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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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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2세는 973년에 태어나 1024년에 사망한 신성 로마 황제이다. 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이자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증손으로, 1002년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1014년 교황 베네딕토 8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했다.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와의 분쟁, 비잔틴 제국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제국 교회 제도를 강화하고 밤베르크 교구를 설립하는 등 제국 정책을 펼쳤다. 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콘라트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 2세는 1147년 시성되었으며, 7월 13일을 기념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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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겐스부르크 성사집에 묘사된 하인리히 2세
레겐스부르크 성사집에 묘사된 하인리히 2세
독일어Heinrich II
이탈리아어Enrico II
라틴어Henricus
통치
칭호로마 황제
즉위1014년 2월 14일
대관식1014년 2월 14일, 옛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
선임자오토 3세
후임자콘라트 2세
이탈리아 왕 즉위1004년 5월 15일
이탈리아 왕 대관식1004년 5월 15일, 파비아,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 선임자오토 3세, 아르두인
이탈리아 왕 후임자콘라트 2세
독일 왕 즉위1002년 6월 7일
독일 왕 대관식1002년 6월 7일, 마인츠, 독일 왕국
독일 왕 선임자오토 3세
독일 왕 후임자콘라트 2세
바이에른 공작 즉위995년 8월 28일 – 1004년 3월 21일, 1009년 – 1017년 12월
바이에른 공작 선임자하인리히 2세
바이에른 공작 후임자하인리히 5세
개인 정보
배우자룩셈부르크의 쿠니군데
왕가오토 왕가
아버지하인리히 2세
어머니기젤라 폰 부르군트
출생일973년 5월 6일
출생지압바흐, 바이에른, 독일,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024년 7월 13일 (51세)
사망지괴팅겐 근처, 독일, 신성 로마 제국
매장지밤베르크 대성당
종교칼케돈 기독교

2. 초기 생애와 결혼

하인리히는 999년에 룩셈부르크의 쿠니군데[8][9]와 결혼했다. 그녀는 룩셈부르크의 지크프리트 백작의 딸이었으며, 이 결혼을 통해 하인리히는 독일 서부 영토에서 넓은 인맥을 갖게 되었다.

1002년, 오토 3세가 2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오토 3세는 독신으로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실력자들이 왕위를 노렸다. 같은 해 6월 7일, 마인츠에서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의 주도하에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이자 오토 2세와 갈등을 겪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인 하인리히가 국왕(로마 왕 하인리히 2세[50])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작센, 로트링겐 등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인리히는 제후령을 순회하며 각지에서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51]

2. 1. 가문 배경과 초기 교육

하인리히는 973년 5월에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군디의 기젤라의 아들로 태어났다.[6] 그는 부계로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손자이자 독일의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였고, 모계로는 부르군디의 콘라트 1세의 손자이자 부르군디의 루돌프 2세의 증손자였다.

하인리히의 아버지 하인리히 2세는 974년에 사촌 신성 로마 황제 오토 2세와 슈바벤 공국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하인리히 2세는 공작 자리가 자신의 상속권이라고 주장한 반면, 오토 2세는 자신이 공작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토 2세는 하인리히 2세를 잉겔하임에 투옥했다가, 그가 탈출 후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바이에른 공작에서 폐위시키고 978년 4월에 위트레흐트 주교에게 맡겨 추방했다. 이 과정에서 바이에른 공국 남동부의 이탈리아 접경 지역은 케른텐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아버지의 망명 기간 동안 어린 하인리히는 힐데스하임에서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볼프강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배웠고,[7] 이후 힐데스하임 대성당에서 공부했다. 황제는 젊은 하인리히가 성직자가 되어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종교 교육을 받게 했다.

2. 2. 섭정 문제와 바이에른 공작 즉위

983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2세가 사망하자, 하인리히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감금에서 풀려나 망명에서 돌아왔다. 선대 하인리히는 오토 2세의 세 살배기 아들 오토 3세에 대한 섭정을 주장했다. 985년 독일 왕위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선대 하인리히는 섭정을 아들의 어머니 테오파누에게 넘겨주었다. 어린 왕에게 복종한 대가로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귀했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젊은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7] 995년 선대 하인리히가 사망하자 젊은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귀족들에 의해 부친의 뒤를 이을 새로운 공작으로 선출되었다.

3. 독일 왕 즉위와 권력 강화

1002년, 재종사촌이자 전 왕인 오토 3세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오토 3세는 독신으로 직계 후계자가 없었고, 각지의 실력자들이 다음 왕위를 노렸다. 이런 가운데 1002년 6월 7일, 마인츠에서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의 주도하에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이자 오토 2세와 다퉜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 하인리히 4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으로서 하인리히 2세[50]였다.

하인리히 2세는 즉위 과정에서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않고 귀족들의 선출 없이 즉위하는 등, 오토 1세 이후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작센, 로트링겐 등 제후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후령을 순회하며 각지에서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았다.[51]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는 오토 3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하인리히 2세와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나, 결국 1002년 10월 1일 하인리히 2세에게 복종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03년 헤르만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슈바벤 공작 지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으나, 어린 헤르만 3세를 명목상 후계자로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인 공작령 통치권은 자신이 행사했다.[50][51][52][53]

1003년, 노르트가우 변경백 헨리히 폰 슈바인푸르트가 바이에른에서 하인리히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고, 하인리히 2세는 1007년 밤베르크 교구를 설립하여 변경백령의 이전 영토에 대한 세속적 권한을 교구로 이전하여 더 이상의 봉기를 막았다.

3. 1. 왕위 계승 분쟁

오토 3세는 1002년 1월, 자녀나 후계 구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50] 오토 왕조의 왕위 계승은 작센 분파에 속했지만,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계열이었기에, 로트링겐 백작 에초, 마이센의 에카르트 1세, 슈바벤의 헤르만 2세 등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50]

1002년 2월, 장례 행렬이 바이에른 공국을 통과할 때, 하인리히 2세는 폴링에서 행렬을 만나 쾰른의 헤리베르트 대주교에게 성창을 포함한 제국 보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헤리베르트는 하인리히 2세를 불신하거나 헤르만 2세를 지지했기에 보물을 먼저 보냈고, 하인리히 2세는 헤르만 2세가 성창을 넘기도록 대주교와 그의 형제를 감금해야 했다. 하인리히 2세는 제국 권위의 상징물과 헤리베르트의 협력 없이는 귀족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아헨 대성당에서 열린 오토 3세의 장례식에서도 하인리히 2세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하인리히 2세는 1002년 7월 9일 마인츠에서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에 의해 스스로 독일 왕(로마인의 왕, Rex Romanorum)으로 즉위했다.[50] 이는 오토 1세 이후 독일 왕이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하지 않고, 귀족 선출 없이 즉위한 최초의 사례였다. 하인리히 2세는 작센 공국 앞에서 왕의 복장을 갖추고 나타나 작센의 베른하르트 1세에게 왕위 계승을 지지하도록 설득했고, 그 대가로 작센인 통치권과 이익 대표권을 보장했다.

작센인들의 지지를 얻은 직후, 하인리히 2세는 빌리기스 대주교가 1002년 8월 10일 파더보른에서 그의 아내 룩셈부르크의 쿤이군데를 독일 여왕으로 대관하도록 했다. 작센, 로트링겐 등 제후들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인리히 2세는 제후령을 순회하며 각지에서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았다.[51]

3. 2. 독일 왕 즉위와 대관

1001년, 황제 오토 3세는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겪었다. 황제는 하인리히 2세에게 독일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합류하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1002년 1월 오토 3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오토 3세는 자녀도 없고 제위 계승에 대한 지침도 남기지 않았다. 오토 왕조에서 왕위 계승은 작센 분파에 속했으며, 하인리히가 속한 바이에른 계열이 아니었다. 로트링겐 백작 에초(Ezzo, 로트링겐 궁정 백작), 마르크그라프 마이센의 에카르트 1세, 그리고 공작 슈바벤의 헤르만 2세를 포함한 왕위 경쟁자들은 하인리히의 오토 3세 계승 권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장례 행렬이 1002년 2월 바이에른 공국을 통과하면서, 하인리히는 알프스 북쪽의 폴링에서 행렬을 만났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인리히는 쾰른의 헤리베르트 대주교에게 제국 보물, 그 중에서도 특히 성창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헤리베르트는 하인리히를 불신했거나 그의 친척인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를 다음 왕으로 옹립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보물들을 행렬보다 먼저 보냈다. 하인리히는 헤르만 2세가 자신에게 성창을 넘기도록 강요하기 위해 대주교와 그의 형제인 뷔르츠부르크 주교를 감금했다.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 왕관 보석, 헤리베르트의 협력도 얻지 못한 하인리히는 오토 3세의 장례 행렬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선출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몇 주 후, 아헨 대성당에서 열린 오토 3세의 장례식에서 하인리히는 다시 왕국의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

결국 하인리히는 왕국의 귀족들의 지지 없이, 1002년 6월 7일[50], 현재의 독일 마인츠에서 마인츠 대주교인 빌리기스에 의해 스스로 독일 왕 ("로마인의 왕", Rex Romanorum)으로 성유하고 대관하는 급진적인 행동을 취했다. 하인리히의 이러한 행동은 936년 오토 1세 황제가 전통을 시작한 이후로 독일 왕이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하지 않은 최초의 사례이자, 독일 귀족의 선출 없이 독일 왕이 즉위한 최초의 사례였다. "하인리히 2세"라는 왕의 이름으로, 그는 7월 중순 작센 공국 앞에서 완전한 왕의 복장을 갖추고 나타났다. 그곳에서 하인리히는 작센의 베른하르트 1세에게 왕위 계승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지지에 대한 대가로 하인리히는 베른하르트의 작센인 통치권과 그들의 이익을 자신에게 대표할 권리를 보장했다.

작센인들의 지지를 얻은 직후, 하인리히는 빌리기스 대주교가 1002년 8월 10일 현재의 독일 파더보른에서 그의 아내 룩셈부르크의 쿤이군데를 독일 여왕으로 대관하도록 했다. 작센 공작, 로트링겐 공작 등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인리히는 제후령을 순회하며 각지에서 다시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았다[51].

3. 3. 권력 공고화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는 오토 3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하인리히 2세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헤르만 2세는 자신이 오토 1세의 맏아들 리우돌프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오토 3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하인리히 2세와 헤르만 2세는 슈바벤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력 충돌과 정치적 경쟁을 벌였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50][51][52][53]

하인리히 2세는 슈바벤에서 헤르만 2세를 제압하지 못하자,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상 로렌, 하 로렌, 프랑켄 등 왕국 내 여러 공국을 순방하며 귀족들의 동의를 구했다. 오토 왕조와의 혈연 관계 덕분에 귀족들은 결국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스트라스부르 근처 전투에서 패배한 헤르만 2세는 1002년 10월 1일 하인리히 2세에게 복종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03년 헤르만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슈바벤 공작 지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으나, 어린 헤르만 3세를 명목상 후계자로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인 공작령 통치권은 নিজে 행사했다.[50][51][52][53]

1003년, 노르트가우 변경백 헨리히 폰 슈바인푸르트가 바이에른에서 하인리히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2세는 독일 왕위 주장을 지지하는 대가로 변경백을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왕위에 오른 후 약속을 어기고 바이에른인들이 스스로 공작을 선출할 권리를 지지했다. 하인리히 2세의 지원으로 룩셈부르크 백작 헨리 1세가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배신당한 헨리히 폰 슈바인푸르트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1004년에 노르트가우 변경백은 폐위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1007년 밤베르크 교구를 설립하고 변경백령의 이전 영토에 대한 세속적 권한을 교구로 이전하여 더 이상의 봉기를 막았다.[50][51][52][53]

4. 이탈리아 원정과 황제 대관

오토 3세가 1002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면서, 직계 후계자가 없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발생했다. 1002년 6월 7일,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의 주도로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이자 오토 2세와 대립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하인리히 2세[50]). 그러나 작센 공작, 로트링겐 공작 등 일부 제후들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 하인리히 2세는 제후령을 순회하며 왕위 승인을 받아야 했다.[51]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1004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고, 1014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8세에 의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52][53]

1006년, 부르군트 왕 루돌프 3세는 후계자가 없어 조카인 하인리히 2세를 상속자로 정했다.[47][54] 비록 하인리히 2세가 루돌프 3세보다 먼저 사망하여 부르군트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이 일은 훗날 콘라트 2세의 부르군트 왕국 병합의 발판이 되었다.

4. 1. 제1차 이탈리아 원정

1002년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후계자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브레아의 아르두인은 황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비아에서 스스로를 이탈리아 왕이라고 선포했다.[12] 아르눌프 2세와 함께 아르두인은 이탈리아 영토 유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아르두인은 997년 베르첼리 주교 살해 혐의로 파문당했다. 이로 인해 라벤나 대주교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교회의 아르두인 반대파들은 이탈리아의 정당한 통치자로서 독일 왕 하인리히 2세의 편을 들었다. 하인리히 2세는 케른텐 공작 오토 1세를 베로나 변경백령을 통해 아르두인과 대결하도록 보냈지만, 아르두인은 1003년 파브리카 전투에서 오토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13]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주교들의 원조 요청에 응하여 아르두인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침공을 이끌었다. 하인리히 2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군대를 모아 브레너 고개를 거쳐 이탈리아 트렌토로 진군했다. 초기 군사적 성공 이후, 아르눌프 2세를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 성직자와 일부 귀족 가문이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베르가모에서 하인리히 2세와 합류한 아르눌프 2세는 1004년 5월 14일 파비아의 산 미켈레 마조레 바실리카에서 그에게 이탈리아 왕 ("렉스 이탈리아에")의 왕관을 씌웠다.[6][14] 선임자들과 달리, 이탈리아 왕국을 얻은 후 하인리히 2세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위한 두 개의 왕관을 착용했으며, 두 왕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일반적인 왕관을 착용하지 않았다.

대관식 후 일부 주민들과 하인리히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이는 주민들이 왕이 식사하고 있던 궁전을 공격할 정도로 격화되었다.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는 재빨리 왕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고, 공격 중에 도시가 불에 타 많은 주민이 사망했다.[15]

남아있는 이탈리아 귀족들의 경의를 받은 후, 하인리히는 황제의 왕관을 요구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지 않고 1004년 초여름에 독일로 돌아갔다. 이는 교황 요한 18세의 반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인리히는 10년 동안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왕국은 스스로 통치하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폴란드의 반역자 볼레스와프 1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취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4. 2. 황제 대관

1014년 교황 베네딕토 8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한 하인리히 2세.


1013년 말,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해 초 메르제부르크에서 폴란드 공작 볼레슬라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행군에는 왕비 룩셈부르크의 쿤군데와 여러 성직자들이 동행했다. 파비아에 도착하자 다른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합류했다. 하인리히 2세의 군대는 이탈리아 왕 아르두인을 수도 이부레아에 가두었고, 아르두인은 1015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014년 초, 하인리히 2세는 로마에 도착하여 베네딕토 8세를 교황으로 복위시켰다. 1014년 2월 1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베네딕토 8세는 하인리히 2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마노룸 임페라토르")로 즉위시켰다.[6] 황제와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다섯 명의 주교를 임명하고,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정결을 장려하며, 교회 재산 반환을 명령했다. 얼마 후 하인리히 2세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보비오 교구를 설립했다. 파비아와 이탈리아에서 부활절을 기념한 후, 1014년 5월 중순 독일로 돌아갔다. 이후 로마 통치는 교황에게 맡겼으며, 하인리히 2세는 교황령이나 이탈리아 정치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22]

5. 폴란드와의 분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오토 3세의 동방 정책을 뒤집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와 오토 3세 통치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좋은 관계가 악화되었다.[16] 1002년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가 암살된 후,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의 내분 틈을 타 오데르강 서쪽의 마이센 변경백령과 라우지츠 변경백령을 점령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의 라우지츠 점령을 인정하고 그를 봉신으로 삼았으나, 마이센 소유는 허용하지 않았다. 볼레스와프 1세가 메르제부르크를 떠난 직후 암살 시도가 실패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가 암살을 지시했다고 비난하며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17]

1004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1018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세 차례의 주요 전쟁과 여러 차례의 소규모 작전으로 이루어졌다.[18]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침공에 대비하여 다른 슬라브 민족과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영토는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1018년 1월 30일,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4]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루사티아와 마이센의 분쟁 지역을 명목상의 봉신 조건으로 유지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봉건 영주로 인정했다.[25]

5. 1. 폴란드와의 관계 악화

황제 하인리히 2세, 밤베르크 주립 도서관 소장, ''욥에 대한 성 그레고리오의 도덕론 필사본''에서


1002년, 21세의 젊은 황제 오토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국 재건(renovatio)" 계획은 좌절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오토 3세의 동방 정책을 뒤집었고[16], 이로 인해 독일과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 사이에 오토 3세 통치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좋은 관계가 악화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오토 3세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나, 하인리히 2세의 정책 변화는 볼레스와프 1세가 새로운 독일 동맹을 찾도록 만들었다. 독일 왕위 계승 후보들 중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 대신 마이센 변경백 에크하르트 1세를 지지했다. 1002년 4월, 에크하르트가 작센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에야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지지하게 되었다.[20]

1002년 7월 25일, 볼레스와프 1세는 메르제부르크에서 새로운 독일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오토 3세 사후 독일의 내분 틈을 타 오데르강 서쪽의 마이센 변경백령과 라우지츠 변경백령 등 주요 독일 영토를 점령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의 라우지츠 점령을 인정하고 그를 봉신으로 삼아 하인리히 2세를 상전으로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의 마이센 소유는 허용하지 않았다. 볼레스와프 1세가 메르제부르크를 떠난 직후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하인리히 2세가 암살을 지시했다고 비난했고,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17] 이후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에 대한 조공도 거부했다.

1002년,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라프 3세는 반란으로 축출되었다. 1003년,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 문제에 개입하여 볼레스라프 3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볼레스라프 3세는 주요 귀족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켰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비밀리에 볼레스와프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직접 개입을 요청했다. 폴란드 공작은 요청을 수락하고 보헤미아 공작을 폴란드로 초대했다. 볼레스라프 3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눈이 멀고 투옥되었으며, 약 30년 후 사망할 때까지 갇혀 있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1003년 보헤미아를 침공, 별다른 저항 없이 공국을 정복했다. 보헤미아는 이전부터 독일의 영향과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폴란드의 침공은 양국 간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1004년,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통치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고 마이센의 성을 불태웠다. 이탈리아 왕위를 되찾고 돌아온 하인리히 2세는 같은 해 폴란드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1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세 차례의 전쟁과 여러 차례의 소규모 작전이 포함되었다.[18]

5. 2. 제1차 폴란드 전쟁 (1004년 ~ 1005년)

1004년 이탈리아로의 첫 번째 원정에서 돌아온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그 전 해인 1003년, 하인리히 2세는 이교도 슬라브 루티치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군사 동맹의 결과로 하인리히 2세는 슬라브 민족 사이의 기독교화 노력을 중단했다. 그러나 폴란드에 대항하는 서슬라브족과의 새로운 동맹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많은 독일 귀족들은 지속적인 선교 활동과 엘베 슬라브족의 직접적인 복종을 희망했다. 게다가 많은 독일 귀족들은 오토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와 가족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다. 이는 퀘르푸르트의 브루노 주교의 폴란드 선교를 방해했기에, 그는 헝가리로 향했다.[19]

하인리히 2세의 군사 침공에 대비하여 볼레스와프 1세는 다른 슬라브 민족과 유사한 동맹을 맺었다. 1002년 오데르강 서쪽을 정복하면서 그의 영토는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더욱이 폴란드 공작은 스칸디나비아의 수많은 공작들과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2세는 1004년 여름 침공으로 볼레스와프 1세의 반란에 대응하여 보헤미아 북부의 광석 산맥에 도달했다. 그는 그 후 자테츠의 성을 정복하고 그곳에 남겨진 폴란드 군대를 전멸시켰다. 동시에 야로미르 (폐위된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3세의 남동생)는 독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메르제부르크에서 야로미르는 보헤미아를 하인리히 2세의 봉신으로 유지할 것을 약속하며 보헤미아를 결정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했다. 볼레스와프 1세를 도망치게 한 야로미르는 독일 군대와 함께 프라하를 점령하고 스스로 공작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가 되찾은 국가는 작았는데, 폴란드군은 1018년까지 모라비아, 실레지아, 루사티아를 점령했기 때문이다.[20]

공세의 다음 부분에서 하인리히 2세는 마이센을 탈환했고, 1005년 여름 그의 군대는 폴란드 깊숙이 진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폴란드 도시인 포즈난에서 독일군은 폴란드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포즈난에서 만난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1] 그 조항에 따라 볼레스와프 1세는 루사티아와 마이센을 잃었고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양측이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는 불과 2년 동안 지속되었다.

5. 3. 제2차 폴란드 전쟁 (1007년 ~ 1013년)

1007년, 하인리히 2세는 포즈난 평화 조약을 비난했고, 이는 볼레스와프 1세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공격하고 루사티아와 마이센 변경, 특히 바우첸을 재점령하는 결과를 낳았다. 3년 뒤인 1010년에 독일의 반격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슐레지엔에서의 약탈 외에는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1012년,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두 번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볼레스와프 1세는 즉시 이 평화를 깨고 다시 루사티아를 침공하여 루부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21]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세 번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루사티아 변경백과 마이센 변경백을 봉토로 받았다. 평화를 확정하기 위해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 미에슈코 2세는 로타링기아의 팔츠 백작 에초의 딸이자 황제 오토 2세의 손녀인 로타링기아의 리헤자와 결혼했다.[18]

5. 4. 제3차 폴란드 전쟁 (1015년 ~ 1018년)

1003년부터 1018년까지의 독일-폴란드 전쟁의 일환으로, 1013년 하인리히 2세와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 간의 평화 협정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1014년, 하인리히 2세가 독일에 부재한 틈을 타 볼레스와프 1세는 아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를 보헤미아 공국으로 보내 올드르지흐 공작에게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올드르지흐는 미에슈코 2세를 투옥했으나, 황제의 개입으로 석방되었다. 미에슈코 2세는 인질로서 메르제부르크의 하인리히 2세 황실로 보내졌지만, 황제가 친척들의 압력에 따라 곧 석방하는 데 동의했다.[23]

1015년, 하인리히 2세는 교황 베네딕토 8세로부터 황제로 즉위한 후 독일에 돌아와 세 번째 폴란드 침공을 준비했다. 그는 세 개의 군대를 지휘하며, 제국군은 독일 북부, 남부, 중부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하인리히 2세는 직접 중부 군대를 지휘했고, 동맹 슬라브 부족의 지원을 받아 마그데부르크에서 출발하여 오데르 강을 건너 폴란드로 진격했다. 하인리히 2세는 곧 남부에서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 북부에서 작센의 베른하르트 2세 공작과 합류했다.

제국군이 오데르 강을 건너 폴란드를 가로질러 진격하면서, 하인리히 2세의 군대는 수천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제국군은 캠페인 전반에 걸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미에슈코 2세가 지휘하는 모라비아 기사 부대를 제국 동부 변경백령에 대한 교란 공격에 보냈다. 제국군은 오데르 강 동쪽에서 영구적인 영토적 이득을 얻지 못한 채 폴란드에서 메르제부르크로 후퇴하여 이 공격에 대응했다. 독일로의 후퇴 중에 작센 동부 변경백 게로 2세는 1015년 말 폴란드군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동부 변경백령 공격 이후, 볼레스와프 1세의 군대가 공세로 전환했다. 1017년 미에슈코 2세는 마이센 포위에 보내졌으나 실패하고 폴란드로 후퇴했다.[23]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017년 여름에 휴전이 선언되었다. 1017년 가을까지 협상이 결렬되자 하인리히 2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그워구프에 도달했지만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 2세는 그 후 니엠차를 포위했지만 역시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의 군대가 니엠차를 포위했을 때, 겨울 추위로 인한 질병이 제국군을 황폐화시켰다. 공격이 실패하자 하인리히 2세는 독일의 메르제부르크로 후퇴해야 했다. 이 패배로 하인리히 2세는 전쟁을 끝내고 볼레스와프 1세와 진지한 평화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1018년 1월 30일,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는 바우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4] 폴란드 공작은 루사티아와 마이센의 분쟁 지역을 순전히 명목상의 봉신 조건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그의 봉건 영주로 인정했다.[25] 하인리히 2세는 또한 볼레스와프 1세가 폴란드 통치자의 키예프로의 원정을 지원하여 그의 사위인 스뱌토폴크가 키예프 왕위를 주장하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26]

6. 비잔티움 제국과의 분쟁

하인리히 2세의 이탈리아 정치 참여와 황제 대관식은 불가피하게 비잔틴 제국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969년, 황제 오토 1세는 비잔틴 황제 요한 1세 치미스케스와 동맹을 맺어 동방과 서방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를 공동 통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973년 오토 1세와 976년 요한 1세가 사망하면서 이 동맹은 약화되었다. 오토 1세의 후계자인 황제 오토 2세와 요한 1세의 후계자인 바실 2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배권을 놓고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27]

오토 1세와 오토 2세 치하에서 롬바르드 지도자 판둘프 철두는 서방 제국의 중앙 및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했다. 961년 오토 1세에 의해 베네벤토 공국과 카푸아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된 판둘프는 오토 2세의 충실한 부하로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978년까지 판둘프는 남부 롬바르드 공국 3곳(베네벤토, 카푸아, 살레르노)을 신성 로마 제국에 통합했다.[27] 그러나 981년 판둘프가 사망하면서 이탈리아 남부에서 비잔틴 제국에 대한 서방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28] 982년까지 판둘프가 통치했던 지역 전체가 붕괴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롬바르드 공국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고, 단일 지도자의 부재는 비잔틴 제국이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출할 수 있게 했다. 오토 2세는 비잔틴 영토에서 아불 카심 알리 이븐 알-하산 알-칼비가 이끄는 대규모 무슬림 군대와 마주쳤고, 시칠리아 토후국의 아부 알-카심에게 982년 7월 14일 스틸로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 패배로 이탈리아 남부의 세력 균형이 비잔틴 제국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의 진격을 반격하려던 오토 2세는 로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어린 아들 오토 3세가 그 뒤를 이었다. 어린 통치자와 해결해야 할 정치적 위기로 인해 서방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지배력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바실 2세는 서방의 미래 반격을 대비하여 방어군을 구축할 수 있었다.

1017년, 노르만 용병의 지원을 받은 롬바르드 귀족 멜루스 오브 바리는 풀리아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의 카테판 바실 보이오안네스 아래 1018년에 반격하여 칸네 전투에서 롬바르드-노르만 연합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멜루스는 패배 후 교황령으로 도망갔다.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성공으로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20년에 알프스를 넘어 북쪽 독일로 건너가 황제와 이탈리아 남부의 상황을 논의했다. 밤베르크에서 하인리히 2세를 만난 교황은 멜루스를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 세속 및 종교 지도자들을 동반했다. 하인리히 2세는 멜루스에게 ''풀리아 공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멜루스는 며칠 후인 1020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교황은 마인츠 주교와 뷔르츠부르크 주교와의 몇 가지 논란을 해결한 후 하인리히 2세를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대항하기 위한 세 번째 원정을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1022년, 하인리히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그는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약간 작은 군대와 함께 티레니아 해 해안으로 보내 카푸아 공국을 정복하도록 했다.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포포가 지휘하는 세 번째 군대는 아펜니노 산맥을 통과하여 트로이아 (FG)의 비잔틴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하인리히 2세와 합류했다. 필그림 대주교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아 카푸아와 살레르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하인리히 2세의 세 군대 모두 트로이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비잔틴 군대는 전면전을 강요할 수 없었고, 하인리히 2세는 질병으로 약해지고 큰 손실을 입은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2세는 배신한 카푸아 공작을 거의 처형할 뻔했지만, 필그림의 간청에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렸다. 대신 하인리히 2세는 그를 쇠사슬에 묶어 독일로 보냈고, 카푸아의 판둘프 5세를 카푸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 원정은 결국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판둘프 4세는 1026년에 비잔틴 동맹국으로서 카푸아 공작으로 복귀했다.

7. 제국 정책

하인리히 2세는 선임 황제였던 오토 3세의 정책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 오토 3세가 "로마 제국 부활"(''Renovatio imperii Romanorum'') 정책을 추진한 반면, 하인리히 2세는 "프랑크 왕국 부활"(''Renovatio regni Francorum'') 정책을 추구했다.[55]

하인리히 2세는 2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알프스 남쪽 이탈리아에는 세 번만 방문했다. 1004년 이부레아 변경백 아르두인 디 이브레아를 몰아낸 후, 1014년 황제 칭호를 받기 위해 돌아올 때까지 10년 이상 이탈리아 반도에 부재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하인리히 2세가 이탈리아에 오랫동안 부재했던 주된 이유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의 지속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오토 3세 재위 기간에는 볼레스와프 1세가 제국의 충실한 동맹국이었으나, 장기간의 독일-폴란드 전쟁으로 인해 두 국가는 16년 이상 전쟁을 벌였다.

하인리히 2세는 카롤루스 대제 이래의 보편적인 기독교 제국을 염두에 두고, 신권적인 제국 통치를 강화하고자 했다.[55] 제권 강화를 위해 작센, 로트링겐 등 제권을 위협하는 여러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고,[56] 제후들의 권력을 뒷받침했던 장원·사유 수도원 등을 황제의 영향 아래에 있던 주교좌 교회로 이관했다.[57]

하인리히 2세는 제국 통치에서 성직자들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는 통치 초기 10년 동안 성직자들의 지지 덕분에 귀족 반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의 매형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5세와 모젤 백작 프리드리히와 같은 친척들조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내부 권력 구조를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하인리히 2세는 세속 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이는 폴란드와의 일련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토 3세 치세 동안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는 중요한 동맹으로 여겨졌지만, 하인리히 2세는 그를 단지 신하로만 보았다.[13] 1019년에는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2세가 세속 귀족에 대한 존경심 부족에 좌절하여 하인리히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4]

7. 1. 제국 교회 제도

하인리히 2세는 선임 황제 오토 3세로부터 교회 관련 분쟁을 물려받았는데, 특히 메르제부르 교구 재건과 간더스하임 분쟁 해결이 중요했다.[40] 968년 황제 오토 1세가 설립한 메르제부르 교구는 헝가리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 슬라브족 선교를 위해 설립되었으나, 983년 슬라브 반란 이후 거의 폐지되었다.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선교 사업 재개를 위해 교구 재건을 명하고, 메르제부르의 티트마르를 주교로 임명했다.[29]

987년 오토 3세의 어머니 테오파누 섭정 기간 동안 간더스하임 수도원 관할권을 두고 마인츠 대주교와 힐데스하임 주교 간의 간더스하임 분쟁이 발생했다. 오토 3세와 테오파누의 개입으로 긴장이 완화되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인리히 2세는 1007년과 1021년에 분쟁을 진압했고, 1030년 제국 종교 회의에서 타협안이 추진되어 힐데스하임이 관할권을 얻었다.[30]

1017년 황후 쿠니군데가 병에 걸리자 하인리히 2세는 회복을 조건으로 수도원 건립을 맹세했다. 1018년 황후가 회복되자 카우풍겐 수도원 건설을 명했다. 하인리히 2세 사후 쿠니군데는 수도원으로 물러나 1040년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하인리히 2세는 교회 봉사를 지원하고 수도원 개혁을 추진했으며, 성직자 독신주의를 강력히 시행하여 성직자에게 부여된 토지와 직위가 상속되지 않도록 했다. 그는 교회 개혁, 선교 활동, 자선 재단 설립을 장려했다.[7]

하인리히 2세는 베르됭 수도원장에게 자신을 수도원에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으나, 수도원장은 맹세를 근거로 제국 행정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하인리히 2세는 세속 권력이 백성을 위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 확신했다.[7]

하인리히 2세는 교황 베네딕토 8세를 설득하여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를 포함시켰다. 이는 성령성부성자 모두에게서 발원한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으로, 교황 수위권 개념과 함께 1054년 교회 대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31][32]

하인리히 2세 복음서


오토 왕조의 제국 교회 제도는 하인리히 2세 치세에 절정에 달했다. 오토 1세는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여 제국 행정에 통합함으로써 족장 공국에 대한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33] 공작들은 정치적 지방주의를 선호했기에, 오토 왕조는 교회를 통해 제국을 통일하고 "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스로를 신앙의 옹호자로 내세웠다.[34] 주교와 수도원장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제국 제후'' 칭호를 부여했으나, 이들은 세습될 수 없었다. 오토 왕조는 사유 교회 주교 서임 및 임명 권한을 자신들에게 부여하고 충성을 요구했지만, 이는 교회법에 위배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더 많은 카운티를 주교의 세속 통치에 할당하고, 수도원과 교구에 많은 상징물과 토지를 기증했다.[36] 제국 수도원과 성직 기관은 제국 관료로 발전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는 하인리히 2세와 주교들의 협력이 강했으며 세속과 교회 문제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기록했다. 성직자들은 군사 문제에서 하인리히 2세를 봉건 영주로 여겼고,[35] 성직자 제후들은 하인리히 2세 군대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인리히 2세는 성직자를 통해 제국 통제력을 강화하고 교회 정책에 대한 통제력도 얻었다.[36][37]

1002년 오토 3세가 사망하고, 같은 해 6월 7일 하인리히 2세[50]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작센 공작, 로트링겐 공작 등은 하인리히 2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인리히는 제후령을 순회하며 승인을 받았다.[51] 1014년 로마에서 교황베네딕토 8세가 대관식을 거행했다.[52][53]

부르군트 왕루돌프 3세는 1006년 하인리히 2세를 상속자로 정했으나,[47][54] 하인리히 2세가 먼저 사망하여 부르군트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이는 콘라트 2세의 부르군트 왕국 병합 발판이 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로마 제국 부흥을 꿈꾸지 않았지만,[55] 카롤루스 대제 이래의 보편적 기독교 제국을 염두에 두고 신권적 제국 통치를 강화하려 했다.[55] 제권 강화를 위해 작센, 로트링겐 등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56] 제후들의 장원·사유 수도원 등을 주교좌 교회로 이관했다.[57] 제국 교회 체제[58] (왕국 교회 체제[59]) 하에 교회 조직과 제국은 더욱 결합되었고, 황제의 교회 인사 개입도 현저해졌다.[59][60]

하인리히 2세는 경건한 인물이었고,[48] 타락해 가던 교회를 우려했다. 교회 인사 개입은 세속화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성직자로서 고결하고 덕망 있는 인물이 추천되었다.[61] 클뤼니 수도원 등에서 고조되었던 교회의 숙정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제국과 교회 조직이 결합됨으로써 교회가 황제에게 장악될 우려도 있었다. 서임권 투쟁의 싹이 보였다.

7. 2. 밤베르크 교구 설립

밤베르크 대성당


1003년, 바이에른의 노르트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는 하인리히 2세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2세는 독일 왕위 주장을 지지하는 대가로 변경백을 바이에른 공국의 후계자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으나, 왕위에 오른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004년, 하인리히 2세는 변경백 하인리히를 폐위하고 변경백령을 폐지했다. 변경백령의 이전 영토에 대한 세속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1007년, 하인리히 2세는 독일에 밤베르크 교구를 설립하려는 의지를 발표했다. 바이에른 공국에서 성장한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를 좋아했으며, 결혼 후 자신의 영지를 아내인 룩셈부르크의 쿤이군데에게 지참금으로 주기도 했다. 이 지역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 사업은 이전에 뷔르츠부르크 교구의 일부로 풀다 수도원에서 수행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새로운 교구가 밤베르크 주변 지역의 이교도 슬라브족을 최종적으로 정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나, 새 교구가 이전 영토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게 되므로 뷔르츠부르크 주교의 상당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1007년 11월 1일, 하인리히 2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시노드를 열어 밤베르크 교구 설립에 대한 제국 주교들의 합의를 구축했다. 뷔르츠부르크 주교는 새로운 교구 설립으로 인한 영토 손실이 그의 대주교 승진으로 이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2세는 아이히슈테트 교구의 영토 일부도 계획된 교구에 할당했다. 시노드에서 하인리히 2세는 교구 설립 허가를 받았다. 또한 하인리히 2세의 제국 재상인 에버하르트가 새로운 교구를 이끌기 위해 마인츠 대주교이자 독일의 수석 사제인 빌리게스에 의해 서품될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새로운 교구의 확고한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프랑코니아 공국, 작센 공국, 카린티아 공국, 슈바벤 공국에 많은 군을 할당하는 등 광범위한 선물을 했다.[18]

7. 3. 귀족 정책

하인리히 2세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정치적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특히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는 하인리히 2세의 왕위 계승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헤르만 2세는 자신이 황제 오토 1세의 맏아들 리우돌프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오토 3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하인리히 2세와 헤르만 2세는 무력 충돌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슈바벤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경쟁해야 했다.

하인리히 2세는 슈바벤에서 헤르만을 제압할 수 없자,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상 로렌, 하 로렌, 프랑켄 등 왕국 내 여러 공국을 순방하며 신하들의 동의를 얻었다. 스트라스부르 근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헤르만 2세는 1002년 10월 1일에 하인리히 2세에게 항복했다. 하인리히 2세는 헤르만 2세가 다음 해 사망할 때까지 슈바벤 공작으로 남도록 허용했지만, 어린 헤르만 3세를 명목상의 후계자로 인정하면서도 사실상 공작령에 대한 모든 권한을 스스로 행사했다.[11]

1003년, 헨리히 폰 슈바인푸르트, 노르트가우 변경백이 바이에른에서 하인리히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2세는 변경백을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왕위에 오른 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이에른인들이 스스로 공작을 선출할 권리를 지지했다. 하인리히 2세의 지원으로 백작 룩셈부르크의 헨리 1세가 헨리 5세로서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배신당한 변경백 헨리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1004년에 폐위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노르트가우 변경백령을 폐지하고 1007년에 밤베르크 교구를 설립하여, 변경백령의 이전 영토에 대한 세속적 권한을 교구로 이전했다.[12]

오토 2세와 오토 3세의 치세처럼, 제국의 여러 독일 공작들은 하인리히 2세로부터 점점 더 독립해졌다. "독일" 정체성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알프스 남쪽 이탈리아에서도 지역 영주들이 독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국의 공작령들은 제국의 구성 부분이라기보다는 각 공작 가문의 개인적 소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13]

하인리히 2세는 제국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작령 내의 가문 구조를 극복하는 데 정책을 집중했다. 그는 다른 오토 왕조와 마찬가지로 공작들에 대한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토 1세, 오토 2세와 달리, 여러 독일 공작들은 더 이상 하인리히 2세와 긴밀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프랑켄 공작령과 작센 공작령이 제국의 핵심 지지 세력을 형성했지만, 슈바벤 공작령과 바이에른 공작령은 점점 더 반항적으로 변해갔다.[13]

전임자들과 달리, 하인리히 2세는 자신의 권위에 반항한 공작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이는 세속 귀족과의 갈등을 증가시켰고, 하인리히 2세는 제국 통치에서 성직자들의 지위를 강화해야 했다. 그는 통치 첫 10년 동안 성직자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귀족 반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의 매형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5세와 모젤 백작 프리드리히와 같은 친척들조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내부 권력 구조를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하인리히 2세가 세속 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점은 폴란드와의 일련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토 3세 치세 동안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귀중한 동맹으로 여겨졌지만, 하인리히 2세는 그를 단지 신하로만 보았다.[13]

1019년, 한때 충실했던 작센 공작 베른하르트 2세는 황제 오토 1세의 신뢰받는 측근이었던 헤르만 빌룽의 손자로, 세속 귀족에 대한 존경심 부족에 좌절감을 느껴 하인리히 2세에 반란을 일으켰다.[14]

8. 죽음과 계승자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하인리히와 쿤군데의 무덤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온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에서 병에 걸렸다. 부활절을 기념한 후 괴팅겐에 있는 자신의 제국 궁전으로 물러났다. 그는 만성적이고 고통스러운 요로 감염으로 고통받은 후 1024년 7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하인리히는 사망하기 전에 제국의 새로운 교회 관계 시스템을 확인하기 위해 교황과 협력하여 교회 회의를 소집하려 했으나 이 노력은 미완으로 남았다.[38]

황후 쿤군데는 하인리히를 밤베르크 대성당에 안치하도록 했다. 하인리히 2세는 상속자 없이 제국을 떠났지만, 제국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일부에서는 그와 쿤군데가 경건함과 왕족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상호 정조 서약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들의 결혼이 무자식이었기 때문에, 오토 왕조의 작센 왕조는 하인리히와 함께 멸망했다.[38]

1024년 9월 초, 독일 귀족들은 캄바에 모여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귀족들은 프랑코니아 귀족인 콘라트 2세를 하인리히 2세의 후계자로 선출했으며, 그는 잘리어 왕조의 첫 번째 일원이 되었다.

9. 시성

15세기에 묘사된 성 하인리히 2세와 쿤데군데


하인리히 2세는 1147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의 배우자인 쿤데군데는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39] 하인리히 2세의 유해는 1160년대 이단에 대항하는 원정에 사용되었다. 그는 스위스 바젤의 수호성인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 있는 성 하인리히 마리스트 형제 대학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40]

하인리히 2세의 축일은 1631년 로마 일반 전례력에 그의 사망일인 7월 13일 기념일로 추가되었다. 1668년에는 축일이 반 이중 축일로 7월 15일로 변경되었다. 이 등급은 1955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단순 축일로, 1960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3등급 축일로 변경되었다. 1969년, 축일은 선택 기념일로 다시 7월 13일로 변경되었다.[41]

하인리히 2세는 성 베네딕도회의 봉헌자였으며, 베네딕도회 봉헌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42]

10. 가계

하인리히 2세는 919년부터 1024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이전의 독일)을 통치한 왕과 황제의 오토 왕조의 일원이었다. 하인리히 2세는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 오토 1세의 종증손, 오토 2세의 재종형, 오토 3세의 육촌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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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3] 서적 The Right of Succession to the Empire of Germany, hereditary and elective the Booksel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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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Heinrich II. und Kunigunde Das heilige Kaiserpaar des Mittelalters https://core.ac.uk/d[...] CORE 2020-01-28
[6]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St. Henry II http://www.newadvent[...]
[7] 서적 My First Book of Saints Sons of Holy Mary Immaculate – Quality Catholic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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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3, c. 900–c. 1024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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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Feldzüge Heinrichs II. gegen den Polenherzog Boleslaw Chrobry http://www.hdbg.eu/k[...] Landesausstellung 2002
[21] 서적 Thietmari merseburgiensis episcopi chronicon
[22]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https://www.gutenber[...] Macmillan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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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World history Henry Holt and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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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간행물 Martyrologium Romanum
[39] 웹사이트 Neues über einen alten Kaiser? Heinrich II. in der Perspektive der modernen Forschung http://archiv.ub.uni[...] Uni Heidelberg
[40] 웹사이트 Heinrich II. https://www.mersebur[...] Merseburger Dom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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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웹사이트 Feast of St. Henry: Patron Saint of Oblates https://beingbenedic[...]
[43] 웹사이트 Henry II Holy Roman emperor https://www.britanni[...]
[44] 문서 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称号は「東フランク王」「フランク王」単にあるいは「王」と不安定で、また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存在しない。
[45] 문서 「2世」は曾祖父のザクセン朝初代国王ハインリヒ1世捕鳥王から数えた数字で、皇帝・イタリア王としては一人目のハインリヒ
[46]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最高位聖職者、すなわち教皇により戴冠していた。また神聖ローマ皇帝やドイツ王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47] 서적 成瀬、p. 149
[48] 서적 瀬原、p.121
[49] 서적 瀬原、p. 141
[50] 서적 成瀬、p. 141
[51] 서적 成瀬他、p. 142
[52] 서적 成瀬、p. 148
[53] 서적 瀬原、p. 132
[54] 서적 瀬原、p. 124
[55] 서적 成瀬他、p. 143
[56] 서적 瀬原、p. 125
[57] 서적 成瀬、p. 144
[58] 서적 瀬原、p. 137
[59] 서적 成瀬、p. 146
[60] 서적 瀬原、p. 137-138
[61] 서적 成瀬、p.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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