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페트로파블롭스크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러시아가 1854년 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을 기념하여 명명된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이다. 12인치 포 4문과 6인치 포 12문을 탑재했으며, 1901년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아시아 함대의 기함으로 배치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기뢰에 의해 침몰하여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 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4년 선박 - 러시아 전함 폴타바 (1894년)
    1890년대 러시아 해군 전함 설계 계획에 따라 건조된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폴타바는 러일 전쟁 중 격침 후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되어 사용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러시아로 반환, 해체되었다.
  • 러시아의 전함 -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은 1890년대 러시아 해군이 건조한 최초의 평갑판 전함 3척(페트로파블롭스크, 폴타바, 세바스토폴)으로,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추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러일 전쟁 초기에 침몰하며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한 비운의 함선이다.
  • 러시아의 전함 - 보로디노급 전함
    보로디노급 전함은 프랑스 체사레비치급 전함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러시아 제국 해군이 부동항 확보를 위해 건조한 함급으로,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 세바스토폴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제국에서 건조된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으로, 12인치 주포와 6인치 속사포를 장착하고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발트 함대와 적색 해군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 러시아 전함 폴타바 (1894년)
    1890년대 러시아 해군 전함 설계 계획에 따라 건조된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폴타바는 러일 전쟁 중 격침 후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되어 사용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러시아로 반환, 해체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페트로파블롭스크" 엽서
함선 국가러시아 제국
함선 이름페트로파블롭스크
함선 별칭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
함선 종류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기공1892년 5월 19일
진수1894년 11월 9일
취역1899년
침몰1904년 4월 13일, 여순항 앞바다에서 기뢰에 의해 침몰
건조 조선소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갈레르니 섬 조선소
제원
배수량11,354 롱톤
길이376 피트
70 피트
흘수28 피트 3 인치
동력14 x 원통형 보일러
10,600 shp
추진2축
2 x 3단 팽창 증기 엔진
속도16 노트
항속 거리10 노트에서 3,750 해리
승조원725명
무장
주포2 x 2연장 12인치포
부포4 x 2연장, 4 x 단장 6인치포
기타12 x 단장 47mm포
28 x 단장 37mm포
4 x 15인치 어뢰 발사관
2 x 18인치 어뢰 발사관
50 x 기뢰
장갑
종류니켈강 장갑
벨트12-16 인치
포탑10 인치
갑판2-3 인치

2. 설계 및 제원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은 전함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ru의 설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12인치(305 mm) 포 4문과 8인치(203 mm) 포 8문을 탑재할 수 있도록 대폭 확대되었다. 건조 중 무장은 더욱 강력하고 빠른 12인치 포로 변경되었고, 8인치 포는 12문의 6인치(152 mm) 포로 교체되었다. 이 함선은 전장 114.6m, 최대 폭 21.3m, 흘수 8.6m였다. 설계 배수량은 10,960톤이었지만,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완성되었을 때 11,354톤으로 400톤 가량 과중량을 보였다. 영국 회사 호손 레슬리에서 제작한 2기의 왕복 증기 기관이 각각 1개의 축을 구동했고, 14개의 원통형 보일러가 증기를 공급했다. 엔진은 10,600ihp(지시 마력)로 설계되었고 최고 속도 16노트(30km/h)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페트로파블롭스크''는 해상 시험에서 11,255ihp로 16.38노트(30.34km/h)의 속도를 기록했다. 10노트(19km/h)의 속도로 3,750해리(6,940km)를 항해할 수 있을 만큼의 석탄을 실을 수 있었다. 기함으로 운용될 때 승무원은 725명이었다.

주포인 4문의 12인치 40구경장 포는 상부 구조의 전방과 후방에 각각 1기씩 2기의 쌍포탑에 장착되었다. 90초마다 1발을 발사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실제 발사 속도는 그 절반이었다. 부포는 12문의 카네 6인치 45구경장 속사포로 구성되었다. 이 중 8문은 4기의 쌍포 윙 포탑에 장착되었고, 나머지 포는 선체 측면의 보호되지 않은 포창에 배치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를 위해 소형 포도 장착되었는데, 12문의 QF 47mm 3파운드 핫치키스 포와 28문의 맥심 QF 37mm 1파운드 포가 포함되었다. 또한 6문의 어뢰 발사관을 장착했는데, 4문의 15인치(381mm) 수상 어뢰 발사관과 2문의 18인치(457mm) 수중 어뢰 발사관이 모두 현측에 장착되었다. 이 함선은 정박지를 보호하기 위해 50개의 기뢰를 탑재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사용한 니켈강 갑옷의 러시아 제조업체는 기존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기에 함선의 갑옷은 미국 베들레헴 스틸에서 주문되었다. 수선 방어 벨트는 12-16인치(305-406mm) 두께였다. 주포 포탑은 최대 10인치(254mm)의 두께를 가졌고 갑판 갑옷은 2-3인치(51-76mm) 두께였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1854년 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에서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숙련된 기술자의 부족, 설계 변경, 주무장의 늦은 납품 등으로 인해 건조가 지연되어 6년에 걸쳐 건조되었다. 1892년 5월 19일, 자매함과 함께 갈레르니 섬 조선소에서 기공되었고, 1894년 11월 9일에 명명 및 진수되었다.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시험 운항을 거친 후 극동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 1. 건조 과정



''페트로파블롭스크''는 1854년 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에서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숙련된 기술자의 부족, 설계 변경, 주무장의 늦은 납품 등으로 인해 건조가 지연되어 6년에 걸쳐 건조되었다. 1892년 5월 19일, 자매함과 함께 갈레르니 섬 조선소에서 기공되었고, 1894년 11월 9일에 명명 및 진수되었다.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시험 운항을 거친 후 극동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 함생

1901년, 러시아일본 제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페트로파블롭스크'는 동아시아 함대(제1태평양 함대로 개칭)에 기함으로 배치되었다.

1904년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3월 초에서 4월 사이 새로 부임한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은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기함으로 삼아 일본군에 맞섰다.

4월 13일, 여순항 해전에서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과 저명한 러시아 전투 화가 바실리 베레샤긴을 포함한 다수의 승조원이 사망했다.

1899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알제에 정박한 ''페트로파블롭스크''


'페트로파블롭스크'는 1854년 페트로파블롭스크 공방전에서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을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숙련된 기술자 부족, 설계 변경, 주무장 납품 지연 등으로 건조가 지연되어 6년이 소요되었다. 1892년 5월 19일, 갈레르니 섬 조선소에서 두 척의 자매함과 함께 기공되었고, 1894년 11월 9일에 명명 및 진수되었다.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시험 운항을 거친 후 극동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10월 17일 크론시타트를 출발하여 1900년 5월 10일 포트 아서에 도착하여 니콜라이 스크리들로프 제독 휘하 제1태평양 전대의 기함이 되었다.

3. 1. 의화단 운동 진압

1900년 중반, 페트로파블롭스크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1902년 2월, 오스카르 빅토로비치 스타르크 제독이 니콜라이 스크리들로프로부터 전대 지휘권을 인수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자신의 기함을 게양했다. 그 해, 이 함선에 무선 통신 장치가 설치되었다.

3. 2. 러일 전쟁

1894년~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모두 만주와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두 국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일본은 1901년에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문제 해결 방안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답변이 느리고 불확실했다. 일본은 이를 러시아가 무장 프로그램을 완료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고안된 고의적인 얼버무림으로 해석했다. 1903년 10월, 러시아가 약속대로 만주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은 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정적인 계기는 북한의 러시아 목재 특허권 소식과 만주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의 일본 활동에 조건을 계속 부과하려는 러시아의 거부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1903년 12월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결정했다.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태평양 함대는 한국에 일본군의 상륙 시도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밤에는 외항에 정박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8일 ~ 9일 밤, 일본 제국 해군은 포트 아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공격을 받지 않았고, 일본 연합 함대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가했을 때 다음 날 아침 출항했다. 도고는 그의 함대가 야간 공격에서 훨씬 더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고, 러시아군이 심하게 혼란스러워지고 약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들은 기습에서 회복하여 그의 공격에 대비했다. 일본 함선은 해안에서 순찰 중이던 방호순양함 보야린/Boyarin영어에 의해 발견되어 러시아 방어군에게 경고했다. 도고는 주 무기로 러시아 해안 방어를 공격하고 부포로 함선과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화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일본의 8인치와 6인치 포가 러시아 함선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러시아 함선은 일본 함선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정임이 드러났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교전 중에 6인치 포탄 1발과 12인치 포탄 2발에 의해 경미한 피해를 입어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반격으로 일본 전함에 12인치 포탄 20발과 6인치 포탄 68발을 발사했지만, 명중한 것은 없었다. 제1 태평양 함대의 형편없는 성능에 불만을 품은 해군성은 스타크 제독을 역동적이고 공격적인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으로 교체했다. 그는 해군의 가장 유능한 제독으로 여겨졌고, 3월 7일에 임명되었다. 더 강력한 장갑을 갖춘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ru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와 그에 따른 긴 수리 시간으로 인해, 마카로프는 자신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기함으로 유지해야 했다.

3. 2. 1. 여순항 해전

1904년 2월 8일 ~ 9일 밤, 일본 제국 해군은 포트 아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공격을 받지 않았고, 일본 연합 함대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가했을 때 다음 날 아침 출항했다. 도고는 그의 함대가 야간 공격에서 훨씬 더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고, 러시아군이 심하게 혼란스러워지고 약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들은 기습에서 회복하여 그의 공격에 대비했다. 일본 함선은 해안에서 순찰 중이던 방호순양함 보야린/Boyarin영어에 의해 발견되어 러시아 방어군에게 경고했다. 도고는 주 무기로 러시아 해안 방어를 공격하고 부포로 함선과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화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일본의 8인치와 6인치 포가 러시아 함선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러시아 함선은 일본 함선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정임이 드러났다. ''페트로파블롭스크''는 교전 중에 6인치 포탄 1발과 12인치 포탄 2발에 의해 경미한 피해를 입어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반격으로 일본 전함에 12인치 포탄 20발과 6인치 포탄 68발을 발사했지만, 명중한 것은 없었다. 제1 태평양 함대의 형편없는 성능에 불만을 품은 해군성은 스타크 제독을 역동적이고 공격적인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으로 교체했다. 그는 해군의 가장 유능한 제독으로 여겨졌고, 3월 7일에 임명되었다. 더 강력한 장갑을 갖춘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ru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와 그에 따른 긴 수리 시간으로 인해, 마카로프는 자신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기함으로 유지해야 했다.

4. 영향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