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의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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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상의 맹은 북송과 여진의 금나라가 맺은 동맹으로, 요나라를 공동으로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송나라가 연운십육주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북송은 요나라와의 전연의 맹으로 평화를 유지했지만, 군사력이 약해 요나라의 위협에 시달렸다. 해상 동맹은 금나라의 도움을 받아 연운십육주를 되찾으려는 시도였으나, 북송의 군사적 무능함과 배신 행위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금나라는 북송을 침공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북송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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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탁주가 권력 강화를 위해 금나라를 공격하고자 일으킨 개희북벌은 오희의 배신과 군사적 실패로 끝나 남송에 정치적,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해상의 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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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군사 동맹 |
체결일 | 1120년 (선화 2년) |
장소 | 바다 위 (정확한 장소는 기록되지 않음) |
관련 국가 | 송나라 여진족 금나라 |
배경 | |
목표 | 요나라 협공 및 분할 통치 연운 16주 회복 |
송나라의 상황 | 요나라에 대한 군사적 열세 금나라의 군사적 성공에 대한 기대 |
금나라의 상황 | 송나라의 경제적 지원 필요 요나라 정복 후 송나라와의 관계 설정 필요 |
주요 내용 | |
군사적 협력 | 금나라는 요나라를 공격, 송나라는 연운 16주 공격 지원 요나라 멸망 후,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되찾고 금나라에 매년 은과 비단을 제공 |
비밀 유지 | 맹약 내용은 요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진행 |
결과 및 영향 | |
요나라 멸망 | 금나라의 군사적 성공으로 요나라 멸망 (1125년) |
송나라의 실패 | 연운 16주 회복 실패 군사력 부족으로 금나라 지원에 실패, 오히려 금나라의 침략 빌미 제공 |
정강의 변 발생 | 금나라의 송나라 침략으로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히는 정강의 변 발생 (1127년) |
남송 시대 개막 | 정강의 변 이후 고종이 남송을 건국하며 수도를 남쪽으로 옮김 |
금나라의 성장 | 송나라의 경제적 지원과 군사적 약점을 파악, 화북 지역 지배 |
평가 | |
송나라의 외교적 실패 | 군사적 능력 부족을 간과하고 금나라와의 동맹을 추진, 국가적 위기 초래 |
금나라의 전략적 성공 | 송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 장악 |
관련 항목 | |
관련 인물 | 휘종 흠종 고종 완안아골타 (금 태조) |
관련 사건 | 정강의 변 정강 靖康 靖康の変 |
관련 장소 | 연운 16주 |
2. 배경
송나라가 건국되기 전,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세울 때 요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할양했는데, 이곳은 북방 민족의 남하를 막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을 잃은 후, 한족 왕조는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 어려웠고, 북송 태종은 이곳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북송은 건국 초기부터 조광윤의 문치주의 정책으로 군대가 약했다. 이 때문에 서하 등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에 항상 노출되었고, 특히 북방의 요나라는 강력한 군사력과 연운십육주 문제로 인해 가장 큰 위협이었다. 북송은 진종 시대 이후 전연의 맹과 같은 조약을 맺고, "세폐"라는 금품을 제공하며 요나라와 명목상의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2]
2. 1. 북송의 대외 관계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세우는 과정에서 요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할양했다. 연운십육주는 한족 왕조가 북방 이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한 주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요나라에 할양된 이래 한족 왕조는 거란족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북송 태종은 이곳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다.북송 진종 때 요 성종이 친정을 하여 남하하자 진종도 친정하여 이에 맞섰고 전연의 맹을 맺어 화의를 도모했다. 이를 계기로 송나라와 요나라의 현재의 국경선을 양측이 인정하고 송나라가 요나라에 세폐를 제공하기로 했다.[2] 1005년, 송나라와 거란의 요나라는 취안연 조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송나라는 공식적으로 16주를 잃은 것을 인정했다.[2] 수십 년간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졌다.[2] 송나라는 해상 동맹 이후 취안연 조약을 파기했다.[2]
해상 동맹의 조건은 송나라와 여진의 금나라가 공동으로 거란의 요나라를 침략하는 것이었다.[2] 성공할 경우, 송나라는 거란의 요나라에 대한 연례 지불금을 여진의 금나라로 이전하고, 여진의 금나라는 16주를 송나라에 넘겨주기로 했다.[2]
북송은 건국 초부터 태조 조광윤의 방침에 따라 문치주의가 국시였고 군대는 약체였다. 이 때문에 항상 서하 등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고, 그중에서도 북방의 요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영토 문제(연운십육주)라는 불씨를 안고 있다는 사정 때문에 최대의 위협이었다. 이 때문에 북송은 진종 시대 이후, 대외적으로는 전연의 맹 등을 대표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세폐”라 칭하는 금품을 지불함으로써 명목상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휘종(徽宗)의 정화(政和) 5년(1115년)에 금(金)의 태조 아골타(阿骨打)는 요(遼)의 토벌군을 격파하고 국가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관찰하던 북송(北宋)은 동관(童貫)·조량사(趙良嗣) 등이 급성장하는 금과 손을 잡고 요를 협공하는 것을 건의하여, 마정(馬政)과 그의 아들 마확(馬擴)을 파견하여 금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육로로는 요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마정·마확은 해로로 금의 영토인 요동(遼東)으로 향했다.
협상 결과 동맹이 성립되었고, 해로로 상호 왕래했던 것에서 이 조약은 “해상의 맹(海上の盟)”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2. 국제 정세 변화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세우는 과정에서 요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할양했다. 연운십육주는 한족 왕조가 북방 이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한 주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요나라에 할양된 이래 한족 왕조는 거란족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북송 태종은 이곳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다.북송 진종 때 요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자 진종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에 맞섰고, 전연의 맹을 맺어 평화적인 관계를 도모했다. 이를 계기로 송나라와 요나라는 현재의 국경선을 양측이 인정하고 송나라가 요나라에 세폐를 제공하기로 했다. 1005년, 송나라와 거란의 요나라는 취안연 조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송나라는 공식적으로 16주를 잃은 것을 인정했다.[2] 수십 년간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졌다.[2] 송나라는 해상 동맹 이후 취안연 조약을 파기했다.[2]
해상 동맹의 조건은 송나라와 여진의 금나라가 공동으로 거란의 요나라를 침략하는 것이었다.[2] 성공할 경우, 송나라는 거란의 요나라에 대한 연례 지불금을 여진의 금나라로 이전하고, 여진의 금나라는 16주를 송나라에 넘겨주기로 했다.[2]
북송은 건국 초부터 태조 조광윤의 방침에 따라 문치주의가 국시였고 군대는 약체였다. 이 때문에 항상 서하 등 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고, 그중에서도 북방의 요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영토 문제(연운십육주)라는 불씨를 안고 있다는 사정 때문에 최대의 위협이었다. 이 때문에 북송은 진종 시대 이후, 대외적으로는 「전연의 맹」 등을 대표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세폐”라 칭하는 금품을 지불함으로써 명목상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휘종(徽宗)의 정화(政和) 5년(1115년)에 금(金)의 태조 아골타(阿骨打)는 요(遼)의 토벌군을 격파하고 국가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관찰하던 북송(北宋)은 동관(童貫), 조량사(趙良嗣) 등이 급성장하는 금과 손을 잡고 요를 협공하는 것을 건의하여, 마정(馬政)과 그의 아들 마확(馬擴)을 파견하여 금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육로로는 요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마정과 마확은 해로로 금의 영토인 요동(遼東)으로 향했다.
협상 결과 동맹이 성립되었고, 해로로 상호 왕래했던 것에서 이 조약은 “해상의 맹(海上の盟)”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경과
1115년(정화 5년/천경 5년/수국 원년) 금나라 건국을 전후로 여진족이 요나라 군대를 격파해나가자, 북송은 동관, 조양사 등의 주도로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협공하기로 했다. 마정과 마확 부자를 파견하여 교섭을 진행, 바닷길을 통해 금나라와 동맹을 성사시켰다.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를 송나라에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방랍의 난 발생으로 북송은 병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해야 했고, 이후 요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야율대석, 야율순 등의 저항에 막혀 연경 공략에 실패하고 백구하까지 후퇴했다. 유연경의 지휘 아래 연경 기습을 시도했으나 야율대석의 방어에 실패했고, 이처온과의 내통을 통한 반란 유도 역시 야율대석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결국 북송은 금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금 태조는 세 방향에서 연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금나라 신하들은 북송의 무능을 이유로 연경 양도에 반대했지만, 금 태조는 맹약을 지켜 연운십육주를 넘겨주었다. 다만, 주민과 재산을 약탈하고 빈 땅으로 만든 뒤, 막대한 전비를 요구하여 실리를 챙겼다.[2]
3. 1. 북송의 군사적 무능
1115년 금나라가 건국되고 여진족이 요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상황에서, 북송은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방랍의 난이 발생하여 북벌군을 반란 진압에 투입해야 했고, 이로 인해 북송은 요나라 공격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방랍의 난을 진압한 후, 동관을 지휘관으로 하여 북송군이 출병했지만, 야율대석·야율순 등이 이끄는 북요의 저항은 거셌다. 북송군은 수도 연경 공략에 실패하고 백구하(白溝河)까지 후퇴해야 했다. 유연경의 지휘 아래 연경을 기습했지만, 야율대석의 끈질긴 방어에 또다시 실패했다. 동관은 북요의 이처온과 내통하여 반란을 유도했지만, 이마저도 야율대석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결국 북송은 스스로의 힘으로 연경을 함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금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금 태조는 세 방향에서 연경을 공격했고, 야율대석은 거용관에서 맞섰지만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연경은 함락되었다. 금나라 신하들은 북송이 연경 공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금 태조는 맹약을 지켜야 한다며 연운십육주의 주민과 재산을 약탈한 뒤 빈 땅이 된 연운십육주를 북송에 양도했다. 또한, 북송에 막대한 전비를 요구하여 실리를 챙겼다.[2]
3. 2. 금나라의 연경 함락
1115년(정화 5년/천경 5년/수국 원년), 금나라가 건국된 직후 여진족은 요나라 군대를 연이어 격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의 동관, 조양사 등은 금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주장했고, 마정과 그의 아들 마확을 파견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바다를 통해 금나라에 간 마정과 마확은 동맹을 성사시켰고,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만리장성 이남 지역인 연운십육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온전히 송나라에 넘기기로 했다.하지만 이때 송나라에서 방랍의 난이 발생하여 연운십육주 공격에 투입할 병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해야 했다. 방랍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야율대석, 야율순 등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의 저항이 거세어 수도 연경 공략에 실패하고 백구하까지 후퇴해야 했다. 야율순이 죽은 뒤 유연경의 지휘 아래 다시 연경을 기습했지만, 야율대석의 끈질긴 방어에 또다시 실패했다. 동관은 요나라의 이처온과 내통하여 반란을 유도했지만, 이 역시 야율대석에게 발각되어 이처온은 처형되었다.
결국 동관은 금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금 태조는 세 방향에서 연경을 공격했다. 야율대석은 거용관에서 맞섰지만 패배하여 금나라에 사로잡혔고, 연경은 함락되었다. 금나라 신하들은 송나라가 연경 공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며 연경을 송나라에 넘기지 말 것을 주장했지만, 금 태조는 맹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대신 연운십육주의 주민과 재산을 약탈한 뒤 빈 땅이 된 연운십육주를 송나라에 양도했으며, 이때 들었던 전비를 송나라에 요구하여 받아내는 실리를 택했다.
4. 파탄
송나라는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몰아내고 연운십육주를 회복했지만, 이후 금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를 거듭했다.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장각(張覺)을 받아들이고, 요나라와 비밀 조약을 맺는 등 금나라를 적대시했다. 결국 분노한 금나라는 황하(黄河)를 건너 개봉(開封)을 공격하여 북송을 멸망시켰다. 1127년, 금나라는 송나라 황제 흠종과 휘종을 사로잡고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이 사건은 정강의 변으로 불리며, 북송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2]
4. 1. 송나라의 배신 행위
송나라는 금나라와 협력하여 연운십육주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나라는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장각의 망명을 받아주고 요나라와 밀약을 맺어 금나라에 대항하는 요나라를 몰래 도와주는 등 금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를 이어갔다.[2] 결국 분노한 금 태조는 황하를 넘어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했고 1127년 북송이 멸망하고 강남에서 남송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정강의 변).[2]4. 2. 정강의 변과 북송 멸망
송나라는 금나라와 협력하여 연운십육주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나라는 금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장각의 망명을 받아주고 요나라와 밀약을 맺어 금나라에 대항하는 등 금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를 이어갔다.[2] 분노한 금 태조는 황하를 넘어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했고 1127년 북송이 멸망하고 강남에서 남송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정강의 변).[2]참조
[1]
Harvnb
[2]
서적
Beyond Power Transitions: The Lessons of East Asian History and the Future of U.S.-China Relat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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