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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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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성진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시대에 축조된 성이다. 쓰시마섬에서 부산, 진해로 향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축조 논의가 시작되었다. 성벽 둘레는 약 700m로 추정되나, 현재는 약 96m가 남아 있으며, 높이는 3.5m이다. 서·남·북쪽에 문터가 있고, 동쪽에는 문이 없으며, 이중 성벽과 수로를 갖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조선 시대 중기 진성의 축성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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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진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천성진성 (天城鎭城)
위치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1613, 1614, 1615
종류조선 시대 성곽
지정 번호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4호 (1989년 3월 10일 지정)
경상남도 기념물 제92호 (1988년 12월 23일 지정, 1990년 1월 18일 해지)
면적48,473m² (보호 구역)
시대조선
소유부산광역시 강서구
관리부산광역시 강서구
좌표35°01′49″N 128°49′07″E
역사
축조 시기1544년
축조 주체조선 정부
구조
재료돌, 나무, 회반죽 벽
높이3.5m
둘레870m

2. 역사적 배경

일본쓰시마섬에서 부산, 진해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둘러쌓은 성이다.[2]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1510년)과 사량진왜변(1544년)을 거치면서 군사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하게 했던 진성(鎭城)의 축성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2]

2. 1. 삼포왜란 (1510년)

조선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년)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래서 바닥쪽으로 돌덩이를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2]

2. 2. 사량진왜변 (1544년)

1544년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천성진성)에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바닥에 돌을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 주둔을 위한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2]

3. 축성 양식 및 구조

일본 대마도에서 부산, 진해 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둘러쌓은 성이다.[2]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래서 바닥에 돌을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2]

천성진성은 조선 시대 중기 군사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하게 했던 진성(鎭城)의 축성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2]

3. 1. 성벽

성벽의 둘레는 약 700m 정도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96m이며 높이는 3.5m이다. 서쪽, 남쪽, 북쪽에 문터가 있는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 문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쪽에 마찬가지로 이중 성벽을 두었고,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는 방어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2]

3. 2. 문터

서·남·북쪽에는 문터가 있는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 문의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쪽에 마찬가지로 이중 성벽을 두었고,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2]

3. 3. 이중 성벽

천성진성의 성문 바깥쪽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이중으로 성벽을 쌓았다.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2] 문의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도 성벽 바깥쪽에 이중 성벽을 설치했다.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 시설을 만들었다.[2]

3. 4. 수로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는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2]

4. 군사적 중요성

대마도에서 부산, 진해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2]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바닥에 돌덩이를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2]

성벽 둘레는 약 700m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둘레가 약 96m, 높이가 3.5m이다. 서·남·북쪽에 문터가 있는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 문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쪽에 마찬가지로 이중 성벽을 두었고,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시설을 갖추었다.[2]

조선시대 중기 군사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하게 했던 진성(鎭城)의 축성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2]

4. 1. 진성(鎭城)

쓰시마섬에서 부산, 진해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2]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래서 바닥에 돌덩이를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2]

성벽 둘레는 약 700m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96m이며, 높이는 3.5m이다. 서·남·북쪽에 문터가 있는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 문의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쪽에 마찬가지로 이중 성벽을 두었고,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시설을 마련해 두었다.[2]

조선시대 중기 군사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하게 했던 진성(鎭城)의 축성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2]

4. 2. 왜구 방어

대마도에서 부산, 진해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2]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과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을 거치면서 이곳에 진영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바닥에 돌덩이를 채워 군함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수군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2]

성벽 둘레는 약 700m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둘레가 약 96m, 높이가 3.5m이다. 서·남·북쪽에 문터가 있는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둘렀다. 문 양옆과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쪽에 마찬가지로 이중 성벽을 두었고, 성벽 주위에는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시설을 갖추었다.[2]

참조

[1] 간행물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보호구역 면적 정정 고시 http://ebook1.busan.[...] 부산광역시장 2017-01-18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3] 문서 원래는 갈마봉성이였으나 임진왜란에 석축을 헐어낸 후 일본식으로 재구축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성북왜성 영토로 변했다.
[4] 웹사이트 당감동 성지 2차 발굴조사 https://museum.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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