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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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언은 전한 무제의 측근으로, 무제가 교동왕이었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다. 무제가 즉위한 후 흉노 정벌을 지지하고 무예 실력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태후 왕씨의 미움을 샀다. 결국 영항 출입과 관련된 소문으로 태후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금 구슬로 구슬치기를 즐겨하여 장안의 아이들에게 구슬을 빼앗기기도 했다.
한언은 기마술에 능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무제가 교동왕이던 시절에 함께 배웠다. 무제는 즉위 이후 흉노 정벌을 염원했으며, 한언이 무술에 뛰어났기에 매우 총애하여 무제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 무제에게는 주위에서 불손하게 비치는 행동도 있었다고 한다.[1] 한언의 횡포에 분개한 이광의 장남 이당호에게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지만, 무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2]
한언은 기마술에 능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무제가 교동왕이었던 시절에 함께 배운 사이였다. 무제는 즉위 이후 흉노 정벌을 염원했으며, 한언이 무술에 뛰어났기에 매우 총애했다. 무제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한다.[1] 무제에게는 주위에서 불손하게 비치는 행동도 있었다고 하며,[1] 한언의 횡포에 분개한 이광의 장남 이당호에게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지만, 무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2]
2. 생애
강도왕 유비(무제의 이복 형)가 입조하여 무제의 상림원에서 사냥에 동행했을 때, 무제는 한언을 부차에 태워 수십 기와 함께 먼저 보냈다. 강도왕은 멀리서 그것을 보고 무제라고 생각하고 길가에 엎드려 기다렸지만, 한언은 그가 엎드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강도왕은 화가 나서 왕태후에게 "왕국을 반납하고, 한언처럼 황제 측근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언이 후궁에 출입하며 궁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왕태후는 한언에게 자결을 명했다. 무제는 감쌌지만 한언은 자살했다.
한언은 금구슬로 구슬치기를 즐겨 하였는데, 할 때마다 족히 열 개는 잃어버렸다. 때문에 장안(長安)의 아이들은 한언이 구슬치기를 하러 나올 때마다 쫓아와서, 한언이 구슬을 떨어뜨리면 그것을 주워 갔다.[7]
2. 1. 무제와의 관계
무제 유철(劉徹)이 교동왕(膠東王)이던 시절에 반독(伴讀)이 되어 가까워진 사이다. 유철이 즉위한 후에는 흉노 정벌을 지지하였으며, 무예에 뛰어나 유철의 총애를 받아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1] 한언은 이따금 유철에게 불손하게 굴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 한언의 발호(跋扈)에 분개한 낭중령(郞中令) 이광(李廣)의 아들 이당호(李當戶)로부터 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으나 유철은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2]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 유철의 이복형 강도왕(江都王) 유비(劉非)[3]가 입조하였을 때[4], 유철은 상림원(上林苑)으로 사냥을 나갈 적에 한언으로 하여금 수레에 타서 기병 수십 기와 함께 앞서 가게 하였다. 유비는 멀리서 한언을 보고는 그가 황제라고 생각하여 길가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언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유비가 분노해 태후 왕씨에게 이를 하소연하였고, 이때부터 태후는 한언을 미워하였다.
한언이 제약 없이 영항(永巷)[5]을 출입하였으며 나쁜 소문(姦聞)이 나서 태후에게 전해지자, 태후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한언을 죽이라고 하였다.[6] 유철은 내키지 않아했는데, 마침 한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2. 왕태후와의 갈등
무제 유철(劉徹)이 교동왕(膠東王)이던 시절 반독(伴讀)으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유철 즉위 후 한언은 흉노 정벌을 지지하였고 무예에 뛰어나 유철의 총애를 받아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1] 한언은 이따금 유철에게 불손하게 굴 때도 있었으며, 한언의 발호(跋扈)에 분개한 낭중령(郞中令) 이광(李廣)의 아들 이당호(李當戶)에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으나 유철은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2]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 유철의 이복형 강도왕(江都王) 유비(劉非)가 입조하였을 때[4], 유철은 상림원(上林苑)으로 사냥을 나갈 때 한언으로 하여금 수레에 타서 기병 수십 기와 함께 앞서 가게 하였다. 유비는 멀리서 한언을 보고 그가 황제라고 생각하여 길가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언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유비가 분노하여 태후 왕씨에게 "왕국을 반납하고, 한언처럼 황제 측근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하소연하였고, 이때부터 태후는 한언을 미워하였다.
한언이 제약 없이 영항(永巷)을 출입하였으며 나쁜 소문(姦聞)이 태후에게 전해지자,[5] 태후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한언을 죽이라고 하였다.[6] 유철은 내키지 않아했는데, 마침 한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3. 일화
무제 유철(劉徹)이 교동왕(膠東王)이던 시절 반독(伴讀)으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유철이 즉위한 후에는 흉노 정벌을 지지하였고, 무예에 뛰어나 유철의 총애를 받아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 한언은 이따금 유철에게 불손하게 굴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 한언의 발호(跋扈)에 분개한 낭중령(郞中令) 이광(李廣)의 아들 이당호(李當戶)에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으나 유철은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1][2]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 유철의 이복형 강도왕(江都王) 유비(劉非)[3]가 입조하였을 때[4], 유철은 상림원(上林苑)으로 사냥을 나갈 때 한언에게 수레를 타고 기병 수십 기와 함께 앞서 가게 하였다. 유비는 멀리서 한언을 보고 그가 황제라고 생각하여 길가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언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유비가 분노하여 태후 왕씨에게 이를 하소연하였고, 이때부터 태후는 한언을 미워하였다.
한언이 제약 없이 영항(永巷)[5]을 출입하고 나쁜 소문(姦聞)이 나서 태후에게 전해지자, 태후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한언을 죽이라고 하였다.[6] 유철은 내키지 않아했는데, 마침 한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언은 금구슬로 구슬치기를 즐겨 하였는데, 할 때마다 족히 열 개는 잃어버렸다. 때문에 장안(長安)의 아이들은 한언이 구슬치기를 하러 나올 때마다 쫓아와서, 한언이 구슬을 떨어뜨리면 그것을 주워 갔다.[7]
3. 가계
4. 평가
무제의 이복 형인 강도왕 유비가 입조하여 무제의 상림원에서 사냥에 동행했을 때, 무제는 한언을 부차에 태워 수십 기와 함께 먼저 보냈다. 강도왕은 멀리서 그것을 보고 무제라고 생각하고 길가에 엎드려 기다렸지만, 한언은 그가 엎드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이것을 본 강도왕은 화가 나서 왕태후에게 "왕국을 반납하고, 한언처럼 황제 측근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언이 후궁에 출입하며 궁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한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왕태후는 한언에게 자결을 명했다. 무제는 감쌌지만 한언은 자살했다.
5. 출전
참조
[1]
서적
李広伝
[2]
서적
李将軍列伝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서적
嫣侍上, 出入永巷不禁, 以姦聞皇太后. 皇太后怒,使使賜嫣死.
[7]
서적
한언금탄(韓嫣金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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