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허영 (영화 감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허영은 일제강점기 친일 영화를 연출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영화 감독이다. 함경도 출신으로 만주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본에서 영화 관련 경력을 쌓은 후 1941년 친일 영화 《너와 나》를 연출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태평양 전쟁 중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었다가 광복 후 현지에 머물며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1952년 자카르타에서 사망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연극/영화 부문으로 포함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도네시아의 영화 감독 - 카밀라 안디니
    카밀라 안디니는 인도네시아의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이며, 2011년 영화 《거울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로 데뷔하여 여러 작품을 연출하고 2023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담배 소녀》를 연출했다.
  • 인도네시아의 영화 감독 - 해피 살마
    해피 살마는 인도네시아의 배우, 작가, 연극 제작자이자 보석 디자이너로서, 소설 출판과 연극 배우 활동을 병행하며 Titimangsa 재단을 설립하여 문화 유산 보존에 기여했고, 영화 주연 배우로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인정받았으며, 보석 브랜드 툴롤라를 설립하여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안석주
    안석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영화감독, 작사가로, 미술,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시사만화 연재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언론 활동, 〈우리의 소원〉 작사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나운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 1952년 사망 - 지그메 왕축
    부탄의 제2대 국왕인 지그메 왕축은 교육 및 인프라 개선, 사법 제도 개혁 등 국내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영국령 인도 및 인도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 1952년 사망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허영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허영
본명알 수 없음
출생1908년
출생지대한제국 함경도
사망1952년 9월 9일
사망지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국적일본
분야영화연출
교육알 수 없음
참고 문헌
저자김재용 외
제목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문학의 논리
날짜2003-06-20
출판사역락
출판 위치서울
ISBN8955563132
보론 - 3. 친일영화의 분류와 자발성

2. 생애

함경도 출신으로 만주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초기 생애는 불분명하다.[1] 10대 시절인 1920년대 초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계에 입문하여 조감독, 각본가, 평론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1941년에는 내선일체와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국책 영화 《너와 나》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 제작 및 관련 활동을 통해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다.[5]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육군 보도반원으로 인도네시아에 파견되어 선전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후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영화 감독 등으로 일하다가 1952년 자카르타에서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일본에서의 활동

함경도 출신으로 만주에서 자란 것으로 추정되나[1], 정확한 어린 시절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0대 시절인 1922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쇼치쿠키네마 촬영소 등에서 조감독과 각본가로 일하며 영화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1929년부터는 마키노 영화에서 조감독과 각본가로 활동했다. 이때 요시카와 에이지 원작의 『처녀 손톱 점쟁이』, 하세가와 신 원작의 『붉은 박쥐』 등의 각본을 담당했으며, 야마모토 큐이치로와 함께 옛 작품들을 모아 편집한 『마키노 대행진』 작업에도 참여했다.

1931년 6월경에는 후타가와 분타로 감독과 함께 쇼치쿠 영화 시모가모 촬영소로 이적하여 각본가 및 조감독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37년에는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의 영화 「오사카 여름의 진」 촬영 당시 조감독을 맡았는데, 로케이션 촬영 중 발생한 폭파 사고로 인해 국보인 히메지 성의 돌담 일부가 파손되고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고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1938년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는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미화하는 국책 영화 《너와 나》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배우 문예봉이 주연을 맡았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와 조선군사령부 보도부가 공동으로 제작했으며, 일본 육군성 보도부와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홍보된 대표적인 친일 영화였다.[5] 허영은 《삼천리》, 《영화평론》 같은 잡지에 실린 좌담회에 참여하여 노골적으로 친일 논리를 옹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2. 2. 친일 영화 제작과 종군 활동

1941년 내선일체를 선전하고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문예봉 주연의 국책 영화 《너와 나》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와 조선군사령부 산하 보도부가 공동 제작한 대표적인 친일 영화였다.[5] 일본 육군성 보도부와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고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허영은 《삼천리》, 《영화평론》 등 잡지에 실린 좌담회에 참여하여 직접 친일 논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육군 보도반원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자바 (현재의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선전 영화인 《호주에의 호소》(Calling Australia|콜링 오스트레일리아영어)를 감독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 3. 인도네시아에서의 활동과 사망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인 1942년, 허영은 육군 보도반원으로 자바(현재의 인도네시아)에 파견되어 선전 영화인 《호주에의 호소》(Calling Australia|호주에의 호소eng)를 감독했다.

광복 후에도 그는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현지에서는 조선 이름 '허영'을 현지식으로 발음한 "후윤"으로 알려지며 활동했다. 그는 새로 독립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에서 영화 감독 및 연극 지도자로 일했다.

특히 1951년에는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천국과 땅의 사이》를 제작하고 감독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 '프리에다'가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 과정에서 겪는 정체성 갈등을 다루었다. 영화는 연애, 스파이 활동, 총격전 등의 요소를 포함한 오락 영화였지만,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고민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허영은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1952년, 43세의 나이로 자카르타에서 사망했다.

3. 친일 행적 논란

1941년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영화 《너와 나》를 연출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등장했다. 문예봉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대표적인 국책 영화였다. 제작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와 조선군사령부 산하 보도부가 공동으로 맡았으며[5], 일본 육군성 보도부와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허영은 《삼천리》, 《영화평론》 등 당대 잡지에 실린 좌담회에 참여하여 친일 논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2년에는 일본 육군 보도반원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자바(현재의 인도네시아)에서 선전 영화 《Calling Australia|콜링 오스트레일리아eng》를 감독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4. 작품 목록

주요 감독 작품은 아래와 같다.

4. 1. 감독 작품


  • 너와 나 (1941년, 제작: 조선군 보도부) - 2009년에 네거 필름의 일부가 발견되어 전후 처음으로 상영되었다.[2][3]
  • 호주로의 부름 (1942년, 제작: 제16군 특별 첩보부 별반) - 일본군의 포로 학대를 부정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로 위장하여 촬영된 프로파간다 영화이다.
  • 하늘과 땅의 사이에 (1951년) - 1997년에 네거 필름이 발견되어, 같은 해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97(도쿄)에서 상영되었다.
  • 『너와 나』와 『하늘과 땅의 사이에』는 2009년 10월 제22회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4]
  • 레스토랑의 꽃 (1951년)
  • 시절의 추억 (1952년)

5. 허영을 다룬 서적


  • 시네아스트 허영의 "쇼와"(우츠미 아이코·무라이 요시타카 저, 가이후샤 1987년) ISBN 978-4773611052
  • 월경의 영화감독 히나츠 에이타로 (히나츠 모에코 저, 분게이샤 2011년) ISBN 978-4-286-10635-9

참조

[1] 문서 墓碑による。本籍は朝鮮咸鏡南道
[2] 웹사이트 朝日シネマ倶楽部「幻の国策映画 日韓で上映へ」(2009年4月3日) http://www.k-asahi.g[...]
[3] 웹사이트 東京国立近代美術館フィルセンター 「発掘された映画たち2009」 http://www.momat.go.[...]
[4] 서적 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문학의 논리 역락 2003-06-20
[5]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02-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