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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베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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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터 베넨슨은 영국의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로, 1961년 정치적 신념으로 투옥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국제앰네스티를 창립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 고아 지원, 유대인 박해 반대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암호 해독가로 복무했다. 베넨슨은 1960년 포르투갈의 정치범 기사를 접하고 국제앰네스티를 설립하여 양심수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으나, 건강 악화와 내부 갈등으로 1967년 사임했다. 그는 200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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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베넨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 이름Peter James Henry Solomon
출생일1921년 7월 31일
출생지런던, 잉글랜드
사망일2005년 2월 25일
사망지옥스퍼드, 잉글랜드
안장지넌햄 코트니 묘지
국적영국인
알려진 이유국제앰네스티 창립
부모플로라 솔로몬
해럴드 솔로몬
배우자마거릿 앤더슨 (?–1972; 이혼)
수잔 붓 (1973–2005; 사망)
기타 정보
업적프라이드 오브 브리튼 어워드 평생 공로상 (2001년)

2. 생애

1961년 피터 베넨슨은 포르투갈에서 두 학생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옵서버 지의 기사를 접했다. 오랫동안 인권 운동에 참여해 온 베넨슨은 옵서버 지에 '양심수'라는 개념을 제창하며 "잊혀진 수감자"(The Forgotten Prisoners)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1961년 7월, 베넨슨을 포함한 7명은 룩셈부르크에서 국제앰네스티(AI)를 설립했다.[9]

1964년 이후 베넨슨은 건강 문제로 국제앰네스티 활동에서 멀어졌고, 1967년에는 탈퇴했다. 이후 다시 국제앰네스티 활동으로 복귀하지 않았다.[9]

2. 1. 어린 시절

러시아 혁명의 일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러시아인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나빠졌으며, 이로 인해 제정에 대한 반감은 높아졌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을 주도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재력가인 그리고리 베넨슨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피터가 태어났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피터 베넨슨은 러시아 혁명스페인 내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등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했다. 16세 때 스페인 내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돕기 위한 구호 기금을 설립하고,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학교 친구들과 모금활동을 하여 4000GBP를 모으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2. 1. 1. 가족 배경과 초기 경험

피터 베넨슨은 1921년 7월 13일 런던에서 플로라 솔로몬과 존 솔로몬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피터 제임스 헨리 솔로몬(Peter James Henry Solomon영어)이었다. 어머니 플로라 솔로몬은 러시아계 유대인이었으며, 열렬한 사회 운동가였다.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친구 사이였고, 러시아 수상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자선 사업 및 기타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기도 했다.[15] 할아버지 그리고리 베넨슨은 은행가이자[15] 석유 부호로, 러시아 제국 시절 크게 성공한 억만장자였다.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 등 셈족을 배척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러한 사회 속에서 그는 드물게 유대인으로서 성공한 경우였다. 베넨슨의 집안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를 떠났으며,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존 솔로몬과 결혼했다. 존은 나중에 정부 관리가 된 영국군 장교였다.[15] 플로라와 존은 곧 연애 관계에 들어섰고 이후 결혼하여 1921년 아들 베넨슨을 낳았다.

베넨슨은 매우 사려 깊은 아이였으나, 어릴 적 슬픈 일을 겪었다. 아버지 존이 말을 타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후에 휠체어를 타며 지내다 결국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베넨슨은 9세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베넨슨은 어머니 플로라의 손에서 자랐는데,[15] 이는 그의 인생에 크고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 덕택에 영국의 전통적인 상류 계급의 교육을 받았는데, 학교에 다니기 전 유명한 청년 시인인 W. H. 오든의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15] 그는 영국의 유명한 학교 이튼고등학교에서 공부했으며[15] 우수한 학업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15]

고등학생 때 불량한 학교 급식에 항의했다.[15] 보수적인 교장은 곧바로 어머니에게 경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베넨슨을 혁명가의 기질이 있다고 비난했다.[15]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의식이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베넨슨은 대가족을 이룬 유대인 가정에서 런던에서 태어났다.[4] 영국 태생인 해롤드 솔로몬과 러시아 태생인 플로라 베네손의 외아들이었으며, 피터 베넨슨은 후에 어머니의 처녀적 성을 사용하였다.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베넨슨이 아홉 살 때 장기간의 부상으로 사망하였고, 그는 W. H. 오든에게 사교육을 받은 후 이튼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열여섯 살 때, 그는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스페인 내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한 구호 기금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죽어가는 할아버지인 러시아의 금융가 그리고리 베넨손(1860~1939)의 유지를 따라 어머니의 처녀적 성인 베넨손을 사용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되었다. 그는 정보국의 정보부에서 복무하였으며, 거기서 첫 번째 아내인 마가렛 앤더슨을 만났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블레츨리 파크의 테스터리에서 근무했다. 그는 암호 해독가로서 41호실에 있는 RSM 베네손으로 기록되어 있다.[5]

2. 1. 2. 스페인 내전과 유대인 박해 경험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주도로 한 내전(스페인 내전)이 일어났으며,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16세 때 베넨슨은 이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시작으로 운동가가 되었다.[15] 프랑코군의 잔인함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친구들과 함께 정부군을 지지하는 학생 단체를 설립했으며 고아가 된 정부군의 아이들을 도왔다.[15] 그는 한 아이를 양자로 삼아서[15] 양육비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정치 활동이었다. 하지만 정부군은 패했고, 양자로 삼았던 아이와도 교류가 끊겼다.

한편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또 다른 운동을 시작했는데,[15] 이는 스페인에서 했던 운동보다 몇 배나 더 큰 규모였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모금활동을 하여 4000GBP를 활동자금으로 모았으며,[15] 유대인 어린이 두 명을 데려다가 교육받게 했다. 또한 영국 정부가 1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의 입국을 허락하자 이들을 돕는 일을 했다.[15] 이 무렵 그는 학교를 떠나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고,[15] 한편으로는 유대인 아이들에게 새 집을 주는 일을 하였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피터 베넨슨은 1921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플로라 솔로몬은 러시아계 유대인이자 사회 운동가였으며, 미국의 일러너 루즈벨트와 친구였다. 할아버지 그리고리 베넨슨은 러시아에서 성공한 억만장자 은행가이자 석유 부호였다.[15] 베넨슨의 집안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났다.[15]

베넨슨은 이튼고등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15] 고등학생 시절 학교 급식에 항의했다가 교장에게 혁명가 기질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사회의식을 격려했다.[15]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베넨슨은 16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정부군 아이들을 돕는 학생 단체를 설립하고 활동했다.[15]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자 유대인 어린이들을 돕는 모금 활동을 벌여 4천 파운드를 모금하고, 유대인 어린이 두 명을 교육시키기도 했다.[15] 또한 영국 정부가 1만 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의 입국을 허락하자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했다.[15]

1958년 그는 병이 들었고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같은 해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2. 2. 1. 암호 해독병 복무

1939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베넨슨은 영국 해군에 지원했으나 어머니가 러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대할 수 없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 1940년에 입대하여 정보부에서 암호 해독병으로 복무했다. 여기서 훗날 첫 번째 아내가 되는 마거릿 앤더슨을 만났다.[15] 1945년에 전쟁이 끝났으나, 연장자가 먼저 군을 떠난다는 규정 때문에 곧바로 제대할 수 없었다. 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2년 뒤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다.[15]

2. 2. 2. 변호사 활동과 노동당 입당

1946년 제대 후 베넨슨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하여 1950년 스트리텀 선거구와 1951년, 1955년, 1959년 히친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15] 그는 노동당 변호사 협회의 주 회원으로서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노동당과, 기타 보수당과 자유당의 이견차를 좁히고 함께 할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스페인 정부가 지하노조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영국 노조회의는 베넨슨에게 스페인에서 열릴 노동조합원 재판의 공식 참관인으로 참가해 줄 것을 부탁했다.[15] 그러나 그는 역할이 매우 제한된 단순 참관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다 해도 상황이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었고, 중요한 서류를 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노조회의를 설득하여 프랑코 정권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자 하였고, 얼마 후 일부 의원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는 곧 특별 위원회의 간사가 되었다.

그 후 노조회의는 스페인에서 유사 재판이 있을 시 그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 재판들은 공통적으로 피고에게 불리했으며, 베넨슨도 변호인 신분으로 법정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이에 그는 강력하게 항의했고 가까스로 맨 뒤에 서 있을 자격만 얻어냈다. 하지만 재판에서는 충격적이고 부당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어느 날 호텔의 판사를 찾아가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했다.[15] 이는 식사하고 있던[15] 판사에게 사레를 걸 정도로 분위기를 매우 심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튿날 판사는 재판에서 피고인들을 석방키로 함으로써,[15] 베넨슨은 또 다른 성과를 보였다.

이 무렵, 그는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하나는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분리 정책)에 반대한 156명이 반역죄로 기소되어 그들의 생사를 다룰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헝가리에서 소련 군대가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반공, 극우 정권이었는데 반해 헝가리는 극좌 및 공산주의를 내세운 정권이었지만, 오히려 좌익이 남아공에, 우익이 헝가리에 관심을 가졌다. 당장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느낀 베넨슨은 자신의 노동당 외에 자유당, 보수당 소속 변호사들을 설득시켰다. 그의 선배 변호사인 제럴드 가디너는 남아공으로, 본인은 헝가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후 그는 어디든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이름은 'JUSTICE'라 지어졌고, 훗날 국제 법률가 위원회의 영국 지부가 되었다. 1957년 그는 영국을 기반으로 한 인권 및 법 개혁 단체인 JUSTICE를 설립한 영국 변호사 그룹 중 한 명이었다.

2. 3. 국제앰네스티 창립

1960년대 초, 베넨슨은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런던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 외신란에서 두 명의 포르투갈 대학생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15]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의 독재 치하에 있었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이 사건은 베넨슨에게 깊은 분노와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그는 즉각 행동에 나설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옵서버 지에 "잊혀진 수감자들"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하여 이 사건을 널리 알리고, 정치적·종교적 신념 때문에 부당하게 투옥된 사람들을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제안했다.[15]

베넨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난민의 해" 운동이 수백만 명의 난민을 도운 것처럼, 독재 정권에 희생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1961년, 사면을 위한 호소"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곧 국제앰네스티 창립으로 이어졌다.

소련 군대가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베넨슨은 이 상황에 빠른 조처가 필요하다고 느껴, 이 곳을 찾아갔다. 그 후 그는 '정의'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베넨슨은 노동당 변호사 협회 주 회원으로서, 보수당자유당 소속 변호사들과 협력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직접 헝가리로 가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 국제 법률가 위원회의 영국 지부인 '정의'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1961년 5월 28일, 베넨슨의 기고문 "잊혀진 수감자들"이 옵서버 지에 실렸다. 이 기고문은 독자들에게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쓸 것을 촉구했고,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켜 1년 안에 10개국 이상에서 편지 쓰기 그룹이 결성되었다.[7][8]

1961년 7월, 베넨슨과 6명의 동료들은 런던에서 국제앰네스티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7][8] 이들은 세계 각국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1년 단위의 체계적인 운동을 계획했고, 루이스 블롬 쿠퍼와 같은 변호사, 피터 아처와 같은 의원 등 저명인사들을 영입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베넨슨은 개인적인 명성보다는 조직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의 열정과 리더십은 국제앰네스티가 초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인권 단체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3. 1. '잊혀진 수감자들' 기고

1960년, 베넨슨은 런던 지하철에서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 외신란에 실린 포르투갈 관련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15]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의 독재 정권 하에 있었기에, 민주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도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포르투갈을 지배하였다.
이 사건에 분노한 베넨슨은 즉각적인 항의 대신, 성 마틴 인 더 필드 교회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결국 옵서버에 "잊혀진 죄수"라는 의견 광고를 싣게 되었다.[15]

베넨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난민의 해' 운동이 난민 지원에 큰 역할을 한 것을 기억하며, 독재 정권 희생자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했다. 친구들과의 논의 끝에 '1961, 사면을 위한 호소'라는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국제앰네스티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옵서버의 편집장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에게 편지를 보냈고, 1961년 5월 28일, "잊혀진 수감자들(The Forgotten Prisoners)" 기사가 발표되었다. 이 기사에서 베넨슨은 정치적, 종교적 신념으로 투옥된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쓸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했다. 이러한 편지 쓰기 캠페인은 국제앰네스티 설립으로 이어졌고,[7][8] 1년 안에 10개국 이상에서 편지 쓰기 그룹이 결성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베넨슨은 "잊혀진 수감자" 기고에서 '양심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2. 3. 2. 국제앰네스티 설립과 초기 활동

1960년 베넨슨은 런던 지하철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카페에서 두 대학생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의 기사를 접했다.[15]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 독재 정권 하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넨슨은 이에 분노하여 옵서버에 "잊혀진 죄수"라는 의견광고를 싣고,[15] 이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를 조직하는 계기가 된다.[15]

베넨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세계 난민의 해' 국제 운동이 수백만 난민들의 집을 찾아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을 도울 방법을 구상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논의를 통해 '1961, 사면을 위한 호소'라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곧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로 이어진다.

국제사면위원회가 발매한 우표


베넨슨과 동료들은 세계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1년 단위의 체계적인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고, 1961년 5월 28일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루이스 블롬 쿠퍼와 같은 변호사, 피터 아처와 같은 의원 등 저명인사들을 포함하여 운동을 펼쳤다. 베넨슨은 겸손한 성격으로 개인적인 칭찬이나 인기는 피했지만, 뛰어난 열정과 용기, 사람들을 모으는 재능,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초창기 국제사면위원회는 작은 규모였으나, 점차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여 독재 정권에 더 빠르고 강력한 압력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폭력 원칙에 따라 폭력을 사용한 정치범들을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넬슨 만델라와 같은 일부 양심수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한계도 있었다.

베넨슨은 포르투갈의 두 학생이 살라자르 정권 당시 반란죄로 투옥되었다는 신문 보도에 분노하여 ''옵서버(The Observer)''의 편집장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에게 편지를 썼다. 1961년 5월 28일, 베넨손의 "잊혀진 수감자들(The Forgotten Prisoners)" 기사가 발표되었고, 독자들에게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지지하는 편지를 쓸 것을 요청했다. 1961년 7월 런던에서 베넨손과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 국회의원을 포함한 6명이 만나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를 설립했다.[7][8] 1년 안에 10개국 이상에서 편지 쓰기 그룹이 결성될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다. 베넨슨은 런던에서 포르투갈 학생 두 명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보도를 접하고, 옵서버에 "잊혀진 수감자"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여 '양심수' 개념을 제창했다. 이후 1961년 7월 룩셈부르크에서 베넨손 등 7명이 국제앰네스티를 설립했다.

그러나 1964년 이후 베넨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국제앰네스티 활동에서 멀어졌고, 1967년에는 탈퇴했다. 이후 다시 국제앰네스티 활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 4. 국제앰네스티 활동과 사임

1961년 피터 베넨슨은 포르투갈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선고받은 두 학생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옵서버 지에 "잊혀진 수감자"(The Forgotten Prisoners)라는 글을 기고하여 '양심수'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이후 룩셈부르크에서 베넨슨 등 7명이 국제앰네스티(AI)를 설립했다.[9]

베넨슨은 세계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체계적인 운동을 계획했고, 1961년 5월 28일에 첫 활동을 시작했다. 루이스 블롬 쿠퍼, 피터 아처 등 영국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베넨슨은 겸손했지만, 열정과 용기, 사람들을 모으는 재능, 아이디어 창출 능력으로 운동을 이끌었다. 국제앰네스티는 초창기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점차 성장하여 세계적인 단체가 되었다. 조직망과 지지 세력 확대로 독재 정권에 더 빠르고 강력한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9]

하지만 국제앰네스티는 비폭력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기에,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정치범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2. 4. 1. 넬슨 만델라 사면 문제

국제사면위원회는 비폭력 원칙에 따라 폭력을 사용한 정치범을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양심수가 희망을 얻지 못했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야당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는 폭력적인 반독재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사면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9]

2. 4. 2. 건강 악화와 내부 갈등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이 커지면서 베넨슨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제 문제와 내부 문제 간의 갈등으로 동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베넨슨은 심한 위통과 두통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국제사면위원회를 이끌면서 느낀 긴장감과 압박감으로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9]

1964년 건강 악화로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에서 사임했고, 1967년 3월에는 국제사면위원회의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다. 이후 그의 친구였던 에릭 베이커가 위원회 운영권을 이어받았다. 베넨슨의 병은 음식물 알레르기로 밝혀졌고, 그는 농장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일을 계속했지만, 중심에서 활동하지는 않고 연설을 하거나 회원들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정도였다. 또한 복강염 환자들을 위한 모임을 만드는 등 인권 외의 활동도 했다.[9]

1966년 내부 위기를 겪었다. 이후 국제 집행위원회 회장이라는 자문직이 신설되었으나, 아덴 비상사태 당시 고문 관련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자, 그는 영국 정부가 국제앰네스티 운영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1967년 덴마크 엘시노어에서 조사 결과 그의 주장은 기각되었고, 베넨슨은 국제앰네스티에서 사퇴했다.[9]

이후 국제앰네스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넨슨은 션 맥브라이드를 포함한 다른 임원들과 개인적으로 화해했다.[9]

2. 5. 사임 이후 활동과 사망

1967년 3월, 베넨슨은 국제앰네스티의 일상 업무 및 공직에서 사퇴했다. 사퇴 후 위원회 운영권은 베넨슨의 친구였던 에릭 베이커가 계승했다. 후에 그의 병은 치료 가능한 음식물 알레르기로 판명되었으며, 이후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초창기보다 한가하게 국제앰네스티의 일을 계속했고, 위원회의 중심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위한 연설을 하고, 회원들에게서 온 편지에 답장을 보내곤 했다.[12] 또한 자신들과 관련이 없더라도 필요한 일이면 즉각 운동을 벌였다. 꼭 인권은 아니더라도, 복강염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해당 병의 증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의사들에게 연구를 하라고 했다.

베넨슨은 2005년 2월 25일 옥스퍼드의 존 라드클리프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으며, 인근 누넘험 쿠르트니 마을에 거주하다가 그곳에 매장되었다.[12]

3. 저서


  • 1961년의 박해

참조

[1] 웹사이트 Peter Benenson https://web.archive.[...] benensonsociety.org 2013-02-17
[2] 서적 Activists (20th century lives) https://books.google[...] The Rosen Publishing Group
[3] 웹사이트 Lifetime Achievement, Peter Benenson, Founder of Amnesty International https://archive.toda[...] Pride of Britain Awards
[4] 웹사이트 Peter Benenson hero file https://web.archive.[...] Moreorless : Heroes and killers of the 20th century
[5] 서적 COLOSSUS Oxford University Press
[6] 뉴스 The "Toast to Freedom" That Led to Amnesty International https://www.huffingt[...] 2011-09-22
[7] 뉴스 Amnesty International marks 50 years of fighting for free speech https://www.theguard[...] 2012-05-29
[8] 간행물 Amnesty International Routledge
[9] 서적 Diplomacy of Conscience: Amnesty International and Changing Human Rights Norms Princeton UP
[10] 웹사이트 Peter Benenson https://web.archive.[...] benensonsociety.org 2013-02-17
[11] 서적 Activists (20th century lives) https://books.google[...] The Rosen Publishing Group
[12] 뉴스 Peter Benenson, Founder of Amnesty Group, Dies at 83 https://www.nytimes.[...] 2005-02-28
[13] 웹인용 Peter Benenson http://www.benensons[...] benensonsociety.org 2014-12-10
[14] 서적 Activists (20th century lives) http://books.google.[...]
[15] 웹인용 Document - Peter Benenson: Biography http://www.amnesty.o[...]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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