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치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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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치 케네디는 1919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방송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이후 탐사 저널리스트와 BBC, ITV 등에서 뉴스 앵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사법 오심 사건에 대한 책을 저술하며, 무신론, 안락사 합법화 등 사회 운동에도 참여했다. 1994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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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치 케네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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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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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도빅 헨리 커벌리 케네디 |
출생 | 1919년 11월 3일 |
출생지 |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
사망 | 2009년 10월 18일 |
사망지 | 솔즈베리, 윌트셔, 잉글랜드 |
직업 | 언론인 방송인 정치 활동가 작가 |
배우자 | 모이라 시어러 (1950년 결혼, 2006년 사별) |
자녀 | 4명 |
학력 | |
모교 |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
정당 | |
소속 정당 | 자유당 (1988년 이전) 자유민주당 (1988년–2001년; 2001년 이후) |
기타 소속 | 무소속 (2001년) |
서훈 | |
작위 | 기사 |
펠로우십 | 왕립 문학 협회 회원 |
2. 생애
루도비치 케네디는 1919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여한 경험을 훗날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2]
전쟁 후 옥스퍼드로 돌아가 학업을 마친 뒤, 탐사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BBC와 ITV 등에서 뉴스 진행자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는 사법 오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며, 관련 저술과 방송 활동을 통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티모시 에반스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그의 사후 사면에 기여했고, 이는 영국 사형제 폐지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무신론자로서 인본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안락사 합법화를 주장하는 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50년 배우 모이라 시어러와 결혼하여 오랜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9] 2009년 89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케네디는 1919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해군 장교인 에드워드 케네디였고, 어머니는 로잘린드 그랜트였다. 로잘린드는 제11대 준남작 루도빅 그랜트 경의 딸이었으며, 보수당 정치인 로버트 부스비(훗날 부스비 남작)의 사촌이었다. 케네디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 모라와 캐서린이 있었다. 모라는 1954년 극작가 로이스 라이튼과 결혼했고, 캐서린은 1947년 이온 칼보코레시 소령과 결혼했다. 케네디는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받았으며, 그곳에서 험프리 리틀턴과 함께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1년간 공부했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에는 불링던 클럽의 회원이었다.[1]케네디의 아버지 에드워드 케네디는 당시 60세의 은퇴한 대령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으로 복귀했다. 그는 급하게 군용으로 개조된 P&O 소속의 대양 정기선 HMS Rawalpindi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배는 무장 상선 순양함으로 개조되어 북대서양의 북부 순찰 임무에 투입되었다. 1939년 11월 23일, 아이슬란드 남동쪽 해역을 순찰하던 중, ''Rawalpindi''호는 독일 해군의 강력한 전함인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와 마주쳤다. 이 독일 전함들은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의 GIUK 갭을 돌파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던 중이었다. ''Rawalpindi''호는 즉시 독일 함대의 위치를 본부에 보고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케네디 함장은 독일 측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교전을 선택했다. 결국 ''Rawalpindi''호는 ''샤른호르스트''의 공격으로 침몰했고, 에드워드 케네디 함장을 포함한 승무원 312명 중 275명이 전사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사후 군사 특보(Mentioned in Despatches)에 이름이 올랐으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싸우기로 한 그의 결단은 영국 해군의 귀감이 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케네디 대령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 해군에 복귀하여 무장 상선 순양함으로 개조된 HMS 라왈핀디의 지휘를 맡았다. 1939년 11월 23일, 아이슬란드 남동쪽 해역에서 순찰 임무 중이던 라왈핀디호는 독일의 강력한 소형 전함(또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와 마주쳤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케네디 대령은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선택했다. 격전 끝에 라왈핀디호는 샤른호르스트에 의해 격침되었고, 에드워드 케네디 대령을 포함한 275명의 승조원이 전사했다. 그의 용감한 결정은 영국 해군 내에서 귀감이 되었다.루도비치 케네디는 아버지를 따라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주로 북해에서 구축함 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승선했던 HMS 타르타르는 덴마크 해협 해전 이후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는 임무에 참여했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화염에 휩싸이고 승조원들이 배를 버리기 시작하는 마지막 전투를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HMS 타르타르는 연료 부족 문제로 비스마르크가 최종적으로 침몰하는 순간을 보지 못하고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케네디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4년,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침몰 과정을 상세히 다룬 책 《추격》(''Pursuit'')을 출간했다.[2]
2. 3. 언론 및 방송 활동
전쟁이 끝난 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로 돌아가 영문학 학위를 마쳤고, 학생 신문인 ''아이시스 매거진''(The Isis Magazine)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옥스퍼드에서는 작가 클럽을 공동 설립했으며 넬슨 제독의 부하들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3]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탐사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시작했다.케네디는 ''뉴스위크''(Newsweek)를 포함한 여러 출판물에 글을 기고했다. 1953년부터는 BBC 제3 프로그램에서 라디오 시리즈 ''퍼스트 리딩''(First Reading)을 편집하고 소개하며 킹슬리 에이미스, 필립 라킨과 같은 젊은 작가들을 대중에게 알렸다. 이후 텔레비전 분야로 진출하여 ITV의 독립 텔레비전 뉴스에서 로빈 데이, 크리스토퍼 채터웨이와 함께 뉴스 리더로 활동했다. 또한 BBC의 대표적인 시사 프로그램 ''파노라마''의 진행자를 여러 해 동안 맡았다.
그는 사법적 오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와 관련된 여러 사건에 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통해 알렸다. 1957년에는 ''스코틀랜드 야드'' 지원 영화 시리즈의 에피소드 ''외로운 집''에 뉴스 리더 역할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4]
케네디는 해전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상사에 관한 다수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BBC에서 직접 쓰고 진행했다. 스카파 플로우를 시작으로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비스마르크 침몰 작전의 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외에도 U보트 전쟁, HMS 벨파스트 이야기, 디에프 강습, 생나제르 강습 등을 주제로 삼았다. 1971년작 ''샤른호르스트의 생과 사'' 제작 과정에서는 아버지의 배 ''라왈핀디''를 침몰시킨 독일 전함 ''샤른호르스트''의 생존자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독일 전함 ''티르피츠''를 침몰시키려는 특별한 시도들을 다룬 ''표적 티르피츠''(1973)도 포함되었으며, 이 중 두 편은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1980년에는 BBC 텔레비전 시리즈 ''세계의 위대한 철도 여행''의 한 에피소드를 맡아 미국을 횡단하는 여정을 소개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는 텔레비전 리뷰 프로그램 ''보셨습니까...?''(Did You See...?)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조각난 삶''에서 피터 쿡이 연기한 캐릭터 아서 스트리브-그리블링 경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정치 코미디 시리즈 ''예스 미니스터''의 여러 에피소드에 본인 역할로 출연했으며, 극중 짐 해커(폴 에딩턴 분)에게 종종 "루도"라는 애칭으로 불렸다.[5][6] 2002년에는 ''그게 생각나네''(시리즈 4, 에피소드 1)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7]
한편, 케네디는 다른 언론인에게 텔레비전에 흑인이 너무 많다는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8] 풍자 잡지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는 때때로 그를 '터무니없는 케네디'(Ludicrous Kennedy)라고 불렀다. BBC의 장수 시트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에서는 주인공 알프 가넷이 BBC 인물들을 비난하며 그를 "러시아 믹"(아일랜드인을 비하하는 용어인 '믹'을 사용)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2. 4. 사법 오심과의 투쟁
그는 영국 사법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여러 사건들의 유죄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가 조사한 최초의 사법 오심 중 하나는 1961년 저서 ''10 릴링턴 플레이스''에서 다룬 티모시 에반스의 유죄 판결과 교수형이었다. 에반스는 1950년 자신의 갓난 딸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케네디는 에반스가 무죄이며 그의 아내와 아기의 살인은 연쇄 살인범 존 크리스티가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에반스가 교수형을 당한 지 3년 후, 크리스티의 집이었던 텐 릴링턴 플레이스에서 6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크리스티 역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시신들은 에반스의 소행으로 볼 수 없었으며, 특히 두 구의 유골은 에반스 가족이 이사 오기 훨씬 전인 전쟁 시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케네디 등의 오랜 캠페인 끝에 에반스는 1966년 사후 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 사형제 폐지 논의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0년 케네디의 책은 리처드 애튼버러, 존 허트 등이 출연한 영화 ''10 릴링턴 플레이스''로 제작되기도 했다.1985년, 케네디는 ''비행사와 목수''를 출판하여 찰스 린드버그 아들 납치 및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1936년 사형된 리처드 하우프트만 역시 무죄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책은 1996년 스티븐 레아와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출연한 HBO 영화 ''세기의 범죄''로 각색되었다.
1990년에는 사법 오심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텔레비전 제작 회사인 ''저스트 텔레비전''의 자문 위원회 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2003년에 출간한 ''36건의 살인과 2건의 부도덕한 수입''에서는 앞서 언급한 에반스 사건을 비롯해 데릭 벤틀리 사건, 버밍엄 식스 사건 등 여러 유명 사건들을 다시 조명했으며, 이 중 다수는 경찰의 수사 실패, 경찰 비위 또는 위증 주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과 미국의 소송 중심주의 사법 제도가 "경찰에게 위증을 저지를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은 종종 그렇게 한다"고 결론 내리고, 규문주의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2. 5. 사회 운동
1958년, 케네디는 당시 보수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웬트워스 스코필드의 사망(1957년 12월)으로 인해 치러진 로치데일 보궐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의회 진출을 시도했다. 그는 노동당 후보 잭 맥칸에게 패배했지만, 자유당의 득표율을 이전보다 끌어올리며 보수당 후보를 3위로 밀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로치데일 보궐선거는 영국 보궐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 방송사인 그라나다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이듬해인 1959년 총선에서도 그는 로치데일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여 보궐선거 때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노동당 후보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케네디는 글쓰기와 사법 오심 문제에 대한 활동 외에도 여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평생 무신론자였던 그는 1999년 All in the Mind: A Farewell to God|마음속의 모든 것: 신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eng라는 책을 출판하여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비판과 그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문제점들을 논했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 협회의 저명한 후원자였으며, New Humanist 잡지에 글을 기고했고, 전국 세속주의 협회의 명예 준회원이자 스코틀랜드 인본주의 협회의 저명한 후원자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안락사 합법화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자발적 안락사 협회(Voluntary Euthanasia Society)의 공동 창립자이자 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저서 Euthanasia: The Case for the Good Death|안락사: 좋은 죽음을 위한 변론eng은 1990년에 출간되었다.
케네디는 2001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했는데, 이는 당시 당 대표였던 찰스 케네디(루도비치 케네디와 친척 관계는 아님)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자발적 안락사 옹호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2001년 총선에서 윌트셔의 데바이시스 선거구에 자발적 안락사 합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이 선거에서 2%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이후 자유민주당에 다시 복당했다.
2. 6. 결혼
1950년 2월 그는 무용가이자 배우인 모이라 시어러와 햄프턴 궁전 로열 채플에서 결혼했다. 그는 1949년 친구의 권유로 런던의 리시움 무도회장에서 열린 가장 무도회에 초대권을 받아 가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영화 ''붉은 구두''로 막 유명해진 시어러는 그 행사에서 상품을 수여하고 있었고, 케네디는 나중에 "그녀를 보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용기를 내어 그는 당시 23세였던 시어러에게 다가가 함께 춤을 추자고 청했다. 그녀는 "저는 춤을 잘 추지 못해요"라고 말하면서도 기꺼이 응했다. 케네디는 그녀가 능숙한 볼룸 댄서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2006년 1월 31일 시어러가 8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슬하에 아들 한 명과 딸 세 명을 두었다.[9]
2. 7. 서거
케네디는 2009년 10월 18일 영국 윌트셔주 솔즈베리의 한 요양원에서 폐렴으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저술 활동
루도비치 케네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구축함 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탔던 군함 HMS 타르타르는 덴마크 해협 해전 이후 비스마르크를 추격한 함선 중 하나였다. 케네디는 비스마르크가 불타고 승무원들이 배를 버리는 마지막 전투를 목격했으나, 연료 부족으로 타르타르 함은 비스마르크가 침몰하기 전에 귀항해야 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4년 비스마르크의 추격과 침몰 과정을 기록한 책 《추격》(Pursuit: The Chase and Sinking of the "Bismarck", ISBN 978-0-304-35526-6)을 저술했다. 이 책은 비스마르크의 활약, 영국 순양전함 후드 격침, 그리고 영국 해군에 의한 격침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2]
케네디는 영국 사법 역사상 주목할 만한 여러 사건들의 유죄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들을 썼다. 그가 처음으로 다룬 사법 오심 사례 중 하나는 1961년 저서 ''텐 릴링턴 플레이스''(Ten Rillington Place, ISBN 978-0-586-03428-6)에서 다룬 티모시 에반스의 유죄 판결과 교수형이었다. 에반스는 1950년 자신의 갓난 딸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케네디는 에반스가 무죄이며, 그의 아내와 아기의 살인은 연쇄 살인범 존 크리스티가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에반스가 교수형 당한 지 3년 후, 텐 릴링턴 플레이스에서 6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고, 이 시신들은 에반스의 소행으로 볼 수 없었다. 특히 집에서 발견된 두 구의 유골은 에반스 가족이 이사 오기 훨씬 전인 전쟁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오랜 노력 끝에 에반스는 1966년 사후 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은 영국 사형 폐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케네디의 책은 1970년 리처드 애튼버러가 크리스티 역, 존 허트가 에반스 역, 주디 지슨이 베릴 에반스 역, 패트 헤이우드가 에텔 크리스티 역을 맡아 영화 ''10 릴링턴 플레이스''로 제작되었다.
1985년에는 ''비행사와 목수''(The Airman and the Carpenter, ISBN 978-0-670-80606-5)를 출판하여, 찰스 린드버그의 아기를 납치하고 살해한 혐의로 1936년 처형된 리처드 하우프트만이 실제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책은 1996년 스티븐 레아와 이자벨라 로셀리니 주연의 HBO 영화 ''세기의 범죄''(Crime of the Century)로 제작되었다.
1990년, 케네디는 사법 오심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텔레비전 제작 회사인 저스트 텔레비전(Just Television)의 자문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2003년에는 ''36건의 살인과 2건의 부도덕한 수입''(36 Murders and 2 Immoral Earnings, ISBN 978-1-86197-457-0)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에반스 사건, 데릭 벤틀리 사건, 버밍엄 식스 사건 등 여러 유명 사건들을 분석하며, 이들 사건 다수가 경찰의 수사 실패, 경찰 비위, 또는 위증 주장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의 소송 중심주의 사법 제도가 "경찰에게 위증할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은 종종 그렇게 한다"고 비판하며, 규문주의 사법 제도를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케네디는 이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출판 연도 | 제목 | ISBN |
---|---|---|
1942 | 부소위: 해상에서의 전쟁에 대한 개인 기록 (Sub-Lieutenant: A Personal Record of the War at Sea) | |
1951 | 넬슨의 형제들 (Nelson Band of Brothers) (미국판 넬슨의 선장들'(Nelsons Captains), 1952) | |
1975 | 넬슨과 그의 선장들 (Nelson and His Captains) (개정판) | ISBN 0-00-211569-7 (2001년 재인쇄 ISBN 9780141390901) |
1953 | 어떤 사람의 고기 (One Man's Meat) | |
1954 | 살인 이야기 (Murder Story) | |
1964 | 스티븐 워드의 재판 (The Trial of Stephen Ward) | ISBN 978-0-575-01035-2 |
1969 |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들; 해외에 사는 일부 미국인에 대한 개인적인 시선 (Very Lovely People; A Personal Look at Some Americans Living Abroad) | ISBN 978-0-671-20205-7 |
1976 | 무죄 추정: 패트릭 미한의 놀라운 사건 (Presumption of Innocence: The Amazing Case of Patrick Meehan) | ISBN 978-0-575-02072-6 |
1979 | 티르피츠의 죽음 (The Death of the Tirpitz) (또는 위협 – 티르피츠의 삶과 죽음 (Menace – The Life and Death of the Tirpitz)) | ISBN 978-0-316-48905-8 |
1980 |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함: 루턴 살인 사건 (Wicked Beyond Belief: The Luton Murder Case) | ISBN 978-0-586-05172-6 |
1990 | 클럽으로 가는 길 (On My Way to the Club) (자서전) | ISBN 0-00-637079-9 |
1990 | 안락사: 좋은 죽음을 위한 사례 (Euthanasia: The Case for the Good Death) | ISBN 978-0-7011-3639-0 |
1992 | 진실을 말하다: 루도비치 케네디의 저작 모음 (Truth to Tell: Collected Writings of Ludovic Kennedy) | ISBN 978-0-552-99505-4 |
1995 | 코끼리와 함께 침대에: 스코틀랜드에 대한 개인적인 시각 (In Bed with an Elephant: A Personal View of Scotland) | ISBN 978-0-593-02326-6 |
1999 | 모두 마음에: 신에게 작별을 고함 (All in the Mind: A Farewell To God) (기독교 비판) | ISBN 978-0-340-68063-6 |
4. 서훈
1985년 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존 메이저 정부의 추천으로 언론 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 여왕 생일 서훈 명단에서 Knight Bachelor 서임을 받았다.[11] 이전 마거릿 대처 정부에서는 그의 기사 작위 서임을 거부한 바 있다.
참조
[1]
뉴스
Ludovic Kennedy, veteran presenter and campaigner, dies at 89
https://www.theguard[...]
2009-10-19
[2]
서적
Pursuit: The Chase and Sinking of the "Bismarck"
Orion Publishing Group, Limited
[3]
웹사이트
Sir Ludovic Kennedy: Writer and broadcaster who devoted much of his career to exposing miscarriages of justice
https://www.independ[...]
2013-08-03
[4]
Citation
The Lonely House (Short 1957) ⭐ 7.2 {{!}} Crime, Short
https://www.imdb.com[...]
2023-08-22
[5]
웹사이트
Yes, Minister: 'The Challenge' episode summary
http://www.tv.com/ye[...]
2010-11-30
[6]
웹사이트
Yes, Prime Minister: 'The Tangled Web' episode summary
http://www.tv.com/ye[...]
2010-11-30
[7]
웹사이트
That Reminds Me: A Titles & Air Dates Guide
http://epguides.com/[...]
2010-11-30
[8]
뉴스
Too Many Blacks on TV, says Ludovic Kennedy
https://www.theguard[...]
2018-10-22
[9]
뉴스
Obituar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4-10-11
[10]
뉴스
Sir Ludovic Kennedy
http://www.telegraph[...]
Daily Telegraph
2009-10-19
[11]
간행물
https://www.thegazet[...]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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