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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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건은 1907년 출생하여 1987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남종화가이다. 소치 허련의 손자이자 미산 허형의 아들로,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1944년에는 총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전남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남종화 연구원을 개원하고, 백양회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운림산방을 재매입하여 관리했으며, 목포 난석회 회장과 예총 목포지부장을 지내며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고미술품과 수석을 목포시에 기증하여 남농미술관(현 남농기념관)을 건립했고, 남농상을 제정하여 후배들을 지원했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선출되었으며, 저서로 '남종회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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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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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 1. 출생과 가계
허건은 1907년[1]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서 조선 헌종 때 궁중화가였으며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시·서·화’ 삼정이라 불리던 화공 소치 허유(또는 허련) 선생의 손자이며 마찬가지로 화가였던 미산 허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허윤대, 동생 허림 역시 화가였다.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충정공 허종(許琮)의 15대손으로 그의 선대는 대대로 화가 가문이었다. 아버지 허형은 그가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만류하였으나 그는 화가가 되기를 고집하여 아버지도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어깨너머로 사군자를 배웠다가 그림의 재주를 알아본 부친에게 화술을 전수받았다.[1]2. 2. 일제 강점기 활동
허건은 15세 때 강진의 세류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집안이 목포로 이사하여 목포북소학교로 전학했다. 소학교 재학 중 전국소년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27년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졸업하고 부친으로부터 익힌 그림이 제9회 선전(오늘날의 국전에 해당)에서부터 23회까지 연속 입선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4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및 총독상을 수상하였으나, 추운 겨울 화실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동상에 걸렸으나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치료를 못하고 1943년 36세 되던 해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아버지 허형이 매각한 운림산방을 형 허윤대와 함께 돈을 모아 다시 매입하였고, 허윤대 사후 그가 운림산방을 관리하게 되었다.
2. 3. 광복 이후 활동
다리를 잃은 것에 굴하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림을 그렸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고[2] 1955년에는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활동이 인정을 받아 전남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예술원활동이 인정을 받았다. 1946년 남종화를 연구하는 남화 연구원을 개원했고, 1955년 국전의 초대 작가로 초빙되었으며 1957년 화가들의 모임인 백양회(白陽會)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3]1975년 목포 난석회의 창림에 참여하여 3대 난석회 회장을 역임하고 예총 목포지부장에도 선출되어 9년 동안을 예총 목포지부장을 지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 소치, 아버지 미산을 중심으로 귀한 고미술품과 수석들을 아낌없이 목포시에 기증하고 남농미술관(후에 남농기념관의 전신)을 지어 후배들로 하여금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보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1976년 남농상(南農賞)을 제정하여 후배 화가와 서예가들을 후원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선출되었다.
2. 4. 사후
허건은 1987년 서울대병원에서 십이지장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회복이 어렵다는 통고를 받았다. 목포의 집으로 내려가던 중 차안에서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무안군 삼양면 왕산리에 안장되었다.3. 작품 세계
4. 사회적 활동 및 평가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부산에서 먼 길을 온 노파에게 무료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뒤에 노파는 아들을 치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선물을 보내왔으나 사양하였다. 각종 자선 사업에도 동참하여 기금을 마련하였으며, 고아와 불우한 노인에게 기탁금을 희사하기도 하여 그에게는 목포의 어른, 호남의 어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80년 5월 그의 작품 회고전이 동아일보사 주최로 서울에서 열렸을 때 주위에서 한번 다녀올 것을 권유했으나 당시 광주에서 사람이 상하는데 전람회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부끄럽다며 사양하였다.
5. 상훈
- 1979년 목포 성옥문화상(聲玉文化賞)을 수상하였다.
- 1982년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수훈받았다.
- 1982년 목포시민상을 수상하였다.
- 1985년 전라남도 무등문화상을 수상하였다.
6. 저서
- 남종회화사(1994)
7. 가족 관계
할아버지 소치 허련의 넷째 아들이 미산 허형이며, 허건 역시 그의 아버지 허형의 넷째 아들이었다. 백부는 허은(許殷)으로 화가였고 선미산이라 불렸다. 중부는 허략, 숙부는 허함이다. 형은 허윤대, 허용대, 허송대이고, 동생은 허림이다. 허윤대의 아들은 허원만이며, 그의 아들은 화가 허은(許垠)이다. 허용대의 아들은 허원의이고, 그의 아들은 화가 허청규이다. 허림의 아들은 화가 허문이다.
부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들로는 허경, 허병, 허연이 있다. 허경의 아들은 허진이고, 허병의 아들은 허재와 허준이다. 허연의 딸은 허윤선과 허윤경이다. 딸은 허기숙, 허차정이다.
참조
[1]
문서
허건의 출생 년도가 1908년이라는 설
[2]
웹사이트
(제목 정보 없음. 추가 정보 필요)
http://namdokorea.co[...]
[3]
웹사이트
(제목 정보 없음. 추가 정보 필요)
http://namdokore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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