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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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순항 해전은 1904년 2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의 러일 전쟁의 시작을 알린 해전이다. 일본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견제하며 여순항을 공격, 야간 어뢰 공격으로 러시아 함대에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일본은 여순항 봉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러시아는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의 지휘 하에 반격했다. 이 과정에서 기뢰전이 벌어져 양측 모두 주요 전함을 잃었다. 해전은 일본의 초기 공격 실패, 러시아 해안 포대의 반격 등으로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선전 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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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러일 전쟁 |
날짜 | 1904년 2월 8일 ~ 2월 9일 |
장소 | 만주 뤼순커우 구와 주변 해역 |
결과 | 전술적 무승부; 일본의 전략적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러시아 제국 지휘관 | 오스카 빅토로비치 스타크 스테판 마카로프 |
일본 제국 지휘관 | 도고 헤이하치로 데와 시게토 |
전력 | |
러시아 제국 전력 | 노급전함 7척 방호순양함 5척 |
일본 제국 전력 | 노급전함 6척 장갑순양함 9척 |
사상자 | |
러시아 제국 사상자 | 150명 전사 전함 7척 대파 |
일본 제국 사상자 | 90명 전사 전함 약간 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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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97년 12월, 러시아 제국의 제1태평양 함대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898년 3월 청나라와 협정을 맺고 여순항과 다롄 만을 조차했으며, 1899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침공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일본을 긴장시켰고,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 협상하는 한편 1902년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2]
1904년 2월 8일 18시,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 동쪽 44해리의 원도 부근에서 제1, 2, 3 구축대를 뤼순항으로, 제4, 5 구축대를 다롄만으로 진격시켰다. 20시 50분, 뤼순항 외곽에서 러시아 구축함을 발견하고 등화를 끈 탓에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구축대는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9일 0시 20분부터 항구 외곽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발견하고 약 10000m 거리에서 어뢰 공격을 가했다. 이후 10일에 인천에 집결했다. 이 야습으로 전함 체사레비치, 레트비잔, 방호순양함 팔라다에 어뢰가 명중했다. 체사레비치는 조타실이 파괴되어 침수, 우현으로 기울어진 후 좌현으로 18도까지 기울어졌다. 레트비잔과 팔라다도 수선 아래에 큰 파공이 생겨 침수되었다. 3척은 밤새도록 방수 작업을 했고, 다른 함선의 도움으로 예인되어 만으로 들어갔지만 좌초되었다. 같은 시기, 제4, 5 구축대가 다롄만을 습격했지만 적함과 마주치지 못했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이후 수십 척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입수되었다. 2월 6일 아침,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사세보에서 제물포에 육군을 상륙시키고 여순항을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출격시켰다.[2]
도고 제독의 초기 계획은 6척의 제1전대 노급전함 (하쓰세, 시키시마, 아사히, 후지, 야시마)이 선두에서 공격하고, 기함 미카사가 주력이 되어 연합함대 제2전대 장갑순양함 (이와테, 아즈마, 이즈모, 야쿠모, 도키와)과 함께 여순항을 급습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15척의 구축함과 순양함이 준비되었고, 20척의 어뢰정과 예비 순양함 (가사기, 지토세, 다카사고, 요시노)이 대기했다.[2]
한편, 러시아군은 노급 전함 (페트로파블로브스크, 세바스토폴, 퍼레스비트, 포베다, 폴타바, 체사레비치, 레트비잔)과 이를 지원하는 방호순양함 (팔라다, 다이나, 아스콜드, 노비크, 보야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순항의 방어 함대는 다롄 시 근처로 우회해 있었고, 대부분의 수비대는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2]
3. 전투 과정
다음날 9일 아침, 제3전대가 뤼순구 정찰과 유인을 위해 러시아 함대에 7000m까지 접근했지만, 러시아 함대는 전날 밤의 혼란으로 전의가 없어 반격하지 않았다. 이어서 제1, 2전대가 11시 55분부터 8500m 거리에서 약 1시간 동안 주간 포격을 가했지만, 러시아 함대는 유인에 넘어가지 않았고, 일본 측도 육상 포대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지 않아 서로 미미한 손해를 입었다. 일본의 야습을 허용한 스타르크 중장은 파면되었고, 마카로프 중장이 부임하게 되었다.
3. 1. 일본군의 초기 작전 (1904년 2월)
1904년 2월 6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사세보 항을 출격하여 대한제국 제물포(인천)에 육군을 상륙시키고 여순항을 공격하는 목표를 세웠다.[6] 초기 계획은 6척의 전함을 포함한 주력 함대로 여순항을 급습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군의 경계 태세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구축함을 이용한 야간 기습 공격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뤼순에 태평양 함대의 주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주요 함선으로는 전함 7척(체사레비치, 레트비잔, 페레스베트, 폴타바, 페트로파블롭스크, 세바스토폴, 포베다), 장갑순양함 1척(바얀), 방호순양함 8척(팔라다, 디아나, 아스콜트, 보야린, 노비크 등)이 있었다.[6]
여순항은 좁은 수로로 연결된 내항과 외항으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얕은 수심 때문에 대형 함선은 주로 외항에 정박했고, 공격이 시작되면 내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만 입구가 좁고 얕아 폐색 작전이 실시되기도 했다.
도고 제독은 첩보를 통해 러시아 요새 주둔군이 완전 경계 태세에 있다고 잘못 판단하여 주력 함대를 투입하는 대신 구축함을 이용한 기습 공격을 선택했다.
3. 1. 1. 2월 8일 ~ 9일 야간 기습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 구축함대는 여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10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공격대는 순찰 중이던 러시아 구축함과 마주쳤으나, 러시아군은 교전 회피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구축함 2척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공격대는 흩어진 채로 여순항에 접근했다.
2월 9일 0시 28분경, 일본 구축함 4척이 어뢰 공격을 개시하여 방호순양함 팔라다와 전함 레트비잔에 피해를 입혔다. 다른 구축함들의 공격은 늦게 도착하여 기습 효과를 살리지 못했지만, 전함 체사레비치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보로는 새벽 2시경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미 경계를 강화한 러시아군의 탐조등과 사격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공격으로 전함 레트비잔과 체사레비치, 방호순양함 팔라다가 큰 피해를 입고 몇 주 동안 작전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일본군은 기습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개전 초 뤼순항을 습격한 일본 제1, 2, 3구축대는 다음과 같다.
구축대 | 함명 | 지휘관 |
---|---|---|
제1구축대 | 시라쿠모 | 하자마 미츠타 소좌 |
카스미 | 오시마 마사키 소좌 | |
아사시오 | 마츠나가 미츠타카 소좌 | |
아카츠키 | 스에츠구 나오지로 대위 | |
제2구축대 | 이카즈치 | 미무라 킨자부로 대위 |
오보로 | 타케무라 반고 대위 | |
제3구축대 | 우스구모 | 오야마 타카노스케 소좌 |
사자나미 | 콘도 츠네마츠 소좌 | |
시노노메 | 요시다 타케코 대위 |
3. 1. 2. 2월 9일 주간 포격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야간 기습에 이어 데와 시게토 중장에게 순양함 4척을 보내 여순항을 정찰하고 피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데와 제독은 오전 9시경 러시아 함대를 관찰했고, 전함과 순양함 12척 중 3~4척이 심하게 기울거나 좌초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고, 데와 제독은 이를 알지 못한 채 도고 제독에게 주력 함대의 신속한 공격이 유리하다고 보고했다.도고 제독은 데와의 보고를 바탕으로 공격을 명령했고, 일본 함대는 여순항에 접근하여 러시아 순양함 ''보야린''과 교전했다. 이후 일본 함대와 러시아 함대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노비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폴타바'', ''디아나'', ''아스콜드''에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의 반격과 해안 포대의 공격으로 ''미카사''를 포함한 일본 함대도 피해를 보았다.
12시 20분, 도고 제독은 함대를 퇴각시키기로 결정했고, 일본 함대는 러시아 해안 포대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키시마'', ''미카사'', ''후지'', ''하츠세''가 피해를 보았고, 카미무라 히코노조 제독의 순양함도 피탄당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포베다'', ''폴타바'', ''세바스토폴'' 전함이 피탄되었고, 순양함 ''노비크''는 일본 순양함에 접근하여 어뢰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수선 아래에 포탄을 맞았다.[1]
3. 2. 여순항 봉쇄 시도와 마카로프 제독의 부임 (1904년 2월 ~ 4월)
1904년 2월 11일, 러시아의 기뢰 부설함 예니세이가 기뢰밭에서 폭발하여 침몰했고, 이를 조사하러 간 순양함 보야린도 2월 13일 침몰했다.[6] 일본 해군은 여순항을 봉쇄하기 위해 2월 24일, 3월 27일, 5월 3일에 걸쳐 낡은 선박들을 침몰시키는 시도를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6]3월 8일, 유능한 해군 제독 스테판 마카로프가 여순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러시아군의 사기를 높였다.[6] 마카로프 제독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3월 10일 일본군 구축함의 기습으로 러시아 구축함 2척이 침몰하는 등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다.[6]
4월 13일, 마카로프 제독이 탑승한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해 침몰하면서 마카로프 제독을 포함한 635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6] 이는 러시아 해군에 큰 타격이었다.
3. 3. 일본군의 기뢰 작전과 전함 손실 (1904년 5월)
일본 해군은 제7차 공격에서 기뢰가 효과를 발휘한 것을 확인하고, 기뢰 작전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1904년 8월까지 19차례에 걸쳐 가상 포함을 이용하여 기뢰를 부설했으며, 같은 해 6월부터 12월까지는 함재 어뢰정도 투입하여 가짜 기뢰를 포함, 총 1703개의 기뢰를 여순항 입구에서 약 9km 떨어진 해역에 부설했다.[6]러시아 역시 기뢰를 이용한 작전을 전개했다. 1904년 5월 5일, 여순항을 감시하는 일본 함대의 항로에 비트게프트 소장은 아무르를 이용하여 기뢰를 부설했다. 이로 인해 5월 15일 오전 11시 10분, 라오톄산(老鐵山) 해역에서 야시마와 하츠세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 일본 측은 야시마의 침몰만을 발표하고, 하츠세의 침몰은 이듬해 1905년 5월 말까지 숨겼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 측은 계속해서 피해를 입었다. 5월 14일에는 어뢰정 48호와 미야코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고, 5월 15일 새벽 1시 30분에는 여순 해역에서 요시노가 가스미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5월 16일에는 다쓰타가 좌초되었고, 5월 17일에는 사고로 오시마가, 기뢰 접촉으로 아카쓰키를 잃었다.[6]
3. 4. 황해 해전과 여순항 포위 (1904년 6월 ~ 12월)
1904년 6월 23일과 8월 10일, 러시아 함대는 여순항을 탈출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특히 8월 10일의 시도는 황해 해전으로 이어졌지만, 전술적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6] 이후 러시아 함대는 항구 내에 갇히게 되었고, 일본 해군은 해상 지배권을 확보했다. 일본 육군은 여순항을 포위하고, 1905년 1월 2일 여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개전 당시 러시아 뤼순 함대(주요 전투 함정)[6]
함종 | 척수 | 함명 |
---|---|---|
전함 | 7척 | 체사레비치, 레트비잔, 페레스베트, 폴타바, 페트로파블롭스크, 세바스토폴, 포베다 |
장갑순양함 | 1척 | 바얀 |
방호순양함 | 8척 | 팔라다, 디아나, 아스콜트, 보야린, 노비크, 자비야카, 라즈보이니크, 지기트 |
포함·수뢰포함 | 6척 | 그레먀시치이, 오트바즈니, 길랴크, 보브르, 후사드니크, 가이다마크 |
구축함 | 18척 | (상세 생략. 그 외 개전 후 준공 함선이 수 척) |
4. 결과 및 영향
러일 전쟁의 시작은 일본 제국 해군 (IJN)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포트 아서와 제물포에 주둔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2] 여순항 해전은 일본과 러시아 간의 러일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은 기습 공격을 통해 여순항을 무력화시켰고,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곳곳에서 패배하여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 해전으로 일본 해군은 러시아 전함과 해안 포대의 연합 사격으로 인해 전장에서 후퇴해야 했고, 이는 러시아에게 약간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러시아는 150명, 일본군은 약 9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양측 모두 침몰한 함선은 없었지만 여러 척이 손상되었다. 일본은 사세보에서 함선을 수리할 수 있었던 반면, 러시아 함대는 여순항에서 매우 제한적인 수리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다.[2]
데와 시게토 제독의 정찰 부족과 실제 상황이 밝혀진 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해안 포대 아래에서 러시아와 교전하는 것에 반대한 것은 정당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일본과 러시아 간의 공식적인 선전 포고는 전투 다음 날인 1904년 2월 10일에 발표되었다.[2] 평화 시기에, 대체로 방심하고 준비되지 않은 중립국을 상대로 감행된 이 공격은 1941년의 진주만 공습과 널리 비교되었다.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는 육상 및 해상에서 중립국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조항을 채택하여,[3][4] 중립 국가나 개인에 대한 적대 행위를 금지하고,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표적 당사자에게 선전 포고를 할 것을 요구했다.[5]
5. 비판
일본 해군의 개전 초기 공격이 불철저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도야마 사부로는 저서 『러일 해전사 연구』에서 기습 기회를 살려 제2격을 가하지 않아 러시아 주력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주력 부대가 돌입했더라면 러시아 함대를 전멸에 가깝게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3]
오에 시노오는 저서 『세계사로서의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사상과 투지 부족을 비판했다. 전과 확대를 이루지 못해 3번에 걸친 폐색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실패했다는 것이다.[4]
아이자와 준은 2005년 발표한 논문에서 군령부의 작전 방침이었던 "기습 단행"과 달리 실제로는 "위력 정찰"에 그쳐 뤼순 함대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육군의 대규모 투입과 희생이 강요되었다는 주장이다.[5]
6. 평가
여순항 해전은 주요 군함의 손실 없이 끝났지만, 일본 해군은 러시아 전함과 해안 포대의 합동 사격으로 전장에서 물러나 러시아에게 약간의 승리를 안겨주었다.[3] 러시아는 150명, 일본군은 약 90명의 사상자를 냈고, 양측 모두 침몰한 배는 없었지만 여러 척이 손상되었다. 일본은 사세보에 함선 수리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여순항에서 매우 제한적인 수리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데와 시게토 제독의 정찰 부족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신중한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전투 결과로 드러났다.
이 전투는 1904년 2월 10일 일본과 러시아 간의 공식적인 선전 포고로 이어졌다. 평화 시기에 준비되지 않은 중립국을 상대로 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비교되기도 한다.[4]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는 중립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금지하고, 공격 전에 선전 포고를 하도록 하는 조항을 채택했다.[5]
개전 직후 실시된 제1차 공격에 대해 불충분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 긍정론
- 군령부 편 『극비 메이지 37·38년 해전사』 '''→''' 성공한 작전.
- 줄리안 코벳 『Marintime operations in the Rosso-Japanese War, 1904-1905.』 '''→''' 목적대로 부분적인 제해권을 획득했다.
- 히라노 류지 「러일 개전 초두의 뤼순 공격의 재평가」 '''→''' 당면한 뤼순 함대의 행동을 억제하여 육군의 인천 상륙과 한국 정치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한반도가 확보되었다. 그 후에도, 제해권을 쥐는 것으로 제1군 주력의 상륙과 보급의 성공에 공헌했다.
; 비판론
- 도야마 사부로 『러일 해전사 연구』 '''→''' 기습의 기회에 제2격이 행해지지 않아, 러시아 주력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주력 부대가 돌입했더라면 전멸에 가까운 전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 오에 시노오 『세계사로서의 러일 전쟁』 '''→''' 사상과 투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과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아, 3번의 폐색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마저 실패했다.
- 아이자와 준 「'기습 단행'인가 '위력 정찰'인가? - 뤼순 항 기습 작전을 둘러싼 대립 -」 2005년 (『군사사학 제호』) '''→''' 군령부의 작전 방침인 "기습 단행"에 반하여 "위력 정찰"로 끝나, 뤼순 함대를 놓침으로써 육군의 대규모 투입과 희생이 강요되었다.
참조
[1]
문서
Sometimes also Nihongo
[2]
서적
Russo-Japanese naval war, 1905
https://www.worldcat[...]
Mushroom Model
2007
[3]
웹사이트
Convention relative to the Rights and Duties of Neutral Powers and Persons in case of War on Land
http://avalon.law.ya[...]
[4]
웹사이트
Convention concerning the Rights and Duties of Neutral Powers in Naval War
http://avalon.law.ya[...]
[5]
웹사이트
Convention relative to the Opening of Hostilities
http://avalon.law.ya[...]
[6]
문서
戸高、20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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