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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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키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으로,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제24대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69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휘틀럼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후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호주 달러 변동 환율제 도입, 국영 기업 민영화 등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총리 재임 기간에는 원주민 토지권 인정, 연금 제도 개혁, 아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퇴임 후에는 저술 활동과 기업 고문으로 활동하며, 정치 현안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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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키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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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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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제24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
통치 기간 | 1991년 12월 20일 – 1996년 3월 11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빌 헤이든 윌리엄 딘 경 |
부총리 | 브라이언 하우 킴 비즐리 |
재임 기간 | 1991년 12월 19일 – 1996년 3월 19일 |
부대표 | 브라이언 하우 킴 비즐리 |
총리 | 밥 호크 |
재임 기간 | 1990년 4월 4일 – 1991년 6월 3일 |
대표 | 밥 호크 |
총리 | 밥 호크 |
재임 기간 | 1983년 3월 11일 – 1991년 6월 3일 |
총리 | 고프 휘틀럼 |
재임 기간 | 1975년 10월 21일 – 1975년 11월 11일 |
선거구 | 블랙스랜드 |
의회 | 오스트레일리아 |
재임 기간 | 1969년 10월 25일 – 1996년 4월 23일 |
출생 이름 | 폴 존 키팅 |
출생일 | 1944년 1월 18일 |
출생지 | 달링허스트, 뉴사우스웨일스 주, 오스트레일리아 |
거주지 | 포츠 포인트, 뉴사우스웨일스 주, 오스트레일리아 |
정당 | 노동당 |
배우자 | 애니타 반 이에르셀 (1976년 결혼, 2008년 이혼) |
파트너 | 줄리앤 뉴볼드 (1999년–현재) |
자녀 | 4명 |
교육 | 드 라 살 가톨릭 대학 벨모어 기술 대학 |
직업 | 노동조합원 정치인 |
웹사이트 | http://paulkeating.net.au |
정치 경력 | |
장관 | 북부 오스트레일리아 장관 |
예비 내각 | 광물, 자원 및 에너지 예비 장관 |
정부 임기 (1991–1996) | |
법률 | 1993년 원주민 권리 법 |
연설 | 레드펀 공원 연설 |
경제 | 슈퍼애뉴에이션 보장 |
경제 정책 | 기업 교섭 |
경제 | 콴타스와 커먼웰스 은행 민영화 |
이민 | 구금 센터 |
문화와 사회 | 창조적인 국가 |
기반 시설 | 원 네이션 |
정부 부처 | |
선거 |
2. 어린 시절
폴 키팅은 시드니에서 태어나 노동자 계급 거주 지역인 뱅크스타운에서 성장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보일러 제조자이자 노조 대표였다.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는 1932년 제임스 스컬린 이후 첫 가톨릭 신자 노동당 총리가 되었다. 14세에 학교를 그만둔 후 사무원과 노조 연구 조교로 일했으며, 가입 자격이 되자마자 노동당에 입당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폴 키팅은 1944년 1월 18일 시드니 달링허스트에 있는 세인트 마가렛 병원에서 태어났다.[9] 그는 미니 (결혼 전 성씨: 채프먼)와 매튜 존 키팅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자녀 중 첫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 철도에서 보일러 제작자로 일했다.[10] 키팅의 조부모는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으로는, 그는 골웨이, 로스커먼, 티퍼레리에서 태어난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후손이었다.[11] 어머니 쪽으로는, 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프레드 채프먼은 1830년대에 절도로 죄수로 형벌 이송된 존 채프먼과 사라 갤러거의 아들이었다.[12]키팅은 시드니 서부의 노동자 계급 교외 지역인 뱅크스타운에서 자랐다. 1942년부터 1966년까지 그의 가족은 3 마셜 스트리트에 있는 작고 소박한 석면 시멘트 방갈로에서 살았다 (2014년에 아파트 개발을 위해 철거됨).[13] 그의 형제자매로는 기업 이사 및 사업가인 앤 키팅이 있다. 14세에 드 라 살 칼리지 (현재는 라살 가톨릭 칼리지로 알려짐)를 떠난 키팅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대신 시드니 카운티 의회의 전기 배급업체에서 급여 사무원으로 일했다. 키팅은 또한 교육을 더 받기 위해 벨모어 기술 고등학교에 다녔다.[14] 그 후 그는 노동당에 가입한 직후 노동조합에서 연구 조교로 일했다. 1966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 청년 노동당의 의장이 되었다.[15] 1960년대에 키팅은 또한 록 밴드인 더 램로즈를 매니지했다.[16]
2. 2. 초기 경력
키팅은 노동조합과 청년 위원회로 알려진 청년 노동자 조직과의 인맥을 통해 로리 브레튼, 그레이엄 리처드슨, 밥 카와 같은 미래의 고위 노동당 인물들을 만났다. 그는 또한 키팅이 정치적 멘토로 삼았던 전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 잭 랭과 친분을 쌓았다. 1972년에는 랭의 노동당 재가입을 성사시키기도 했다.[17] 키팅은 시드니 서부 교외의 블락슬랜드 선거구에 대한 노동당 후보 지명을 성공적으로 얻었고, 불과 25세였던 1969년에 하원에 선출되었다.[15]
키팅은 1972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후, 내각에는 선출되지 못하여 대부분의 휘틀럼 정부 기간 동안 후위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결국 1975년 10월 북부 호주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다음 달 총독 존 커에 의해 정부가 논란 속에 해임될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197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 키팅은 빠르게 그림자 내각에 합류하여 1983년 1월까지 광물, 자원 및 에너지부 그림자 장관으로 활동했다.[14] 1981년,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노동당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영향력 있는 노동 우파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
3. 정치 경력
키팅은 1969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초기에는 사회 보수적인 성향이었으나 점차 변화했다. 1972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후 고프 휘틀럼 정부에서 평의원으로 활동하다 1975년 북부 호주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곧 정부가 해임되면서 장관직을 잃었다.[19]
197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에는 그림자 내각에서 광물, 자원 및 에너지부 장관을 맡아 공격적인 토론 방식으로 명성을 얻었다.[14] 1981년 뉴사우스웨일스 노동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당내 노동 우파 파벌 지도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빌 헤이든을 밥 호크 대신 노동당 대표로 지지하며 리더십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21]
1983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키팅은 호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23] 1991년 내각에서 사임하기 전까지 호주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3. 1. 초기 정치 활동
키팅은 노동조합과 청년 위원회(청년 노동자 조직)를 통해 로리 브레튼, 그레이엄 리처드슨, 밥 카 등 훗날 노동당의 주요 인물이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또한 키팅의 정치적 멘토였던 잭 랭 전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와 친분을 쌓았다. 키팅은 랭과 매주 정치에 관해 논의했으며, 1971년에는 그의 노동당 재가입을 성사시켰다.[17] 키팅은 시드니 서부 교외의 블락슬랜드 선거구에 대한 노동당 후보 지명을 성공적으로 얻었고, 25세였던 1969년에 하원에 선출되었다.[15]키팅은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었다. 그는 국회 첫 연설에서 자유당 정부가 "노동력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가 증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선언했다.[18] 그는 나중에 존 고턴 전 총리의 1973년 동성애 비범죄화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톰 유렌에 따르면 그는 원래 "매우 편협한 젊은이"였으나, 나중에 "성숙"해져서 사회적으로 덜 보수적이 되었다고 한다.[19]
1972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후, 키팅은 내각에 선출되지 못하고 휘틀럼 정부 기간 대부분을 후위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75년 10월 북부 호주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다음 달 존 커 총독이 논란 속에 정부를 해임하면서 장관직을 잃었다.
3. 2. 휘틀럼 정부 시절
키팅은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부에서 대부분 하원 뒷자리 평의원으로 지냈으나, 1975년 잠시 북부 오스트레일리아 장관을 맡아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최연소 장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같은 해 알리탈리아에서 일하던 네덜란드 출신 여승무원 아니타 판 이어르살과 결혼하였다. 키팅 부부는 캔버라의 총리 공식 관저 "더 로지"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4명의 자녀를 두었다.3. 3. 재무장관 시절 (1983-1991)
1983년 3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키팅은 밥 호크 총리에 의해 호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3] 그와 호크는 프레이저 정부로부터 호크 정부가 물려받은 대규모 예산 적자를 이용하여 향후 몇 년 동안 자유-국민 연합의 경제적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24] 호크에 따르면, 연합이 남긴 역사상 최대 규모인 96억 달러의 예산 적자는 "우리가 야당을 정당하게 공격할 수 있는 막대기가 되었다".[24]그 후 몇 년 동안 호크와 키팅은 매우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했고, 이는 노동당의 정부 성공에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후 여러 노동당 인물들은 두 사람의 파트너십을 당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으로 꼽았다.[26] 두 사람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호크는 로즈 장학생이었고, 키팅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27] 호크는 엽궐련, 경마와 스포츠의 모든 형태였고, 키팅은 오히려 고전 건축과 골동품 시계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였다.[28][29] 1983년 호크가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서로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여 정부가 상당수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가끔 긴장된 상황도 있었다.[30]
키팅은 호크와 함께 취임 첫 달에 "국가 경제 정상 회담"을 주관했으며, 키팅은 정부의 경제 의제를 설명하는 여러 세션을 이끌었다. 고위 기업 및 산업계 인사, 노조 지도자,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한 이 정상 회담은 국가 경제 전략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결과를 낳았고, 노동당의 많은 부분에서 이전에 반대했던 광범위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자본을 정부에 제공했다.[31]
키팅은 호크가 제공한 권한과 상대적인 자율성을 활용하여 정부의 광범위한 다양한 거시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주요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32] 1983년 12월, 호크와 키팅은 변동 환율로 오스트레일리아 달러를 변동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재무부 차관 존 스톤의 고정 통화 체제를 유지하라는 조언을 무시했다.[33][34] 경제 및 언론 평론가들이 칭찬한 이 조치의 성공은 키팅이 더 많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35][36][37] 호크 정부의 첫 번째 임기와 두 번째 임기 동안 키팅은 수입 관세의 점진적 폐지,[38] 콴타스 항공,[39] CSL 리미티드,[40] 커먼웰스 은행과 같은 여러 국영 기업의 민영화,[41] 은행 시스템의 상당 부분의 규제 완화 (호주에서 처음으로 다수의 외국 소유 은행이 운영을 시작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포함) 및 호주 준비 은행에 의사 결정 자율성 부여를 감독했다.
키팅은 또한 호크 정부의 대표적인 노사 관계 및 임금 정책인 가격 및 소득 협약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호주 노동조합 평의회(ACTU)와 정부 간의 직접적인 합의로, 정부가 메디케어 및 가족 지원 제도의 도입을 포함하여 사회 프로그램의 상당한 증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임금 인상 요구를 줄이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줄일 수 있었다.[42] 협약에 대한 키팅의 관리와 그가 ACTU 사무총장 빌 켈티와 맺은 긴밀한 협력 관계는 키팅에게 상당한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 되었으며, 그는 호크 정부 전반에 걸쳐 켈티와 여러 버전의 협약을 협상했다. 키팅은 그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특히 통화 정책을 행사하는 데 있어 내각을 완전히 우회할 수 있었으며, 그는 정기적으로 "현대 시대 가장 강력한 재무 장관"으로 불렸다.[43]
특히 호크 정부의 첫 번째 임기 동안 키팅이 도입한 일련의 거시 경제 개혁의 결과로, 1984년 그는 유로머니 올해의 재무 장관[44] 상을 받았으며, 이 상은 호주에서 구어체로 "세계 최고의 재무 장관"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호주 재무 장관이 되었다.[45]

호크 정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동안, 키팅은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호주 조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1985년, 그는 호주의 만성적인 국제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범위한 소비세 도입을 내각에서 열정적으로 옹호했는데, 이는 나중에 하워드 정부에 의해 도입된 상품 및 서비스세와 유사한 성격의 세금이었다.[46][47] 1984년 선거를 앞두고, 호크는 모든 이해 관계자들과 논의할 조세 개혁에 관한 정책 보고서를 약속했다. 보고서에는 A, B, C의 세 가지 옵션이 제시되었는데, 키팅과 재무부 동료들은 상품 및 서비스에 15%의 소비세를 부과하고, 개인 및 법인 소득세와 부대 급여세, 자본 이득세를 인하하는 C안을 강력히 옹호했다. 키팅은 마지못해 동의한 내각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호크는 대중, ACTU, 그리고 재계의 반대가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소비세 도입 계획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지만, 나머지 개혁안은 조세 개혁 패키지에 포함되었다. 소비세 부과 실패는 키팅에게 패배로 여겨졌으며, 그는 나중에 기자 회견에서 "마치 ''벤허''와 같습니다. 바퀴 하나가 빠진 채로 결승선을 넘었지만, 어쨌든 결승선을 넘었습니다."라고 농담했다.[48]
나머지 패키지가 수십 년 만에 호주 조세 제도의 가장 큰 개혁을 나타냈지만, 키팅은 호주가 직면한 국제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1986년 5월 14일, 이 문제에 대한 느린 진행 속도에 실망한 키팅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호주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바나나 공화국"의 지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선언하여 상당한 사회적 논란과 비판을 야기했다.[49] 호크는 공개적으로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정부는 악화되는 국제수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소비세가 없어 수입이 크게 증가하지 않자, 키팅과 내각 동료들은 대신 정부 지출을 대폭 줄이는 과정을 주도했고, 이에 반대하는 노동당의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49]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88년, 1989년, 1990년에 국가 예산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으며, 1988년의 흑자는 호주 역사상 가장 큰 예산 흑자로 기록되었다.[50]
1987년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키팅은 자유-국민 연립의 승리 가능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자유당이 경제 정책의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 설명하기 위해 발표한 비용 계산에서 중대한 회계 오류를 폭로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기 때문이다.[51]
키팅이 재무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일부에서는 지속적인 고금리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키팅은 수입 수요가 통제 불능으로 증가하지 않도록 경제 성장을 점진적으로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동안, 세계 경제와 호주 경제는 모두 빠르게 성장했고, 1980년대 후반까지 인플레이션은 약 9%까지 상승했다. 1988년까지 호주 중앙 은행은 통화 정책을 긴축하기 시작했고, 가계 금리는 18%로 정점을 찍었다. 중앙 은행이 통화 정책 완화에 너무 늦었고, 이것이 결국 경기 침체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키팅은 비공식적으로는 금리가 더 일찍 오르고 더 빨리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견해는 중앙 은행과 재무부 동료들과 달랐다.[43][53] 공개적으로, 호크와 키팅은 경기 침체가 없을 것이라고, 또는 "연착륙"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키팅이 호크 정부가 전례 없는 4선에 성공한 지 몇 달 후인 1990년에 호주가 실제로 경기 침체에 빠졌다고 발표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키팅은 경기 침체를 발표하면서, 이 경기 침체는 "호주가 겪어야만 했던 경기 침체"라고 기억에 남을 만한 발언을 했다.[54]
1980년대의 경제 개혁 패키지는 수많은 경제 평론가와 언론인들에 의해 전례 없는 장기간의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되는데, 호주의 국내 총생산이 30년 동안 매년 증가했고,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 문제, 그리고 점점 더 세계화되는 국내 경제가 안정과 성장의 장기간을 가능하게 했다.[55][56]
1988년 말, 오랫동안 호크를 총리로 승계할 것이라고 믿어온 키팅은 새해에 호크에게 사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호크는 이 조언을 거부했지만, 키팅과 비밀 협정을 맺고 1990년 선거까지 지도자로 남고, 키팅이 승리할 수 있다고 설득한 후 선거 직후 키팅에게 사임하기로 했다.[43] 호크는 그 후 비록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사임하는 라이어넬 보웬을 대신하여 키팅을 부총리로 임명했다.[57] 그러나 1990년 말, 호크가 언제 사임할지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자, 키팅은 정부의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도발적인 연설을 했다. 그 결과, 호크는 키팅에게 공개적으로 불충했다는 이유로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말했다.[58]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한동안 사적으로 유지되었지만, 키팅은 결국 1991년 6월 내각에서 사임하고 지도부에 도전했다.[59] 호크는 66 대 44표로 투표에서 승리했고,[60] 그 후 언론 발표에서 키팅은 지도부에 대해 "한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고 선언했다.[61][62]
3. 4. 총리 재임 (1991-1996)
1991년 12월 20일, 키팅은 총독 빌 헤이든에 의해 총리직에 취임했다. 총리가 되자 주 총리들이 종종 자신의 재무장관을 겸임했던 것을 언급하며 재무장관직을 다시 맡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포기했다.[69] 대신 존 도킨스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키팅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의 화해 추진,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 간의 경제적, 문화적 관계 심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을 포함한 광범위한 입법 의제를 가지고 취임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키팅의 "큰 그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70]
밥 호크의 사퇴로 인해, 자유당의 새로운 당수 존 휴슨이 발표한 정치적 패키지인 "반격"이 공개되었다. 이 정책은 재화용역세(GST)를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 관계 개혁, 개인 소득세 인하, 보건 및 교육 분야 정부 지출 삭감 등을 포함했다. 호크와 그의 새로운 회계원 존 케린은 이 패키지의 선거 항소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키팅은 국회 모임에서 휴슨의 신용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1993년 선거가 노동당에게 "이길 수 없는" 선거라고 보았다. 정부는 10년 동안 집권했고, 경제는 좋지 않았으며, 유권자들은 키팅의 거만한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휴슨은 일관된 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키팅은 "이것에 10%, 저것에 10%"라는 낭독과 함께 "반격"에 대한 두려운 선거 운동으로 유권자를 되찾는 데 성공하여 노동당을 예상치 못한 선거 승리로 이끌었다. "반격"의 많은 개혁들은 이후 존 하워드의 자유당 정부 아래에서 구현되었다.
키팅은 1993년 선거 승리를 자신의 "큰 그림" 안건을 추구할 의무로 해석했고, 시드니와 멜버른의 좌파 지식인 계급들에 의해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키팅은 근로자 계급과 지역 유권자들이 침체된 경제에 대해 더 걱정하고 있었고,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루에 대한 키팅의 강조에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동당은 신뢰할 만한 대안 총리를 제시하지 못했고, 키팅은 안전해 보였다. 1994년 알렉산더 다우너가 휴슨을 당수직에서 대체했지만, 키팅의 입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1995년 초 존 하워드가 노동당의 리더십을 다시 얻었을 때, 많은 유권자들은 그의 더욱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메시지에 호응했다. 1995년 캔버라 보궐 선거 패배는 경고 신호였지만, 키팅은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1996년 3월 선거에서 하워드는 자유당을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어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역사상 노동당 정부의 장기 집권을 끝냈다. 키팅은 즉시 국회에서 사임했고, 다양한 기업들의 이사로서 퇴직 후 낮은 프로필을 유지했다. 그가 정계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다. 하워드 집권 기간 동안 키팅은 자신의 후임자의 사회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종종 했고, 동티모르와 같은 자신의 정책들에 대한 약점을 부인했지만, 노동당 정치 상황은 피했다.
3. 4. 1. 원주민 토지권 및 국내 정책
키팅은 총리가 된 직후,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이 원주민 토지 권리에 대한 오랜 소송에서 마보 판결을 내린 것에 주목했다. 이 판결은 테라 눌리우스를 뒤집고 원주민 토지권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존재함을 선언했지만, 누가 권리를 갖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71] 키팅은 이 판결에 대한 정부 대응을 주도하고,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대중 캠페인을 시작했다. 1992년 12월 10일, 키팅은 레드펀 파크 연설을 통해 원주민 화해에 관한 중요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정착민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원주민 사회의 많은 부분을 파괴한 것에 대한 책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여,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정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자주 인용되었다.[72][73]이러한 노력은 1993년 원주민 토지권법 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은 원주민 토지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국가 토지 관리 시스템과 공존하기 위한 국가 시스템을 제공했다.[71] 또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원주민 사회 정의 위원을 설립하여 원주민 토지권법의 시행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원주민의 인권 행사 및 향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례 보고서를 오스트레일리아 법무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했다.[74]
국내 정책의 다른 분야에서 키팅은 '창조적 국가'로 알려진 최초의 연방 문화 정책을 수립하고 홍보했다.[75] 이 정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화 및 창작 예술 부문을 장려하기 위해 4년 동안 2.5억호주 달러를 할당했다. 키팅은 공개적으로 예술의 이점을 자주 옹호했으며, 이 정책을 오스트레일리아 문화 부문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활용했다.[75] 키팅 정부 동안, 망명 신청자에 대한 강제 구금도 처음 도입되었다.[76]
3. 4. 2. 연금 제도 개혁
키팅 총리의 가장 광범위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국가 연금 제도의 완전한 도입이다. 이는 호주의 고질적인 저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 제도는 키팅이 재무장관 시절 추진했던 정책을 기반으로 하며, 대부분의 호주 국민이 은퇴 후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77]1992년, 의무적인 고용주 부담금 제도가 이러한 은퇴 소득 문제 해결을 위한 더 광범위한 개혁 패키지의 일부로 도입되었다. 호주는 다른 많은 서방 국가와 마찬가지로 고령화로 인해 향후 수십 년 동안 심각한 인구 고령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연금 지급액 증가로 이어져 호주 경제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키팅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은퇴 소득에 대한 "세 가지 기둥" 접근 방식을 제시했다. 이는 다음을 포함한다.
- 연금 기금에 대한 의무적인 고용주 부담금
- 연금 기금 및 기타 투자에 대한 추가 기여 허용
- 소득 심사를 거친 정부 지원 노령 연금으로 구성된 안전망 도입 (위의 두 가지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한 경우)
의무적인 고용주 부담금은 "연금 보장" (SG) 부담금으로 명명되었다.[78] 이러한 정책과 최소 기여금액의 점진적인 증가 덕분에 호주는 2022년 6월 말 기준으로 3.3조호주 달러의 연금 자산을 보유하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연금 기금 자산 보유국이 되었다.[79]
3. 4. 3. 대외 정책
키팅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호주의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를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는 세계에서 호주에게 인도네시아보다 더 중요한 나라는 없다고 자주 말했으며, 해외 첫 방문지로 인도네시아를 선택하여 호주 총리로는 처음으로 방문했다.[81] 키팅은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인도네시아를 호주가 참여하는 다자간 포럼에 포함시키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키팅과 수하르토의 친분 관계는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는 인권 운동가들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 호세 라모스 오르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키팅 정부의 인도네시아 군과의 협력과 티모르 해협 조약 서명 역시 이들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키팅이 호주의 문화, 외교, 경제적 관계를 아시아와 극적으로 증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인권 침해 혐의를 간과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2]
밥 호크에 의해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경제 포럼이 창설된 후, 키팅은 이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켜 1993년 최근에 선출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중국 총리 리펑의 지지를 얻어 APEC을 정식 정상 회담으로 확대했다. 이로 인해 APEC은 가장 중요한 고위급 국제 정상 회담 중 하나가 되었고, 1994년 인도네시아가 주최한 APEC 정상 회담에서 회원국들은 키팅 정부가 제안한, 2010년까지 선진 APEC 국가 간, 2020년까지 개발도상 APEC 국가 간의 자유 무역과 투자를 대폭 증대하는 목표를 설정한 보고르 선언에 합의했다.[83]
1993년 12월, 키팅은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을 "고집불통"이라고 묘사하면서 외교적 사건에 휘말렸다. 이 사건은 마하티르가 1993년 APEC 정상 회담에 참석을 거부한 후 발생했다. 키팅은 "APEC은 우리 모두, 즉 호주, 미국,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박사 및 다른 고집불통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집불통"이라는 단어를 말레이시아어로 번역한 결과 그 단어가 더욱 심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마하티르는 키팅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호주와의 외교 관계 및 무역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호주 수출업자들에게 큰 우려를 안겨주었다. 일부 말레이시아 관리들은 "호주 제품 구매는 마지막으로" 캠페인을 시작하겠다고 말했고, 키팅은 이후 그 발언에 대해 마하티르에게 사과했다.[84]
2021년 11월, 키팅은 AUKUS 체제와 미국과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원자력 잠수함 제공 계획을 비판하며,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타이완 측이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 한, 중국 측이 군사 행동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도령 카슈미르에서의 무슬림의 처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126]
3. 4. 4. 1993년 및 1996년 선거
밥 호크 내각에서 개혁파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91년 호크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한 폴 키팅은 1993년의 "난공불락" 총선에서 혼란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85]1993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키팅은 연립 여당이 제안한 상품 및 서비스세 (GST)를 공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GST가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휴슨 박사의 손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슨이 선거 운동이 끝날 무렵 GST가 부과될 상품과 부과되지 않을 상품을 정확히 설명하려고 고군분투한 것은 키팅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운동 시작 당시 여론 조사에서 연립 여당에 크게 뒤처져 있었지만, 3월 13일 키팅은 노동당을 이끌고 예상외로 기록적인 5연속 선거 승리를 거두며 2석의 표차를 얻었다. 키팅이 승리 축하 행사에서 행한 연설은 노동당의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86][87][88][89] "어려운 시기에 믿음을 지켜온 호주의 진정한 신봉자, 남녀에게 이 승리를 바칩니다"로 시작하는 이 연설은 오늘날까지 노동당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묘사되고 있다.[90]

그의 전임자 호크와 마찬가지로 키팅은 자유당 내의 분열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93년 3월 선거 14개월 후, 존 휴슨은 자유당 대표직에서 알렉산더 도너로 교체되었고, 그의 리더십은 몇 달 안에 실수와 논란으로 빠르게 얼룩졌다. 키팅은 의회에서 도너를 능가하는 데 성공했으며, 1995년 초 도너는 사임하고 존 하워드로 교체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자유당을 이끌었다. 하워드는 노동당이 캔버라 선거구에서 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연립 여당에 새로운 동력을 줄 수 있었다. 휴슨과는 대조적으로 하워드는 1996년 선거를 위해 "작은 목표" 선거 전략을 채택하여 메디케어와 같은 많은 노동당 개혁을 유지하기로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헌법 협약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공화국 문제를 무력화시켰다.[91]
총리 재임 2기에는 경제 문제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높아졌지만, 키팅은 이에 대한 자신의 "청사진"을 각인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변화의 시간"이라는 이야기와 결합된 하워드의 전략은 1996년 3월 2일 키팅 정부에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5%의 양당 선호도 표차를 보이며 29석을 잃었고, 이는 호주 역사상 현직 정부의 두 번째로 큰 패배였다. 키팅은 노동당 대표와 의회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밥 호크가 처음 취임한 지 13년이 되는 3월 11일에 총리직에서 사임했다.[92]
4. 총리 퇴임 이후
1996년 선거에서 하워드는 자유당을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어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역사상 노동당 정부의 장기 집권 기간을 끝냈다. 키팅은 즉시 국회로부터 사임하였고, 다양한 기업들의 이사로 활동하며 퇴직 후 낮은 프로필을 유지하였다. 정계를 떠난 직후 그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다.[93] 하워드 집권 기간 동안 키팅은 자신의 후임자의 사회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가끔 했고, 동티모르에 대한 자신의 정책들에 대한 약점을 부인하였으나 노동당 관련 정치 활동은 피하였다.
1996년 의회를 떠난 후 키팅은 부유한 시드니 동부 교외의 울라라로 이주했다.[93] 그는 여러 회사의 이사직을 수락했으며, 투자 은행 회사인 라자드의 수석 고문이 되기도 했다.[94][95] 또한 중국 정부 개발 은행의 자문 위원으로 임명되었다.[96]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의 객원 공공 정책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게이오기주쿠 대학(1995), 싱가포르 국립 대학교(1999),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2003), 맥쿼리 대학교(2012)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92]
1975년 현대적인 호주 훈장 제도가 도입된 이후 모든 전직 총리에게 제공된 훈장인 호주 국경일 훈장에서 키팅은 호주 훈장 사령관 임명을 거절했다.[92] 그는 훈장은 지역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며, 총리를 지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적 인정을 받았다고 밝혔다.[97]
2000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첫 번째 저서인 『약속: 호주는 아시아 태평양을 마주하다』를 출판했는데, 이는 그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의 외교 정책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98] 2002년, 키팅의 전 연설문 작성자이자 고문인 돈 왓슨은 『피눈물을 흘리는 자의 회고록: 폴 키팅 총리의 초상』을 출판했다. 이 책은 처음에 키팅의 당시 별거 중이던 아내 애니타 키팅의 비판을 받았는데, 그녀는 왓슨이 자신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다고 말했고, 왓슨은 이 불만을 거부했다.[99] 키팅 자신은 이 책에 매우 불만을 품어 두 사람의 우정을 갑작스럽게 끝냈다.[100]
키팅은 처음에는 하워드 정부 동안 공개적인 정치적 논평을 피했지만, 그의 후임자의 사회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가끔 했다. 2007년 선거를 앞두고 키팅은 전 노동당 총리 고프 휘트램 및 밥 호크와 합류하여 하워드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하워드를 "마른 코코넛"이라고 묘사하며, "의자에 아랄다이트 처리"되어 있고, "...구식 홍수 전 시대 19세기 인물로, 일터에서 스스로를 조직하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를 영원히 짓밟고 싶어하는 사람...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의 암흑주의자"라고 말했다.[101] 또한 하워드의 부총리인 피터 코스텔로를 하워드가 두 번의 임기 후에 코스텔로에게 리더십을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언급하면서 "얼음은 없고 팁만 있다"고 묘사했다.[102]
2008년 2월, 2007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 후, 키팅은 전직 총리 휘트램, 프레이저, 호크와 함께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새 총리 케빈 러드가 원주민에게 국립 사과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103] 같은 해 8월, 그는 경제학자 데이비드 러브가 저술한 『미완의 과업: 폴 키팅의 중단된 혁명』 출판 기념회에서 연설했다. 기념식에서는 의무적인 퇴직 연금 기여금 증가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퇴직 연금 지급액을 연금으로 받도록 하는 인센티브를 복원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104]
2013년, 키팅은 케리 오브라이언과 4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가졌으며, 이 인터뷰는 그 해 11월 ABC에서 방송되었다. 이 시리즈는 키팅의 어린 시절, 의회 입성, 재무부 장관 및 총리 시절, 호주에 대한 그의 학문적, 음악적 및 예술적 관심사, 경제 및 문화적 비전, 그리고 아시아와의 통합에 대한 헌신을 다루었다. 오브라이언은 이 대화를 바탕으로 2014년 저서 『키팅: 인터뷰』를 썼다. 키팅은 여러 번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오브라이언과의 협력은 그가 자서전을 쓰는 데 가장 가까운 행보로 여겨졌다.
2016년, 『디 오스트레일리안』의 기자이자 정치 역사가인 트로이 브램스턴은 키팅이 협력한 무단 전기 『폴 키팅: 거대한 그림의 리더』를 썼다. 브램스턴은 키팅의 개인 서류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허가받았고, 키팅과의 인터뷰를 받았으며, 100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과도 인터뷰를 했다. 이 책은 "권위 있는"이자 "결정적인" 키팅 전기이며, "일류" 정치 역사가가 썼다고 묘사되었다.[105]
2015년 뉴사우스웨일스 주 선거 동안 키팅은 자유당 정부의 민영화 의제를 지지했으며, 노동당의 반 민영화 입장을 비난했다.[106]
2019년 연방 선거 유세 기간 동안, 키팅은 오스트레일리아 안보 정보 기구를 "괴짜"라고 부르며 비난했다.[107] 그의 발언은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 노동당 대표 빌 쇼튼은 키팅의 견해와 거리를 두었다.[108] 키팅은 나중에 밥 호크와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노동당의 경제 계획을 지지하고, 자유당을 "경제 개혁 의제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쇼튼의 노동당은 우리 시대의 주요 과제인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경제를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정부 정당"이라고 말했다. 이는 1991년 이후 두 사람이 발표한 첫 번째 공동 언론 성명이었다.[109] 호크가 같은 달에 사망한 후, 키팅은 6월 14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호크의 국가 추모 행사에서 연설을 했으며,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누렸던 "훌륭한 우정과 파트너십"을 되돌아보았다.[110]
2021년 9월, 오커스 미국, 영국, 호주 간의 3자 군사 동맹 발표 이후, 키팅은 이 동맹을 비판하며 "호주는 21세기, 즉 아시아의 세기를 낡고 퇴색된 앵글로스피어 때문에 등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 거래는 "미국 잠수함을 인수함으로써 국가와 군대를 미국의 군사 구조에 묶어두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키팅은 계속해서 노동당의 야당 외교 대변인 페니 웡을 비판하며, 노동당 야당이 자유당과 공모하여 "중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허위 진술"을 했다고 비난했다.[111] 그의 발언은 노동당 국회의원 앤서니 번과 피터 칼릴의 비판을 받았다.[112] 2022년 1월, 키팅은 영국 외무 장관 리즈 트러스가 태평양에서의 중국의 군사적 침략에 대해 "정신 나간" 발언을 했다며 "영국은 과대망상과 관련성 박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113] 2023년, 키팅은 오커스 협정을 "역사상 최악의 거래"라고 부르며 노동당 정부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그 결정은 빌리 휴즈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징병제를 도입하려 했던 이후 노동당 정부가 내린 최악의 결정이라고 말했다.[114] 2024년, 키팅은 오커스를 비판했고, 타이완은 "중국의 부동산"이며, 타이완은 태즈메이니아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115]
2021년 11월, 키팅은 AUKUS 체제와 미국과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원자력 잠수함 제공 계획을 비판하며,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타이완 측이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 한, 중국 측이 군사 행동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도령 카슈미르에서의 무슬림의 처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126]
5. 개인사
1976년 키팅은 알리탈리아의 네덜란드 출신 승무원 아니타 반 이얼셀과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자녀들은 십 대 시절을 캔버라에 있는 총리의 공식 관저인 더 로지에서 보냈다. 부부는 1998년 11월에 별거했으며, 2008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아니타는 이혼하기 훨씬 전에 결혼 전 성을 회복했다. 반 이얼셀과 결혼하기 전, 키팅은 1972년에 패션 컨설턴트 크리스틴 케네디와 약혼을 발표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16] 1999년부터 키팅의 파트너는 배우 줄리앤 뉴볼드이다.[117] 키팅의 딸 캐서린 키팅은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 밥 카와 뉴사우스웨일스 주 장관 크레이그 놀스의 고문을 지냈다.
1970년대 초, 키팅은 뱅크스타운에 있는 가족 집에서 이사하여 콘델 파크 제라드 애비뉴 12번지에 벽돌로 된 새 집을 구입했는데, 이곳은 부모님의 새 집(8 제라드 애비뉴)에서 두 집 떨어진 곳이었다.[118] 이곳은 1976년 결혼 후 1983년까지 가족의 보금자리였으며, 키팅 부부는 이 부동산을 123000USD에 매각하고 직장과 더 가까운 캔버라 교외 레드 힐의 단층 임대 주택으로 이사했다.[119][120][121]
키팅의 관심사는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 프랑스 골동품 시계 수집 등이다.[15][122] 그는 현재 시드니 시내 포츠 포인트에 거주하며, 호크스베리 강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123][124]
키팅은 내셔널 럭비 리그의 캔터베리-뱅크스타운 불독스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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