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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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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창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제1사단이 함창 지역에서 북한군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격퇴한 전투이다. 제1사단은 유재흥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문경 공격을 중단하고 함창으로 이동하여 군단 서측방을 방어하게 되었다. 7월 28일부터 29일까지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며, 제12연대, 제13연대, 제11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미 제8군 사령관의 철수 명령에 따라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 확보를 통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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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7월 26일 ~ 7월 29일
장소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
결과대한민국의 전략적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대한민국 지휘관유재흥 제2군단장 준장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김종오 제6사단장 준장
박기병 제12연대장 대령
김동빈 제11연대장 중령
김재명 제1대대장 소령
이두황 제2대대장 소령
정영홍 제3대대장 소령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1대대장 소령 (7월 28일부터)
조성래 제2대대장 소령
이무종 제3대대장 소령
최영희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중좌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김병천 제19연대장 대좌
이승준 제21연대장 대좌
태병열 제23연대장 대좌
병력 규모
대한민국 병력7133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병력불명
피해 규모

2. 배경

7월 25일,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백령장 방어 임무를 미 제25사단 예하 제24연대에게 인계하고 함창으로 이동하던 중 상주에서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같은 날 12시에 함창에 도착한 제1사단은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김동빈 중령의 제5연대와 박기병 대령의 제20연대를 편입하여 재편성하였다. 제5연대는 제11연대에, 제20연대는 제12연대에 각각 통합되어 사단 전력이 강화되었다.

재편 후 제1사단은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의 우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주 임무는 김종오 대령의 제6사단 정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제11연대는 금룡리(함창 동북쪽 4km)에, 제12연대는 막곡리(금룡리 북쪽 4km)에 배치되어 공격 준비를 하였다. 한편, 최영희 대령이 이끄는 제13연대는 제5연대가 통합되기 전 배치되었던 검안리(함창 서쪽 5km)에 전개하여 군단의 서측방 방어를 맡았다.

이 시기 제1사단은 제5연대와 제20연대의 통합으로 총 병력이 7,133명에 달했으며, 공석이었던 지휘관들도 충원되어 지휘체계가 안정되었다. 또한 보급 지원 체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M-1 소총 등 각종 장비가 보충되어 사기가 크게 오른 상태였다.

2. 1. 작전 계획

7월 27일, 제1사단은 문경 탈환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북한군의 집중 포화로 진격이 저지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정면 돌파 외에도 일부 병력으로 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왕릉리-농암리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제13연대 진지로 몰려드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제1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군단 서측방의 방어가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의 방어력 보강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비교적 북한군과의 교전이 적었던 군단 우익의 제1사단을 좌익으로 이동시켜 서측방 방어를 강화하기로 하고, 23:00에 제1사단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였다. 당시 제1사단은 제5연대와 제20연대를 통합하여 병력이 7,133명으로 늘어났고, 지휘관 충원과 보급 개선으로 사기가 높은 상태였다.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군단장으로부터 "문경 공격을 중단하고 함창으로 철수하여 군단 서측방 방호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좌측 전방에 있던 제12연대는 신현리-295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후속 부대를 견제하고 있어 즉시 철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백선엽 준장은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협의하여, 제12연대를 해당 지역에 남겨 제6사단의 작전 통제하에 두는 대신, 제6사단 제19연대의 1개 대대를 제1사단에 배속받기로 결정하고 군단장의 승인을 얻었다. 이를 통해 제1사단은 군단 서측방 방어 임무 수행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3. 전투 과정

7월 25일 함창으로 이동한 제1사단은 백선엽 대령(이동 중 준장 진급)의 지휘 아래 재편성에 들어갔다. 기존의 제5연대(김동빈 중령)는 제11연대에, 제20연대(박기병 대령)는 제12연대에 각각 통합되었다. 재편성을 마친 제1사단은 제2군단(유재흥 준장)의 우익으로서 제6사단(김종오 대령) 전면을 위협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1사단은 7월 27일 06시, 문경 탈환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제11연대는 금룡리에서 부운령을 거쳐 외어리 방면으로, 제12연대는 막곡리에서 오정산을 거쳐 오천리 방면으로 진격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포격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중단되었다. 당시 제6사단과 미군 포병, UN 공군의 지원 아래 국군은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군은 정면 돌파가 어려워지자 일부 병력을 이용한 국군 후방 교란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7월 27일 저녁 무렵 왕릉리-농암리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제13연대 진지로 몰려드는 상황은 이러한 북한군의 우회 기동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조짐과 미 제25사단 예하 부대의 이동으로 생긴 서측방의 공백을 간파한 제1군단장 유재호 준장은 군단 서측방 방어 강화를 위해 제1사단을 좌익으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하고, 7월 27일 23시에 이를 명령했다.

한편, 제1사단은 제5연대와 제20연대의 통합으로 병력이 7,133명에 달했고, 지휘관 충원 및 M-1 소총 등 장비 보급이 이루어져 사기가 높은 상태였다. 제1사단이 공식적으로 군단 좌익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은 7월 28일 06시부터였으나, 서측방 방어를 담당할 제13연대(최영희 대령)는 7월 26일 함창 도착 즉시 제5연대로부터 검안리 일대 진지를 인수하여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7월 27일 밤, 제13연대는 정찰과 피난민 제보를 통해 북한군의 구체적인 우회 기동을 포착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3. 1. 7월 28일

7월 27일 밤, 제1사단이 군단 좌익으로 전환 배치되는 가운데, 서측방 방어를 담당하던 최영희 대령의 제13연대는 북한군의 새로운 움직임에 직면했다. 앞서 7월 26일 15시에 함창군에서 제13연대는 김동빈 중령의 제5연대로부터 진지를 인수하여 992번 국도를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1대대(김진위 소령)는 366고지에, 제2대대(안광영 소령)는 212고지에 배치되었고, 제3대대(최병순 소령)는 구릉리에 예비대로 대기 중이었다.

7월 27일 저녁, 왕릉리와 가은리 부근 주민들이 제13연대 진지로 피난해 오면서 "북한군이 마을에 집결해 있으며, 밤에 도로를 따라 남침할 것으로 보인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어서 밤 10시경, 연대 정찰대로부터 "장갑차를 동반한 약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주막동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부대는 992번 도로를 따라 아천 방면으로, 다른 부대는 동막리 방면의 이름 없는 도로를 따라 동진하고 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동막리 방면 도로는 함창이나 상주로 이어질 수 있는 경로였다.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은 사단 정보 참모 최혁기 소령에 의해서도 분석되었다. 최 소령은 북한군이 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정면 돌파가 어려워지자, 미 제25사단 예하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해진 서측방 후방 지대를 교란하기 위해 우회 기동을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북한군이 이미 지난 밤부터 장갑차를 동반한 연대 규모 병력을 977번 도로를 통해 침투시켜 주막동에 이르렀고, 여기서 992번 도로와 동막리 방면으로 분산 이동 중임을 보고하며 제11연대의 조속한 진지 점령을 촉구하였다.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최영희 연대장은 즉시 예비대인 제3대대를 국사봉으로 급파하여 중촌리와 동막리 사이의 이안천 도하 지점을 봉쇄하도록 조치했다. 동시에 제1, 2대대에도 북한군의 침투 상황을 알리고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북한군의 우회 침투를 저지하고 함창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한 신속한 대응이었다. 제1사단은 7월 27일 23시에 군단 좌익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7월 28일 06시부터 공식적으로 군단 서측방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3. 2. 7월 29일

3번 국도와 조봉(새봉) 방면에 주력을 집중하던 북한군은 국군의 집중 포화로 정면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작전 계획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7월 28일 북한군 제13사단 21연대가 군단 서측방 침투를 시도한 데 이어, 같은 날 저녁부터는 북한군 제1사단 예하의 황석 대좌가 이끄는 제1연대와 김양춘 대좌가 이끄는 제2연대가 국군 제1사단 정면에서 포착되었다. 이는 북한군이 공격 방향을 변경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대비하여 제1사단백선엽 준장은 밤 사이 제6사단에서 복귀한 제12연대를 제13연대와 제11연대의 공동 책임 지역인 992번 도로와 이안천 일대에 투입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하도록 조치했다.

제13연대는 전날 992번 도로를 따라 침투하려던 북한군 제13사단 예하 이승준 대좌의 제21연대를 격퇴한 상태였다. 연대는 제1대대를 428고지(366고지 북쪽 2km), 제2대대를 366고지(일명 덥재산)에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또한, 이전에 제11연대에 배속되었던 제3대대를 181고지(366고지 동쪽 2km)로 이동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한편, 3번 국도를 주축으로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오던 최광 소장의 북한군 제1사단 예하 제1연대와 제2연대는 760고지(428고지 서쪽 3km)와 장암리(366고지 서쪽 5km) 방면으로 우회하여, 패주한 제21연대 패잔병들과 합세했다. 이들은 전날 밤 야습에 이어 7월 29일 새벽에 다시 한번 제13연대 정면을 공격해왔다.

제12연대는 전날 제6사단의 작전 통제에서 벗어나 23시 소암리로 철수하여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7월 29일 새벽 4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긴급 명령에 따라 경돌 저수지 동쪽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7월 27일 영강 도하 작전 중 손실이 컸던 제1대대를 집결지에 남겨 부연대장 김묵곤 중령의 지휘 아래 재편하도록 하고, 조성래 소령의 제2대대와 이무중 소령의 제3대대를 경돌 저수지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제2대대는 212고지 북쪽에, 제3대대는 그 남쪽에 배치되었다. 이 시각 제13연대는 북한군 제1사단 제2연대와 교전 중이었다.

제12연대의 작전 지역 정면에는 경돌 저수지가 놓여 있었고, 992번 도로 북쪽은 제13연대가, 이안천 남쪽은 제11연대가 방어하고 있어 북한군의 침투가 비교적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러나 992번 도로 및 212고지 남단과 연결되는 경돌 저수지 수문 부근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제12연대가 이 지역으로 긴급히 투입된 것이었다.

제13연대가 북한군의 새벽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적의 모습은 관측되지 않았으나, 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북한군 일부가 992번 도로 남쪽 숲 속에 숨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며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2, 3대대장에게 각각 1개 중대 병력을 전방으로 보내 경계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동향을 탐색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4. 결과 및 영향

제1사단은 함창군 일대에서 제2군단의 우익으로서 군단 후방으로 침투하려던 북한군 제13사단 및 제1사단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시기 전반적인 전황은 국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는 향후 반격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워커 중장은 그의 작전 통제 하에 있는 한국군과 미군에게 8월 1일을 기해 현 저지선에서 철수하여 낙동강 방어선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제1사단백선엽 준장은 7월 31일, 인접한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같은 날 제12연대를 낙동리(상주 동쪽 13km)로 먼저 보내 도하 지점과 장비를 확보하도록 했다. 제1사단 주력 부대는 8월 1일 밤을 이용해 함창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상주 부근에서 미 제25보병사단 예하 부대의 검문이 한 차례 있었을 뿐, 8월 3일 낙동강 도하를 완료할 때까지 북한군의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낙동강을 건넌 제1사단은 제2군단의 좌익 부대로서 낙정리(상주 남동쪽 15km)부터 왜관 북쪽까지 남북으로 방어선을 형성했다. 제12연대, 제11연대, 제13연대 순서로 배치되었으며, 오른쪽에는 제6사단이, 왼쪽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각각 인접하게 되어 한국 전쟁 개전 이후 처음으로 유기적으로 협조된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는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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