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티나이코스 FC는 1908년 창단된 그리스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수페르리가 엘라다에서 20번, 그리스 컵에서 20번 우승하며 국내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0-71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1977년 발칸컵에서 우승하는 등 유럽 대항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스에서 올림피아코스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클럽이며, 1918년부터 토끼풀을 문양으로 사용하고 녹색과 흰색을 전통적인 유니폼 색상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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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요르고스 칼라파티스는 1908년 2월 3일 파넬리니오스 김나스티코스 실로고스에서 독립하여 "축구 클럽 아테네 (Podosfairikos Omilos Athinon, POA)"를 창단했다.[126] 이는 파넬리니오스 김나스티코스 실로고스가 축구 부서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칼라파티스와 40명의 선수들이 독립하면서 이루어졌다.[25] 당시 칼라파티스는 17세였다. 초기 팀 색상은 적색과 백색이었으며, 첫 홈구장은 파티시온 로에 있었다.[122]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의 존 시릴 캠벨이 감독으로 부임하여, 그리스 클럽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122]
1908년 첫 번째 팀
1910년,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칼라파티스는 캠벨 감독과 함께 다수의 선수들을 이끌고 팀을 떠나 아메리키스 광장에 새 구장을 마련했다. 이후 클럽 명칭은 "범그리스 축구 클럽 (Panellinios Podosfairikos Omilos, PPO)"으로 변경되었고, 팀 색상은 녹색과 백색으로 변경되었다.
1918년, 미할리스 파파조글루의 제안으로 토끼풀을 로고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23] 1921년과 1922년, 아테네-피레아스 축구 클럽 협회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두 차례의 리그를 개최했고, 범그리스 축구 클럽은 두 대회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클럽은 파티시온 로와 아메리키스 광장에 있는 구장들이 다른 스포츠 부서의 확장으로 인해 규모가 작아지자, 알렉산드라스 가의 페리볼라 지역에서 새 구장을 건설할 부지를 찾기 시작했다.[123]아테네 시의회와의 오랜 협상 끝에 1922년,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 건설 허가를 받았다.[122]
1924년 3월 15일, 파나티나이코스는 현재의 명칭인 범아테네 체육 클럽(Παναθηναϊκό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ΠΑΟ)으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다.[122]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설되었고, 1927년부터 범그리스 리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파나티나이코스 FC의 황금기로, 알파 에트니키에서 6번, 그리스 컵에서 2번 우승했다.[126] 특히 1964년에는 스체판 보베크 감독의 지휘 아래 타키스 루카니디스, 반겔리스 파나키스, 미미스 도마조스 등의 선수들이 활약하며 알파 에트니키 무패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는 그리스 리그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126]
2008년 4월 22일, 대지주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는 기자 회견을 통해 가문의 €80M의 사 자본 가치 증가를 통해 지분을 50%로 줄일 것을 발표했다.
2. 1. 창단 초기 (1908-1924)
요르고스 칼라파티스는 1908년 2월 3일 파넬리니오스 김나스티코스 실로고스에서 독립하여 "축구 클럽 아테네 (Podosfairikos Omilos Athinon, POA)"를 창단했다.[126] 이는 파넬리니오스 김나스티코스 실로고스가 축구 부서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칼라파티스와 40명의 선수들이 독립하면서 이루어졌다.[25] 당시 칼라파티스는 17세였다. 초기 팀 색상은 적색과 백색이었으며, 첫 홈구장은 파티시온 로에 있었다.[122]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의 존 시릴 캠벨이 감독으로 부임하여, 그리스 클럽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122]
1910년,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칼라파티스는 캠벨 감독과 함께 다수의 선수들을 이끌고 팀을 떠나 아메리키스 광장에 새 구장을 마련했다. 이후 클럽 명칭은 "범그리스 축구 클럽 (Panellinios Podosfairikos Omilos, PPO)"으로 변경되었고, 팀 색상은 녹색과 백색으로 변경되었다.
1918년, 미할리스 파파조글루의 제안으로 토끼풀을 로고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23] 1921년과 1922년, 아테네-피레아스 축구 클럽 협회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두 차례의 리그를 개최했고, 범그리스 축구 클럽은 두 대회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클럽은 파티시온 로와 아메리키스 광장에 있는 구장들이 다른 스포츠 부서의 확장으로 인해 규모가 작아지자, 알렉산드라스 가의 페리볼라 지역에서 새 구장을 건설할 부지를 찾기 시작했다.[123]아테네 시의회와의 오랜 협상 끝에 1922년,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 건설 허가를 받았다.[122]
2. 2. 범아테네 체육 클럽 (1924-현재)
1924년 3월 15일, 파나티나이코스는 현재의 명칭인 범아테네 체육 클럽(Παναθηναϊκός Αθλητικός Όμιλος, ΠΑΟ)으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다.[122]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설되었고, 1927년부터 범그리스 리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1961년, 1962년, 1964년, 1965년, 1969년, 1970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67년과 1969년에는 그리스 컵 우승도 달성했다. 이 시기 동안 클럽은 미미스 도마조스, 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 안티모스 캅시스, 코스타스 엘레프테라키스,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 등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며, 타키스 루카니디스와 안드레아스 파파엠마누일 등 기존 선수들의 은퇴에 대응했다.
스테판 보벡 감독은 1963년 팀에 부임하여 4-3-3 포메이션을 도입하고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여 1964년 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었다.[25] 당시 주요 선수로는 미미스 도마조스,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 프란기스코스 수르피스 등이 있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 시기에는 루카스 파누르기아스 회장이 사임하고,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가 재판을 받는 등 클럽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26] 벨라 구트만 감독이 잠시 팀을 맡았으나 곧 떠났고, 라키스 페트로풀로스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1969년(리그, 컵 더블)과 1970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60년대는 파나티나이코스 FC의 황금기로, 알파 에트니키에서 1959-60, 1960-61, 1961-62, 1963-64, 1964-65, 1968-69, 1969-70 시즌에 우승을 차지했고, 그리스 컵에서는 1966-67, 1968-69 시즌에 우승했다.[126] 특히 1964년에는 스체판 보베크 감독의 지휘 아래 타키스 루카니디스, 반겔리스 파나키스, 미미스 도마조스 등의 선수들이 활약하며 알파 에트니키 무패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는 그리스 리그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126]
같은 해, 파나티나이코스는 아약스가 출전을 거부하여 인터콘티넨털컵에 대신 출전했지만, 나시오날에게 합계 2-3 (1-1, 1-2)으로 패했다.[128]
2. 4. 요르고스 바르디노얀니스 시대 (1979-2012)
1979년, 그리스에 프로 축구가 도입되면서 바르디노얀니스 가문은 범아테네 체육 클럽의 축구부를 인수했고, 요르고스 바르디노얀니스가 회장으로 취임했다.[123] 인수 초기 몇 년간은 전환기였으나, 1981-82 시즌 그리스 컵 우승을 시작으로 프로 축구 도입 이후 첫 트로피를 획득했다. 이후 파나티나이코스는 리그에서 2차례 (1983-84, 1985-86), 그리스 컵에서 4차례 (1983-84, 1985-86, 1987-88, 1988-89), 그리스 슈퍼컵에서 1차례 (1988년) 우승하며 명성을 되찾았다.
1984-85 시즌에는 야체크 모흐 감독의 지휘 아래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진출했다. 1990년대에도 파나티나이코스는 국내외 대회에서 성공을 거두며, 여러 차례 리그와 컵 대회에서 우승했다. 특히 1995-9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2. 5. 21세기 초반과 범아테네 연합 (2000-현재)
2000년 여름, 요르고스 바르디노얀니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지분을 조카인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에게 넘겨주었고, 클럽 관리 방식이 변경되었다. 얀니스 키라스타스가 팀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트자크 슘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후, 파나티나이코스는 2003-04 시즌에 더블을 달성했다. 에세키엘 곤살레스, 루시안 슨머르테안, 마쿠스 뮌흐 등의 선수들이 2003년 여름 이적 시장에 영입되었다. 그러나 슘 감독은 다음 시즌 초반에 경질되었고, 즈데네크 슈차스니가 후임 감독이 되었다.
2005년, 앙겔로스 바시나스나 미할리스 콘스탄티누와 같은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플라비우 콘세이상과 이고르 비슈찬이 영입되었다. 슈차스니는 알베르토 말레사니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2006-07 시즌 시작 전, 말레사니가 클럽을 떠났고, 한스 바케를 거쳐 빅토르 무뇨스가 감독이 되었다. 2007-08 시즌, 파나티나이코스는 주제 페사이루를 감독으로 내정했다.
2008년 4월 22일, 대지주 얀니스 바르디노얀니스는 기자 회견을 통해 가문의 €80M의 사 자본 가치 증가를 통해 지분을 50%로 줄일 것을 발표했다. 바르디노얀니스 가문은 56%의 지분을, 아마추어 클럽이 10%, 나머지 34%를 소지주 (안드레아스 게노풀로스, 파블로스 얀나코풀로스, 아다만티오스 폴레미스, 니코스 파테라스 등) 가 갖게 되었다.
2008년의 대변혁 후, 파나티나이코스는 헹크 텐 카터를 감독으로 내정해 아스널의 지우베르투 시우바와 플루미넨시의 가브리에우와 같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2008-0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수페르리가 엘라다에서는 정규 시즌 3위, 플레이오프 미니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9-10 시즌, 파나티나이코스는 지브릴 시세를 마르세유에서, 코스타스 카추라니스를 벤피카에서, 세바스티안 레토를 리버풀에서 영입했다. 헹크 텐 카터가 12월에 떠난 후, 니코스 니오플리아스가 감독이 되었다. 팀은 UEFA 유로파리그 16강에 올랐고, 수페르리가 엘라다와 그리스 컵을 모두 석권했다.
2011년, 재정난으로 인해 파나티나이코스는 지브릴 시세를 580만유로에 라치오로, 알렉산드로스 초르바스를 팔레르모로 매각했다.[130][131] 퀸시 오우수-아베이, 투셰, 비톨로, 제카와 같은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디미트리스 곤티카스가 새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오덴세에게 합계 4-5로 패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본선행이 좌절되었다.
3. 문양과 유니폼
Σύμβολοel와 Χρώματαel
파나티나이코스의 문양은 1918년 미칼리스 파파조글루가 제안한 세잎 클로버(토끼풀)이다.[55] 클럽 관계자들은 아테네 전체를 대표하기 위해 보편적이고, 민족주의적이거나 지역색이 없는 상징을 찾고 있었다.[56] 파파조글루는 그의 고향인 칼리키돈 (이스탄불, 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클럽에서 뛸 때부터 셔츠에 세잎 클로버를 달고 다녔다.[57] 그는 1906년 중간 올림픽마라톤 (1906년 중간 올림픽)에서 가슴에 큰 녹색 세잎 클로버가 달린 흰색 옷을 입고 우승한 아일랜드계 캐나다인 선수인 빌리 셰링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58][59][60]
클럽의 멤버이자 나중에는 회장이 되었고, 국립 미술관 (아테네)의 관장이었던 게오르기오스 하차포울로스가 팀의 새로운 엠블럼을 디자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70년대 말까지, 세잎 클로버(녹색 또는 흰색)가 유니폼의 왼쪽 가슴에 크게 새겨져 있었다. 프로화가 시작되면서, 클럽의 이니셜과 창립 연도인 1908년이 함께 새겨진 축구 클럽의 엠블럼이 만들어졌다.[57]
오늘날까지 팀의 전통적인 색상은 녹색과 흰색이다(녹색은 건강, 자연, 예를 들어 자연 숭배를, 흰색은 미덕을 상징한다). 하지만 흰색은 때때로 생략되거나, 장식으로 또는 대체 색상으로 사용된다. 파나티나이코스의 주 색상으로 녹색이 정해진 후 몇 년 동안, 선수들은 녹색 셔츠, 흰색 반바지, 녹색 양말을 착용했다. 1930년대에는 특징적인 가로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이 정착되었다. 이 모티브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주 유니폼 또는 두 번째 선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유니폼 스타일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녹색은 항상 팀의 주 색상으로 남아 있었다.
1995–현재
4. 경기장 및 시설
파나티나이코스 FC의 홈구장은 1920년대 초부터 아테네 암벨로키포이 구에 위치한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레오포로스)이었다. 이 경기장은 알렉산드라스 애비뉴에 있으며, 흔히 ''레오포로스''(그리스어로 "가"를 뜻함)로 불린다.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파나티나이코스의 라이벌인 AEK와 올림피아코스도 여러 차례 사용한 그리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경기장 중 하나이다.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레오포로스)
파나티나이코스는 1984년에 ''레오포로스''를 떠나 스피로스 루이스로 이전했다. 2000년에는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으로 복귀하여 리모델링을 거쳤으나, 2004년에 강화된 규정으로 인해 다시 스피로스 루이스로 복귀했다. 2007-08 시즌에는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을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구단으로, 대규모 팬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1966년에 설립된 주요 서포터 조직인 '''13번 출입구'''(Θύρα 13|튀라 13el)는 그리스와 키프로스 전역에 80여 개의 하위 서포터 클럽을 두고 있다.[57] 13번 출입구는 울트라스 라피트 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6. 라이벌
올림피아코스는 파나티나이코스 FC의 최대 라이벌이며, 이 두 팀의 대결은 그리스 더비라고 불린다.
7. 선수
미미스 도마조스는 1959년과 1980년 사이 502번의 1군 경기에 출전해 파나티나이코스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139] 스트라이커 크시슈토프 바지하가 390경기로 그 뒤를 잇고 있다.[140] 골키퍼 중 최다 출전 기록은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로 303경기에 출전했다.[141]
크시슈토프 바지하는 1989년부터 2004년까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88골을 기록해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며,[142] 1998년 1월에 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가 종전에 기록한 180골 기록을 경신했다.[143]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는 푸슈카시 페렌츠의 지도 하에 유러피언컵 1970-71의 득점왕과 그리스 리그 득점왕을 5차례 차지했다.
파나티나이코스가 기록한 최다 홈 관중은 74,493명으로, 1986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열린 AEK와의 그리스 리그 경기에서 기록했다.[144] 파나티나이코스가 아포스톨로스 니콜라이디스 경기장에서 기록한 최다 관중 기록은 1967년, 29,665명이 관전한 파나티나이코스와 바이에른 뮌헨간의 컵위너스컵 경기에서 기록되었다.[145]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1부 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거둔 유일한 클럽이다. 팀은 이 업적을 1963-64 시즌에 달성했다.[146]
요르고스 칼라파티스는 연합국 경기에 참가한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멤버였으며,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그리스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았다. 이후 파나티나이코스는 안토니스 미기아키스, 코스타스 리녹실라키스, 타키스 루카니디스, 미미스 도마조스, 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 안티모스 캅시스,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 디미트리스 사라바코스 등 그리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하며 국가대표팀에도 기여했다. 6명의 파나티나이코스 선수들은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참가했다 (디미트리스 사라바코스, 타나시스 콜리치다키스, 스트라토스 아포스톨라키스, 요안니스 칼리차키스, 니코스 니오플리아스, 스피로스 마랑고스).
또한, 이 클럽의 6명의 선수는 UEFA 유로 2004에서 우승한 2004년 황금팀의 일원이었다 (UEFA 유로 2004): 요르카스 세이타리디스, 안젤로스 바시나스, 야니스 구마스, 디미트리스 파파도풀로스, 코스타스 할키아스, 안토니스 니코폴리디스.
Μίμης Δομάζος|미미스 도마조스el는 1959년과 1980년 사이 502번의 1군 경기에 출전하여 파나티나이코스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39] 스트라이커 Krzysztof Warzycha|크시슈토프 바지하pl가 390경기로 그 뒤를 잇고 있다.[140] 골키퍼 중 최다 출전 기록은 Τάκης Οικονομόπουλος|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el로 303경기에 출전했다.[141]
Krzysztof Warzycha|크시슈토프 바지하pl는 1989년부터 2004년까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88골을 기록하여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 선수이다.[142] 1998년 1월에 Αντώνης Αντωνιάδης|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el가 종전에 기록한 180골 기록을 경신했다.[143] Αντώνης Αντωνιάδης|안토니스 안토니아디스el는 1970-71 유러피언컵에서 1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미미스 도마조스는 1959년부터 1980년까지 502경기에 출전하여 파나티나이코스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74] 공격수 크시슈토프 바르지하는 390경기로 그 뒤를 잇고 있다.[75] 골키퍼 중에서는 타키스 이코노모풀로스가 303경기로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6]
크시슈토프 바르지하는 1989년부터 2004년까지 모든 대회를 통틀어 288골을 기록하며 클럽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78]
파나티나이코스의 홈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은 1986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AEK 아테네와의 그리스 리그 경기에서 기록된 74,493명이다.[79] 레오포로스 알렉산드라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 중 최다 관중 기록은 1967년 바이에른 뮌헨과의 컵 위너스 컵 경기로, 29,665명이 입장했다.[80]
파나티나이코스는 1963-64 시즌에 그리스 축구 역사상 1부 리그를 무패로 마친 두 클럽 중 하나이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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