다. 센다이 항복 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점령되었고, 1870년대에 일부가 해체되었으며, 그 부지는 일본 제국 육군에 할양되어 센다이 주둔지(이후 제2사단)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 1876년(메이지 9년): 메이지 천황 행차[5]
  • 1882년(메이지 15년): 니노마루에서 화재 발생[5]. 오테몬, 와키야구라, 토라노몬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 1904년(메이지 37년): 본마루 터에 초혼사 건립[5] (현재의 미야기현 호국신사).
  • 1920년(다이쇼 9년): 오테몬에서 본마루로 가는 중간에 있는 중문(토라몬) 철거[5]. 문은 현 지사 관저 정문으로 이축되었다.
  • 1925년(다이쇼 14년): 센다이시가 아오바야마 공원 개원[5]
  • 1931년(쇼와 6년): 오테몬과 와키야구라(스미야구라)가 국보로 지정[5].
  • 1935년(쇼와 10년) 5월: 다테 마사무네 사후 300년을 기념하여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이 본마루에 건립[5].
  • 1943년(쇼와 18년): 마사무네 기마상이 금속류 회수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모두 용해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45년(쇼와 20년) 11월, 향토사학자가 시오가마시의 금속 집적소에서 발견했다. 다음 해 9월 사학자가 자비로 구입하여 아오바 신사에 봉납했다.
  • 1961년(쇼와 36년): 센다이시 박물관이 미노마루에 개관함에 따라, 상이 아오바 신사로부터 기증되었다. 이후, 흉상으로 1986년(쇼와 41년)부터 2023년(레이와 5년) 4월까지 센다이시 박물관 중정에 설치되어 있었다(2023년 4월 센다이 녹채관으로 이전).[6]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쇼와 20년) 7월 10일 새벽, 미군센다이 공습 당시, B-29가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오테몬, 와키야구라(스미야구라)(당시 국보), 위병소로 사용 중이던 니노마루 표무대 락실 등이 모두 소실되었고, 호국신사도 소실되었다. 이로써 에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은 미노마루의 다츠미몬(巽門)만 남게 되었다(전후, 다츠미몬 터를 발굴하던 중 초석 근처에서 타버린 흙이 발견되어 오테몬과 마찬가지로 이날의 전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다).

2. 4. 현대

1873년(메이지 6년) 「전국 성곽 존폐의 처분 및 병영지 등 선정방」에 따라 센다이성은 존치성으로 분류되었다.[5]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센다이성에는 근정청(勤政庁)이 설치되었고,[5] 1871년(메이지 4년)에는 도호쿠 진대가 센다이성을 본영으로 주둔했다. 이때 본마루가 파괴되어 석재와 목재가 병영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후 도호쿠 진대는 센다이 진대로 개칭되었으며, 진대 제도가 사단 제도로 바뀌면서 제2사단이 설치되었다.

  • 1876년(메이지 9년): 메이지 천황 행차[5]
  • 1882년(메이지 15년): 니노마루에서 화재 발생.[5] 오테몬, 와키야구라, 토라노몬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 1904년(메이지 37년): 본마루 터에 초혼사 건립.[5] (현재의 미야기현 호국신사)
  • 1920년(다이쇼 9년): 오테몬에서 본마루로 가는 중간에 있는 중문(토라몬) 철거.[5] 문은 현 지사 관저 정문으로 이축되었다.
  • 1925년(다이쇼 14년): 센다이시가 아오바야마 자연공원을 개원.[5]
  • 1931년(쇼와 6년): 오테몬과 와키야구라(스미야구라)가 국보로 지정.[5]
  • 1935년(쇼와 10년) 5월: 정종 사후 300년을 기념하여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이 본마루에 건립.[5]
  • 1943년(쇼와 18년): 마사무네 기마상이 금속류 회수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모두 용해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45년(쇼와 20년) 11월 시오가마시의 금속 집적소에서 향토사학자가 발견했다. 다음 해 9월 사학자가 자비로 구입하여 아오바 신사에 봉납했다.
  • 1961년(쇼와 36년): 센다이시 박물관이 미노마루에 개관함에 따라, 상이 아오바 신사로부터 기증되었다. 이후 흉상으로 1986년(쇼와 41년)부터 2023년(레이와 5년) 4월까지 센다이시 박물관 중정에 설치되어 있었다(2023년 4월 센다이 녹채관으로 이전).[6]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쇼와 20년) 7월 10일 새벽, 미군센다이 공습 당시 B-29가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오테몬, 와키야구라(스미야구라, 당시 국보), 위병소로 사용 중이던 니노마루 표무대 락실 등이 모두 소실되었고, 호국신사도 소실되었다. 이로써 에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은 미노마루의 다츠미몬(巽門)만 남게 되었다(전후 다츠미몬 터 발굴 중 초석 근처에서 타버린 흙이 발견되어 오테몬과 마찬가지로 이날 전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다).

전후 니노마루 터에 미군이 주둔(캠프 센다이)하였다.[5] 트럭 통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노마루 동남문이 파괴됨으로써(전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음) 센다이성터에 있던 에도시대 건축 유적은 모두 사라졌다. 미군은 1957년(쇼와 32년)에 캠프 센다이를 반환하였다.[5]

반환 후 니노마루 터에는 도호쿠 대학이 들어서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가 되었다. 가와우치 캠퍼스(가와우치 북캠퍼스, 가와우치 남캠퍼스) 중 남부의 문과 4학부, 부속 도서관, 부속 식물원이 있는 곳이 니노마루에 해당한다.

  • 1950년(쇼와 25년): 미야기 신사(미야기현 호국신사의 점령기 명칭)는 국유지 불하를 받아 본마루 일대를 소유하였다. 센다이시는 성이 신사의 것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협상하여 토지의 일부를 관리하고 일부를 매입하였다. 2003년(헤이세이 15년) 현재 본마루 일부는 센다이시 소유지만, 본마루 일부와 니시노마루는 아직 호국신사 소유다. 성을 찾는 사람은 정문이 있던 곳에 큰 토리이와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계속하자”라고 적힌 간판을 보게 된다. 본마루 중심은 호국신사 하이덴과 아오바 성 자료관, 식당 등이 차지하고 있다.
  • 1954년(쇼와 29년): 전쟁 중 철거된 마사무네상은 콘크리트 평복 입상으로 재건되었다.
  • 1960년(쇼와 35년): 미노마루 터에 센다이시 박물관 개관.[5] 미노마루의 호리(해자)는 나가누마, 고시키누마로 남아 있다.
  • 1962년(쇼와 37년):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 재건. 먼저 건립한 콘크리트 제 입상은 이와데야마정(현 오사키시) 이와데야마성으로 이전되었다.
  • 1978년(쇼와 52년) 6월 12일: 미야기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과 토담에 피해 발생.[5]
  • 2003년(헤이세이 15년) 8월 27일: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2]
  • 2005년(헤이세이 17년): 아오바성 본마루 회관이 영업시간을 오후 10시까지 연장하여, 센다이성 본마루에서 바라보는 센다이시 도심부 야경을 중심으로 야간 관광에 주력.[7]
  • 2006년(헤이세이 18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8번) 선정.
  • 2008년(헤이세이 20년): 센다이·미야기 데스티네이션 캠페인을 계기로 토이 반스이 동상 앞에서 “황성의 달” 자동 연주를 하루 3회에서 10회(9:00~18:00 1시간 간격)로 늘렸다. 센다이성 본마루의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과 성벽을 일몰부터 오후 11시까지 연중 라이트업을 실시. 이에 맞춰 본마루에 있는 유료 주차장(낮 일반차 400엔/시간)을 18:00~익일 8:00까지 야간 무료 개방.[8]
  • 2011년(헤이세이 23년) 3월 11일: 동북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대지진)으로 성벽, 곁여장(귀루) 일부 붕괴.[9]
  • 2022년(레이와 4년) 3월 16일: 후쿠시마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 붕괴와 마사무네상 손상 등 피해 발생.

3. 구조

센다이성은 센다이 시를 내려다보는 아오바 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히로세 강 건너편에 위치한다. 남쪽과 동쪽은 절벽, 서쪽은 숲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 숲은 에도 시대에 엄격하게 보호되었으며, 혼슈 원시림의 희귀한 생존자이다. 현재 도호쿠 대학에서 식물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다테 마사무네가 축성한 센다이 성은 혼마루와 니시노마루로 이루어진 산성이었으며, 천수각은 없었다. 세바스티앙 비스카이노는 센다이 성을 "일본에서 가장 뛰어나고 견고한 성 중 하나"라고 평가할 정도로 견고했다.

하지만 산 위에 있는 혼마루는 도시와의 왕래가 불편하여, 다테 타다무네는 1638년(간에이 15년)에 니노마루 조영에 착수하여 이듬해 거처를 옮겼다.[5] 니노마루는 히로세 강 안쪽에 있지만 평평한 땅으로, 다테 가문 당주는 이곳에 거주하며 정무를 보았다. 이후 니노마루가 센다이 성의 중추가 되었다.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이때쯤 오테몬 옆, 아오바야마 기슭에 산노마루가 만들어졌다.

에도 시대 동안 센다이 성은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고 재건되었다. 주요 피해 및 재건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646년 (쇼호 3년)지진으로 성벽과 누각 피해[5]
1668년 (간분 8년)지진으로 성벽 피해[5]
1804년 (분카 원년)니노마루 소실 (1809년 (분카 6년에 재건)[5]



보신 전쟁에서도 센다이는 전장이 되지 않아, 센다이 성은 공격받지 않고 요새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3. 1. 혼마루(本丸)

센다이 시를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위치한 센다이성의 본마루(본성)는 약 115미터 높이에 있으며, 대략 정사각형 모양으로 250미터 길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돌담의 일부는 15미터 높이에 이른다.[5] 본마루에는 천수각(유럽 성의 중앙 망루에 해당)의 기초가 있었지만, 기초만 건설되었다. 대신 본마루는 3층짜리 야구라(망루) 네 개로 보호되었다.

본마루 내의 다이묘 저택은 화려한 모모야마 시대 모모야마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당대 사람들은 교토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설적인 주라쿠다이 궁전과 비교했다.[10]

성벽 북쪽 면에는 입구인 츠메몬(詰門)이 있었고, 본마루 중앙에는 중핵 시설인 본마루 고텐(御殿)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츠메몬 양쪽에 2개(서쪽 와키야구라(脇櫓), 동쪽 와키야구라), 북동쪽에 1개(우스토라야구라(艮櫓)), 쵸에이카쿠(眺瀛閣) 남쪽에 1개 등 총 4개의 3중 야구라, 1개의 2중 야구라, 다몬야구라(多門櫓) 등이 있었다.

본마루 고텐은 북쪽에 공식적인 고텐인 대광간(大広間), 남쪽에 번주(藩主)의 생활 공간인 오쿠고텐(奥御殿)이 배치되어 있었다. 430조(畳)의 대광간은 금벽장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주라쿠다이의 대광간과 유사한 설계였다.[10] 대광간에는 번주가 앉는 상단(上段)의 방 위에 쇼군(将軍) 전용의 상상단(上々段)의 방이 있었고,[10] 쇼군이 방문했을 때만 열리는 오나리몬(御成門)까지 준비되어 있었지만, 끝내 방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아오바조(青葉城) 자료 전시관의 학예사인 오오사와 케이진(大沢慶尋)은 오나리몬은 1611년에 스페인 왕국 대사로 비스카이노가 방문하여, 다테 마사무네가 비스카이노에게 상단의 방을 양보하고 다테 마사무네 자신은 하단의 방에 앉아 맞이했을 것이라는 설을 제창하고 있다.

대광간 동쪽에는 기요미즈 무대처럼 절벽에 튀어나오도록 만들어진 케카조(懸造)의 쵸에이카쿠(眺瀛閣)가 있어 센다이 성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1639년(간에이 16년) 니노마루 고텐(二の丸御殿) 완공 후에는 본마루가 사용되는 경우가 적었다.

2012년에 본마루 터 일부가 국사적에 추가 지정되었다.[5]

본마루 북동쪽에 위치한 우스토라야구라(艮櫓)를 복원하는 계획이 있었지만, 성벽 보존 문제와 국사적 지정지라는 점 등을 이유로 2003년에 중단되었다.

본마루에 개인 차량이나 관광 버스로 왔을 경우에는 뒤편에 있는 우즈미몬(埋門) 터에서 들어가게 된다.

3. 2. 니노마루(二の丸)

2대 번주 다테 타다무네에 의해 조성되었다. 1638년(간에이 15년) 5월 4일 착공되어 이듬해 1639년(간에이 16년) 12월에 완성되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번정의 중심이었다. 니노마루의 정문인 오테몬(大手門)을 들어가 안쪽의 쓰메몬(詰門)을 지나면 번주가 거주하는 고텐(御殿), 노가부타이(能舞台), 정원 등이 있었다. 니노마루의 규모는 동서 310미터, 남북 200미터였다.

성하마을에서 본 니노마루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1869년(메이지 2년)에 킨세이청(勤政庁)이 설치되었고,[5] 1871년(메이지 4년)에는 도호쿠 친다이(東北鎮台)(후의 육군 제2사단)가 설치되었다. 1882년(메이지 15년) 9월 7일, 세이난 전쟁 전몰자 초혼제의 불꽃놀이가 불발된 채 떨어져, 그 화재로 인해 표무대 락야(表舞台楽屋)를 제외한 니노마루 유구는 모두 소실되었다.[5] 남아 있던 표무대 락야도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가와우치 남 캠퍼스)가 되어 문과 계열 학부(문학부, 경제학부, 법학부, 교육학부)가 들어서 있다.

센다이성은 2003년(헤이세이 15년)에 국사적(國史跡)으로 지정되었지만, 니노마루에 대해서도 2010년(헤이세이 22년)에 일부가 국사적에 추가 지정되었다.[5]

누문 형식의 망루문(櫓門)으로, 桐(키리)이나 국화 문양(菊紋)을 본뜬 장식 금구 등이 시공되어 있었다. 나고야성의 오테몬을 이축(移築)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나고야성 오테몬을 본뜬 의미의 '베꼈다(写した)'를 '옮겼다(移した)'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11] 오테몬은 니노마루의 정문이었다. 1931년(쇼와 6년)에 측루(脇櫓)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3. 3. 산노마루(三の丸)

센다이 번의 미곡 창고가 있었고, 니노마루(二の丸) 조영 시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정확한 조영 시기는 불명이나, 옛날에는 히가시노마루(東の丸)라고도 불렸다. 현재는 센다이시 박물관이 있다.[1]

3. 4. 니시노마루(西の丸)

초대 다테 마사무네 시대에 건설된 아오바야마의 혼마루, 니시노마루와 2대 다테 타다무네 시대에 건설된 아오바야마 산록의 니노마루, 미노마루(히가시노마루) 및 부속 야구라, 문으로 구성된다. 히로세가와를 성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다.[1] 현재는 미야기현 호국신사가 있다.[1]

3. 5. 오테몬(大手門)

오테몬은 니노마루의 정문이었다. 누문(樓門) 형식의 망루문(櫓門)으로, 키리(桐)나 기쿠몬(菊紋)을 본뜬 장식 금구 등이 시공되어 있었다. 명호야성(名護屋城)의 오테몬을 이축(移築)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나고야성 오테몬을 본뜬 의미의 "베꼈다(写した)"를 "옮겼다(移した)"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11] 1931년(쇼와 6년)에 측루(脇櫓)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5]

3. 6. 와키야구라(脇櫓)

와키야구라(脇櫓)는 오테몬스미야구라(大手門隅櫓)라고도 불린다. 1931년(쇼와 6년) 오테몬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5] 1967년(쇼와 42년) 민간 기부로 외관이 복원되어 현재 센다이 성에서 유일하게 복원된 건축물이다. 맞은편 성벽과의 거리를 통해 옛 오테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12][13]

2020년 조사에서 소실 전의 형태와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오테몬 재건과 함께 소실 전 모습으로 재건될 예정이다. 곁야구를 복원하여 센다이시에 기증한 기성회는 오테몬 복원도 계획했으나, 자금과 용지 문제로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후화로 인해 2036년까지 오테몬과 함께 목조로 복원될 예정이다.

3. 7. 성벽

센다이 성의 성벽은 절삭접(切込接)이라는 방식으로 쌓았으며, 모서리돌 표면은 「에도자르기(江戸切)」 기법으로 가공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본마루 성벽 수리 공사 중 발굴 조사를 통해 시대가 다른 두 개의 성벽이 현 성벽 안에서 발견되었고, 과거 지진으로 붕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5] 가장 오래된 성벽은 다테 마사무네 시대의 것으로, 가공하지 않은 돌을 사용한 야마쓰미(野面積) 방식이었다. 새로운 기법을 채택하여 더욱 견고한 성벽을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테 마사무네는 죽을 무렵 "이 성은 태평성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내가 죽으면 수축하라"고 가신들과 다테 다다무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에 본마루 성벽 붕괴 우려가 제기되어 센서로 성벽 상황을 감시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성벽 해체 수리 공사를 진행했는데, 원래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보존을 우선했다. 이 과정에서 3기에 걸친 성벽이 확인되었고, 과거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공사 후 본마루 북동쪽 모서리의 우시토라야구라(艮櫓) 복원 계획이 있었으나, 성벽 조사 결과 3기 성벽 위에는 우시토라야구라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기와 2기 성벽은 3기 성벽보다 뒤쪽에 있어 복원해도 망루가 아래에서 보이지 않고 경관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망루 기초 공사가 유적과 성벽 기초를 파괴할 우려가 있었다. 성터 시유지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사적 보존 의견이 우세하여 2003년 5월 우시토라야구라 복원은 착공 전에 중단되었다.

성벽 수리 덕분에 동일본대지진과 여진에도 본마루의 거대한 성벽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진 당시 도로에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정체되었지만, 반복되는 여진에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4. 유적 및 복원

현재 센다이성 터는 청엽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이노마루(二の丸)는 도호쿠대학 가와우치 캠퍼스, 산노마루(三の丸)는 센다이시 박물관으로 각각 이용되고 있다. 본마루(本丸)에서 산노마루(三の丸)에 이르기까지 성벽과 토루(土塁)가 현존하며, 산노마루(三の丸)에는 나가누마(長沼)와 고시키누마라 불리는 해자가 남아 있다.

성 내에 남아 있던 건축물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모두 소실되었지만, 토라노몬(寅の門)이 미야기현 지사 공관의 문(현 지정 유형 문화재)으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이 문은 이전에는 2층 누문 형식이었다. 또한, 본마루(本丸) 나가메테(搦手)의 타츠노구치몬(辰ノ口門)이 만흥사 산문으로, 산문이 효쇼지 산문으로[14], 이노마루(二の丸) 간죠쇼(勘定所)의 이타쿠라(板倉)라고 전해지는 건물(현 지정 유형 문화재)이 미야기노구 이와키리(宮城野区岩切)의 민가[15]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그 외, 구도다이 공원 지역에 있던 번교(藩校) 요켄도 정문이 타이신인 산문(시 지정 유형 문화재)으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1931년(쇼와 6년), 센다이성의 오테몬(大手門)과 와키야구라(脇櫓)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45년 7월 10일 새벽, 미국센다이 공습 당시 B-29가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소실되었다.[5]

1964년(쇼와 39년) 민간의 기부금을 모아 오테몬와키야구라(大手門脇櫓)가 복원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마루(本丸)의 성벽 붕괴 우려가 제기되어, 성벽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센서가 설치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성벽 해체 수리 공사가 실시되었고, 이 과정에서 3기에 걸친 성벽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본마루 고덴(御殿)의 중심 건물이었던 "대광간(大広間)"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그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 규모와 방 배치가 지면에 표시되었다. 대광간은 430畳(약 710m2)에 달하는 대규모 고덴 건축물이다.

센다이시 교육위원회는 2021년부터 2038년까지의 정비 기본 계획에서 오테몬(大手門)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16]

4. 1. 현존 유적

전후, 니노마루 터에 미군이 주둔(캠프 센다이)하였고,[5] 트럭 통행을 위해 미노마루 동남문이 파괴되면서(※전재로 소실설도 있음) 센다이성터에 있던 에도시대 건축 유적은 모두 사라졌다. 미군은 1957년(쇼와 32년)에 캠프 센다이를 반환하였다.[5]

반환 후 니노마루 터에는 도호쿠 대학이 들어서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가 되었다. 가와우치 캠퍼스(가와우치 북캠퍼스, 가와우치 남캠퍼스) 중 남부의 문과 4학부, 부속 도서관, 부속 식물원이 있는 곳이 니노마루에 해당한다.

  • 1950년(쇼와 25년)
  • * 미야기현 호국신사(점령기 명칭)는 국유지 불하를 받아 본마루 일대를 소유하였다. 센다이시는 성이 신사의 것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협상하여 토지의 일부를 관리하고, 일부를 매입하였다. 2003년(헤이세이 15년) 현재, 본마루의 일부는 센다이시 소유지만, 본마루 일부와 니시노마루는 아직 호국신사 소유다. 성을 찾는 사람은 정문이 있던 곳에 큰 도리이와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계속하자”라고 적힌 간판을 보게 된다. 본마루 중심은 호국신사 하이덴과 아오바 성 자료관, 식당 등이 차지하고 있다.
  • 1954년(쇼와 29년)
  • * 전쟁 중 철거된 마사무네상은 콘크리트 평복 입상으로 재건되었다.
  • 1960년(쇼와 35년)
  • * 미노마루 터에 센다이시 박물관이 개관하였다.[5] 미노마루의 해자는 나가누마, 고시키누마로 남아 있다.
  • 1962년(쇼와 37년)
  • *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이 재건되었다. 먼저 건립한 콘크리트 제 입상은 이와데야마정(현·오사키시)의 이와데야마성으로 이전되었다.
  • 1978년(쇼와 52년)
  • * 6월 12일: 미야기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과 토담에 피해가 발생하였다.[5]
  • 2003년(헤이세이 15년)
  • * 8월 27일: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 2005년(헤이세이 17년)
  • * 아오바성 본마루 회관이 영업시간을 오후 10시까지 연장하여, 센다이성 본마루에서 바라보는 센다이시 도심부의 야경을 중심으로 야간 관광에 주력하였다.[7]
  • 2006년(헤이세이 18년)
  • * 4월 6일: 일본 100명성(8번)에 선정되었다.
  • 2008년(헤이세이 20년)
  • * 센다이·미야기 데스티네이션 캠페인을 계기로, 토이 반스이 동상 앞 “황성의 달” 자동 연주를 하루 3회에서 10회(9:00~18:00 1시간 간격)로 늘렸다. 센다이성 본마루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과 성벽을 일몰부터 오후 11시까지 연중 라이트업을 실시하였다. 이에 맞춰 본마루 유료 주차장(낮 일반차 400엔/시간)을 18:00~익일 8:00까지 야간 무료 개방하였다.[8]
  • 2011년(헤이세이 23년)
  • * 3월 11일: 동북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대지진)으로 성벽, 곁여장(귀루) 일부가 붕괴되었다.[9]
  • 2022년(레이와 4년)
  • *3월 16일: 후쿠시마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 붕괴와 마사무네상이 손상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2대 번주 다테 타다무네(伊達忠宗)에 의해 조영되었다. 1638년(간에이 15년) 5월 4일 착공, 이듬해 1639년(간에이 16년) 12월에 완성되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까지 번정 중심이었다. 이노마루 정문인 오테몬(大手門)을 들어가 안쪽 츠메몬(詰門)을 지나면 번주가 거주하는 고텐(御殿), 노가부타이(能舞台), 정원 등이 있었다. 이노마루 규모는 동서 310미터, 남북 200미터였다.

메이지 시대에 1869년(메이지 2년)에 킨세이청(勤政庁)이 설치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에는 도호쿠 친다이(東北鎮台)(후의 육군 제2사단)가 설치되었다. 1882년(메이지 15년) 9월 7일, 추이(追廻)에서 거행된 세이난의 난(西南戦争) 전몰자 초혼제 불꽃놀이가 불발된 채 떨어져, 그 화재로 인해 표무대 락야(表舞台楽屋)를 제외한 이노마루 유구는 모두 소실되었다. 남아 있던 표무대 락야도 전재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가와우치 남 캠퍼스)가 되어 문과 계열 학부(문학부, 경제학부, 법학부, 교육학부)가 들어서 있다.

센다이성은 2003년(헤이세이 15년)에 국사적(國史跡)으로 지정되었지만, 이노마루에 대해서도 2010년(헤이세이 22년)에 일부가 국사적에 추가 지정되었다.[5]

누문(樓門) 형식 망루문(櫓門)으로, 桐(키리)이나 菊紋(기쿠몬)을 본뜬 장식 금구 등이 시공되어 있었다. 나고야성(名護屋城) 大手門을 이축(移築)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나고야성 大手門을 본뜬 의미의 「베꼈다(写した)」를 「옮겼다(移した)」로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11]。大手門은 이노마루(二の丸) 정문이었다. 1931년(쇼와 6년)에 측루(脇櫓)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센다이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센다이 번 미곡 창고가 있었고, 니노마루(二の丸) 조영 시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정확한 조영 시기는 불명이나, 옛날에는 히가시노마루(東の丸)라고도 불렸다. 현재는 센다이시 박물관이 있다.

현재, 센다이성터(仙台城址)는 청엽산공원(青葉山公園)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이노마루(二の丸)는 도호쿠대학 가와우치 캠퍼스(東北大学川内キャンパス), 산노마루(三の丸)는 센다이시 박물관(仙台市博物館)으로 각각 이용되고 있다. 본마루(本丸)에서 산노마루(三の丸)에 이르기까지 성벽과 토루(土塁)가 현존하며, 산노마루(三の丸)에는 나가누마(長沼)와 고시키누마(五色沼 (仙台市))라 불리는 해자가 남아 있다. 마장(馬場) 터에 대해서는 가와우치오이마와시를 참조.

다이코베이(太鼓塀)에 대해서는 메이지 이후의 것인지 에도 시대의 것인지 판단이 갈리는 부분이다.

성 내에 남아 있던 건축물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모두 소실되었지만, 토라노몬(寅の門)이 미야기현 지사 공관(宮城県知事公館) 문(현 지정 유형 문화재)으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이 문은 이전에는 2층 누문 형식이었다. 또한, 본마루(本丸) 나가메테(搦手)의 타츠노구치몬(辰ノ口門)이 만흥사(満興寺) 산문으로, 산문이 효쇼지(孝勝寺) 산문으로,[14] 이노마루(二の丸) 간죠쇼(勘定所)의 이타쿠라(板倉)라고 전해지는 건물(현 지정 유형 문화재)이 미야기노구 이와키리(宮城野区岩切) 민가[15]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그 외, 구도다이 공원(勾当台公園) 지역에 있던 번교(藩校) 요켄도(養賢堂) 정문이 타이신인(泰心院) 산문(시 지정 유형 문화재)으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본성 터나 이노마루 터 발굴 조사에서는 조몬 토기, 석기, 야요이 토기가 출토되었다.[5] 또한 발굴 조사에서 이노마루 터 서쪽에는 헤이안 시대에 가마가 있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5]

4. 2. 복원

1931년(쇼와 6년), 센다이성의 오테몬(大手門)과 와키야구라(脇櫓)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45년 7월 10일 새벽, 미국센다이 공습 당시 B-29가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소실되었다.[5] 에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은 미노마루(三の丸)의 다쓰미몬(巽門)만 남게 되었으나, 전후 다쓰미몬 터 발굴 중 초석 근처에서 타버린 흙이 발견되어 오테몬과 마찬가지로 이날 전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다.

1964년(쇼와 39년) 민간의 기부금을 모아 오테몬와키야구라(大手門脇櫓)가 복원되었다. 이것이 에도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건축물이었으나, 맞은편 성벽과의 거리를 통해 옛 오테몬(大手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곁야구를 복원하여 센다이시에 기증한 기성회(期成会)는 대문 복원을 계획했으나, 자금과 용지 문제로 실현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마루(本丸)의 성벽 붕괴 우려가 제기되어, 성벽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센서가 설치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성벽 해체 수리 공사가 실시되었고, 이 과정에서 3기에 걸친 성벽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공사 종료 후, 본마루 북동쪽 모서리에 있던 우시토라야구라(艮櫓) 복원 계획이 있었으나, 성벽 조사 결과 3기 성벽 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망루 기초 공사가 귀중한 유적이자 성벽 기초 부분을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성터 시유지 부분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사적 보존 의견이 우세해지면서, 우시토라야구라 복원은 2003년 5월에 중단되었다.

본마루 고덴(御殿)의 중심 건물이었던 "대광간(大広間)"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그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 규모와 방 배치가 지면에 표시되었다. 대광간은 430畳(약 710m2)에 달하는 대규모 고덴 건축물이다.

센다이시 교육위원회는 2021년부터 2038년까지의 정비 기본 계획에서 오테몬(大手門)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16] 2021년부터 기초 조사가 실시될 예정이다.[16] 2020년 조사에서 소실 전의 것과 형태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현재 재건된 스미야구라(隅櫓)는 오테몬(大手門) 재건과 일체적으로 재건될 예정이다.[12][13]

5. 경관

慶長 시대에 伊達政宗가 축성한 이후 廃藩置県·폐성령까지 약 270년 동안 伊達氏 역대의 거성이자 仙台藩의 정청이었다. 2대 번주 伊達忠宗 시대에 완성된 센다이 성은 약 2만 평으로 대번에 걸맞는 대규모 성이었다.

明治부터 大正까지 육군 용지가 되어 많은 건축물이 해체되었다. 몇 안 되는 유구였던 오테몬(大手門), 와키야구라(脇櫓), 巽문은 국보(구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第二次世界大戦 당시 仙台空襲으로 소실되었다.

三の丸에 있는 仙台市博物館 주변에는 호리(堀)와 이시가키(石垣)가 보인다. 여기서 도보로 아오바야마(青葉山)의 산길을 오르면, 산 정상에 축성된 거대한 本丸의 이시가키(石垣)가 눈앞에 나타난다. 본마루에서는 동쪽으로 센다이시 중심부와 센다이 평야, 날씨가 좋으면 태평양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북쪽의 二の丸 터는 현재 東北大学의 부지가 되어 있지만, 이 중 동쪽의 동屋 부근과 로터리의 북동쪽 부분은 동 대학이 아닌 센다이시가 소유하는 아오바야마 공원의 飛び地가 되어 있다.

현재, 본마루는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성벽 끝에는 위험 방지용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센다이 시가지의 경관을 넓은 범위에서 조망할 수 있다. 동시에 당시 막부 도시를 둘러싼 신사, 불각, 하천을 포함한 방어 시설의 연계를 엿볼 수도 있다.

6. 현지 정보

센다이 성터는 아오바야마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니노마루(二の丸)는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 산노마루(三の丸)는 센다이시 박물관으로 각각 이용되고 있다. 본마루(本丸)에서 산노마루(三の丸)에 이르기까지 성벽과 토루(土塁)가 현존하며, 산노마루(三の丸)에는 나가누마(長沼)와 고시키누마라 불리는 해자가 남아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센다이 성은 육군 용지로 사용되면서 많은 건축물이 해체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센다이 공습으로 오테몬(大手門)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미야기현 지사 공관 정문으로 전용된 토라노몬(寅の門)의 부재만이 남아 있다.

센다이 성터의 토지 권리 관계는 복잡하여 센다이시가 소유한 구획은 일부이며, 미야기현 고쿠진자와 도호쿠 대학이 소유한 구획이 많다. 2003년에는 국가지정 사적 "센다이조아토(仙台城跡)"로 등록되었다.

"아오바조(青葉城)"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미야기현 고쿠진자는 "아오바조(青葉城)" 또는 "'''아오바조토(青葉城址)'''"라고 칭한다. 센다이시는 "아오바조(青葉城)(아오바조토(青葉城址))"가 아닌 "'''센다이조아토(仙台城跡)'''"라고 칭하며, 여러 안내 표기가 혼재하는 상황이다.

본마루에서는 센다이시 중심부와 센다이 평야, 태평양까지 조망할 수 있다. 2005년부터는 야간 관광 활성화를 위해 센다이성 본마루 회관의 영업시간을 연장하고, 센다이시 도심부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08년에는 황성의 달 자동 연주 횟수를 늘리고,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과 성벽의 라이트업을 실시하며, 유료 주차장을 야간 무료 개방하였다.[8]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22년 후쿠시마현 해역 지진으로 성벽과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이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9]

다이코베이(太鼓塀)는 에도 시대의 것인지 메이지 이후의 것인지 판단이 갈린다.

성 내에 남아 있던 건축물 중에는 미야기현 지사 공관의 문으로 이축된 토라노몬(寅の門), 만흥사 산문으로 이축된 타츠노구치몬(辰ノ口門), 효쇼지 산문으로 이축된 산문,[14] 미야기노구 이와키리의 민가로 이축된 이타쿠라(板倉) 등이 현존한다.[15]

구도다이 공원 지역에 있던 번교 요켄도 정문은 타이신인 산문으로 이축되어 현존한다.

본성의 일부와 산노마루(三の丸), 그리고 주변 지역은 시에서 관리하는 아오바야마 공원이다. 그 외의 부분도 각 소유자가 공공 공지·녹지화한 곳이 많다. 센다이 탄자와 축제의 불꽃놀이 때에는, 니노마루(二の丸)의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홀 앞마당이 관람 장소 중 하나가 된다.

6. 1. 위치

아오바 성은 센다이 시를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위치하며, 히로세 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남쪽과 동쪽은 절벽으로, 서쪽은 숲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 숲은 에도 시대에 엄격하게 보호되었으며, 혼슈 원시림의 희귀한 생존자이다. 이 지역은 현재 도호쿠 대학에서 식물원으로 관리하고 있다.[3]

성산은 북쪽과 동쪽으로 히로세 강에 일부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보호된다.

6. 2. 교통


  • 동일본여객철도(JR東日本) 도호쿠 본선·도호쿠 신칸센 센다이역에서 하차한다. 서쪽 출구 버스 정류장 15번 3호선에서 센다이 시영 버스(루플 센다이)를 이용하여 약 22분 후, “센다이성터”에서 하차하여 도보 약 3분 거리이다.
  • *※루플 센다이는 시계 방향으로 시내 관광지를 경유하므로, 센다이성터→센다이역 앞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48분이다.(루플 센다이를 아오바야마역에서 하차하여 센다이 시영 지하철 도자이선을 이용하는 등의 경로가 역 앞으로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다.)
  • 센다이 시영 지하철 도자이선 국제센터역에서 하차한다. 도보 25분 거리이다.
  • 본마루 유료 주차장(승용차 150대, 400JPY/시간. 관광버스 1200JPY/시간. 오토바이 100JPY/일)
  • * 오후 6시 이후는 야간 무료.
  • 도호쿠 자동차도

6. 3. 주변 시설


  • 본성
  • * 미야기현 호국신사
  • * 센다이 성견문관
  • 이의丸
  • * 도호쿠 대학 가와우치 캠퍼스
  • 삼의丸
  • * 센다이시 박물관
  • 마장
  • * 가와우치오이마와시(川内追廻)
  • 오우라바야시(성의 수원이었던 오스즈와 호리키리 흔적 등의 유적이 있다)
  • * 도호쿠 대학 식물원
  • 호리
  • * 고시키누마, 나가누마
  • 조각상·구비
  • * 다테 마사무네 기마상(본성)
  • * 아이치 케이이치상
  • * 도이 반스이상
  • * 황성의 달 구비

참조

[1] 웹사이트 仙台城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6-12-25
[2] 문서 仙台城跡
[3] 웹사이트 (4292) Aoba = 1938 QE = 1955 KK = 1957 WH2 = 1959 ES = 1979 QW2 = 1986 AB1 = 1988 PX3 = 1989 VO https://minorplanetc[...] MPC 2021-10-06
[4] 서적 仙台築城の歴史的意義 吉川弘文館 2008
[5] 웹사이트 仙台城跡関連年表 https://www.city.sen[...] 仙台市 2020-12-02
[6] 뉴스 伊達政宗の胸像、「仙臺緑彩館」へ引っ越し 26日にお披露目 https://kahoku.news/[...] 河北新報 2023-04-14
[7] 뉴스 夜の杜の都味わって http://www.stcb.or.j[...] 河北新報
[8] 웹사이트 仙台城跡 夜の観光魅力アップ企画をDC以降も継続します http://www.stcb.or.j[...] 仙台観光コンベンション協会
[9] 웹사이트 http://www.kahoku.co[...]
[10] 웹사이트 【千田嘉博のお城探偵】伊達政宗の仙台城 強き独眼竜の志(2/2ページ) https://www.sankei.c[...] 2020-05-10
[11] 서적 ポケット図鑑 日本の城 主婦の友社 1995
[12] 뉴스 仙台城・脇櫓も建て替えへ 大手門と一体で復元 https://kahoku.news/[...]
[13] 뉴스 “仙台城”大手門復元 仙台市は「脇櫓」を解体し一体整備 「脇櫓」屋根が史実とは異なる形状と判明 https://news.yahoo.c[...]
[14] 웹사이트 光明山孝勝寺|宮城県仙台市 http://kosyoji.or.jp[...] 2021-03-11
[15] 웹사이트 旧仙台城板倉 - 仙台市の指定・登録文化財 http://www.sendai-c.[...] 2021-03-11
[16] 뉴스 市道仙台城跡線の廃止を検討へ 大手門復元計画 https://www.kahoku.c[...] 河北新報 2020-12-02
[17] 웹인용 仙台城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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