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피아코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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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림피아코스 FC는 1925년 창단된 그리스 피레아스 연고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수페르리가 엘라다에서 47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리스 컵 28회, 그리스 슈퍼컵 4회 우승을 차지했다. UEFA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2023-24 시즌에 우승하며, UEFA 클럽 대항전에서 우승한 유일한 그리스 클럽이 되었다. 라이벌은 파나티나이코스 FC이며,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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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코스 FC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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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클럽 이름 | 올림피아코스 |
전체 이름 | 올림피아코스 신데스모스 필라슬론 피레오스 |
로마자 표기 | Olympiakos Syndesmos Filathlon Peiraios |
별칭 | 스릴로스 (전설) 에리트로레프코이 (붉은-하얀) |
창단 | 1925년 3월 10일 |
구단주 |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
회장 |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 |
감독 | 호세 루이스 멘딜리바르 |
리그 | 수페르리가 엘라다 |
시즌 | 2023-24 |
위치 | 수페르리가 엘라다, 14개 중 3위 |
웹사이트 | olympiacos.org |
경기장 | |
홈 경기장 |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
수용 인원 | 33,33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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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 | |
홈 유니폼 | pattern_la1: _olympiacosfc2425h pattern_b1: _olympiacosfc2425h pattern_ra1: _olympiacosfc2425h pattern_sh1: _olympiacosfc2425h pattern_so1: leftarm1: E60000 body1: FFFFFF rightarm1: E60000 shorts1: E60000 socks1: E60000 |
원정 유니폼 | pattern_la2: _olympiacosfc2425a pattern_b2: _olympiacosfc2425a pattern_ra2: _olympiacosfc2425a pattern_sh2: _olympiacosfc2425a pattern_so2: leftarm2: FFFFFF body2: FFFFFF rightarm2: FFFFFF shorts2: FFFFFF socks2: FFFFFF |
세 번째 유니폼 | pattern_la3: _olympiacosfc2425t pattern_b3: _olympiacosfc2425t pattern_ra3: _olympiacosfc2425t pattern_sh3: _olympiacosfc2425t pattern_so3: leftarm3: 0000DD body3: 0000DD rightarm3: 0000DD shorts3: 0000DD socks3: 0000DD |
관련 항목 | |
모기업 | 올림피아코스 CFP |
2. 역사
1925년 피레아스 항에서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 회원들이 합쳐져 올림피아코스 FC가 창단되었다.[197] 고대 올림픽 우승자를 나타내는 문양이 도입되었고, 노티스 캄페로스가 ''올림피아코스''라는 명칭을 제안했으며, 미할리스 마누스코스가 현재의 명칭인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변경했다.
클럽의 명성을 쌓고 현재의 영광으로 이끈 것은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이었다.[198]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바실리스가 초창기에 활동했고, 막내 레오니다스는 나중에 합류하여 장기간 활동했다. (1927-1935) 5형제로 이루어진 초창기 공격진은 전설이 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 팬들을 기반으로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으로 옮겼다. 1925년, 1926년, 1927년에 피레아스 지역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99]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립되고 1927-28 시즌에 범그리스 리그가 출범했다. 아리스가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1928-2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협회와의 불화로 불참했고, 파나티나이코스와 AEK도 동참했다. 이들은 중부 그리스 축구 구단 (Π.Ο.Κ.)을 조직하여 친선전을 치렀다.
1930-31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기를 열었다. 1940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11시즌 중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3] 특히 야니스 바조스, 크리스토포로스 라고스, 테올로고스 시메오니디스는 막강한 공격진을 이루어 수많은 골을 넣으며 전설적인 선수가 되었다. 야니스 바조스는 18년 동안 올림피아코스에서 활약(1931–1949)하며 364경기에서 450골(공식 경기 156경기 179골)을 기록, 클럽 역대 득점 2위에 올랐으며, 그리스 선수권 최다 득점상을 4번(1933, 1936, 1937, 1947) 수상했다.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했고, 여러 올림피아코스 선수들이 추축국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헬레닉 육군에 합류했다.[3] 독일의 그리스 점령 이후, 올림피아코스 선수들은 그리스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나치와 격렬하게 싸웠다.[3] 올림피아코스 선수 니코스 고다스는 그리스 인민 해방군(ELAS)의 대장이 되어 여러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고,[35] 올림피아코스 유니폼을 입은 채 처형되었다.[36][37]
전쟁 후, 올림피아코스는 전쟁 전 시대의 주요 선수들이 은퇴하면서 팀 명단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일리아스 로시디스, 타나시스 베비스등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설(Thrylo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3][38][39] 1959년 9월 13일, 올림피아코스는 밀란과의 1959~60 유러피언컵 경기에서 유럽 데뷔전을 치렀고, 유럽 대회에 출전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이 되었다.[40]
1972년, 니코스 굴란드리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라키스 페트로풀로스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게오르요스 델리카리스등의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여 1973-74 시즌에는 최다 승점 (59점)과 최다 득점 (102골)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굴란드리스가 회장직에서 사임한 후, 팀은 1970년대 말에 상대적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리그가 프로 리그로 전향되자, 올림피아코스는 리그 4연패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공격수 니코스 아나스토풀로스, 미드필더 타소스 미트로풀로스, 그리고 니코스 사르가니스 수문장이 있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알케타스 파나굴리아스는 1981-82 시즌, 1982-83 시즌, 그리고 1986-87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198]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이른바 '돌의 시대'라 불리는 암흑기를 겪었다. 다만, 그리스컵 우승으로 체면치레는 했다. 1993년,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회장의 등장은 올림피아코스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코칼리스 체제 하에서 올림피아코스는 1996-97 시즌부터 2002-03 시즌까지 리그 7연패를 달성했다.[3]
2023-24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유럽 컨퍼런스리그 결승전에서 피오렌티나를 연장전 끝에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172] 이는 그리스 팀 최초의 유럽 대회 우승이기도 하다.[172]
2. 1. 초창기와 국내 무대에서의 성공 (1925–1946)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3월 10일 피레아스 항에서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 회원들이 합쳐져 창단되었다.[197] 고대 올림픽 우승자를 나타내는 문양이 도입되었고, 노티스 캄페로스가 ''올림피아코스''라는 명칭을 제안했으며, 미할리스 마누스코스가 현재의 명칭인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변경했다.]
클럽의 명성을 쌓고 현재의 영광으로 이끈 것은 안드리아노풀로스 형제들이었다.[198] 얀니스, 디노스, 요르고스, 바실리스가 초창기에 활동했고, 막내 레오니다스는 나중에 합류하여 장기간 활동했다. (1927-1935) 5형제로 이루어진 초창기 공격진은 전설이 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 팬들을 기반으로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으로 옮겼다. 1925년, 1926년, 1927년에 피레아스 지역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99]
1926년 그리스 축구 협회가 창립되고 1927-28 시즌에 범그리스 리그가 출범했다. 아리스가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1928-29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협회와의 불화로 불참했고, 파나티나이코스와 AEK도 동참했다. 이들은 중부 그리스 축구 구단 (Π.Ο.Κ.)을 조직하여 친선전을 치렀다.
1930-31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기를 열었다. 1931년 10월, 올림피아코스의 상징적인 선수이자 창단 멤버인 조르조스와 얀니스 안드리아노풀로스가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야니스 바조스, 크리스토포로스 라고스, 테올로고스 시메오니디스 등 새로운 선수들이 등장했다.
]1940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11시즌 중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3] 특히 야니스 바조스, 크리스토포로스 라고스, 테올로고스 시메오니디스는 막강한 공격진을 이루어 수많은 골을 넣으며 전설적인 선수가 되었다. 야니스 바조스는 18년 동안 올림피아코스에서 활약(1931–1949)하며 364경기에서 450골(공식 경기 156경기 179골)을 기록, 클럽 역대 득점 2위에 올랐으며, 그리스 선수권 최다 득점상을 4번(1933, 1936, 1937, 1947) 수상했다.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했고, 여러 올림피아코스 선수들이 추축국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헬레닉 육군에 합류했다.[3] 독일의 그리스 점령 이후, 올림피아코스 선수들은 그리스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나치와 격렬하게 싸웠다.[3] 올림피아코스 선수 니코스 고다스는 그리스 인민 해방군(ELAS)의 대장이 되어 여러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고,[35] 올림피아코스 유니폼을 입은 채 처형되었다.[36][37]
2. 2. "전설"의 시대 (1946–1959)
전쟁 후, 올림피아코스는 전쟁 전 시대의 주요 선수들이 은퇴하면서 팀 명단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올림피아코스의 주장이자 다작 득점자인 야니스 바조스는 야니스 켈미스와 함께 팀에 남았다.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알레코스 차치스타브리디스, 스텔리오스 쿠루클라토스, 디오니시스 미나르도스와 같은 중요한 새로운 선수들이 팀에 합류했다. 정규 경기가 재개되자 피레우스 클럽은 그리스 축구에서 다시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았다. 1946년부터 1959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11번의 그리스 챔피언십 중 9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1947, 1948, 1951,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총 23시즌의 그리스 리그에서 15번의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올림피아코스가 획득한 6연패는 그리스 축구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업적으로,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올림피아코스가 7연패를 달성할 때까지 44년 동안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3]또한 같은 기간(1946~1959) 동안 클럽은 13번의 대회 중 8번의 그리스컵을 우승했다 (1947, 1951, 1952, 1953, 1954, 1957, 1958, 1959), 6번의 더블(1947, 1951, 1954, 1957, 1958, 1959)을 달성했으며, 그중 3번은 연속 더블이었다(1957~1959).[3] 1950년대 전설적인 올림피아코스 팀은 안드레아스 무라티스, 일리아스 로시디스, 타나시스 베비스, 일리아스 이판티스, 바비스 코트리디스, 코스타스 폴리크로니우, 기오르고스 다리바스, 바비스 드로소스, 안토니스 포세이돈, 사바스 테오도리디스, 코스타스 카라파티스, 미미스 스테파나코스, 타나시스 킨리, 스텔리오스 프시코스, 야니스 이오아누, 테미스 무스타클리스, 바실리스 잔토풀로스, 디미트리스 코키나키스, 기오르고스 칸소스, 코스타스 파파조글루, 아리스테이디스 파파조글루 와 같은 핵심 선수들과 함께 그리스 축구에서 올림피아코스의 절대적인 지배 시대를 열었고, 이는 클럽의 인기를 급상승시켰고 그리스 전역에 올림피아코스의 우수성을 알렸다.[3] 이러한 1950년대의 기록적인 성과로 인해 클럽은 "전설(Thrylo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3][38][39]
1959년 9월 13일, 올림피아코스는 밀란과의 1959~60 유러피언컵 경기에서 유럽 데뷔전을 치렀고, 유럽 대회에 출전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이 되었다.[40] 1차전은 피레우스의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올림피아코스는 코스타스 파파조글루의 골로 리드를 잡았다 (1-0). 이것은 유럽 대회에서 그리스 클럽(그리고 그리스 선수)이 득점한 최초의 골이었다.[41] 밀란의 조제 알타피니는 잔카를로 다노바의 크로스 이후 33분에 헤딩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일리아스 이판티스는 45분에 체사레 말디니와 빈첸초 오케타 사이에서 공을 컨트롤한 후 강력한 발리슛으로 골을 성공시켜 올림피아코스가 다시 리드를 잡았다(2-1).[41] 알타피니는 닐스 리드홀름의 프리킥 이후 다시 한번 헤딩으로 두 번째 골을 넣었다 (72분). 경기는 2-2로 끝났고, 올림피아코스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챔피언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반면 밀란은 알타피니, 리드홀름, 후안 알베르토 시아피노, 에르네스토 그릴로와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외국인 선수 4명을 보유하고 있었다.[41] 2차전에서 밀란은 3-1로 승리했고 (잔카를로 다노바 12', 26', 85' – 일리아스 이판티스 68')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지만, 올림피아코스는 특히 후반전에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2. 3. 굴란드리스 시대와 프로 리그 출범 (1972–1987)
국내 1부 리그인 ''알파 에트니키'' (Α΄ Εθνική)가 1959-60 시즌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60년대와 70년대는 올림피아코스가 그리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시대로, 리그를 2회, 컵을 6회 우승하는데 그쳤다. 1972년, 니코스 굴란드리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라키스 페트로풀로스를 감독으로 내정하고, 게오르요스 델리카리스, 이브 트리안타필로스, 훌리오 로사다, 밀톤 비에라, 미할리스 크리티코풀로스, 로맹 알지루대, 마이크 갈라코스, 라키스 글레조스, 코스타스 다불리스, 이오아니스 키라스타스, 페터 페르시디스와 같은 톱클래스 선수들을 영입했다. 굴란드리스 회장의 임기에, 올림피아코스는 1972-73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같은 시기에 컵도 3연패를 달성했다.[198] 이 시기에 최고의 해는 1973-74 시즌으로 손꼽히는데, 올림피아코스는 이 시즌에 최다 승점 (59점)과 최다 득점 (102골)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굴란드리스가 회장직에서 사임한 후, 팀은 1970년대 말에 상대적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리그가 프로 리그로 전향되자, 올림피아코스는 또다시 그리스 축구에서 압도적인 존재로 부상했는데, 리그 4연패 (1979-80 시즌, 1980-81 시즌, 1981-82 시즌, 1982-83 시즌)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공격수 니코스 아나스토풀로스, 미드필더 타소스 미트로풀로스, 그리고 니코스 사르가니스 수문장이 있었다.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알케타스 파나굴리아스는 팀을 1981년과 1983년 사이와 1986-87 시즌에 지휘하여 1981-82 시즌, 1982-83 시즌, 그리고 1986-87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198]2. 4. "암흑기"와 코칼리스 시대 (1987–2010)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이른바 '돌의 시대'라 불리는 암흑기를 겪었다. 1987-88 시즌, 리그 8위와 UEFA 챔피언스리그 1라운드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57] 1988-89 시즌 리그 2위로 반짝 반등했지만,[57] 1989-90 시즌에는 리그 4위에 그쳤다.[57] 다만, UEFA컵 3라운드 진출과[57] 그리스컵 우승으로[57] 체면치레는 했다.이후에도 올림피아코스는 리그 상위권을 맴돌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0-91 시즌과 1991-92 시즌 리그 2위,[57] 1992-93 시즌 리그 3위를 기록했고, UEFA컵 위너스컵 8강에 오르며 유럽 무대에서 선전하기도 했다.[57]
1993년, 소크라티스 코칼리스 회장의 등장은 올림피아코스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코칼리스 체제 하에서 올림피아코스는 1996-97 시즌부터 2002-03 시즌까지 리그 7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그리스 축구계를 평정했다.[3] UEFA 챔피언스리그 8강,[3] 그리스컵 우승 등[3]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다.
2003-04 시즌 잠시 주춤하며 리그 2위에 머물렀지만, 2004-05 시즌부터 2008-09 시즌까지 다시 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3] '절대 강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7-08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오르며[3] 유럽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증명했다. 2009-10 시즌에는 리그 2위를 기록했다.[3]
2. 5. 마리나키스 시대 (2010–현재)
2023-24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유럽 컨퍼런스리그 결승전에서 피오렌티나를 연장전 끝에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172] 이는 그리스 팀 최초의 유럽 대회 우승이기도 하다.[172]3. 문양과 유니폼
1925년, 피레아스의 두 클럽인 피레아코스 축구 클럽과 피레아스 팬들의 클럽이 합병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도덕성, 경쟁심, 그리고 광채로부터 영감을 받아 '피레아스 팬들의 올림피아코스 클럽'으로 명명되었다. 그 결과, 클럽은 월계관을 쓴 청소년을 문양으로 도입했고, 이는 올림픽 우승자를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의 작은 변화를 거쳤다. 문양의 색상은 적색과 백색으로, 적색은 열정을, 백색은 도덕성을 상징한다.[210][211]
3. 1. 유니폼 변천사
팀의 유니폼은 흔히 적색과 백색의 세로 줄무늬 상의와 적색 하의, 백색 양말로 구성된다. 유니폼은 시대를 거치면서 주로 줄무늬 두께에 변화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흔하게 사용된 유니폼은 붉은색이나 흰색 단색 유니폼이었다. 올림피아코스는 원정 유니폼과 써드킷에 다양한 색상을 사용해 왔으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검은색이나 은색 유니폼이다.[210][211]
역대 주요 유니폼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해당 유니폼이 사용된 연도):
1950 | 1978 | 1979 | 1985 | 2000–01 | 2008–09 |
---|---|---|---|---|---|
2009–10 | 2010–11 | 2013–14 |
3. 2. 스폰서와 유니폼 제작사
1979년 그리스에서 축구가 프로화된 이후, 올림피아코스는 특정 유니폼 제작사를 사용했으며, 1982년부터는 특정 유니폼 스폰서를 사용했다. 다음 표는 연도별 올림피아코스 유니폼 제조업체와 유니폼 스폰서를 자세히 보여준다.기간 | 유니폼 제조업체 | 유니폼 스폰서 |
---|---|---|
1979 | 엄브로 | — |
1980 | 푸마 | |
1980–1982 | 아식스 타이거 | |
1982 | 아디다스 | |
1982–1984 | 아식스 타이거 | 피아트 |
1984–1985 | 트래블 플랜 | |
1985–1988 | 푸마 | 시티즌 |
1988 | 도요타 | |
1989 | 크레타 은행 | |
1989–1990 | — | |
1990–1992 | 다이애나 | |
1992–1993 | 엄브로 | |
1993–1994 | 로토 | |
1994–1995 | 아디다스 | 에트노카르타 마스터카드 |
1995–1997 | 푸마 | |
1997–2000 | 아스피스 은행 | |
2000–2005 | 엄브로 | 지멘스 모바일 |
2005–2006 | 푸마 | 지멘스 |
2006–2009 | 보다폰 | |
2009–2010 | 씨티 은행 | |
2010–2013 | 파메 스토이키마 | |
2013–2015 | 유니세프[113] | |
2015– | 아디다스 | 스토이키만.gr[114] |
4. 경기장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Γήπεδο Γεώργιος Καραϊσκάκηςel)은 그리스 피레아스의 팔리로 구에 있는 경기장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전통적인 홈구장이자 현재 홈구장이다. 그리스 독립 전쟁 영웅인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스카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올림피아코스의 대부분 홈경기를 유치했다.[212]
1895년, 이 경기장은 아테네에서 열린 1896년 하계 올림픽의 사이클 경기를 위한 경륜장으로 개장되었다. 공식 경기장 명칭은 ''네오 팔리론 벨로드롬''(Ποδηλατοδρόμιο Νέου Φαλήρουel)이었으며, 경기장 안에는 자전거 경륜 트랙이 있었다. 올림피아코스는 1925년 창립 때부터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64년, 경기장이 리모델링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2003년까지 경기장 주변에 육상/경륜 트랙이 있었다.[213] 이 경기장은 1969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와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1971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 경기를 주최하기도 했다.[214]
올림피아코스는 1984년에 잠시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을 떠나 새로 지어진 스피로스 루이스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5년 동안 이 경기장을 사용한 후, 1997년까지 다시 전통적인 홈구장으로 복귀했다. 그 후, 올림피아코스는 다시 스피로스 루이스로 돌아가 5년을 더 머물렀다. 2002년, 스피로스 루이스가 2004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리모델링을 목적으로 폐장됨에 따라, 올림피아코스는 아폴론 스미르니의 홈구장인 아테네 리주폴리 구의 게오르기오스 카마라스 경기장으로 이전해 2년을 머물렀다.
2003년 4월,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황폐해진 채로 올림피아코스에 넘겨졌다. 클럽은 그 자리에 축구 전용 구장을 지을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 구장은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경기를 주최했다.[215]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2052년까지 경기장의 전적인 사용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보수비를 모두 충당하며 주 정부에 수익의 15%를 지불하게 되었다. 2003년 봄에 구 홈구장은 철거되었고, 새 구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1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기간이 소요되었다. 경기장은 6000만유로의 비용을 들여 2004년 6월 30일에 완공되었다.[216] 현재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구장 중 하나로, 올림피아코스 박물관[217]과 여러 시설을 운영한다.
5. 7번 출입구 참사
1981년 2월 8일, 올림피아코스는 AEK와의 리그 홈경기에서 6-0 대승을 거두었다. 경기 막판, 7번 출입구 인근의 올림피아코스 팬들 수천 명이 선수들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경기장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은 거의 닫혀 있었고 회전문이 설치되어 있어 출구가 매우 비좁았다.[218] 관중석에서 계속 내려오는 사람들은 아래쪽 상황을 알 수 없었고, 결국 7번 출입구는 죽음의 함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짓눌리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1명의 젊은이들이 질식 등으로 사망했다.[219]
이 사건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참사로 불리며, 그리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매년 2월 8일, 경기장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수천 명의 팬들이 참석하여 "Αδέρφια, ζείτε, εσείς μας οδηγείτε." (Adhélfia, zíte, esís mas odhiyíte, "형제들이여, 너희는 살아있다, 너희가 우리를 인도한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현재 7번 출입구가 있던 자리에는 좌석 일부가 빨간색 대신 검은색으로 칠해져 숫자 "7"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경기장 동쪽에는 희생자 21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139]
이 비극은 올림피아코스 팬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 스포츠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다른 팀들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 같은 외국 팀들도 희생자들을 기렸다.[140]
6. 서포터
올림피아코스의 팬층은 전통적으로 클럽의 연고지인 피레아스 시와 아테네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1950년대 올림피아코스가 여러 번 우승하며 기록을 세우자 인기가 급상승했고, 그리스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축구 클럽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을 대표했지만, 모든 사회 계층의 팬들을 끌어모았고, 현재는 특정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팬층이 형성되지 않는다.[220][221]
UEFA에 따르면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며,[184] 여러 설문조사와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222][223] 신문과 잡지에서 주최한 설문 조사에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최고의 인기 클럽으로 나타났으며, 전체 팬들의 29%에서 37%, 전체 인구의 20.3%에서 29.3%를 차지하는데, 이를 토대로 그리스 국내 팬 수는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된다.[186][224] 올림피아코스는 피레아스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시 인구의 절반이 올림피아코스를 지지한다.[225] 아테네 전체에서도 지지하는 팬의 비율이 45.1%에 달해, 그리스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다.[226] 올림피아코스는 노동층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며, 모든 연령대에서 37%가 지지하고,[225] 남성과 여성 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227] 팬들의 대다수는 중도좌파이거나 중도우파의 정치성향을 보인다.[225] 아테네 수도권 외에도, 올림피아코스는 중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테살리아, 에게 해 제도, 이오니아 제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이다.[228] 또한,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축구 역사상 최다 평균 관중 수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역대 시즌들 중 대부분 올림피아코스가 이 부문에서 최고를 기록했다.[229]
2006년, 올림피아코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료 회원 수를 보유한 상위 10개 클럽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9위를 차지하여 레알 마드리드보다 한 순위 높았다.[230] 2006년 4월 기준, 클럽의 등록된 유료 회원 수는 83,000명이었다.[231] 올림피아코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팬들은 깊은 친선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를 ''정교회 형제''라고 부른다. 보통 올림피아코스 팬클럽의 팬들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경기, 특히 파르티잔과의 경기를 관람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정교회 형제들이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팬들을 동맹으로 합류시키려 한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팀에 대해 열정적이고 강렬한 지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홈 경기 분위기는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UEFA컵 2004-05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할 때, 영국 방송 채널 5에서 중계했는데, 객원 해설가이자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토니 코티는 경기 분위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이 경기장이 가장 분위기가 있는 경기장인지에 대한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곳의 분위기에 대해 들어보고 가보면 실감하는 것 이상이 아닐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이 곳은 진짜 [분위기를 느끼는 것 이상을 체감하는] 그곳입니다."''라고 답했다.[232] 보르도가 카라이스카키스 스타디움 원정을 앞두었을 때, 경험 많은 체코 국가대표 윙어 야로슬라프 플라실은 모나코 시절의 경기를 언급하며 올림피아코스 팬들이 홈경기에서 만드는 적대적인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곳에서 저는 경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분위기를 경험했고, 이곳은 우리에게 지옥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들의 응원은 홈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233] 파리 생제르맹의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2013년 9월 17일 올림피아코스-파리 생제르맹 경기 후, 올림피아코스 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환상적인 관중들 앞에서 활약합니다. 올림피아코스 팬들은 놀라웠습니다. 제 동료 올로프 멜베리가 여기서 활약했었고, 그는 서포터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저는 실감하지 못했으나, 이제 이해합니다. 놀랍습니다. 이는 올림피아코스에게 홈경기에서 크게 유리한 점입니다.''[234][235] 파리 생제르맹의 억만장자 구단주 나세르 알-켈라이피는 ''저는 이곳 팬들에게 큰 존경심을 표합니다. 저는 올림피아코스 팬들과 같은 팬들을 인생에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36]
올림피아코스의 공식 응원가는 "경기장의 전설" (Θρύλε των γηπέδωνel) 이라고 불리며, 피레아스 연고의 종합 스포츠 클럽 올림피아코스 CFP의 많은 부서에서 불린다.[239] 작사는 그리스 작곡가인 코스타스 킬리만초스가 했고, 작곡은 스피로스 발사마키스가 했다.[240] 이 응원가를 처음 부른 사람은 흐리스타키스 볼리오티스이다.
역사적으로, 올림피아코스의 첫 응원가는 1931년 미미스 바실리아디스가 작사하고 얀고스 라우타리스가 작곡했다. 이 곡은 행진곡 형식이며 축구 경기 형식에 더 가깝게 만들어졌다.
7. 라이벌
올림피아코스의 가장 큰 라이벌은 파나티나이코스이며, 이 두 팀 간의 경기는 영원한 적들의 더비라고 불린다. 이 더비는 아테네 수도권 지역은 물론 그리스 축구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라이벌전 중 하나이다.[241] 두 팀은 그리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이자 가장 인기 있는 클럽들이며,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사회적, 문화적, 지역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올림피아코스는 항구 도시 피레아스의 노동층을 대표했고, 파나티나이코스는 아테네의 상류층을 대표했다.[220][221] 그러나 현재는 두 클럽 간의 계층 차이가 옅어지고 팬층도 비슷해졌다. 두 팀은 통산 61번의 리그 우승을 합작할 정도로 성공적인 클럽들이기 때문에, 이들 간의 라이벌 의식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242]
두 팀 간의 증오는 매우 강렬하여, 특히 더비 경기 전후로 아테네 수도권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2007년 3월 29일에는 아테네 인근 마을 파이아니아에서 두 팀 훌리건 간의 충돌로 22세의 파나티나이코스 팬이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리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으며, 2주 동안 그리스의 모든 스포츠 경기가 중단되었다.[243][244][245] 2012년 더비 경기에서는 휘발유 폭탄, 홍염, 각종 투척물이 경기장에 난무하고 팬들과 경찰에게까지 투척되어 일부가 불에 타는 등 폭동으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올림피아코스는 AEK와도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두 팀 간의 지리적 근접성과 경기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246] 올림피아코스와 PAOK 간의 라이벌 관계는 1960년대 올림피아코스가 PAOK의 상징적인 선수였던 요르고스 쿠다스를 영입하려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가장 큰 두 도시인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간의 지역 감정도 두 팀의 라이벌 관계를 심화시켰다.[247] 이 외에도 올림피아코스는 피레아스를 연고로 하는 에트니코스 피레아스와도 라이벌 관계를 맺었으나, 에트니코스가 하위 리그로 강등된 이후에는 두 팀 간의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다.
8. 기록
부문 | 기록 |
---|---|
최다 점수차 승리 | 11–0 (포스티라스전, 1973-74 시즌) |
한 시즌 최다승 | 30승 (1999-2000 시즌) |
한 시즌 최다골 | 102골 (1973-74 시즌) |
한 시즌 최소실점 | 13실점 (1972-73 시즌) |
최다 연승 기록 | 16연승 (2005-06 시즌 8라운드 – 2005-06 시즌 23라운드) |
최다 경기 무패 기록 | 58경기 (1972-73 시즌 3라운드 – 1973-74 시즌 27라운드) |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수페르리가에서 리그 우승 46회, 컵 우승 23회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1996-97 시즌부터 15시즌 동안 13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그리스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8. 1. 유럽 대항전 기록
올림피아코스는 1959년 9월 13일 AC 밀란과의 유러피언컵 1959-60 경기를 통해 UEFA 주관 대회에 처음 출전했다.[248] 유러피언컵 1958-59 예선 라운드에서 베식타시와의 경기는 기권했다.[248] 2010년 2월 23일, 보르도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16강 1차전 경기에서 200번째 유럽대항전 경기를 치렀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3-64에서는 폴란드의 자그웽비에 소스노비에크를 꺾고 유럽대항전 2라운드에 진출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이 되었다.
올림피아코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어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은 첫 그리스 클럽이 되었고, 현재 형식 도입 후 5연속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기록도 세웠다.
올림피아코스는 UEFA 랭킹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그리스 클럽으로, 2024년 기준 10년 랭킹 36위, 5년 랭킹 43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 클럽 협회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다. 모든 유럽 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그리스 클럽이며, 홈경기와 원정경기 승리에서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145][146] 2010년 2월 23일 보르도와의 2009-10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 경기에서 200번째 유럽 대회 경기를 기념했다. 1982–83 유러피언컵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75,263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그리스 클럽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47]
올림피아코스는 유럽 역사의 대부분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보냈으며, 홈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새로운 방식으로 토너먼트가 시작된 이후 15경기 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 홈 무패 기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의해 종료)과 2009-10 시즌부터 2014-15 시즌까지 19경기 중 15승을 거두는 등 긴 기록을 세웠다. 레알 마드리드, 밀란,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약스, 유벤투스, 아스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벤피카, 포르투, PSV 아인트호벤, 셀틱, 아스톤 빌라, 올림피크 리옹, 올림피크 마르세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발렌시아, 세비야, 레버쿠젠, 레드 스타 벨그라드 등 유럽 강호 및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팀들을 상대로 많은 홈 승리를 거두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올림피아코스는 7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에 참가하여 7개 조 모두에서 최소 9점을 얻었고, 3번의 토너먼트 진출(16강)을 기록했다 (2007-08 시즌, 2009-10 시즌, 2013-14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1963년 발칸컵에서도 우승했다. 당시 이 대회는 유러피언컵 다음으로 중요한 대회로 여겨졌다.[7]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이 되었다.
'''UEFA 계수'''
'''현재 순위 (2024년 5월 30일 기준)'''[153]
순위 | 팀 | 점수 |
---|---|---|
42 | 브라가 | 49.000 |
43 | 마르세유 | 48.000 |
44 | 올림피아코스 | 48.000 |
45 | 릴 | 47.000 |
46 | 헨트 | 45.000 |
'''2018-19 시즌 종료 시점 5년간 클럽 순위'''[154]
순위 | 클럽 | 시즌 획득 점수 | 총점 | ||||
---|---|---|---|---|---|---|---|
2019–20 | 2020–21 | 2021–22 | 2022–23 | 2023–24 | |||
scope="row" | | 브라가 | 10.000 | 9.000 | 16.000 | 7.000 | 7.000 | 49.000 |
rowspan="2" scope="row" | | 마르세유 | – | 6.000 | 16.000 | 8.000 | 18.000 | 48.000 |
올림피아코스 | 10.000 | 10.000 | 8.000 | 3.000 | 17.000 | 48.000 | |
scope="row" | | 릴 | 5.000 | 8.000 | 17.000 | – | 17.000 | 47.000 |
scope="row" | | 헨트 | 10.000 | 3.000 | 11.000 | 11.000 | 10.000 | 45.000 |
'''2023-24 시즌 종료 시점 10년간 클럽 순위'''[155]
순위 | 클럽 | 시즌 획득 점수 | 총점 | |||||||||
---|---|---|---|---|---|---|---|---|---|---|---|---|
2014–15 | 2015–16 | 2016–17 | 2017–18 | 2018–19 | 2019–20 | 2020–21 | 2021–22 | 2022–23 | 2023–24 | |||
scope="row" | | 아탈란타 | – | – | – | 11.000 | 2.500 | 20.000 | 17.000 | 16.000 | – | 28.000 | 94.500 |
scope="row" | |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 17.000 | 19.000 | 12.000 | 14.000 | 10.000 | 9.000 | 5.000 | 8.000 | – | – | 94.000 |
scope="row" | | 올림피아코스 | 11.000 | 10.000 | 10.000 | 5.000 | 8.000 | 10.000 | 10.000 | 8.000 | 3.000 | 17.000 | 92.000 |
scope="row" | | 디나모 키이우 | 16.000 | 18.000 | 8.000 | 12.000 | 11.000 | 6.000 | 10.000 | 5.000 | 3.000 | 2.500 | 91.500 |
scope="row" | | 라치오 | – | 14.000 | – | 17.000 | 6.000 | 4.000 | 17.000 | 9.000 | 6.000 | 18.000 | 91.000 |
유럽 팀 | 대회 | 시즌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실점 |
---|---|---|---|---|---|---|---|
올림피아코스 |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 35 | 186 | 66 | 36 | 84 | 222–283 |
올림피아코스 | UEFA컵 위너스컵 | 9 | 33 | 14 | 6 | 13 | 43–47 |
올림피아코스 |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 28 | 134 | 55 | 28 | 51 | 191–174 |
올림피아코스 | UEFA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 1 | 9 | 7 | 0 | 2 | 19–10 |
결과 | 합계 | 69 | 362 | 142 | 70 | 150 | 475–514 |
8. 1. 1. 최고 성적
시즌 | 대회 | 업적 | 비고 |
---|---|---|---|
2023-24 |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 우승 | 아테네에서 피오렌티나에 1:0 승리[248] |
1998–99 | UEFA 챔피언스리그 | 8강 | 토리노에서 유벤투스에 1:2 패배, 아테네에서 1:1 무승부 |
1992–93 | UEFA컵위너스컵 | 8강 | 피레아스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1:1 무승부, 마드리드에서 1:3 패배 |
1989–90 | UEFA 유로파리그 | 16강 | 피레아스에서 오세르와 1:1 무승부, 오세르에서 0:0 무승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
2004–05 | UEFA 유로파리그 | 16강 | 피레아스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1:3 패배, 뉴캐슬에서 0:4 패배 |
2011–12 | UEFA 유로파리그 | 16강 | 하르키우에서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에 1:0 승리, 피레아스에서 1:2 패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 |
1963 | 발칸컵 | 우승 |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그리스 클럽[7] |
2023–24 | UEFA 유스리그 | 우승 | 올림피아코스 U-19 팀, AC 밀란을 꺾고 우승[149] |
2024 | U-20 인터컨티넨탈컵 | 준우승 | 올림피아코스 유소년팀, 플라멩구에 1:2 패배[152] |
올림피아코스는 유럽 대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 축구 클럽으로, 그리스 클럽 중 유일하게 주요 유럽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23-24 UEFA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결승에서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를 1:0으로 꺾고 우승했다.[248] 2024년 우승으로 올림피아코스는 2011년 이후 빅4 유럽 리그(프리미어리그, 세리에 A, 라리가, 분데스리가)를 제외한 클럽 중 UEFA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992-93 시즌 UEFA컵 위너스컵 8강에 진출했다.
2023-24 시즌, 올림피아코스는 UEFA 유로파 컨퍼런스리그와 UEFA 유스리그에서 우승하여 한 시즌에 두 개의 UEFA 대회에서 우승한 유일한 유럽 축구 클럽이 되었다.[150][151]
8. 1. 2. 최다 점수차 승리
올림피아코스는 유럽대항전에서 홈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 시즌에는 전 시즌 준우승팀인 레버쿠젠을 상대로 6-2 대승을 거두었다.[248] UEFA컵 2008-09 시즌에는 노르셸란에 5-0, 벤피카에 5-1, 헤르타 베를린에 4-0으로 3경기 연속 4점 차 이상 대승을 거두었다.[248]8. 2. 리그 기록
– 2005–06 시즌 23라운드)– 1973–74 시즌 27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