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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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훈은 평양군 태산현 출신으로, 한나라 장군 포현의 9대손이며, 아버지 포신은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조조를 구하고 전사했다. 포훈은 조조를 섬기며 승상연을 지냈고, 조비가 조조의 뒤를 잇자 태자중서자, 부마도위, 시중을 겸임했다. 조비가 즉위한 후에도 그는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조비의 사냥과 군사 원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직언으로 조비의 미움을 사 치서진법으로 좌천된 후, 226년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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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포훈 (鮑勛) |
본명 | 포훈 (鮑勛) |
자 | 숙업 (叔業) |
출생지 | 산둥성 신태 |
사망지 | 허난성 뤄양 |
사망 년도 | 226년 |
아버지 | 포신 |
직업 | 정치가 |
관직 | |
관직명 | 우중랑장 (右中郎將) |
임기 시작 | 기원후 220년 경 |
임기 종료 | 226년 |
군주 | 조비 |
2. 가계와 초기 생애
포훈은 평양군 태산현 출신으로, 한나라의 장군 포현의 9대손이다. 그의 자손 중 일부는 상당군에서 태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2] 아버지 포신은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조조를 구하고 전사했다.[3]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형 포소는 조조에 의해 신도정후에 봉해졌다.[4]
212년, 아버지의 공적에 힘입어 조조에게 발탁되어 승상연이 되었다. 217년, 조비가 태자가 되자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다. 포훈은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여 조비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위군에 부임했을 때, 곽부인의 남동생이 저지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면제해 달라는 조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사면하지 않아 원한을 샀다.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뒤를 잇자, 부마도위·시중을 겸임했다.
2. 1. 아버지 포신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희생으로 조조의 목숨을 구했다.[3]2. 2. 형 포소
포소는 아버지 포신의 공헌을 기려 조조에 의해 신도정후에 봉해졌다.[4]3. 조조 섬김
212년, 아버지 포신의 공적을 인정받아 조조에게 발탁되어 승상연이 되었다.[1] 형 포소는 신도정후에 봉해졌다.[1] 217년, 조조의 적자 조비가 태자가 되자,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다.[2] 포훈은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비의 미움을 샀다.[2] 위군에 부임했을 때 조비의 부인 곽부인의 남동생이 저지른 죄를 사면해 달라는 조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사실대로 보고하여 조비의 원한을 샀다.[2]
4. 조비 섬김
217년, 조조의 적자 조비가 태자가 되자 포훈은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다. 포훈은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여 조비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위군에 부임했을 때, 조비의 정실 부인인 곽부인의 남동생이 저지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면제해 달라는 조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사면하지 않아 원한을 샀다.[7]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뒤를 잇자 부마도위·시중을 겸임했다. 조비(문제)가 즉위한 후에는 "궁궐 건축보다 군대, 농업, 인자한 통치를 우선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8]
4. 1. 조비와의 갈등
포훈은 조비의 사냥과 군사 원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한번은 조비가 사냥을 나섰을 때, 포훈은 조비의 수레를 멈춰 세우고 사냥보다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조비는 포훈의 항의 서신을 찢어버리고 사냥을 계속했다.[9] 사냥 중에 조비가 신하들에게 음악과 사냥의 즐거움을 비교하게 하자, 유엽은 사냥이 더 즐겁다고 답했다. 반면 포훈은 음악은 평화롭고 교화적인 반면 사냥은 생명에 해를 끼치고 군주에게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유엽을 아첨꾼이라고 비난했다.[10] 이로 인해 조비는 불쾌감을 느껴 포훈의 관직을 삭탈하여 말단 관리로 강등시켰다.[11]225년,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대해서도 포훈은 "오와 촉은 산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칠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했다.[5] 그러나 조비는 더욱 화가 나서 포훈을 좌천시켰다.
5. 죽음
225년, 조비가 오를 공격하려 하자, 포훈은 산천에 의지하고 있는 오와 촉을 쉽게 칠 수 없으며, 원정이 오히려 적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조비는 더욱 분노하여 포훈을 치서집법으로 좌천시켰다.[1]
조비가 수춘에서 돌아왔을 때, 포훈은 진류태수 손옹이 건설 중인 진영 보루를 가로질러 간 죄를 눈감아 주었다. 손옹을 추궁하려던 군영령사 유요가 죄를 범하자, 포훈은 유요의 면직을 상소했는데, 유요는 포훈이 손옹의 죄를 눈감아 준 사실을 몰래 상소했다. 이에 조비는 포훈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겼다.[1] 정위 고유는 포훈의 죄가 징역 5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삼관은 법에 따라 벌금형으로 끝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비는 격노하여 삼관 이하를 체포했다. 종요, 화흠, 진군 등이 포훈의 아버지의 공적을 들어 변호했지만, 조비는 허락하지 않고 226년 여름에 포훈을 처형했다.[1]
5. 1. 죽음의 배경과 원인
황초 6년(225년) 가을, 조비는 오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대해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도록 했다. 이때 포훈은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조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1] 조비는 포훈을 치서진법으로 좌천시켰으나, 여러 신하들이 표를 올려 포훈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조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적인 감정으로 포훈을 처형했다.[1]5. 2. 죽음 이후의 평가
포훈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은혜를 잘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처형되었을 때 집에 재산이 거의 없었다.[1] 또한, 포훈이 죽은 지 20일 후인 5월 17일에 조비가 병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포훈의 죽음을 애도했다.[1]참조
[1]
문서
Bao Xun's biography in Sanguozhi indicated that he died about 20 days (2 xun) before Cao Pi, who died on 29 June 226.
[2]
문서
鮑勛字叔業,泰山平陽人也,漢司隸校尉鮑宣九世孫。宣后嗣有從上党徙泰山者,遂家焉。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3]
문서
太祖以賊恃勝而驕,欲設奇兵挑擊之於壽張。先與信出行戰地,後步軍未至,而卒與賊遇,遂接戰。信殊死戰,以救太祖,太祖僅得潰圍出,信遂沒,時年四十一。- Book of Wei cited in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Pei SongZhi
[4]
문서
建安十七年,太祖追錄信功,表封勛兄邵新都亭侯。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5]
문서
二十二年,立太子,以勳為中庶子。-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6]
문서
勳前在東宮,守正不撓,太子固不能悅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7]
문서
太子郭夫人弟為曲周縣吏,斷盜官布,法應棄市。太祖時在譙,太子留鄴,數手書為之請罪。勳不敢擅縱,具列上。勳前在東宮,守正不撓,太子固不能悅,及重此事,恚望滋甚。會郡界休兵有失期者,密敕中尉奏免勳官.''-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8]
문서
文帝受禪,勳每陳「今之所急,唯在軍農,寬惠百姓。台榭苑囿,宜以為後。」''-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9]
문서
文帝將出遊獵,勛停車上疏曰:『臣聞五帝三王,靡不明本立教,以孝治天下【……】如何在諒闇之中,修馳騁之事乎!【……】』帝手毀其表而競行獵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10]
문서
中道頓息,問侍臣曰:『獵之爲樂,何如八音也?』侍中劉曄對曰:『獵勝於樂。』勛抗辭曰:『夫樂,上通神明,下和人理,隆治致化,萬邦咸乂。移風易俗,莫善於樂。況獵,暴華蓋於原野,傷生育之至理,櫛風沐雨,不以時隙哉?昔魯隱觀漁於棠,春秋譏之。雖陛下以爲務,愚臣所不原也。』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11]
문서
因奏:『劉曄佞諛不忠,阿順陛下過戲之言。昔梁丘據取媚於遄臺,曄之謂也。請有司議罪以清皇廟。』帝怒作色,罷還,即出勛爲右中郎將。 - Biography of Bao Xun, Fascicle 12, Records of the Thre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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