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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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된 석축 읍성으로, 고현성이라고도 불린다.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으로, 조선 전기 연해읍성과 관방성의 축조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하동읍성은 삼한시대 낙노국, 가야 시대에는 백제와 교섭의 요충지였으며, 신라 통일 후 한다사군이 설치되어 읍기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 군대에 의해 훼손되었고, 읍치는 여러 차례 이전되었다. 읍성은 1,400m의 잔존 둘레를 가지며, 옹성, 치성, 해자, 양마장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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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읍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하동읍성 |
로마자 표기 | Hadong Eupseong |
한자 표기 | 河東邑城 |
지정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453 |
지정일 | 2004년 5월 31일 |
면적 | 165,461m2 |
시대 | 조선 시대 |
주소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산151번지 일원 |
추가 정보 | |
기념물 지정 (해제) | 지정 번호: 217 지정일: 1999년 8월 6일 해제일: 2004년 5월 31일 |
2. 역사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성된 조선 전기의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고현성(古縣城)'이라고도 불린다.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한 포곡식 석축성으로, 조선 전기 연해읍성과 관방성의 축조 수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평지성(平地城)이나 평산성(平山城)과 달리 산성에 가깝고, 축성신도(築城新圖) 반포 이전 초축된 성에서부터 세종 연간과 그 이후 시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축성 양식을 단일 성곽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동읍성이 위치한 고전면 고하리는 삼한시대 변한 12국 중 낙노국(樂奴國)에 속한다고 추정되며, 가야 시대에는 대외 교섭상의 위치에 있어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곳이다. 가야 멸망 후 백제 세력권에 들면서 다사성(多沙城)이라 불렸고, 신라 통일 후 한다사군(韓多沙郡)이 설치되어 읍기(邑基)를 고하에 두었다. 이후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읍기였다. 1593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객사, 관아, 향교 등이 불탔고, 1661년 관아를 횡포촌 내기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667년 다시 성내로 이전하기도 하였으나, 1703년 진답면 우동(비파리 우치동)으로 읍을 옮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1,019척, 높이 13척으로 성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여장 높이 3척, 적대(敵臺) 11개, 원아축 4문, 옹성 3개로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에 방비하기 힘들다고 적혀 있다. 문종 연간 기록에는 주위 2,943척, 높이는 평지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 높이 3척, 적대 11개소(이미 쌓은 것 4개소), 문 3개소(옹성 있음), 여장 588개, 성안에 샘 5개소, 못 1개소, 해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읍성 주변에는 해발 150∼300m 내외의 산줄기가 뻗어 있고, 여기서 동쪽이나 동남쪽으로 뻗은 50m 내외의 능선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성내는 작은 곡부(谷部)를 이루어 물이 대부분 남서쪽 남문터 주변에 집중되어 동쪽으로 흘러 남서 방향으로 배수되는 지형이다.
현재 잔존 둘레는 1,400m, 폭 4.5m, 잔존 최고 높이는 5.2m 정도이다. 동·서·남쪽 체성 중간에는 옹성을 두른 문지와 그 좌우 및 성 모퉁이에 방대상(方臺狀)의 치성을 배치하고, 체성 바깥에는 해자를 두었으며, 해자와 나란하게 양마장(羊馬墻)을 두른 구조이다.
2. 1. 삼국 시대 이전
2. 2. 삼국 시대 ~ 조선 초기
2. 3. 조선 시대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성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고현성(古縣城)이라고도 불린다.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한 포곡식 석축성으로, 조선 전기 연해읍성 및 관방성 축조 수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평지성(平地城) 및 평산성(平山城)과 달리 산성에 가깝고, 축성신도(築城新圖) 반포 이전에 초축된 성에서부터 세종 연간과 그 이후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축성 양식을 단일 성곽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성사적 중요성이 크다.하동읍성이 위치한 고전면 고하리는 삼한시대 변한 12국 중 낙노국(樂奴國)에 속한다고 추정되며, 가야 시대에는 대외 교섭상의 위치에서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곳이다. 가야 멸망 후 백제 세력권에 들면서 다사성(多沙城)이라 불렸고, 신라 통일 후 한다사군(韓多沙郡)이 되어 고하에 읍기(邑基)를 두었다.
1593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객사, 관아, 향교 등이 소실되었다. 1661년 횡포촌 내기동으로 관아가 이전되었다가 1667년 다시 성내로 이전하였으나, 1703년 진답면 우동(비파리 우치동)으로 읍이 이전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둘레 1,019척, 높이 13척으로 성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여장 높이가 3척, 적대(敵臺)가 11개, 원아축 4문, 옹성이 3개로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에 방비하기 힘들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 연간 기록에는 주위 2,943척, 높이는 평지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 높이는 3척, 적대 11개소(이미 쌓은 것 4개소), 문 3개소(옹성 있음), 여장 588개, 성안에 샘 5개소, 못 1개소, 해자는 미착이라고 되어 있다.
읍성 주변에는 해발 150∼300m 내외의 산줄기가 뻗어 있으며, 산줄기에서 동향 혹은 동남향하여 뻗은 50m 내외의 능선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성내는 작은 곡부(谷部)를 이루고 있어 물은 대부분 남서쪽 남문터 주변에 집중되어 동쪽으로 흘러 남서 방향으로 배수되는 지형이다.
현재 잔존 둘레는 1,400m, 폭 4.5m, 잔존 최고 높이는 5.2m 정도이다. 동·서·남쪽 체성 중간에는 옹성을 두른 문지와 그 좌우 및 성 모퉁이에 방대상(方臺狀)의 치성을 배치하고, 체성 바깥에는 해자를 두었으며, 해자와 나란하게 양마장(羊馬墻)을 두른 구조이다.
3. 구조 및 특징
3. 1. 지리적 특징
3. 2. 축성 양식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성된 조선 전기의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고현성(古縣城)이라고도 불린다.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한 포곡식 석축성으로, 조선 전기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평지성 및 평산성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며, 축성신도(築城新圖) 반포 이전에 초축된 성에서부터 세종 연간 및 그 이후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축성 양식을 단일 성곽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읍성은 해발 150∼300m 내외의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내는 작은 곡부(谷部)를 이루어 남서쪽 남문터 주변에 물이 집중되어 동쪽으로 흘러 남서방향으로 배수되는 지형이다.
현재 잔존 둘레는 1,400m, 폭 4.5m, 잔존 최고 높이는 5.2m 정도이다. 동·서·남쪽 체성 중간에는 옹성을 두른 문지가 있고, 그 좌우 및 성 모퉁이에 방대상(方臺狀)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다. 체성 바깥에는 해자가 있고, 해자와 나란하게 양마장(羊馬墻)이 설치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1,019척, 높이 13척으로 성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여장 높이 3척, 적대(敵臺) 11개, 원아축 4문, 옹성 3개로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에 방비하기 힘들다고 적혀 있다. 문종 연간 기록에는 주위 2,943척, 높이는 평지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 높이는 3척, 적대 11개소(이미 쌓은 것 4개소), 문 3개소(옹성 있음), 여장 588개, 성안에 샘 5개소, 못 1개소, 해자는 미착이라고 되어 있다.
3. 3. 방어 시설
4. 현재 상태
참조
[1]
간행물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85번지 일원 내 梁山 架山里遺蹟 Ⅴ. 고찰
https://www.cha.go.k[...]
2015-09-01
[1]
보고서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양산석산지구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http://www.feaci.or.[...]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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