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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성전 (152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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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공성전 (1529–30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피렌체 공화국을 공격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시킨 사건이다. 1529년,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는 볼로냐 조약을 체결한 후 피렌체 공격을 계획했고, 오렌지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군이 피렌체를 포위했다.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포함한 시민들의 방어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비아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저항 능력을 상실하고 1530년 8월 10일 항복했다. 공성전 이후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되찾았으며, 피렌체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고 피렌체 르네상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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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냐크 동맹 전쟁은 1526년부터 1530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한 코냐크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분열 심화, 교황권 쇠퇴,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피렌체 공성전 (1529–3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조 바사리가 1558년에 묘사한 피렌체 공성전
조르조 바사리가 1558년에 묘사한 피렌체 공성전
분쟁 명칭피렌체 공성전
일부코냐크 동맹 전쟁
기간1529년 10월 24일 – 1530년 8월 10일
장소이탈리아 피렌체
결과합스부르크-교황령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피렌체 공화국
교전국 2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교황령
지휘관
지휘관 1프란체스코 페루초
말라테스타 발리오니
지휘관 2필리베르 드 샬롱
피에르 마리아 3세 데 로시
페란테 1세 곤차가
관련 전투
관련 전투 목록카몰리아 전투
시에나 마렘마의 교황령 점령
고베르놀로
북부 이탈리아
로마
파비아
멜피
카탄차로
남부 이탈리아
나폴리
아베르사
카포 도르소
란드리아노
피렌체 공성전 (1529–1530)
모노폴리
가비나나
참고 문헌

2. 역사적 배경

15세기 말 프랑스샤를 8세이탈리아를 침공(1494년)하면서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수십 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유럽 강대국들의 주된 경쟁 무대로 만들었다.[19][20] 프랑스는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등이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충돌을 야기했다.[21]

한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22] 이 결혼의 결과로 태어난 카를 5세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영토를 모두 상속받아 유럽에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고, 이는 기존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주변국들의 경계를 샀다.

카를 5세의 강력한 등장은 특히 교황령과 국경을 맞댄 나폴리 왕국의 군주이기도 했던 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교황들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군주의 출현이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아 경계해왔다.[21] 교황의 우려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황제군에게 대패하고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현실화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카를 5세는 북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 사실상 지배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1526년,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과 함께 코냑 동맹을 결성하고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코냑 동맹 전쟁이다. 그러나 동맹군은 황제군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1527년에는 봉급을 받지 못한 황제군 소속 란츠크네흐트 용병들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로마 약탈 사건이 발생하여 교황은 큰 충격을 받고 항복했다. 이 혼란을 틈타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다시 수립되었다.[25] 이후 프랑스군이 1528년 나폴리 공략에 실패하고 1529년 란드리아노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코냑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529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와 바르셀로나 조약 및 볼로냐 조약을 체결하여 화해했다.[23][24] 이 조약들에는 황제군이 피렌체를 공격하여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메디치 가문을 복귀시킨다는 합의가 포함되었으며, 교황은 이를 위해 군사 비용 지원을 약속했다.[26] 이 결정은 코냑 동맹에서 피렌체를 고립시키고 제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불러와, 결국 피렌체 공성전(1529-1530)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2]

2. 1.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백년전쟁 후 상비군 창설과 관료제 정비를 통해 중앙집권에 성공한 프랑스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19] 국력이 강해지자 프랑스는 외부로 눈을 돌렸고, 1494년 샤를 8세밀라노 공작의 협조를 받아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20] 그러나 이는 명백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 대한 도전이자 월권행위였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관할권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1]

한편, 스페인은 방계 가문이 통치하던 나폴리를 지키고자 했다. 프랑스를 경계할 필요성을 느낀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는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후아나와 펠리페 1세의 결혼식은 1496년 10월 20일 현재의 벨기에 리르에서 열렸다.[22] 이 결혼의 결과로 태어난 카를 5세는 훗날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을 모두 상속받아 초강대국을 형성했고, 이는 유럽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별다른 실익 없이 끝났지만, 부유하지만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후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의 주도권 경쟁의 장으로 변모하여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이탈리아 전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499년,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밀라노 계승권을 주장하며 원정을 실시해 밀라노 점령에 성공했다. 이에 교황 율리오 2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외세의 간섭을 몰아내기 위해 직접 전쟁을 이끌었고, 1512년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프랑수아 1세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밀라노를 다시 탈환했지만, 황제 카를 5세가 1521년에 밀라노를 정복하여 스포르차 가문에게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1529년 여름, 볼로냐 조약이 체결된 후,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아버지)는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오랑주 공은 7월 말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으로부터 약 30,000 두캇(추가 자금 약속 포함)을 받고, 페루자(당시 말라테스타 4세 바글리오니가 점령)와 피렌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오랑주 공은 1526년 게오르크 프룬스베르크를 따라 이탈리아로 들어온 란츠크네흐트의 잔여 병력과 전쟁 종결로 실직한 다양한 이탈리아 부대를 모아 총 7,000명의 보병을 확보했다.[3] 한편, 피렌체는 공격에 대비하여 10,000명에 가까운 민병대를 소집하고, 성벽 밖의 도시 일부를 철거하며 방어 준비에 나섰다.[4]

오랑주 공은 피렌체를 향해 진군하며 도중에 추가 병력을 모았다. 그는 포병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시에나에서 일부를 징발해야 했다. 시에나 사람들은 교황에 대한 호감이 적었기에 포병을 제공했지만, 최대한 늦게 도착하도록 지연시켰다.[5] 9월 24일까지 제국군은 피렌체에서 약 40.23km 떨어진 몬테바르키에 머물며 약속된 대포를 기다렸다.

같은 시기 피렌체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10인 평의회는 클레멘스 7세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했지만,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방어 공사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공화국이 고용한 많은 콘도티에리들은 황제를 상대로 싸우기를 거부했다. 피렌주올라가 제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자, 피렌체의 저명한 시민 다수가 도시를 떠났다. 그중에는 도시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예술가이자 건축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있었다. 그는 곤팔로니에레에게 말라테스타 바글리오니가 도시를 배신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9월 10일 피렌체를 떠났다. 하지만 11월 중순에 다시 돌아와 포위 공격이 끝날 때까지 요새 책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6]

도시 방어 준비 과정에서 여러 수도원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여기에는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수도원 교회, 산 갈로 교회[7], 포르타 산 갈로 외곽의 몬테 도미니 및 몬티첼리 수도원, 포르타 핀티 외곽의 카말돌리 수도원인 산 베네데토, 폴베로사의 산 도나토, 그리고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가 있던 산 지우스토 델리 인제수아티 등이 포함된다. 페루지노가 산 지우스토를 위해 그린 다른 작품들과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그린 제단화는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2. 2. 코냑 동맹 전쟁 (1526-1530)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영토를 상속받아 강력한 군주로 부상했다. 이는 유럽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특히 교황령과 국경을 맞댄 나폴리의 군주이기도 했던 카를 5세의 영향력 확대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큰 부담이었다. 교황들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경계했는데, 이는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21]

교황의 우려는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현실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카를 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국왕이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승리로 카를 5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까지 사실상 장악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내 황제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526년, 프랑스를 비롯한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코냑 동맹을 결성하고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동맹군이 초기에 밀라노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분노한 카를 5세는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흐트 용병을 포함한 제국군을 투입하여 밀라노를 되찾고 로마로 진격했다.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교황군의 저항을 뚫고 로마를 함락시켰다.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제국군 소속 용병들은 대대적인 로마 약탈을 자행했고, 이 사건으로 교황은 즉시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로마 약탈은 교황권의 실추를 가져왔으며, 이 혼란을 틈타 1527년 5월 19일, 피렌체에서는 공화정 세력이 교황 클레멘스 7세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다시 공화정을 복원했다.[25]

이후 전쟁은 황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528년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공략했지만 실패했고, 1529년 6월 란드리아노 전투에서도 제국군에게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전쟁 수행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1529년 6월 29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바르셀로나에서 황제 카를 5세와 비밀리에 만나 바르셀로나 밀약을 체결했다.[23][24]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향후 체결될 강화 조약에서 피렌체를 제외시키고, 교황이 군사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제국군이 피렌체를 공격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피렌체가 독자적으로 황제와 협상할 기회를 차단하여 고립시키고, 제국군을 이용해 피렌체를 공격함으로써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했다. 카를 5세 역시 이탈리아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해 교황의 제안에 동의했다.[26] 이 밀약과 이후 체결된 캉브레 조약으로 코냑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피렌체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채 제국의 공격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529년 여름, 볼로냐에서 최종 조율이 이루어진 후,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는 피렌체 공화국 공격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제국군 사령관 오렌지 공은 7월 말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으로부터 군자금 약 30,000 두캇을 지원받고 페루자와 피렌체 공격 명령을 받았다.[2] 오렌지 공은 기존 란츠크네흐트 잔여 병력과 전쟁 종결로 일자리를 잃은 이탈리아 용병들을 모아 약 7,000명의 보병대를 구성했다.[3] 이에 맞서 피렌체는 약 10,000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고, 도시 외곽의 일부 건물을 철거하며 방어 준비에 나섰다.[4]

오렌지 공은 피렌체로 진군하면서 병력을 추가로 모았으나, 포병 부족 문제에 직면하여 시에나로부터 대포를 징발해야 했다. 시에나는 교황에게 비협조적이었기에 대포 제공을 최대한 지연시켰다.[5] 9월 24일, 제국군은 여전히 대포를 기다리며 피렌체에서 약 40.23km 떨어진 몬테바르키에 머물렀다.

같은 시기 피렌체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10인 위원회는 교황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는 이를 거부하고 방어 준비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공화국이 고용한 용병대장 다수가 황제를 상대로 싸우기를 거부했고, 피렌주올라가 제국군에게 약탈당하자 많은 유력 시민들이 피렌체를 떠났다. 도시 요새 방어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용병대장 말라테스타 바글리오니가 피렌체를 배신할 것이라고 곤팔로니에레에게 경고한 후 9월 10일 도시를 떠났다가, 11월 중순에 돌아와 포위전이 끝날 때까지 요새 방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6]

thumb 1529–1530. 미켈란젤로는 포위 기간 동안 요새 책임자로 근무했다.]]

도시 방어 준비 과정에서 피렌체 외곽의 여러 수도원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여기에는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수도원 교회, 산 갈로 교회, 포르타 산 갈로 외곽의 몬테 도미니 및 몬티첼리 수도원, 포르타 핀티 외곽의 카말돌리회 수도원 산 베네데토, 폴베로사의 산 도나토, 그리고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로 유명했던 산 지우스토 델리 인제수아티 등이 포함되었다.[7] 이 과정에서 파괴된 산 지우스토 교회를 위해 페루지노가 그린 다른 작품들과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단화 등 일부 예술품은 우피치 미술관으로 옮겨져 보존되었다.

3. 피렌체 공성전 (1529-1530)

1527년 5월 19일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25]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1529년 6월 29일 바르셀로나 밀약을 통해[24] 교황은 황제 카를 5세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여 피렌체를 공격할 기반을 마련했다.[26] 코냑 동맹 전쟁의 종결 과정에서 체결된 여러 조약으로 동맹국들의 지원이 끊기면서 피렌체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1529년 10월, 오랑주 공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이 피렌체 외곽 언덕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8] 당시 피렌체는 약 8,000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고,[8] 이미 상당한 수준의 요새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제국군은 피렌체의 방어 시설이 견고하다고 판단하여 직접적인 강습보다는 포격과 수비군과의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공성전을 진행했다.[9] 이탈리아 내 다른 전투들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이 제국군에 합류하여 병력이 늘어났는데, 이들 중에는 잔혹함으로 악명 높았던 파브리치오 마라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10]

피렌체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으나, 이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프랑수아 1세는 약간의 자금만 지원했을 뿐,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았다.[11] 공성전이 길어지면서 전투는 피렌체의 보급로 확보에 중요했던 볼테라 등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피렌체는 프란체스코 페루초를 파견하여 한때 제국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결국 볼테라는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12]

볼테라 함락 이후 피렌체의 마지막 희망은 피사 인근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던 페루초의 구원군뿐이었다. 1530년 8월 3일, 페루초의 군대는 오랑주 공이 이끄는 제국군 주력 부대와 가비아나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 치열한 전투에서 페루초와 제국군 사령관 오랑주 공이 모두 전사했으며, 피렌체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13] 이 패배는 피렌체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도시의 항복으로 이어졌다.

3. 1. 제국군과 교황군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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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년 여름 볼로냐 조약[2]과 바로셀로나 밀약 체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공동 공격을 계획했다. 오랑주 공은 7월 말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으로부터 추가 자금 지급 약속과 함께 약 30,000 두카트를 받고 페루자 (당시 말라테스타 발리오니가 점령)와 피렌체 공격 명령을 받았다.[2][27]

오랑주 공은 약 7,000명의 보병을 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1526년 게오르크 프룬츠베르크를 따라 이탈리아에 들어온 란츠크네흐트 부대의 잔존 병력과, 전쟁이 끝나 일자리를 잃은 여러 이탈리아 용병 부대들이었다.[3][28] 한편, 피렌체는 공격에 대비하여 10,000명에 가까운 민병대를 소집하고 성벽 외부의 일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4]

오랑주 공은 피렌체를 향해 진군하며 도중에 병력을 추가로 모았다. 그러나 그는 포병 부족 문제에 직면하여 시에나에서 일부를 징발해야 했다.[5][29] 시에나인들은 교황에 대한 호감이 적었기에,[5][29] 대포를 제공하면서도 가능한 한 도착을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9월 24일에도 제국군은 피렌체에서 약 40.23km 떨어진 몬테바르키에 머물며 약속된 대포를 기다리고 있었다.[5][29]

피렌체에서 요새화 작업이 진행되고 제국군의 이동이 지연되면서 도시는 항전 의지를 다졌다. 10월 5일, 오랑주 공은 진군을 재개했고,[8] 10월 24일까지 피렌체 주변 언덕에 군대를 배치했다.[8] 피렌체의 방비가 공격으로 쉽게 함락시키기에는 너무 견고하다고 판단한 제국군은 포격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었다.[9] 한편,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가 중단되면서 수천 명의 실업 군인들이 제국군에 합류하여 병력이 크게 늘어났다. 새로 합류한 인물 중에는 잔혹함으로 악명 높아 교황 클레멘스 7세조차 그의 참전을 반대했던 파브리치오 마라말도도 있었다.[10]

3. 2. 피렌체의 방어 준비

볼로냐 조약 체결 후 1529년 여름, 황제 카를 5세교황 클레멘스 7세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오렌지 공에게 페루자피렌체 공격을 명령하며 약 30,000 두캇을 지원했다.[2] 오렌지 공은 란츠크네흐트 잔여 병력과 이탈리아 부대를 모아 약 7,000명의 보병을 확보하고[3] 피렌체로 진군했으나, 포병 부족으로 시에나에서 대포를 징발해야 했다. 교황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시에나는 대포 인도를 지연시켰고,[5] 9월 24일 제국군은 피렌체에서 약 40.23km 떨어진 몬테바르키에 머물며 대포를 기다려야 했다.

한편, 피렌체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10인 위원회는 교황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했지만, 곤팔로니에레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방어 준비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30] 공화국이 고용한 콘도티에리 중 다수가 황제군과의 전투를 거부했고,[6] 제국군이 피렌추올라를 약탈하자 많은 유력 인사들이 피렌체를 떠났다.[30]

270px 1529–1530. 미켈란젤로는 포위 기간 동안 요새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피렌체는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 약 10,000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고[32][4], 도시 방어를 위해 성벽 바깥의 일부 건물들을 철거했다.[4] 이 과정에서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수도원 교회, 포르타산갈로 외곽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과 산 갈로 교회[7], 몬테도미니 및 몬티첼리 수녀원, 포르타 핀티 외곽의 카말돌리회 수도원인 산 베네데토,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가 있던 산 도나토 인 포베로사와 산 주스토 델리 인제수아티 등 다수의 외곽 수도원과 수녀원이 파괴되었다. 이때 철거된 산 주스토 교회의 페루지노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작품 일부는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요새화 작업 책임은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미켈란젤로가 맡았다. 그는 교황의 요청으로 산 로렌초 성당 작업을 하던 중 차출되어 피렌체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31] 미켈란젤로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언덕까지 요새를 확장하고, 성벽 안쪽에 두꺼운 진흙벽을 쌓아 대포의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보강했으며, 성벽 외벽에는 침대 요나 짚을 엮어 늘어뜨려 포탄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31] 그러나 미켈란젤로 역시 혼란 속에서 말라테스타 발리오니가 피렌체를 배신할 것이라는 경고를 곤팔로니에레에게 남기고 1529년 9월 10일에 잠시 피렌체를 떠났다가, 11월 중순에 돌아와 다시 요새화 작업을 지휘했다.[30][6]

한편, 피렌체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움직임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1529년 5월, 술탄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대군이 이스탄불을 출발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을 공격하기 위해 서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8월에 헝가리를 점령한 오스만 군대는 9월에 빈을 포위했다. 이는 카를 5세에게 동쪽 전선이라는 부담을 안겨주어 피렌체 공격에만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3. 3. 공성전의 전개

피렌체에서 약 떨어져 있는 볼테라


요새화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제국군의 이동이 늦어지면서 피렌체는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1529년 10월 5일, 오랑주 공은 진격을 재개하여 10월 24일경 피렌체 주변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당시 피렌체는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약 8,000명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33][8] 피렌체의 방어 시설, 특히 토루가 견고하여 직접 공격으로 쉽게 점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제국군은 포격과 함께 수비대에 대한 산발적인 유격전을 벌이는 전략을 택했다.[34][9]

한편,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자리를 잃은 수천 명의 용병들이 제국군에 합류하여 군대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새로 합류한 인물 중에는 파브리치오 마라말도도 있었는데, 그는 잔혹한 행적으로 악명이 높아 교황 클레멘스 7세조차 그의 공성전 참여를 우려하며 반대했을 정도였다.[35][10]

피렌체를 지원하겠다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약속은 결국 빈말에 그쳤다. 비록 마드리드에서 그의 두 아들이 풀려났지만[36], 프랑수아 1세는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즉각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를 꺼렸다. 그는 피렌체 상인들에게 약간의 자금을 지원했지만, 이는 애초에 약속했던 군대 파견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미미한 보상에 불과했다.[37][11]

전투는 피렌체의 보급로 확보에 중요한 거점이었던 볼테라로 확산되었다. 제국군이 볼테라를 공격하자, 피렌체는 엠폴리 수비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페루초를 급파하여 대응했다. 페루초는 제국군을 비교적 쉽게 격퇴했지만, 볼테라에 남아 방어하라는 피렌체 10인 위원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엠폴리로 복귀했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제국군에게 두 번째 공격 기회를 주었고, 결국 볼테라는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38][12]

볼테라 함락으로 피렌체의 보급선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고, 남은 희망은 피사 인근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던 페루초의 구원군뿐이었다. 오랑주 공은 피렌체 내부의 용병대장 말라테스타 발리오니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국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 후, 주력 부대를 이끌고 페루초를 요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1530년 8월 3일, 두 군대는 가비아나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오랑주 공과 페루초가 모두 전사했으며, 피렌체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39][13]

페루초 군대의 전멸 소식은 피렌체 내부에 퍼져 있던 분열과 맞물려 더 이상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부 시민들이 항전을 주장했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결국 1530년 8월 10일, 피렌체 공화국 대표들은 제국군에 항복했다.[40] 항복 이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제국군에 의해 피렌체의 통치자로 임명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렸다.

3. 4. 볼테라 전투와 엠폴리 함락



전투는 피렌체로 향하는 보급선을 통제하고 있던 볼테라로 옮겨갔다. 제국군이 볼테라를 공격하자, 피렌체는 엠폴리 수비대 사령관 프란체스코 페루초를 파견하여 구원했다.[12] 페루초는 비교적 쉽게 제국군을 격퇴하였으나,[12] 볼테라에 주둔하라는 피렌체 10인 위원회의 명령을 어기고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엠폴리로 돌아갔다.[12][38] 페루초가 떠난 후, 제국군은 다시 볼테라를 공격하여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12][38]

3. 5. 가비아나 전투 (1530)

볼테라를 제국군에게 빼앗기면서, 도시로 향하는 보급선을 확보하려던 피렌체의 희망은 점차 줄어들었다. 피렌체는 피사 근방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던 프란체스코 페루초(Francesco Ferruccio)가 이끄는 구원군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12]

한편, 오랑주 공은 피렌체 내부의 지휘관 발리오니(Baglioni)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국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후, 페루초의 군대를 막기 위해 직접 나섰다. 1530년 8월 3일, 마침내 두 군대는 가비아나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제국군 사령관인 오랑주 공과 피렌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페루초가 모두 전사하는 격전이 벌어졌으나, 결과적으로 피렌체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13][39]

페루초 군대의 전멸은 피렌체의 저항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부 분열과 더불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피렌체 공화정 대표들은 결국 8월 10일 제국군에게 항복했다.[40]

이보다 앞선 1530년 2월 17일,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피렌체 시민들은 제국군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칼초 경기를 열기도 했다. 이 경기는 산타 크로체 광장에서 열렸으며, 저명한 군인, 영주, 귀족, 왕자들이 참여했다.[14]

3. 6. 피렌체의 항복

페루초의 군대가 가비나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15] 피렌체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다. 일부 시민들이 저항을 계속하려 했고 시 정부 내에서도 분열이 있었지만, 결국 1530년 8월 10일 피렌체 공화국 대표들은 제국군에게 항복했다.[15] 바글리오니와 그의 남은 병력은 도시를 떠났다.[15]

이 항복으로 피렌체 공성전은 끝났고, 1526년에 시작된 코냑 동맹 전쟁 역시 4년 만에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았다.[41]

전후 처리는 황제의 지원을 받는 교황이 주도했다. 그러나 피렌체 공화정 지도자들과 맺었던 항복 조건은 도시가 교황의 손에 넘어가자마자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천여 명에 달하는 공화정 지도급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추방, 투옥되는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15][42][43] 제국군이 피렌체에 주둔하는 가운데, 교황의 측근인 바초 발로리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권력을 장악했으며, 기존의 시뇨리아는 형식적으로만 남게 되었다.[41]

4. 공성전 이후

피렌체 공성전은 피렌체 공화국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공성전의 결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았고,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 황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공화정을 지지했던 지도자들이 숙청되면서 피렌체 공화국은 완전히 종식되었으며, 이는 코냑 동맹 전쟁의 종결로 이어졌다. 이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초대 세습 공작으로 임명되어 피렌체는 공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4. 1.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피렌체 공화국은 페루초 군대의 패배 이후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8월 10일 제국군에 항복했다. 바글리오니와 남은 병력은 도시를 떠났고,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몇 달간 공화국의 지도자 다수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15]

1531년 7월 5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재종손자인[44] 알레산드로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했다. 또한 도시 북쪽 성벽 중앙에 '포르테차 다바소'라는 요새 건설을 명했다. 이 요새는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잠재적인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요새가 완성되자 1532년 5월 1일, 교황의 요청을 받은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를 피렌체 초대 세습 공작으로 임명했다.[45]

이로써 피렌체 공화국은 완전히 종말을 맞이하고, 메디치 가문의 세습 통치가 시작되었다. 새로 지어진 요새에는 피렌체 공작의 통치를 뒷받침할 제국군이 상주하게 되었다. 1536년에는 알레산드로 공작이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마르게리타(1522~86)와 결혼하면서, 메디치 가문과 황제 간의 정치적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4. 2. 코냑 동맹 전쟁의 종결

피렌체 공성전의 결과로 1526년에 시작된 코냑 동맹 전쟁은 4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 전쟁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았으며,[41] 피렌체의 전후 처리는 황제의 지원을 받는 교황이 주도하였다.

1530년 8월 10일, 피렌체 공화국 대표들은 제국군에 항복했다.[15] 그러나 항복 당시 피렌체 공화정 지도자들과 체결된 조건들은 도시가 교황의 손에 넘어가면서 완전히 무시되었다. 천여 명에 달하는 피렌체 지도급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추방, 투옥되었다.[42][43][15] 제국군이 피렌체에 주둔하는 가운데, 교황의 측근인 바초 발로리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권력을 장악했으며, 기존의 시뇨리아는 형식적인 기구로 존속하게 되었다.[41] 항복 후 말라테스타 바글리오니와 그의 남은 병력은 도시를 떠났다.[15] 이로써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참조

[1] 서적 Historia de' Rossi Parmigiani http://www.cortedeir[...]
[2] 서적 History of Italy
[3] 서적 History of Italy
[4] 서적 History of Italy
[5] 서적 History of Italy
[6] 서적 History of Italy
[7] 간행물 Sangallo
[8] 서적 History of Italy
[9] 서적 History of Italy
[10] 서적 History of Italy
[11] 서적 History of Italy
[12] 서적 History of Italy
[13] 서적 History of Italy
[14] 서적 What's on in Italian Folklore Automobile club d'Italia L'editrice dell'automobile 1967
[15] 서적 History of Italy
[16] 서적 Historia de' Rossi Parmigiani http://www.cortedeir[...]
[17] 문서 알렉산드로는 로렌초 2세 메디치(1492-1519)의 사생아이다. 교황과는 6촌간이 되며 손자뻘이다. 교황의 사생아 또는 조카라는 설도 있다.
[18] 문서 카트린(1519~1589)은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딸로서 메디치 가문의 법적 상속인이자 후계자이다. 다행이도 구출되었고 1533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와 결혼하였다. 1547년 앙리가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19] 지식백과 샤를 7세
[20] 서적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1]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2019-04-25
[22]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23]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24]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5]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6]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27] 서적 이탈리아사
[28] 서적 History of Italy
[29] 서적 History of Italy
[30] 서적 History of Italy
[31] 서적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32] 서적 History of Italy
[33] 서적 History of Italy
[34] 서적 History of Italy
[35] 서적 History of Italy
[36] 문서 장남 프랑수아와 차남 앙리를 말한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스페인에 대패하며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생포되었는데 스페인과 협상에서 두 아들을 스페인에 볼모로 보내는 조건으로 국왕이 석방된 적이 있다. 장남 프랑수아는 1536년에 사망하고 차남이 훗날 1547년에 앙리 2세가 되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
[37] 서적 History of Italy
[38] 서적 History of Italy
[39] 서적 History of Italy
[40] 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41] 서적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 까치 1997-06-05
[42]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43] 서적 History of Italy
[44] 문서 재종손자(再從孫子)란 6촌 손자를 말한다. 재종(再從)은 서로 6촌지간을 말한다. 알레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7세의 사촌형인 '피에르 2세 데 메디치' (1471~1503)의 손자이다. 클레멘스 7세의 큰아버지의 큰 아들이 낳은 자식의 아들이다. 즉 알레산드로의 아버지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45]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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