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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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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쿨름 전투는 1813년 8월 29일과 30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퇴각하는 연합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도미니크 조제프 르네 방담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스테르만-톨스토이 휘하의 러시아군과 교전하여 첫날에는 우위를 점했지만, 프리드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패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방담은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를 무효화하고 연합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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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일부
전투 이름쿨름 전투
알렉산더 코체부의 그림
날짜1813년 8월 29일–30일
장소보헤미아 쿨름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국
교전국 2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지휘관
프랑스 제국 지휘관도미니크 방담
연합군 지휘관알렉산드르 오스테르만-톨스토이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미하일 바클라이 데 톨리
미하일 밀로라도비치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만스펠트
프리드리히 폰 클라이스트
병력 규모
프랑스 제국 병력32,000–37,000명
연합군 병력초기: 15,000–16,000명
: 103,000명
이 중 54,000명은 44,000명의 러시아인과 10,000명의 프로이센인으로 구성됨
사상자
프랑스 제국 사상자13,000 ~ 25,000명
프랑스 제국 사상자 상세9,000명 전사 또는 부상
8,000명 포로
81문 포획
2개의 제국 독수리 노획
2개의 기병 깃발 노획
연합군 사상자11,000 ~ 12,319명
연합군 사상자 상세11,000명 전사 또는 부상
1,000명 포로

2. 배경

드레스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함에 따라 방담은 퇴각하는 연합군을 추격하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로랑 구비옹 생 시르 원수와 오귀스트 마르몽을 보내 방담을 지원하도록 했다. 방담이 앞서 나가는 동안 생 시르와 마르몽의 군단은 후방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방담의 군단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스테르만-톨스토이 휘하의 군단을 우스티나트라벰(오늘날의 체코)에서 8km 떨어져 있는 쿨름 마을 근교에서 따라잡았다.

3. 전투

방담은 8월 29일 오스테르만-톨스토이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8월 30일, 프리드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단이 방담의 후방을 공격했고, 바클레이 드 톨리와 폰 콜로레도-만스펠트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정면에서 공격했다. 방담은 사각 대형으로 방어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프랑스군은 패배했고, 방담은 포로로 잡혔다.

3. 1. 8월 29일

방담 휘하의 군단(32,000명-34,000명, 포 84문)은 오스테르만-톨스토이 휘하의 러시아군(13,000명-14,000명)을 공격하였다. 당시 연합군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만약 방담이 승리하면 프랑스군은 산에 있는 도로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퇴로가 나폴레옹에 의해 차단당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담은 톨스토이에게 패했다.

쿨름에서의 기병대 돌격


8월 29일, 방담은 34,000명의 병력과 84문의 대포를 동원하여, 14,700명에서 16,000명 규모의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이 러시아군은 퇴각하는 연합군을 위한 후위 부대였다. 러시아군 지휘관은 오스테르만-톨스토이였다. 연합군에게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만약 방담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프랑스군은 산길의 요새를 점령했을 것이고, 퇴각하는 연합군은 나폴레옹에게 포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테르만-톨스토이는 강력한 방어를 위해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는 왼쪽 손을 잃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측근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가 그를 대신했다. 그날이 끝날 무렵 연합군은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방담의 모든 공격은 격퇴되었고, 그의 상황은 다음 날 더욱 악화되었다.

3. 2. 8월 30일

프리드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단이 방담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클라이스트는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폰 콜로레도-만스펠트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방담 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한 오스테르만 톨스토이 휘하의 러시아-오스트리아군과 함께 더욱 유리하게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공격해 오는 연합군을 격퇴하기 위해 방담은 휘하의 병력에 사각 대형 방어태세를 취할 것을 명했으나, 경험 없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방담은 포로로 사로잡혔다.

3. 3. 폴란드 울란 연대의 참전

방당의 군단에는 장 코르비노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사단의 일부로 2개의 폴란드 울란 연대가 있었다. 방담은 이들에게 적 기병부대를 향하여 돌격할 것을 명하였다. 알렉산드르 프레드로의 동생 막시말리안 프레드로가 지휘하는 한 연대는 일렬종대로 퇴각하는 와중에 적의 공격을 당했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토마시 우비엔스키(영어명 토마스 루비엔스키) 휘하의 또 다른 창기병 연대는 퇴각하는 데 성공하였다.

4. 결과

프랑스군은 약 5,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방담을 포함한 7,000~13,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이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80문의 포가 탈취되었다.[1] 연합군은 대략 11,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1]

방담의 군단에는 장 코르비노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사단의 일부로 2개의 폴란드 울란 연대가 있었다. 방담은 이들에게 적 기병부대를 향하여 돌격할 것을 명하였다. 막시말리안 프레드로(극작가 알렉산드르 프레드로의 동생)가 지휘하는 한 연대는 일렬종대로 퇴각하는 와중에 적의 공격을 당했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토마시 우비엔스키(영어명 토마스 루비엔스키) 휘하의 또 다른 창기병 연대는 퇴각하는 데 성공하였다.[1]

프랑스는 반담을 포함한 추격군 34,000명 중 13,000명에서 2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포병 대부분을 잃어 84문의 대포 중 82문을 빼앗겼다. 연합군은 약 11,000명의 전사자 또는 부상자를 냈다.

맥도날 원수의 카츠바흐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드레스덴에서의 승리와 일치했지만, 쿨름에서의 연합군의 성공은 결국 그의 승리를 무효화했다. 왜냐하면 그의 군대는 적을 완전히 격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오스터만-톨스토이와 그의 군대는 드레스덴 전투 이후 바르텐부르크 전투와 그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를 위해 연합군이 재정비할 수 있는 절실히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5. 전장

전장은 대부분 재개발되었다. 나폴레옹 호텔 옆에는 사자상이 올려진 커다란 기념비가 있다.

6. 일화

프랑스 측 기록에 따르면, 전투 후 방담은 약탈자나 산적 취급을 받으며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끌려갔다. 방담은 "나는 산적도, 약탈자도 아니다. 어쨌든 간에 나의 동시대 사람들과 역사는 나를 아버지의 피를 손에 묻힌 사람으로 비난하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기록했다. 이는 알렉산드르 1세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러시아의 차르였던 파벨 페트로비치의 살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며 비꼬는 내용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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