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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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민사는 일제강점기 말기 언론 통제 속에서 탄압받던 지식인들이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설립한 출판사이다. 언론인, 종교인, 학자 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하여 《평민신문》을 발행하고, 사회 비판적인 칼럼 '직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이후 재건되어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적 뿌리 중 하나로 여겨지며, 진보적 가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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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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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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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일간지 |
창립자 |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 |
발행인 | 헤이민샤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 |
편집장 | 고토쿠 슈스이 |
기고자 | 우치야마 구도 |
창간일 | 1903년 11월 |
정치 성향 | 아나키즘 사회주의 |
언어 | 일본어 |
폐간일 | 1905년 1월 18일 |
재창간 | 1907년 1월 – 1907년 4월 1914년 10월 – 1915년 3월 1946년 6월 – 1950년 |
발행 도시 | 도쿄 |
발행 국가 | 일본 제국 |
자매지 | 오사카 헤이민 신분 (후에 니혼 헤이민 신분) |
관련 정보 | |
다른 이름 | 헤이민 신문 더 커머너스 뉴스 |
평민사 (헤이민샤) | |
종류 | 출판사 |
설립 | 1903년 12월 |
해산 | 1907년 3월 |
위치 | 도쿄 후카가와 |
관련 인물 |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 |
2. 설립 배경
1903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일본 내 여론은 개전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만조보는 비전론을 주장했으나, 대로동지회와 7박사 의견서 등의 영향으로 개전론으로 입장을 선회했다.[1] 이에 반발한 코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 등 '만조보' 기자들은 비전론을 관철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퇴사 후 1903년 10월 27일 평민사를 설립했다.[1]
1903년 10월 27일, 코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는 러일 전쟁 개전을 지지하는 여론에 맞서 전쟁 반대(비전론)를 주장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 평민사를 설립했다.[1] 평민사는 신문사 형태를 띠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협회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 조직 역할을 했다. 코지마 류타로, 카토 토키지로, 이와사키 카쿠야 등이 자금을 지원했다.[1]
평민사는 신문사 형태로, 코지마 류타로, 카토 토키지로, 이와사키 카쿠야 등의 자금 원조를 받아 설립되었다.[1] 결성 약 한 달 후에는 평민신문을 창간하였다. 평민사는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지원자들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고, 사실상 사회주의협회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 조직이었다.
3. 주요 활동
평민사는 JR오츠카역 북쪽 출구 광장 근처에 있던 셋집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곳은 주거 공간이자 신문사였다.
1905년에는 『직언』 제7호에서 에스페란토어를 소개하기도 했다.[4]
평민사는 재정난, 내부 갈등, 그리고 관헌의 탄압으로 인해 1905년 10월 9일 해산되었다.[1] 1907년 1월 15일 일본 사회당의 기관지인 '''『일간 평민신문』''' 발행소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4월 14일 폐간되어 3개월 만에 다시 해산되었다.[3] 이후 세 번째로 재건되었으나 1910년 3월에 해산되었고, 코토쿠 사건으로 주요 인물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3. 1. 평민신문
1903년 11월 15일[1]부터 1905년 1월 29일[1]까지 총 64호가 발행된 주간 신문이다. 러일 전쟁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며, 국제 연대를 강조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1]
창간호에는 "평민사 동인"의 서명이 있는 "선언"과 사카이 토시히코, 코토쿠 슈스이의 서명이 있는 "발간의 서"가 게재되었다. "선언"에서는 평민주의, 사회주의, 평화주의를 주장할 것을 밝혔다. 이는 1901년에 결성되었으나 곧 금지된 사회민주당의 "사회민주당 선언서"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1]
1904년 3월 13일, 『평민신문』은 사설 "여로국 사회당서"를 통해 러시아 사회당에 연대를 제안했고, 3월 27일 사설 "아아 증세"에서 군국 제도, 자본 제도, 계급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1]
1904년 7월, 『평민신문』의 직접 구독자는 1400명에 달했다.[3] 11월 13일에는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사무엘 무어의 영어 번역본을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공동 번역한 『공산당 선언』이 게재되었다. 이는 일본 최초의 『공산당 선언』 번역이었다.[1]
『평민신문』은 제1면에 영문란을 두어 미국, 영국,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정보를 보내고 국제적인 연대를 호소했다. 그 결과, 1904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에서 가타야마 센과 러시아 대표 플레하노프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악수를 나누며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확인했다. 이는 『평민신문』을 비롯한 각국 사회주의 진영의 기관지에 보도되었다.[1]
그러나 러일 전쟁 반대 주장은 관헌의 주목을 받았고, 재정난과 내부 갈등까지 겹쳐 1905년 10월 9일, 평민사는 해산했다.[1]
3. 2. 직언
1903년 11월 15일에 창간된 주간 『평민신문』이 1905년 1월 29일 제64호를 끝으로 폐간된 후, 평민사는 소비조합 직행단(直行團)의 기관지였던 '''『직언』'''을 매주 발행하는 형태로 활동을 이어갔다.[2] 아라하타 칸손의 자전에 따르면, 이는 후계 신문을 새로 창간하는 형태로는 당국의 허가를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언』은 관헌의 탄압을 받아 제3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3]
4. 해산과 재건
1905년(메이지 38년) 10월 9일[1], 평민사는 정부의 탄압과 재정난, 유심론과 유물론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3] 활동 2년 만에 해산되었다.
1907년(메이지 40년) 1월 15일[1], 일본 사회당의 기관지인 '''『일간 평민신문』''' 발행소로 재건되었으나, 당국의 심한 탄압으로 인해 같은 해 4월 14일[1] 폐간되면서 3개월 만에 다시 해산되었다[3]. 이듬해 세 번째로 재건되었지만, 1910년 (메이지 43년) 3월에 해산되었다.
이후 코토쿠 사건으로 주요 멤버 대부분을 잃었다.
5. 의의 및 영향
평민사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러일 전쟁 반대 운동을 통해 평화주의를 확산시키고자 노력했으며, 공산당 선언 번역, 해외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 등 국제 연대 활동을 펼쳤다.[1]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이후 일본 사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03년 11월 15일 주간 『평민신문』 창간호에는 "평민사 동인"의 서명이 있는 "선언"과,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의 서명이 있는 "발간의 서"가 게재되었다. "선언"에서는 평민사가 "평민주의·사회주의·평화주의"를 주장할 것을 밝혔다. 이 두 문서는 1901년 코토쿠 등이 결성했지만 즉시 금지된 사회민주당의 "사회민주당 선언서" 정신을 계승하여, 이후 일본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4년 11월 13일, 주간 『평민신문』은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사카이 토시히코와 코토쿠 슈스이가 사무엘 무어의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공산당 선언』을 게재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공산당 선언』 번역이었다.
주간 『평민신문』은 제1면에 영문란을 설치하여 미국, 영국,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정보를 보내고 국제적인 연대를 호소했다. 1904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2 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에서 가타야마 센과 러시아 대표 플레하노프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장에서 악수하며 국경을 초월한 연대와 협력을 확인한 것은 그 성과 중 하나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평민사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참조
[1]
웹사이트
平民社(へいみんしゃ)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3-08-10
[2]
서적
パンとペン
講談社
[3]
웹사이트
No.0043 直言=週刊平民新聞改題
https://sanshorou.jp[...]
2023-08-10
[4]
서적
パンとペン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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