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칸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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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릭스 칸델라는 스페인 출신의 건축가로, 쌍곡 포물면(HP) 쉘 구조를 건축에 혁신적으로 도입하여 구조 역학적 합리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했다. 그는 얇고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건축물을 설계했으며, 1950년대부터 멕시코를 중심으로 300개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칸델라는 수학적 재능과 구조 역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쉘 구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멕시코 대지진에서도 끄떡없는 건물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우주선 연구소, 이글레시아 데 라 비르헨 미라그로사 교회, 스포츠 팰리스 등이 있으며, 런던 구조 기술자 협회 골드 메달 수상, 하버드 대학교 교수 역임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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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칸델라 | |
---|---|
기본 정보 | |
이름 | 펠릭스 칸델라 아우테리뇨 |
원어 이름 | Félix Candela Outeriño |
국적 | 스페인, 멕시코 |
출생 | 1910년 1월 27일, 스페인 마드리드 |
사망 | 1997년 12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
학력 | |
학교 | 마드리드 건축학교 (현 마드리드 공과대학교) |
가족 | |
배우자 | 엘라디아 마르틴, 도로시 칸델라 |
경력 | |
소속 | 구조기술자 협회 |
직업 | 건축가 |
주요 작품 | |
건축물 | 예술 과학 도시 스포츠 궁전 |
디자인 | 박판 구조 |
수상 | |
수상 내역 | IStructE 금메달 건축가 국제 연합의 아우구스토 페레 상 |
2. 생애
펠릭스 칸델라는 1910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1935년 마드리드 고등 건축 학교를 졸업했다. 스페인 내전 발발로 독일 유학이 무산되었고, 공화파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프랑스 페르피냥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 멕시코로 망명하여 건축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포물면과 쌍곡선 기하학 전문가였던 칸델라는 1950년 설계·시공·구조 해석 회사 Cubiertas ALA S.A.를 설립했다. 1951년 HP 쉘을 사용한 두께 1.5cm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진 우주선 연구소(Cosmic Rays Pavilion)로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3년 이글레시아 데 라 비르헨 미라그로사 교회를 설계하면서 건축가로도 유명해졌고, 멕시코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칸델라는 1960년대까지 멕시코에서 300개 이상의 작품과 900개의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1961년 런던 구조 기술자 협회로부터 골드 메달을 수상했고, 1968년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경기장인 스포츠 팰리스를 건설했다.
1971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 교수로 재직했다. 1978년 스페인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1997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87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10-1936)
펠릭스 칸델라는 1910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4] 1927년 마드리드 고등 건축 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에 졸업했다. 그는 학창 시절 기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4] 특히 루이스 베가스(Luis Vegas) 교수의 재료 역학 수업에서 "조력자"로 활동하며, 여러 건축 공모전에서 수상했다.[4] 그는 순수 수학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탄성 이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수를 돕거나 다른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났다.1935년 친구와 건축 설계 사무소를 개설하여 철강과 콘크리트 구조 해석을 주로 담당했다. 졸업 후 쉘 구조의 권위자에게 배우기 위해 독일 유학을 계획했으나,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로 마드리드에 남아 공화파에 합류, 종군하게 되었다.[4] 공병대 장교로 복무하던 중, 프랑스 국경 피레네 부근에서 포로가 되어 페르피냥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칸델라는 젊은 시절 럭비와 스키 등 스포츠에도 능했다.[4] 1927년부터 1935년까지 마드리드 건축 학교에서 공부하며 스키, 멀리뛰기, 높이뛰기에서 국내 챔피언에 올랐고, 자신이 이끄는 럭비 팀도 우승시켰다.
연도 | 내용 |
---|---|
1910년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 |
1927년 | 마드리드 고등 건축 학교 입학, 스포츠(럭비, 스키 등) 활동 |
1935년 | 마드리드 고등 건축 학교 졸업, 건축 설계 사무소 개설 |
1936년 | 스페인 내전 발발, 공화파 종군, 페르피냥 강제 수용소 수용 |
2. 2. 스페인 내전과 망명 (1936-1939)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7월 18일은, 펠릭스 칸델라가 논문 「건축 형태에 대한 철근 콘크리트 기술의 새로운 경향의 영향」으로 아카데미의 해외 장학생 자격을 얻어 쉘 구조의 권위자에게 독일 유학을 떠날 예정이던 바로 그날이었다.[3] 그러나 칸델라는 그대로 마드리드에 남아 공화파로 종군하는 것을 선택했다.[3] 공병대 장교로 에브로 전선에 배치되어, 프랑스 국경 피레네 부근에서 포로가 되어 페르피냥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3]1939년 퀘이커 프렌즈회의 구제 원조로 멕시코에 맨몸으로 망명하였다.[4] 당시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망명한 사람들의 총수는 25만 명에 달했다.[4]
2. 3. 멕시코에서의 활동 (1939-1971)
펠릭스 칸델라는 1939년 퀘이커 프렌즈회의 구제 원조로 멕시코로 망명하였다.[3] 당시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망명한 사람은 총 25만 명에 달했다.[3] 그는 1940년 멕시코시티의 건축 회사에서 제도사(도면 작성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로 근무하였다.[4] 1941년부터 1942년까지는 아카풀코에서 친구와 건설 사업을 시작했고,[5] 1943년부터 1946년까지는 멕시코시티에서 건축가 헤수스 마르티의 조수로 일하며 개인 작업도 병행하였다.[6]1950년, 칸델라는 설계·시공·구조 해석 회사인 Cubiertas ALA S.A.를 설립하였다.[7] 1951년에는 HP 쉘을 사용한 두께 1.5cm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진 우주선 연구소(Cosmic Rays Pavilion)를 건설하여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8] 이 건물은 멕시코 정부가 의뢰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1953년에는 이글레시아 데 라 비르헨 미라그로사 교회를 건설하여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같은 해 멕시코 국립 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70년까지 재직하였다.[9]
칸델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멕시코에서 300개 이상의 작품과 900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 대통령의 건설 정책에 힘입어 공공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954년에 공장과 창고를 언브렐라로 짓기 시작했으며,[10] 1955년부터 1958년 사이에는 산 안토니오 데 라스 웨르타스 교회, 소치밀코의 레스토랑, 쿠에르나바카의 오픈 채플 등 프리 엣지 쉘 구조를 설계하였다.[11] 1959년에는 바갈디 본사 공장과 산 비센테 데 파울의 예배당을 건설하였고,[12] 1960년에는 산타 모니카 교회를 건설하였다.[13]
1961년, 칸델라는 런던 구조 기술자 협회로부터 골드 메달을 수상하였으며,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62년까지 재직하였다.[14] 1967년에는 멕시코시티 지하철역인 칸델라리아 역을 건설하였고,[16] 1968년에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경기장인 스포츠 팰리스를 건설하였다.[17]
2. 4. 미국에서의 활동 및 말년 (1971-1997)
칸델라는 1971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 건축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8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5] 1978년부터는 명예 교수가 되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는 영국 리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1978년에 스페인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1997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주요 작품 및 업적
칸델라는 평생 동안 철근 콘크리트가 구조 공학에서 가진 잠재력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쉘 구조 설계에 있어 복잡한 수학적 계산 대신 쉘의 기하학적 특성을 활용하는 방식을 추구했다.[6]
1950년대부터 멕시코를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하며 쉘 구조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하위 섹션에서 연도별 작품 목록을 상세히 제공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작품 몇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한다.)
- 1951년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의 우주선 연구소는 얇은 콘크리트 쉘 구조로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0]
-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건설된 이글레시아 데 라 메달라 데 라 비르헨 밀라그로사는 그의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 중 하나이다.
- 1968년 196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팔라시오 데 로스 데포르테스는 스포츠 시설로서 쉘 구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 1969년 건설된 멕시코시티 지하철의 산 라자로 역과 칸델라리아 역은 공공시설에도 쉘 구조를 적용한 사례이다.
칸델라의 건축물은 구조적 효율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한 결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85년 멕시코 대지진에서도 그의 건물들이 무사했다는 사실은 쉘 구조의 안전성을 입증한다.[9]
3. 1. 쉘 구조의 혁신
칸델라는 철근 콘크리트가 돔이나 쉘과 같은 형태에서 매우 효율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형태는 콘크리트의 인장 힘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복잡한 수학적 수단 대신 쉘의 기하학적 특성에 의존하여 쉘 설계를 분석했다. 1950년경 칸델라의 회사가 라미나 구조 설계를 시작했을 때, 학술 저널과 엔지니어링 기사를 연구하며 철근 콘크리트의 거동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구조 분석을 "취미"로 여기기도 했다.


미스 판 데어 로에의 유니버설 스페이스가 유클리드 기하의 극점이라면, 구면 기하는 버크민스터 풀러의 지오데식 돔이고, 펠릭스 칸델라가 다룬 것은 쌍곡 기하의 건축적 표상인 HP(쌍곡 포물면) 쉘 구조이다[8]。 얇은 막 구조의 쉘 구조는 건축 구조 역학적으로 우수하여 힘이 건축 재료에 균등하게 분배되므로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비용 효율이 좋다. 1985년 규모 8.1의 멕시코 대지진에서도 칸델라의 건물은 모두 무사했다[9]。
1951년, 칸델라는 멕시코시티의 대학 도시에 우주선 연구소를 건설하면서 HP 쉘 구조의 우위를 직감했다. 두께가 정점에서 1.5cm, 기초에서도 최대 4cm인 쉘 구조물을 실현하여 건축계에 이름을 알렸다[10]。 그는 실험 모형 없이 구조 역학적 센스와 직관, 간단한 수계산과 실물 크기 모델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적 감으로 설계했다[11]。
칸델라가 HP 쉘의 대가로 불린 것은 3힌지 콘크리트 아치 구조의 개척자인 로베르 마이야르에 대한 존경[12], 수학적 재능, 기하학적 취향, 구조 역학적 합리성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13]。 당시 멕시코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성립되기 어려워, 건축업자를 겸해야 하는 환경에서 공장이나 창고와 같은 건물을 싸고 빠르게 수주해야 했다[14]。 HP 쉘은 직선재 거푸집으로 시공이 용이하다는 특성이 있다[15]。
거푸집 제거 후 직선재 사용으로 나타나는 콘크리트 면의 주름은 미학적으로 우수하며, 단게 겐조의 도쿄 대성당 인테리어에서 볼 수 있다. 구조가로서의 칸델라의 건축은 구조 역학적 합리성 때문에 외부 공간 디자인이나 파사드가 빈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16][17],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침체 이후 구조에 정직하고 미니멀한 모더니즘 양식과 곡예적인 공간 표현을 하는 칸델라의 건축 역량이 재평가되고 있다[18]。
칸델라의 건축에서는 HP 쉘 면에 뚫린 슬릿이 톱 라이트나 하이 사이드 라이트로 이용되며, 특히 교회 건축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쏟아지는 내부 공간을 만들어내고, HP 쉘 내벽 면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교차로 극적인 종교적 공간을 연출한다[19]。
3. 2. 대표작
펠릭스 칸델라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6]
연도 | 작품명 | 위치 | 비고 |
---|---|---|---|
1951년 |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 우주선 연구소 (Cosmic Rays Pavilion) | 멕시코시티 | 호르헤 곤잘레스 레이나와 공동 작업. 관측상 우주선을 통과시키기 위해 극히 얇은 콘크리트 지붕이 요구되어, 두께가 정점에서는 불과 1.5cm, 기초에서도 최대 4cm라는 놀라운 쉘 구조물을 실현하였다.[10] |
1952년 | 알마세네스 데 라스 아두아나스(세관 창고) | 멕시코시티 아스카포찰코 | 카를로스 레카미에와 공동 작업 |
1953년-1957년 | 이글레시아 데 라 메달라 데 라 비르헨 밀라그로사 | 멕시코시티 콜로니아 나르바르테 | |
1954년-1955년 | 파브리카 셀레스티노 페르난데스 | 멕시코시티 콜로니아 바예호 | |
1955년 | 멕시코 증권 거래소 지붕 | 멕시코시티 | 엔리케 데 라 모라 로페즈 및 페르난도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1955년-1956년 | 키오스코 데 무시카 | 산타 페 | |
1955년 | 엘 아틸로 교회 | 멕시코시티 코요아칸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1955년 | 산 안토니오 데 라스 우에르타스 | 멕시코시티 타쿠바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1959년 | 산 비센테 데 파울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
1963년 | 산타 모니카 로페즈 데 카르모나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
1955년-1956년 | 코요아칸, 아스카포찰코 및 아나우악 시립 시장 | 멕시코시티 | 페드로 라미레즈 바스케즈 및 라파엘 미야레스와 공동 작업 |
1956년-1957년 | 나이트클럽 라 자카란다 | 아카풀코 | |
1956년 | 호텔 카지노 데 라 셀바 | 쿠에르나바카 | 2001년 철거 |
1958년 | 로스 마나티알레스 레스토랑 | 멕시코시티 소치밀코 | 호아킨 알바레즈 오르도네즈와 공동 작업 |
1958년 | 예배당 로마스 데 쿠에르나바카 | 쿠에르나바카 | |
1959년-1960년 | 플란타 엠보텔라다 바카르디 | 멕시코시티 근처 쿠아우티틀란 | |
1959년 | 카피야 데 아비에르타 팔미라 | 쿠에르나바카 | 로셀 및 마누엘 기예르모 라로사 공동 작업 |
1959년 | 산 호세 오브레로 교회 | 몬테레이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1962년 | 앵글로 멕시칸 재단 강당 | 콜로니아 산 라파엘 | 엔리케 데 라 모라 |
1962년-1963년 | 과달루페 성모 교회 | 마드리드 | 엔리케 데 라 모라 이 팔로마르 및 페르난도 로페즈 카르모나와 공동 작업 |
1963년 | 존 루이스 창고(JLW) | 영국 스티버니지 | |
1966년 | 파로키아 델 세뇨르 델 캄포 플로리도 | 멕시코시티 | |
1968년 | 팔라시오 데 로스 데포르테스 | 멕시코시티 | 196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 A. 페이리 및 E. 카스타녜다 탐보렐과 공동 작업 |
1969년 | 멕시코시티 지하철 산 라자로 및 칸델라리아역 | 멕시코시티 | |
1994년-2002년 | L'Oceanogràfic | 발렌시아, 스페인 |
4. 칸델라의 건축 철학 및 영향
칸델라는 철근 콘크리트가 돔이나 쉘과 같은 형태에서 매우 효율적이며, 콘크리트의 인장 힘을 제거한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복잡한 수학적 수단 대신 쉘의 기하학적 특성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1950년경 쉘 구조 설계를 시작하면서 탄성 가정을 사용하여 철근 콘크리트의 거동에 의문을 제기했다.[8]
미스 판 데어 로에의 유니버설 스페이스가 유클리드 기하의 극점이라면, 구면 기하는 버크민스터 풀러의 지오데식 돔이고, 칸델라는 쌍곡 기하의 건축적 표상인 HP(쌍곡 포물면) 쉘 구조를 다루었다.[8] 쉘 구조는 힘이 건축 재료에 균등하게 분배되어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비용 효율이 좋은 건축물을 만들기 쉽다. 1985년 규모 8.1의 멕시코 대지진에서도 칸델라의 건물은 모두 무사했다.[9]
1951년, 칸델라는 우주선 연구소 건설에서 HP 쉘 구조의 우위를 직감하고, 두께가 1.5cm에 불과한 쉘 구조물을 실현했다.[10] 그는 간단한 수계산과 실물 크기 모델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적 감에 의해 설계하는 스타일을 유지했다.[11]
칸델라가 HP 쉘의 대가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로베르 마이야르에 대한 존경과[12] 그의 기하학적 취향, 구조 역학적 합리성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13] 당시 멕시코에서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성립되기 어려워, 공장이나 창고와 같은 건물을 싸고 빠르게 수주해야 했다.[14] HP 쉘은 직선재 거푸집으로 시공이 용이하며,[15] 거푸집 제거 후 나타나는 주름진 자국은 미학적으로 우수하다. 단게 겐조의 도쿄 대성당 인테리어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칸델라는 구조 역학적 합리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외부 공간 디자인이나 파사드가 빈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16][17]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 이후 구조에 정직하고 미니멀한 모더니즘 양식이면서도 곡예적인 공간 표현을 하는 그의 건축은 재평가되고 있다.[18]
칸델라의 건축에서 HP 쉘 면에 뚫린 슬릿은 톱 라이트나 하이 사이드 라이트로 이용되며, 특히 교회 건축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과 그림자를 활용하여 극적인 종교적 공간을 만들어낸다.[19]
참조
[1]
뉴스
Muere a los 87 años el arquitecto Félix Candela
https://elpais.com/d[...]
El País
2020-12-21
[2]
뉴스
Felix Candela and Fernando Higueras: back to the umbrella geometry
https://doi.org/10.4[...]
EGA
2022-12-27
[3]
학술지
Reconstructing Pérez Piñero's Anoeta Velodrome
[4]
웹사이트
Felix Candela, the architect who showcased concrete's curves
https://www.curbed.c[...]
2019-05-04
[5]
문서
Félix Candel, 064-01 Faculty and Alumni Biography Files
UIC Archives,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6]
서적
Felix Candela, Builder of Dreams
https://www.scribd.c[...]
[7]
문서
齋藤裕1995、225-229頁の年譜をもとに作成
[8]
문서
齋藤裕1995、37、41頁
[9]
문서
齋藤裕1995、46頁
[10]
문서
齋藤裕1995、14、32頁
[11]
문서
齋藤裕1995、32、40、45頁
[12]
문서
齋藤裕1995、23-26頁
[13]
문서
齋藤裕1995、44頁
[14]
문서
齋藤裕1995、18、42頁
[15]
문서
齋藤裕1995、15、44、152頁
[16]
문서
齋藤裕1995、18-19、21頁
[17]
문서
キャンデラの作品の大半は、建築家との協働によるものである。これはキャンデラが「プラン(建築計画-建築が実際に使用される建造物として要請される諸条件の構成)をつくることや窓のディテール、その類いのものをつくること」にあまり興味を抱けなかったからであるが、しかしながら建物のシェイプやプロポーションの細部における決定は、キャンデラ自身が行っている。齋藤裕1995、29、44頁。
[18]
문서
齋藤裕1995、30、33、35、37、40、41頁
[19]
문서
齋藤裕1995、12、4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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