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호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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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디난트 호들러는 1853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난 스위스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사실주의에서 상징주의,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풍을 시도했으며, 특히 '밤'과 같은 작품을 통해 상징주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호들러는 평행주의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대칭성과 리듬을 강조하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스위스 국립은행 지폐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스위스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치 시대에 약탈된 미술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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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호들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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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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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디난트 호들러 |
출생일 | 1853년 3월 14일 |
출생지 | 베른, 스위스 |
사망일 | 1918년 5월 19일 |
사망지 | 제네바, 스위스 |
국적 | 스위스 |
분야 | 회화 |
사조 | 상징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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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스위스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인 페르디난트 호들러는 1853년 베른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났다.[1][26] 어린 시절 결핵으로 아버지와 남동생들을 잃고, 재혼한 어머니마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연이은 가족의 죽음을 겪으며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의 삶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2][27][28]
호들러는 툰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2] 19세에 제네바로 이주, 화가 바르텔레미 멘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10] 초기에는 사실주의에 기반한 풍경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나,[10] 1890년 대표작 《밤》을 발표하며 상징주의 화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0] 이 작품은 외설 논란으로 제네바 전시가 거부되기도 했으나,[5] 파리에서는 호평을 받으며 그의 국제적 명성의 발판이 되었다.[9]
이후 호들러는 인물의 대칭적 구도와 리듬감을 강조하는 자신만의 '평행주의(Parallelism)' 양식을 발전시켰고,[10] 《선택된 자》, 《율동》 등 상징성이 강한 작품들을 남겼다.[9][11] 또한, 스위스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애국적인 주제의 대형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10]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수상[12] 및 베를린 분리파, 빈 분리파 활동 등을 통해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5]
개인적으로는 두 번의 결혼[6][7] 외에 오귀스틴 뒤팽과의 사이에서 아들 엑토르 호들러를 두었고,[5] 말년에는 연인 발렌틴 고데-다렐이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하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14][15]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전쟁 행위를 비판하는 활동에 참여하여 독일 미술계에서 배척당하기도 했다.[17] 건강 악화로 고생하던 호들러는 1918년 제네바에서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9]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교육
호들러는 1853년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26] 아버지는 목수였고[26] 어머니 마르그리트 노이콤은 농민 출신이었다.[1] 호들러가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와 두 남동생이 결핵 등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2][27] 이후 어머니는 다섯 자녀를 둔 장식 화가 고틀리프 슉파흐와 재혼하여 가족 수가 13명으로 늘어났으나,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웠다.[2] 호들러는 아홉 살 때부터 계부를 도와 간판 제작 등 상업적인 일을 해야 했다.[2]1867년,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사망했고,[2][27] 결국 다른 형제들도 모두 같은 병으로 잃었다. 호들러는 회고록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어린 자신이 형제와 어머니의 시신을 직접 수레에 싣고 옮겼다고 밝혔는데,[28] 이러한 비극적인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8]
어머니가 사망한 후, 호들러는 툰으로 보내져 지역 화가 페르디난트 솜머의 도제가 되었다(1868-72년).[2] 솜머 밑에서 그는 인쇄된 그림을 보고 모사하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알프스 풍경화를 그리는 법을 배웠고, 이를 상점이나 관광객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2] 19세가 되던 해(1872년경) 제네바로 이주하여 화가 바르텔레미 멩의 제자가 되었고(1871-76년), 스승을 통해 코로와 바르비종 파의 영향을 받았다. 재능을 인정받아 제네바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의 기초를 다졌다.
2. 2. 사실주의에서 상징주의로
1871년, 18세의 호들러는 화가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 제네바까지 걸어갔다. 그는 제네바 대학교에서 과학 강의를 들으며 박물관에서 알렉상드르 칼라메의 그림을 모사했다.[10] 1873년에는 바르텔레미 멘의 제자가 되어 뒤러의 비례 이론을 연구했다.[10]1875년 바젤로 여행하여 한스 홀바인의 그림, 특히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연구했는데, 이는 이후 호들러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3] 1878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서 몇 달간 머물며 프라도 미술관에서 티치아노, 푸생, 벨라스케스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다.[10]
1880년에서 1881년 사이, 호들러는 계속되는 가난과 세상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담은 ''자화상 (분노한 자)''을 그렸다.[4] 이 그림이 제네바에서 전시되었을 때 조롱을 받자, 호들러는 친구에게 스위스인들이 "내가 다른 곳에서 인정받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했다.[4] 그는 이 그림을 파리 살롱에 출품했고, 비록 비평가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살롱에 처음으로 작품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4]
호들러의 초기 성숙기 작품들은 강렬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진 풍경화, 인물화, 초상화가 주를 이루었다. 1884년, 그는 오귀스틴 뒤팽(1852–1909)을 만나 이후 몇 년간 그녀는 호들러의 동반자이자 모델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엑토르 호들러는 1908년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를 창설했다.[5] 호들러는 두 번 결혼했다. 1889년부터 1891년 이혼할 때까지는 베르타 슈투키와 결혼했으며[6], 1898년에는 1894년에 만난 베르테 자크(1868–1957)와 결혼했다.[7]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호들러의 작품 세계는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등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에 완성한 ''밤''은 그가 상징주의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다.[10]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이 누워 잠든 모습을 묘사하는데, 중앙의 한 남성만이 검은 그림자(죽음의 상징[8])에 위협받으며 깨어 있다. 1891년 2월 제네바 보자르 전시회에 이 그림을 출품했을 때, 서로 얽힌 나체 인물 묘사가 스캔들을 일으켰다. 시장은 작품이 외설적이라 판단하여 전시에서 철수시켰다.[5] 그러나 몇 달 후 파리 살롱에 전시된 ''밤''은 퓌비 드 샤반과 로댕 같은 거장들의 지지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9]
호들러는 자신이 "평행주의(Parallelism)"라고 부른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그가 인간 사회의 근간이라고 믿었던 대칭성과 리듬을 강조하는 화풍이었다.[10] ''선택된 자'' (1893)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마치 의식이나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호들러는 여성을 자연과의 조화를 갈망하는 존재로, 어린이나 청소년을 순수함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보았다.[9] 죽음이라는 주제는 ''율동'' (1895)에서 의례적인 복장을 한 다섯 남자가 낙엽 깔린 길을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11]
호들러는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대형 역사화도 여러 점 그렸다.[10] 1897년에는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박물관 무기고에 대형 프레스코 연작을 의뢰받았다.[10] 그러나 그가 제안한 구도, 특히 스위스가 패배한 전투를 묘사한 ''마리냐노 전투''는 이미지와 양식 때문에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1900년에 이르러서야 프레스코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11]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밤'', ''율동'', ''낮'' (1900) 등 세 점의 주요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12] 그는 베를린 분리파와 빈 분리파 그룹 양쪽 모두로부터 가입 초대를 받았다. 1904년 빈에서 열린 전시회에 31점의 작품을 선보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마침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5]
2. 3. 평행주의와 만년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호들러의 작품은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등 여러 경향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1890년에 완성한 《밤》은 그가 상징주의적 이미지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이다.[10] 이 그림에는 여러 사람이 누워 잠든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유독 한 남자만이 검은 그림자(죽음을 상징[8])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1891년 2월, 제네바의 보자르 전시회에 이 그림을 출품하려 했으나, 서로 얽힌 나체의 모습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시장에 의해 전시가 거부되는 스캔들을 겪었다.[5] 그러나 몇 달 뒤 파리 살롱에 전시된 《밤》은 퓌비 드 샤반과 로댕과 같은 유명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9]호들러는 자신이 "평행주의(Parallelism)"라고 부른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그가 인간 사회의 근본이라고 믿었던 대칭성과 리듬을 강조하는 화풍이다.[10] 《선택된 자》(1893)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마치 의식이나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호들러는 여성을 자연과의 조화를 갈망하는 존재로, 어린이나 청소년을 순수함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겼다.[9] 《율동》(1895)에서는 의식적인 복장을 한 다섯 명의 남자가 낙엽이 흩날리는 길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했다.[11]
호들러는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대규모 역사화도 여러 점 그렸다.[10] 1897년에는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박물관 무기고에 대형 프레스코 연작을 의뢰받았다.[10] 그러나 그가 제안한 구도, 특히 스위스가 패배한 전투를 묘사한 《마리냐노 전투》는 내용과 표현 방식 때문에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1900년에야 프레스코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11]
1900년, 호들러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밤》, 《율동》, 《낮》(1900) 등 세 점의 주요 작품을 전시하여 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12] 그는 베를린 분리파와 빈 분리파 그룹에 모두 초청받아 가입했다. 특히 1904년 빈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31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마침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5] 1900년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등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풍경화는 점차 본질적인 요소만 남도록 단순화되었는데, 때로는 물과 하늘 사이에 쐐기 모양의 땅만이 존재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제프 켄(Sepp Kern)은 《제네바 호수》(1911년경)에 대해 "호숫가, 산, 그리고 물 표면에 비친 모습이 이루는 띠와 구름의 세 부분으로 나뉜 리듬감 있는 프리즈(frieze)가 마치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 구성을 보여준다"고 평했다.[10]
1900년 11월, 스위스 연방 의원이자 우편 및 철도 부서 책임자였던 젬프(Zemp)는 새로운 스위스 우표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다. 호들러는 익명으로 프리부르(Fribourg)의 목동을 그린 디자인을 제출했고, 이 디자인은 35년 후인 1936년 스위스의 프로 파트리아(Pro Patria) 기념 우표 블록에 사용되었다.[13]


1908년, 호들러는 발렌틴 고데-다렐(Valentine Godé-Darel)을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고데-다렐과 연인 관계를 이어갔다.[14] 1913년, 고데-다렐은 부인과 암 진단을 받았다. 호들러는 그녀의 병상을 자주 찾아 간호하며, 병마와 싸우는 그녀의 모습을 담은 강렬한 연작 그림들을 남겼다.[15] 1914년 1월, 딸 폴린(Pauline)이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고데-다렐은 암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6월에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16] 그러나 결국 1915년 1월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이는 호들러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1916년부터 약 20점의 내성적인 자화상 연작을 그리며 슬픔을 표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호들러는 랭스 대성당 포격과 같은 독일군의 잔혹 행위를 규탄하는 제네바 지식인들의 청원서에 서명했다.[17] 그의 스위스와 독일 친구들은 서명을 철회하라고 압박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17] 이 일로 인해 그는 여러 독일 미술 협회에서 추방당하는 불이익을 겪었다.[17]
1917년부터 호들러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해 11월에는 폐부종으로 심하게 앓았고, 아들에게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18]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보냈지만, 1918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이는 제네바의 풍경을 여러 점 그렸다.[19] 그는 향년 65세로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3. 작품 세계
G. 노먼의 분석에 따르면[29],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초기 작품은 코로와 쿠르베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특유의 색조를 이어받았다. 그가 주로 그린 풍경화, 우의화, 이야기 그림 등은 자연주의적인 면모와 상징주의적인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양식적으로는 구축적인 화면 구성, 대칭성, 평행성, 그리고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명확한 윤곽선을 가진 형태 구조는 그의 작품에 특징적이며, 이는 감상자에게 신화적이면서도 명상적인 느낌을 전달한다.[29]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고난으로 가득했던 삶의 영향 탓인지 그의 작품에는 "죽음"이나 "밤"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29]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 초상화나 스위스 풍경을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 또한 다수 남겼다.[29]
한편, 호들러는 스위스 지폐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1911년에 처음 발행되어 1958년까지 사용된 제2차 스위스 프랑 은행권 중 50CHF 지폐와 100CHF 지폐의 앞뒷면 도안을 그렸으며, 특히 50프랑 지폐 뒷면에는 그의 작품 "나무를 베는 사람" 그림이 사용되었다.[29]
3. 1. 주요 주제와 양식
호들러의 초기 작품들은 강렬한 사실주의에 기반한 풍경, 인물 구성, 초상화가 주를 이루었다.[29] 그는 바젤에서 한스 홀바인의 그림, 특히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를 연구했는데, 이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3] 또한 초기에는 코로와 쿠르베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29]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작품은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등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1890년에 완성한 ''밤''은 호들러가 상징주의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이다.[10] 이 그림은 잠든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형상(죽음의 상징)에 위협받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8] 1891년 제네바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누드 묘사로 인해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철거되었으나,[5] 파리 살롱에서는 퓌비 드 샤반과 로댕 등의 지지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9]
호들러는 "평행주의(Parallelism)"라고 명명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그가 인간 사회의 기초라고 믿었던 대칭성과 리듬을 강조하는 방식이다.[10] ''선택된 자'' (1893)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마치 의식이나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호들러는 여성을 자연과의 조화를 갈망하는 존재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순수함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보았다.[9] ''율동'' (1895)에서는 의식적인 복장을 한 다섯 남자가 낙엽이 흩뿌려진 길을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했다.[11]
호들러는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대형 역사화도 다수 제작했다.[10] 1897년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박물관 무기고에 프레스코 연작 제작을 의뢰받았으나, 스위스가 패배한 전투를 묘사한 ''마리냐노 전투'' 등의 구성과 양식 때문에 논란이 일어 1900년에야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1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스위스 연방의 정체성을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념비적인 벽화 예술의 부활에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10]
1900년 이후 호들러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풍경화는 점차 본질적인 요소만 남도록 축소되었고, 때로는 물과 하늘 사이에 뾰족한 땅 조각만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제프 켄은 ''제네바 호수'' (약 1911년)에서 호숫가, 산, 물 표면의 반영이 이루는 띠와 구름의 리듬이 우주적인 전체를 형성한다고 분석했다.[10] 후기 작품에서는 인상주의의 특징적인 색조 사용도 계승되었다.[29]
호들러의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주요 주제는 '죽음'과 '밤'으로, 이는 그의 고난했던 삶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그는 사실주의에 기반한 여성 초상화나 스위스 풍경화도 많이 남겼다. 그의 양식은 화면의 구축적인 성격, 대칭성, 평행성, 리듬감이 특징이며, 명확한 윤곽선은 신화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29] 또한, 그는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인물들을 그리기도 했는데, ''나무꾼'' (1910)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스위스 국립은행의 의뢰로 디자인한 50CHF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100CHF 지폐에는 ''수확자''를 그려 넣었다.[20]
3. 2. 대표작
호들러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사실주의에 기반한 풍경, 인물 구성, 초상화였다.[10] 1880년부터 1881년 사이에 그린 ''자화상 (분노한 자)''는 계속되는 가난과 무관심에 대한 작가의 분노를 담고 있다.[4] 이 작품은 제네바에서 조롱받았으나, 파리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되어 받아들여졌다.[4]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작품은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에 완성된 ''밤''은 호들러가 상징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중요한 작품이다.[10] 이 그림은 잠든 인물들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죽음의 상징)에 위협받는 한 남자를 묘사한다.[8] 1891년 제네바 전시회에서 누드 묘사로 인해 외설 논란을 일으키며 철거되었으나,[5] 몇 달 후 파리 살롱에서는 퓌비 드 샤반과 로댕 등의 지지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9]
호들러는 자신이 "평행주의(Parallelism)"라고 부른 독자적인 양식을 개발했다. 이는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는 대칭성과 리듬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10] ''선택된 자'' (1893)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의식이나 춤을 추는 듯한 대칭적인 구도로 배열되어 있다. 호들러는 여성을 자연과의 조화를 갈망하는 존재로, 어린이나 청소년을 순수함과 활력의 상징으로 보았다.[9] ''율동'' (1895)에서는 의식적인 복장을 한 다섯 남자가 낙엽이 흩날리는 길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모습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표현했다.[11]
호들러는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대규모 역사화도 여러 점 그렸다.[10] 1897년에는 취리히의 스위스 국립박물관 무기고에 프레스코 연작을 의뢰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구성, 특히 스위스가 패배한 전투를 묘사한 ''마리냐노 전투''는 논란 끝에 1900년에야 제작될 수 있었다.[11][10]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밤'', ''율동'', ''낮'' (1900) 등 주요 작품을 전시하여 상을 받았고,[12] 베를린 분리파와 빈 분리파에 가입했다. 1904년 빈 전시회에서 31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5] 1900년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풍경화는 본질적인 요소만 남겨 단순화되었는데, 때로는 물과 하늘 사이에 땅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제프 켄은 ''제네바 호수'' (1911년경)에 대해 "호숫가, 산, 물 표면에 비친 모습이 만드는 띠와 구름이 세 부분으로 나뉜 리듬감 있는 프리즈를 형성하며, 우주적인 전체를 구성한다"고 평했다.[10]
1914년, 그의 연인이었던 발렌틴 고데-다렐이 암 진단을 받자, 호들러는 그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병상에서 기록한 감동적인 연작을 남겼다.[15] 그녀의 죽음은 호들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1916년부터 약 20점의 내성적인 자화상 연작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말년에는 주로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발코니에서 보이는 제네바 풍경을 여러 점 그렸다.[19]
호들러의 작품은 코로와 쿠르베의 영향을 받은 초기 사실주의에서 출발하여, 후기에는 인상주의의 색채와 상징주의적 요소를 결합했다.[29]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구축적인 화면 구성, 대칭성, 평행성, 리듬감은 특징적인 양식으로 평가받는다.[29] 고난했던 삶의 영향으로 "죽음"이나 "밤"과 같은 주제를 자주 다루었지만, 동시에 여성 초상화나 스위스 풍경화 등 사실적인 작품도 많이 남겼다.
또한 호들러는 스위스 지폐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1911년부터 1958년까지 사용된 제2차 스위스 프랑 은행권 중 50프랑과 100프랑 지폐 디자인을 맡았으며, 특히 50프랑 지폐 뒷면에는 그의 작품 ''나무꾼'' (1910)이 그려졌다.
'''주요 작품 이미지'''
4. 유산 및 논란
스위스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페르디난트 호들러는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기념비적인 벽화와 나무꾼과 같은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1908년에는 스위스 국립은행의 의뢰로 지폐 도안을 제작했는데, 기존의 관례를 깨고 유명 인물 대신 노동자를 그려 넣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20]
한편,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나치 독일 시절 박해받았던 유대인 미술 수집가들로부터 약탈되거나 강제로 매각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유 이력이 불분명한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으며, 여러 작품이 나치 약탈 미술품 목록에 오르거나 소유권 분쟁에 휘말렸다.[21][22][23][24][25]
4. 1. 유산

호들러는 생전에 애국적인 주제를 담은 벽화 크기의 그림으로 특히 존경을 받았다. 제프 켄에 따르면 호들러는 "기념비적인 벽화의 예술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스위스 연방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0]
호들러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다수는 유명한 ''나무꾼''(191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과 같이 등장인물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장면이다. 1908년, 스위스 국립은행은 호들러에게 새로운 지폐 디자인 두 점을 의뢰했다. 그의 디자인은 유명 인물의 초상 대신 노동자인 나무꾼(50CHF 지폐)과 수확자(100CHF 지폐)를 묘사하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20] 두 디자인 모두 1911년 발행된 스위스 프랑 시리즈 2 지폐에 사용되었다.
호들러의 작품 대부분은 스위스의 공공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다른 컬렉션으로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등이 있다.
4. 2. 나치 약탈 미술품 논란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작품을 수집한 사람들 중에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박해를 받은 독일계 유대인이 많았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유 이력이 불분명한 호들러의 작품이 발견될 때마다 나치에 의한 약탈 미술품이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특히, 폴란드 출신의 독일계 유대인 사업가이자 미술 수집가였던 막스 마이로우스키가 1938년 나치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판매해야 했던 그림 'Lied aus der Ferne'가 스위스의 우파 정당 소속 정치인 크리스토프 블로허의 소장품 중에서 발견되면서, 스위스 내에서 나치 약탈 미술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21][22]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미술 수집가 막스 질버베르크의 유족들은 시몬과 샬롯 프리크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호들러의 "스톡호른케테의 툰 호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23]
경매 회사 크리스티에 따르면, 호들러의 또 다른 작품인 "니젠의 툰 호수"는 원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에른스트 플레르샤임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나치의 박해 과정에서 약탈당했다. 이 작품은 이후 취리히의 나탄 화랑을 통해 개인 수집가에게 판매되었으나, 결국 플레르샤임 가문에게 반환되었다.[24]
독일 분실 미술 재단(German Lost Art Foundation)은 현재까지 호들러의 작품 37점을 나치 약탈 또는 강제 매각 관련 미술품 목록에 올려놓고 있다.[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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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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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wierige Suche nach Nazi-Raubkunst in St.Gallen - Difficult search for Nazi looted art in St G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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