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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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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나우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1813년 10월 30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프랑크푸르트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바이에른군과 벌인 전투이다. 바이에른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퇴각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퇴각로를 확보했다. 전투 결과, 연합군 측은 9,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프랑스군도 피해를 입었지만 퇴각에 성공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바이에른의 동맹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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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명칭하나우 전투
일부나폴레옹 전쟁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독일 전역
오라스 베르네의 하나우 전투 그림, 1824년
오라스 베르네의 "하나우 전투" (1824년)
날짜1813년 10월 30일 ~ 31일
장소헤센 하나우
결과프랑스의 승리
교전 세력1프랑스 제국
교전 세력2바이에른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지휘관1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지휘관2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카를 폰 브레데
병력117,000 ~ 30,000명
병력243,000명
사상자14,500 ~ 5,000명 사망 및 부상
사상자26,000명 사망 및 부상
4,000명 포로
독일 전역 (1813년) 관련 전투 목록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관련 전투 목록

2. 배경

나폴레옹 전쟁 중 가장 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던 라이프치히 전투는 1813년 10월 16일부터 3일 동안 격전이 벌어졌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중앙 독일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급히 후퇴해야 했다. 그의 전략은 라인강 연안에서 가용한 모든 병력을 재집결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이미 타격을 입은 자신의 군대가 우세한 병력과 다시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퇴각을 매우 신속하게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동맹군도 라이프치히에서 큰 피해를 입어 효과적인 추격을 할 수 없었다. 군사 행동은 부차적인 후위 부대 행동에 국한되었고, 나폴레옹은 10월 23일 에르푸르트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10월 26일, 그는 여러 군단에 아이제나흐풀다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마인츠였다.[2]

바이에른 왕국은 리드 조약을 통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3] 이로써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가 이끄는 45,000~50,000명 규모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군대가 나폴레옹의 후방으로 이동하여 프랑코니아의 뷔르츠부르크를 점령, 프랑스의 군사적 지위를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2] 뷔르츠부르크의 소규모 프랑스 수비대는 저항하지 않고 지역 성채에 바리케이드를 쳤고, 적군은 싸움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브레데는 뷔르츠부르크에서 나폴레옹의 주요 퇴각 경로인 하나우로 이동했다.[2] 10월 28일, 브레데의 선봉대는 하나우를 점령하여 나폴레옹의 프랑크푸르트행 경로를 차단했다. 브레데는 프랑스군 주력이 코블렌츠로 가는 북쪽 길을 따라 퇴각하여 20,000명의 병력과 마주할 것으로 예상했다.[3] 그는 나폴레옹의 패배에 주요 역할을 하길 희망했으나, 프랑스군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그의 믿음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 프랑스군은 주 동맹군인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프랑스군과 거리가 멀었고 긴밀한 접촉도 없었다.[2]

2. 1. 라이프치히 전투와 나폴레옹의 퇴각

나폴레옹 전쟁 중 가장 크고 치열했던 라이프치히 전투는 1813년 10월 16일에 시작되어 3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패배하여 동맹군에게 중앙 독일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급히 후퇴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통신망이 짧아지고 후방의 위협이 덜 할 라인강 연안에서 가용한 모든 병력을 재집결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이미 타격을 입은 자신의 군대가 우세한 병력과 다시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퇴각을 매우 신속하게 수행하라고 명령했다.[2]

동맹군 역시 라이프치히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추격을 시작할 여력이 없었다. 군사 행동이 부차적인 후위 부대 행동에 국한되면서 나폴레옹은 10월 23일 에르푸르트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10월 26일, 그는 여러 군단에 명령을 내려 아이제나흐풀다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지정된 목적지는 라인강변에 있는 마인츠였다.

2. 2. 바이에른의 배신과 연합군의 전략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 바이에른 왕국은 리드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였다.[2] 이로 인해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장군이 이끄는 45,000~50,000명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브레데는 프랑코니아의 뷔르츠부르크를 점령하고 하나우로 진군하여 나폴레옹의 퇴로를 막으려 했다. 브레데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코블렌츠 방면으로 퇴각할 것으로 예상하여 자신이 상대할 병력을 20,000명 정도로 과소평가하였다.[2]

3. 전투 서열

하나우 전투 전투 서열 문서에서 하나우 전투의 전투 서열을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3. 1. 연합군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장군이 지휘한 하나우 전투 당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되었으며, 42,000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다. 이들은 보병 33,000명, 기병 9,000명, 그리고 94문의 포를 갖추고 있었다.[1]

오스트리아 군단은 프레즈네트 남작 야전사령관의 지휘 아래 보병 18,000명(18개 대대), 기병 6,000명(32개 기병대), 그리고 34문의 포를 포함하여 24,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오스트리아 군단은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제1사단은 바흐 장군, 제2사단은 트라우텐베르크 장군, 제3사단은 스플레니 장군(기병 및 예비 포병)이 지휘했다.

브레데 장군이 직접 지휘한 바이에른 군단은 보병 15,000명(17개 대대), 기병 3,000명(20개 기병대), 그리고 60문의 포를 포함하여 1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바이에른 군단은 2개 사단, 1개의 기병 예비대, 그리고 1개의 포병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제2사단은 베커스 장군, 제3사단은 라모트 장군이 지휘했으며, 3개 여단으로 구성된 기병 예비대는 비에레그, 엘브라흐트, 디에츠 장군이, 포병 예비대는 콜로뉴 장군이 지휘했다.[2]

3. 2. 프랑스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 대육군(Grande Armée)은 이전 전력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직접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병력은 40,000명에서 50,000명 사이였지만, 실제 전투 투입 가능 병력은 30,0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제2, 제5, 제11 군단, 제1, 제2 기병 예비 군단, 황제 근위대로 구성되었다. 근위대를 제외한 프랑스 대대 다수는 100명으로 구성되었고, 기병대는 더 적은 규모였다.[3]

실제 전투에는 원수 클로드 빅토르 페랭의 제2군단 소속 장 루이 드브레통 장군의 15개 대대와 자크 맥도날드 원수의 제11군단 소속 앙리-프랑수아-마리 샤르팡티에 장군의 11개 대대, 총 7,000~8,000명 정도가 투입되었다. 기병 지원은 세바스티아니의 제2 기병 군단(약 3,000기), 에티엔 드 난수티의 황제 근위 기병대(약 4,000기)가 맡았다. 약 6,000명과 52문 대포의 황제 근위대 보병과 포병도 투입되었다. 나폴레옹은 하나우 전투에서 총 약 20,000명(40개 대대, 113개 기병대)을 지휘했다.[3]

4. 전투 경과

10월 29일, 프레데는 혼란에 빠진 프랑스군의 퇴각을 막기에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결심했다. 그는 방어에 유리한 좁고 깊은 종대로 병력을 배치했다. 프레데의 좌익은 프랑스군의 주요 퇴각로인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로 가는 길을 방어했다. 병력 대부분은 킨치히 강을 따라 배치되었고, 우익의 일부는 강 남쪽에 위치했다. 최우익에는 바이에른 부대가 배치되었고, 오스트리아군 일부와 산병들이 람보이 숲에 전진 배치되었다. 기병은 중앙에, 포병은 전장에 고르게 분산되었다.[3]

바이에른 보병이 킨치히 다리를 건너고 있다.


한편, 나폴레옹은 이젠부르크 성에서 밤을 보내며 연합군의 저항 의지를 확인했다. 그는 장-투생 아리이 드 카사노바의 기병 군단에게 군대의 짐과 보급 열차를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프레데에게 정면 공격을 가하도록 했다. 빅토르는 킨치히 강을 따라 좌익을 형성하고, 마크도날 군단과 근위대는 람보이 숲을 돌파하도록 했다. 샤를르 르페브르-데노에트 휘하의 근위 기병 일부는 측면 방어를 위해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레데가 군대 대부분을 강 뒤에 배치하여 퇴각 시 불리하다는 약점을 파악하고, "내가 프레데를 백작으로 만들었지만 그를 장군으로 만드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라고 비꼬았다. 하지만 이 약점을 이용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열세의 병력으로 프레데를 격파해야 했다.[3]

하나우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에서 프랑스 근위 기병척탄병의 바이에른 왕국 셰보 레제에 대한 돌격.


기병 돌격 후의 붉은 란서.


10월 30일, 브레데는 중앙 부대를 킨치히 강 뒤에, 우익 부대는 고립된 위치에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상드르 마크도날의 보병과 세바스티아니의 기병대를 포함한 17,000명의 병력으로 연합군 좌익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3] 숲 때문에 프랑스군은 연합군에 근접할 수 있었다.[3] 정오까지 빅토르와 마크도날은 숲을 정리했고, 앙투안 드루오는 포병을 움직일 길을 찾았다. 3시간 후 구 근위대 척탄병이 숲을 정리하고, 드루오는 근위대와 세바스티아니 기병대의 지원을 받아 50문의 대포를 배치했다.[3]

드루오의 포격으로 브레데의 포병 28문이 침묵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브레데 좌익 기병대를 격파하고 중앙 측면을 공격했다. 브레데의 중앙 부대는 킨치히 강둑으로 밀려나며 큰 피해를 입었다. 우익 부대는 중앙을 지원하려 했지만, 많은 병력이 익사했다.[3]

브레데는 람보이 다리에서 하나우 시까지 방어선을 형성했고, 밤중에 하나우를 포기했다. 프랑스군은 10월 31일 하나우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추격 대신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퇴각로를 확보했다.

4. 1. 브레데의 배치와 나폴레옹의 전략

브레데는 프랑스 군을 상대로 소규모 교전을 벌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앞에 있는 20,000명의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다. 10월 30일 브레데는 중앙을 킨치히 강 뒤편에 배치하고, 우익은 남쪽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고립되어 있어 본대와는 오직 하나의 다리로만 연결되어 있었다.[3] 브레데가 있는 곳에서 동쪽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들키지 않은 채로 진군하여 연합군 진영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3] 나폴레옹은 운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연합군의 좌측을 공격했다. 정오쯤 빅토르 원수와 마크도날 원수가 연합군의 중앙 바로 앞에 있는 숲을 제압하였다.[3]

10월 29일, 프레데는 자신의 병력이 혼란에 빠진 적군의 퇴각을 막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방어에 집중하려는 의도에 따라 비교적 좁고 깊은 종대로 병력을 배치했다. 프레데의 좌익은 프랑스군이 가고 싶어 했던 주요 퇴각로인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로 향하는 길을 방어했다. 그의 병력 대부분은 하나우 시의 반대편 둑, 킨치히 강을 따라 배치되었고, 그의 우익에서는 엘브라흐트와 트라우텐베르크의 사단이 킨치히 강 남쪽에 위치했다. 베커스의 바이에른 사단은 맨 우익을 구성했으며, 킨치히 강 양쪽에 배치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세클러' 연대 하나(2개 대대 규모)와 모부대에서 파견된 많은 산병들이 람보이 숲의 전진 기지에 배치되었다. 기병 대부분은 중앙의 2열에 배치되었고, 포병은 전장 전체에 고르게 분산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10월 29일/30일 밤을 겔른하우젠 근처의 이젠부르크 성에서 보냈고,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의 준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는 적군이 저항할 의도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장-투생 아리이 드 카사노바의 기병 군단의 보호 아래 연합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북쪽으로 군대의 짐과 보급 열차를 이동시키는 한편, 프레데의 병력에 맞서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빅토르에게 그의 군단으로 좌익을 형성하여 킨치히 강을 따라 행진하도록 명령했고, 마크도날의 군단과 근위대는 람보이 숲을 돌파하도록 했다. 샤를르 르페브르-데노에트 장군 휘하의 근위 기병 일부는 군대의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더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레데의 위치를 연구했고, 그의 주요 약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프레데가 군대의 대부분을 강을 뒤에 두고 배치하여, 퇴각이 필요할 경우 자연적인 장벽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프레데의 배치를 본 나폴레옹은 "내가 프레데를 백작으로 만들었지만 그를 장군으로 만드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프레데의 배치에 있는 이 치명적인 약점을 이용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먼저 그를 격파해야 했고, 방어를 위해 병력을 배치할 시간이 충분했던 적군과 싸우기 위해 열세의 보병, 적은 수의 기병, 그리고 적은 수의 대포를 가지고 그렇게 해야 했다.

4. 2. 전투의 전개 (10월 30일)

브레데는 프랑스 군을 상대로 소규모 교전을 벌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앞에 있는 20,000명의 프랑스군에 맞서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다. 10월 30일, 브레데는 중앙군을 킨니히 강(Kinzig) 뒤편에 배치하고, 우익군을 남쪽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고립되어 있어 본대와는 오직 하나의 다리로만 연결되어 있었다.[3]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병력은 마크도날 원수가 지휘하는 보병대와 세바스티아니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대를 포함하여 17,000명 정도였다.[3] 브레데가 있는 곳에서 동쪽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들키지 않은 채로 진군하여 연합군 진영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3] 나폴레옹은 운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연합군의 좌익을 공격했다.

정오쯤 빅토르 원수와 마크도날 원수가 연합군의 중앙 바로 앞에 있는 숲을 제압하였다. 얼마 후 드루오 장군은 숲에서 브레데 부대의 좌익을 포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데, 이 길은 포를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다. 3시간 후 척탄병 부대와 구 근위대가 숲의 많은 지역에 있는 연합군을 격퇴했다. 드루오는 근위대와 세바스티아니의 기병대의 도움을 받아 50문의 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3]

드루오 휘하의 포병대가 포격을 개시하여 브레데 군에 소속되어 있던 28문의 포를 무력화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좌익에 위치한 브레데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들은 이윽고 브레데 부대의 중앙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브레데의 중앙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상당한 피해를 입고 킨니히 강둑으로 밀려났다. 우익에서 브레데 부대는 중앙군을 지원하기 위해 하나의 다리에 몰려 강을 건너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이 익사하였다.[3]

4. 3. 전투의 결과 (10월 31일)

브레데는 람보이 다리에서 하나우 시까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간신히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 완전 붕괴를 피한 연합군은 밤중에 하나우를 포기하고 퇴각하였다.[3] 프랑스군은 10월 31일 별다른 저항 없이 하나우를 점령했다.[3] 나폴레옹은 브레데를 추격하는 대신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퇴각로를 확보하여 퇴각을 계속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하나우 전투에서 바이에른-오스트리아 연합군은 9,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이보다 적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0월 28일부터 31일 사이에 약 10,000명의 프랑스 낙오병이 연합군 포로가 되었다.[3] 프랑스군은 1813년 11월 2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고, 마인츠에서 불과 32k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회복하여 1814년 프랑스 침공에 대처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트 행군 중 방해를 받지 않고 1813년 10월 31일 오후에 도착했다. 군사적으로 이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값비싼 승리였다. 프레데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막는 데 실패했지만,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퇴각로를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기동을 회피했다. 바이에른 왕국은 이 전투를 통해 연합군 측으로의 전환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자 했다. 바이에른 정치인과 군인들에게는 전투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1813년 11월 5일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프랑크푸르트로 진군했다.

5. 1. 피해 규모

브레데 휘하의 병력은 9,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 피해는 이보다 적었다. 그러나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10,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탈영병들이 연합군의 전쟁포로가 되었다.[3]

5. 2. 전략적 영향

프랑스군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마인츠까지 퇴각하여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3] 나폴레옹은 퇴각로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와 하나우 전투에서의 피해로 인해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이 전투는 바이에른 왕국이 동맹군 측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1814년, 연합군은 프랑스 본토를 침공하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1813년 12월 8일 에서 초연되었으며, 베토벤이 직접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서 지휘했다.

6. 기념 및 평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교들은 진급과 함께 많은 훈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바이에른 출신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레오폴트 훈장과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사령관 십자 훈장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과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1]

하나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하나우 시에는 여러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이 중 5개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람보이슈트라세, 카를 마르크스 슈트라세, 로베르트 블룸 슈트라세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킨지히 다리에 두 개가 있다.[1]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승리한 전투 목록에 포함되어 파리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개선문에 새겨진 하나우 전투의 비문


2015년에는 전투 현장에서 전투 중 사망한 프랑스 군인 약 200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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