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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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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2세는 113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154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플랜태저넷 왕조의 첫 번째 국왕이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아키텐 공작 등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며 '앙주 제국'으로 불리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법률 및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관습법의 기초를 다졌으며, 토마스 베켓과의 갈등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를 살해하는 사건을 겪었다. 말년에는 아들들과의 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1189년 아들 리처드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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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헤르만 사자공의 복음서에 묘사된 헨리 2세의 상세 그림. 그는 왕관을 쓰고 왕실 예복을 입고 오른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고 있다. 그의 왼손은 들려 있다.
년경, 헤르만 사자공의 복음서에 묘사된 헨리 2세
칭호잉글랜드 국왕
재위 기간1154년 12월 19일 - 1189년 7월 6일
대관식1154년 12월 19일
선임자스티븐
후임자리처드 1세
섭정젊은 왕 헨리 (1170년–1183년)
섭정 유형공동 국왕
출생일1133년 3월 5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멘, 르망
사망일1189년 7월 6일 (56세)
사망지프랑스, 투렌, 시농, 시농성
매장지프랑스, 앙주, 퐁트브로 수도원
배우자엘레오노르 다키텐 (1152년 5월 18일 결혼)
자녀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
젊은 왕 헨리
작센 공작부인 마틸다
리처드 1세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
카스티야 왕비 엘레오노르
시칠리아 왕비 조안
잉글랜드 국왕 존

요크 대주교 제프리
윌리엄, 솔즈베리 백작
왕가플랜태저넷-앙주|group=nb}}
아버지조프루아 5세 당주 백작
어머니마틸다

2. 생애

헨리 2세는 기록에 따르면 잘생긴 외모에 붉은 머리카락과 주근깨, 큰 머리를 가졌다고 한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말을 타서 생긴 O자형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종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 짧은 안주 망토를 선호하여 "단망토(Curtmantle)"라는 별명을 얻었다.[2]

어머니처럼 내성적이거나 아버지처럼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무자비했지만 악의적이지는 않았으며, 날카로운 시선, 괴롭힘, 욱하는 성질, 때때로 말을 전혀 하지 않는 침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행동 중 일부는 연극적이었고 효과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헨리는 영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를 이해했지만, 라틴어와 프랑스어만 사용했다. 젊은 시절에는 전쟁, 사냥, 기타 모험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법 및 행정 업무에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더 신중해졌지만, 평생 동안 활동적이고 빈번하게 충동적이었다. 분노가 폭발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불같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재치 있는 대화와 설득력 있는 논쟁을 펼쳤고, 지적인 사고방식과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너먼트나 음유시인의 오락보다는 사냥이나 책과 함께 방에 은퇴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걱정했는데, 통치 초기에 조난당한 사람들이 잘 대우받도록 명령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기록자 랄프 오브 다이세토는 1176년 앙주와 메인에 기근이 들었을 때 개인 저장품을 비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할아버지 헨리 1세가 통치했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재건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영토를 되찾고, 영지를 되찾고, 역사가 존 길링엄이 핵심 영토 주변의 "보호막"이라고 묘사한 것을 제공했던 소규모 영주들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립했다. 영국의 왕 중 처음으로 문장 디자인을 사용했을 것이며, 표범이나 사자를 새긴 반지였다. 이 디자인은 후대에 변경되어 영국 왕실 문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활

헨리 2세는 1133년 3월 5일 프랑스 왕국 르망에서 조프루아 5세 당주 백작마틸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앙주 백작위는 10세기에 형성되었으며 앙주가 출신 지배자는 수 세기간 프랑스 전체에 걸쳐 신중한 결혼과 정치적 동맹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확장하고자 시도했다. 본디 앙주 백작령은 프랑스 왕실 영토에 부합하나, 앙주 영지에 대한 왕실의 힘은 11세기에 걸쳐 약화되었고 이에 앙주 영지는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2]

헨리의 어머니 마틸다[11]는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1세의 장녀였다. 그녀는 첫 남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죽은 후 1128년에 앙주백과 재혼하였고 1135년 부왕의 사망 이후 사촌 스티븐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났다. 아버지 조프루아는 혼란을 노르망디를 공격할 기회로 활용했으나 잉글랜드 갈등에 직접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학자들이 명명한 "무정부 시대"로 불린 이 전쟁은 질질 끌어지고 교착상태로 악화되었다.[4]

헨리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의 가정에서 보냈으며, 1130년대 말 마틸다와 노르망디로 동행했다. 헨리의 유년 시절 후기(7세 무렵)는 앙주에서 보냈으며, 그는 거기서 그 시대의 문법학자로 알려진 상트의 피에르에게 교육받았다. 1142년 말, 제프리는 9세의 헨리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동행해 남서부 잉글랜드에 있는 앙주가의 스티븐 반대 세력의 중심지인 브리스틀로 보냈다. 친척의 집에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그 시기의 귀족들에게 흔했으나, 헨리를 잉글랜드로 보낸 것은 제프리가 잉글랜드의 전쟁에 참여를 거부한 비난에 대한 정치적 이익이 있었다. 1년 정도, 헨리는 로버트의 자식들 중 한 명인 우스터의 로저와 함께 살았고 마스터 매튜에게 교육받았다. 로버트의 가정은 교육과 학식으로 유명했다. 브리스톨의 성 아우구스틴의 수사신부들 역시 헨리의 교육에 도움을 주었고, 그는 나중에 그들을 애착과 함께 기억했다. 헨리는 1143년 혹은 1144년 앙주로 돌아와, 콘슈의 귀욤 아래서 교육을 재개했다.

1147년, 14세의 헨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직속 가족과 소수의 용병을 갖고 노르망디를 떠나 잉글랜드에 도착하고, 윌트셔를 공격했다. 처음에는 극심한 공포가 일어났으나, 원정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헨리는 군대에 지불할 돈이 없어 노르망디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와 삼촌도 그에게 지원을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는 첫 원정에 대해 그들이 만족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놀랍게도, 헨리는 스티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스티븐은 미해결된 임금을 지불하여 헨리가 귀국할수 있도록 하였다. 스티븐이 그렇게 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가능한 설명으로는 친족 구성원에 대한 그의 공손함, 또는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내고 헨리와의 관계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5] 1149년, 헨리는 다시 개입했다. 이때 헨리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 북서부 잉글랜드 대부분을 지배한 강력한 지역 통치자인 헨리의 종조부 체스터의 라널프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 동맹 아래에서 헨리와 라널프는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아 요크를 공격하기로 동의했다. 이 계획된 전투는 북쪽의 요크를 향한 스티븐의 신속한 행군 후 붕괴되었고 헨리는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2. 2. 작위 계승과 결혼

1150년, 헨리 2세는 어머니 마틸다로부터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물려받았고, 1151년에는 아버지 조프루아가 사망하면서 앙주 백작위를 계승했다. 1152년 5월,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아키텐, 푸아티에, 기엔, 가스코뉴 등 광대한 영토를 지참금으로 얻었다.[7] 이 결혼으로 헨리 2세는 8명의 자녀(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마틸다, 엘리오노르, 조안)를 두었다.

1151년 8월, 헨리 2세는 아버지와 함께 루이 7세의 파리(시테 섬) 시테 궁전을 방문했다. 아버지의 파문 해제를 위한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아버지가 베를레를 석방하면서 루이 7세에게 신종하고 노르망디 공작위를 확정받았다. 같은 해 9월, 아버지의 죽음으로 앙주 백작령을 계승했다. 1152년 5월 18일, 헨리 2세는 11살 연상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푸아티에에서 결혼하여, 그녀의 상속지인 아키텐 공작령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엘레오노르의 전 남편 루이 7세는 프랑스 서쪽 절반이 헨리 2세의 손에 들어가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헨리 2세의 동생 조프루아도 영토 상속 불만을 이유로 가세했지만, 헨리 2세는 이를 막고 동생을 항복시켰다. 루이 7세도 휴전했고, 헨리 2세는 1153년 1월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1월 6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헨리 2세는 스티븐으로부터 평화 제안을 받았다. 11월 6일, 헨리 2세는 스티븐과 워링포드 협정을 맺어 스티븐 사후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54년 봄, 노르망디로 돌아간 헨리 2세는 10월 25일 스티븐이 사망하자 헨리 2세로서 즉위했다. 12월 1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레오노르와 함께 잉글랜드 왕·왕비 즉위식을 올렸다.

이로써 잉글랜드 왕국에 앙주 가문에 의한 플랜태저넷 왕조가 창시되었고, 헨리 2세는 프랑스 남서부와 북서부, 잉글랜드의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 왕조는 "플랜태저넷 왕조"로 불리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아버지 조프루아 4세가 금작화 가지를 모자에 꽂고 전장에 나선 것에서 유래한다.

동생 조프루아는 1158년 7월 27일 사망했고, 헨리 2세는 브르타뉴 종주권을 주장하며 낭트를 영유하고 루이 7세에게도 인정받았다.

2. 3. 잉글랜드 국왕 즉위

1153년 1월, 헨리는 외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이에 스티븐이 맞서며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12] 그러나 1153년 8월, 스티븐의 아들 외스타슈가 세인트 에드먼드 수도원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스티븐은 실의에 빠져 11월에 헨리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월링퍼드 조약을 맺었다.[13] 헨리는 즉위 후 스티븐의 차남 윌리엄(기욤)에게 불로뉴 백작 직위를 주기로 약속했고, 그해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북안 영지를 탈취했지만 스티븐은 이를 묵인하였다.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자 월링퍼드 조약에 따라 헨리는 윌리엄에게 불로뉴 백작위를 넘기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21세의 헨리 2세는 군주로서 위엄이 부족해 보였지만,[9] 침착하고 냉정한 처신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 때로는 억제할 수 없는 성미를 드러내거나 냉혹하고 무자비한 성정을 보이기도 했다.

1153년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정치 지도

2. 4. 영토 확장

1171년 헨리 2세는 아일랜드를 병합하고, 1173년 대반란에서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에게 승리하여 잉글랜드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헨리 탄생 무렵 북부 프랑스; 붉은 원은 주요 도시 중심지


1140년대 후반, 산발적인 전투를 제외하면 내전은 사실상 끝났다.[1] 많은 귀족들이 전쟁의 결과를 확보하기 위해 개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 교회도 평화 조약 체결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루이 7세는 제프리의 세력 성장과 자신의 영지에 대한 잠재적 위협, 특히 헨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3] 1150년, 제프리는 헨리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임명했고, 루이는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스를 공국의 정당한 상속자로 내세우며 헨리를 몰아내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4] 제프리는 헨리에게 루이와 타협할 것을 조언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중재로 1151년 8월 평화가 이루어졌다.[5] 이 합의로 헨리는 루이에게 봉신 의례를 행하여 루이를 봉건적 군주로 받아들이고, 분쟁 지역이었던 노르망디 베크생 지역을 넘겨주었고, 그 대가로 루이는 헨리를 공작으로 인정했다.[6]

1152년 루아르 강 옆 몽소로 샤토 점령은 그의 형제 제프리가 조직한 반란의 종식을 의미했다.


1151년 9월 제프리가 사망하자, 헨리는 자신의 계승, 특히 앙주 계승을 먼저 확보해야 했기에 잉글랜드 귀환을 연기했다.[7] 이 무렵 그는 루이의 부인이었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8]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남부 아키텐 공작부인으로, 아름답고 활기차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루이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다.[9] 루이는 혈족 결혼 금지를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했고, 19세였던 헨리는 8주 후인 5월 18일에 11살 연상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10] 이 결혼은 즉시 헨리와 루이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모욕으로 여겨졌고, 프랑스의 봉토를 소유한 엘레오노르가 루이의 동의 없이 결혼했기에 봉건 제도 관행에 위배되었으며,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은 그녀와 루이의 결혼만큼이나 혈족 결혼이었다. 헨리의 아키텐 획득은 루이와 엘레오노르의 두 딸인 마리와 알리스의 상속을 위협했는데, 이들은 엘레오노르 사후 아키텐에 대한 주장을 가질 수 있었다. 새로운 영토를 얻은 헨리는 이제 루이보다 프랑스의 훨씬 더 큰 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11] 루이는 스티븐 왕, 그의 아들 외스타스,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페르슈 백작 로베르를 포함한 연합군을 조직했다.[12] 루이의 동맹에는 헨리가 자신의 상속 재산을 박탈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헨리의 동생 제프리도 합류했다.[13] 아버지의 토지 상속 계획이 모호했기에 제프리 주장의 진실성을 평가하기는 어려웠다.[14]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제프리에게 푸아투의 주요 성들을 남겼다고 하며, 이는 헨리가 노르망디와 앙주는 유지하지만 푸아투는 유지하지 않을 의도였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15]

노르망디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샹파뉴의 헨리와 로베르는 뇌프마르셰를 점령했다.[16] 루이의 군대는 아키텐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다.[17] 스티븐은 헨리에게 충성하는 주요 요새인 템스 계곡을 따라 위치한 월링포드 성을 포위 공격하여, 헨리가 프랑스 영토를 위해 싸우는 동안 영국 분쟁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18] 헨리는 아키텐에서 루이와의 공개 전투를 피하고 노르망디 국경을 안정시켰고, 베크생을 약탈한 다음 앙주로 진격하여 제프리와 싸우며 그의 주요 성 중 하나인 몽소로를 점령했다.[19] 루이는 병들어 작전에서 철수했고, 제프리는 헨리와 타협해야 했다.[20]

1153년 초, 헨리 2세는 스티븐의 포위 공격에 대응하여 잉글랜드로 돌아왔다.[21] 소규모 용병 군대만 데리고 온 헨리는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체스터의 랜울프와 휴 빅고드 두 지역 귀족의 군대의 지원을 받았고, 군사적 승리를 기대했다.[22] 4월 부활절 직전 고위 성직자 대표단이 스톡브리지에서 헨리와 그의 고문들과 만났다.[23] 성직자들은 스티븐을 왕으로 지지하지만 협상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헨리는 잉글랜드 대성당을 피하고 주교들이 그의 궁정에 참석할 것을 기대하지 않겠다고 재확인했다.[24]

헨리는 스티븐의 군대를 월링퍼드에서 끌어내기 위해 말메즈베리의 스티븐의 성을 포위 공격했고, 왕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25] 헨리는 에번 강을 따라 스티븐의 더 큰 군대를 피해 스티븐이 결정적인 전투를 강요하는 것을 막았다.[26] 추워지는 날씨 속에 두 사람은 일시적인 휴전에 합의했고, 헨리는 미들랜즈를 통해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로버트 드 보몽이 그의 대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27] 헨리는 월링퍼드 포위군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남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28] 군사적 성공은 미미했지만, 그와 동맹국들은 이제 잉글랜드 남서부, 미들랜즈, 그리고 대부분의 북부를 장악했다.[29] 한편 헨리는 합법적인 왕의 역할을 하려 노력하며 결혼식과 합의에 증인이 되고 당당한 방식으로 궁정을 열었다.[30]

그 다음 여름, 스티븐은 군대를 모아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월링퍼드 성 포위 공격을 재개했다.[31] 월링퍼드의 함락이 임박해 보였고, 헨리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스티븐의 포위군을 스스로 포위했다.[32] 이 소식을 듣고 스티븐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7월에 월링퍼드에서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대치했다. 양측의 귀족들은 공개 전투를 피하기를 간절히 바랐고, 성직자들이 휴전을 중재하여 헨리와 스티븐 모두를 짜증나게 했다. 헨리와 스티븐은 전쟁 종식 가능성에 대해 비밀리에 이야기를 나눴다. 헨리에게는 편리하게도 스티븐의 아들 유스테이스가 병들어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써 왕위 계승에 가장 명백한 다른 후보자가 제거되었는데, 스티븐에게는 윌리엄이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지만 둘째 아들이었고 왕위 계승에 대한 주장에 대해 별로 열의가 없어 보였다. 월링퍼드 이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소극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잉글랜드 교회는 양측 사이에 영구적인 평화를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11월, 두 지도자는 영구 평화 조건을 비준했다. 스티븐은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윈체스터 조약을 발표했다. 그는 헨리를 양자이자 후계자로 인정하는 대가로 헨리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고, 스티븐은 헨리의 조언을 경청할 것을 약속했지만 모든 왕권을 유지했으며,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신의 땅의 안전을 약속받았다. 주요 왕실 성은 스티븐이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는 동안 보증인에 의해 헨리의 명의로 유지될 것이며,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해산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헨리와 스티븐은 대성당에서 평화의 키스로 조약을 봉인했다. 1154년 초 스티븐은 더 활동적이 되었다. 그는 권위를 행사하려고 시도했고 무단으로 건설된 성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평화는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했고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은 헨리에게 미래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헨리를 죽이려는 음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아마도 그 결과로 헨리는 한동안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스티븐은 위장 장애로 병들어 1154년 10월 25일에 사망하여 헨리가 예상보다 빨리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12세기 헨리 2세와 에일리너가 궁정을 여는 모습


1154년 12월 8일 영국에 상륙한 헨리 2세는 몇몇 귀족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은 후, 12월 19일 에일리너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1155년 4월에는 왕실 궁정이 소집되어 귀족들이 국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스티븐의 아들 윌리엄과 헨리 2세의 형제인 제프리와 윌리엄을 포함하여 몇몇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몇 년 안에 사망하여 헨리 2세의 지위는 안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는 내전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영국에서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 국가의 많은 지역에서 전투로 인해 심각한 황폐화가 발생했지만, 다른 일부 지역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많은 "불법" 성이 지역 영주들의 기지로 건설되었다. 왕실 삼림법의 권위는 국가의 많은 지역에서 무너졌다. 국왕의 수입은 심각하게 감소했고, 왕실의 주화 조폐소에 대한 통제는 제한적이었다.

헨리 2세는 자신을 헨리 1세의 정통 후계자로 내세우며 자신의 모습대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헨리 2세는 또한 자신의 어머니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경청할 것이라는 점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다. 여러 가지 조치가 즉시 시행되었지만, 헨리 2세가 그의 통치 초기 8년 중 6년 반을 프랑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작업을 원격으로 수행해야 했다. 전쟁으로부터 불법 성을 철거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왕실 사법 제도와 왕실 재정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헨리 2세는 또한 새로운 권위 있는 왕실 건물의 건설과 개조에 많은 투자를 했다.

스코틀랜드 국왕과 지역 웨일스 통치자들은 영국의 장기간에 걸친 내전을 이용하여 분쟁 지역을 점령했고, 헨리 2세는 이러한 손실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1157년 헨리 2세의 압력으로 젊은 말콤 4세는 전쟁 중에 점령했던 영국 북부의 땅을 반환했고, 헨리 2세는 즉시 북부 국경을 재강화하기 시작했다. 웨일스에서 앵글로-노르만의 우위를 회복하는 것은 더 어려웠고, 헨리 2세는 1157년과 1158년에 두 차례의 원정을 북부와 남부에서 수행해야 했다. 그 후 웨일스의 왕자 오웬 귄네드와 리스 압 그뤼피드가 그의 지배에 복종하고 내전 이전의 국경에 동의했다.

14세기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모습


헨리 2세와 루이 7세 사이의 오랜 긴장은 116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프랑스 국왕은 유럽에서 헨리 2세의 힘이 커지는 것을 점점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1160년 루이는 샹파뉴 백작과 부르고뉴 공작 오도 2세와 함께 중부 프랑스에서 동맹을 강화했다. 3년 후 헨리 2세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새로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는 공개적으로 프랑스 국왕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의 아내 아델은 1165년에 아들 필리프 2세 아우구스트를 낳았고, 루이는 이전 몇 년 동안보다 자신의 위치에 더 자신감을 가졌다. 그 결과, 1160년대 중반에 헨리 2세와 루이 사이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한편, 헨리 2세는 브르타뉴에서 간접 통치 정책을 바꾸고 더 직접적인 통제를 시작했다. 1164년 그는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을 따라 있는 땅을 장악하기 위해 개입했고, 1166년에는 브르타뉴의 귀족들을 처벌하기 위해 브르타뉴를 침략했다. 헨리 2세는 그 후 코난 3세가 공작직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하고 브르타뉴를 그의 딸 콘스탄스에게 주었고, 콘스탄스는 헨리 2세의 아들 제프리에게 약혼했다. 코난 3세에게는 공작령을 합법적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이 있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은 중세법 하에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는 헨리 2세가 프랑스 국왕의 분노를 사면서 오베르뉴를 장악하려 했다. 더 남쪽에서는 헨리 2세가 툴루즈의 레이몽에게 계속 압력을 가했다. 그는 1161년에 직접 그곳에서 원정을 벌였고, 1164년에는 그의 동맹국인 아라곤의 알폰소 2세와 보르도 대주교를 레이몽에 맞서 보냈다. 1165년 레이몽은 루이의 여동생과 이혼하고 헨리와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헨리 2세와 루이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마침내 1167년에 레반트십자군 국가로 향하는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논쟁으로 인해 공개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루이는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 브르타뉴인과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를 공격했다. 헨리 2세는 루이가 주요 군사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쇼몽쉬르에프트를 공격하여 도시를 불태우고 루이가 동맹국을 버리고 개인적인 휴전을 맺도록 강요함으로써 응수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공작령 장악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고조되어 있던 브르타뉴의 반란 귀족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나면서 헨리 2세는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를 점점 더 원했다. 그는 사후에 제국을 나눌 것을 결정했는데, 젊은 헨리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리처드가 아키텐 공국을, 제프리가 브르타뉴를 받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루이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국왕들은 1169년 몽미라유에서 새로운 평화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은 광범위했고,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프랑스에서의 미래 상속에 대해 루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끝났다. 또한 이때 리처드는 루이의 어린 딸 알리스와 약혼했다.

몽미라유에서의 합의가 이행되었다면, 충성 맹세는 루이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고 헨리 2세의 영토 내 반역 귀족들의 정당성과 그들과 루이 사이의 동맹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루이는 자신이 일시적인 이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회담 직후 그는 헨리 2세의 아들들 사이의 긴장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한편, 헨리 2세의 프랑스 남부에서의 지위는 계속 개선되었고, 1173년까지 그는 사보이아 백작 움베르토 3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아들 존과 움베르토의 딸 알리시아의 약혼을 포함했다.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는 1170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결혼하여 남부에 추가 동맹국을 확보했다. 1159년 이후 헨리 2세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1173년 2월 레이몽은 마침내 잉글랜드 국왕에게 항복하고 툴루즈에 대한 충성을 헨리 2세와 그의 상속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맹세했다.

1171년 아일랜드 왕국들과 헨리의 상륙을 보여주는 화살표


12세기 중반 아일랜드는 지역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아일랜드 고왕의 권력은 제한적이었다. 1160년대에 레인스터 왕 디어매이트 맥 머카다는 강력한 연합군에 패한 후 고왕 루아이드리 우아 콘호바이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디어매이트는 1167년 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잉글랜드 왕은 디어매이트가 제국 내에서 용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디어매이트는 웨일스 변경 지역 출신의 앵글로-노르망디 및 플랑드르 용병들을 포함하여, 리처드 드 클레어, 2대 펨브룩 백작을 포함한 군대를 모았다. 새로운 지지자들과 함께 그는 레인스터를 탈환했지만, 곧 1171년 사망했다. 그 후 드 클레어는 레인스터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했다. 아일랜드의 상황은 긴장되었고, 앵글로-노르망디인들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헨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일랜드에 직접 개입했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4세는 그곳의 교회를 조직한다는 명목상의 이유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침공을 승인했다. 헨리는 대규모 군대를 남웨일스로 이끌고, 1165년 이후 그 지역을 점령했던 반군들을 진압한 후 1171년 10월 펨브룩에서 아일랜드로 항해했다. 일부 아일랜드 영주들은 앵글로-노르망디 침략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헨리에게 호소했고, 드 클레어는 새로운 소유지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으면 헨리에게 복종하겠다고 제안했다. 헨리의 개입은 성공적이었고, 아일랜드와 앵글로-노르망디인들은 아일랜드 남동부에서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드 클레어는 잉글랜드 왕의 봉토로서 레인스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헨리는 1171년 방문 중 새로운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성 건설 사업을 착수했다. 앵글로-노르망디인들은 아일랜드인보다 우수한 군사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성은 그들에게 유리한 점을 주었다. 헨리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서의 접근 방식과 유사한 장기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바랐고, 1175년 윈저 조약에 따라 루아이드리 우아 콘호바이르를 아일랜드 고왕으로 인정하고,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대리인으로서 현장의 안정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우아 콘호바이르는 먼스터와 같은 지역에서 충분한 영향력과 힘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대신 1177년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회의를 통해 자신의 지역 봉토 시스템을 더 직접적으로 설립했다.

2. 5. 행정·사법 제도 개혁

헨리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재정 정비와 조세 제도 개혁에 착수하여 세출을 파악하고 지출과 수납을 꼼꼼하게 통제했다.[1] 1166년에는 배심제를 도입하여 왕권 강화를 추진했으나, 교회 사법권을 두고 토머스 베켓 캔터베리 대주교와 갈등을 빚었다.[1]

같은 해, 헨리 2세는 성직자와 귀족들의 범죄 행위와 월권을 단속하기 위해 배심제 정비에 매진했다.[2] 1164년에 제정하려 했던 클라렌던 헌장에는 교회 재판권 금지 조항이 추가되었는데, 베켓을 비롯한 주교단은 일사부재리 원칙 위반을 이유로 반대했다.[2] 한편, 헨리 2세는 시골 백성을 위한 순회재판소를 확충하고 문자 교육을 장려했다.[2]

1170년 12월 29일, 헨리 2세의 환심을 사려던 기사 네 명이 캔터베리에서 베켓 대주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헨리 2세는 "이 몹쓸 대주교를 없앨 사람이 없단 말인가!"라며 분노했고, 이 말을 들은 기사들이 베켓을 살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3]

인망 높던 베켓의 비참한 죽음에 헨리 2세는 비난에 시달렸고, 정치적 대립 관계였지만 존경하던 베켓의 죽음에 괴로워했다.[4] 1173년 베켓은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이듬해 헨리 2세는 베켓의 무덤 앞에서 참회했다.[4]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병과 민병으로 구성된 국왕 친위대를 창설하여 신변 안전을 도모했다.[4]

헨리 2세 시대에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중요한 법적 변화가 있었다.[5] 12세기 중반, 잉글랜드에는 다양한 법적 전통이 섞여 있어 교회법과 민법 법정 간 관할권이 중복되는 문제가 있었다.[6] 헨리 2세는 왕실 사법의 역할을 확대하여 더욱 일관된 법 체계를 만들었고, 이는 초기 법률 안내서인 글랜빌 논고에 요약되었다.[7]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헨리 2세의 거대한 비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실용적인 필요에 따른 점진적인 변화였는지는 불분명하다.[8]

스티븐 왕 시대의 혼란 이후, 잉글랜드에는 토지 관련 법적 분쟁이 많았다.[9] 헨리 2세는 주 법정, 백 법정, 영주 법정 등 전통적인 지역 법정에 사건 처리를 맡겼고, 직접 다루는 사건은 소수에 불과했다.[10] 이 과정은 완벽하지 않았고, 왕을 찾아 재판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11] 그럼에도 헨리 2세는 교회법과 민법 절차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12] 노르망디에서는 공국 관리들이 운영하는 법정을 통해 사법을 집행했고, 왕실 수입 관련 사건은 칸(Caen)의 국고 법정에서 처리했다.[13] 1159년부터 1163년까지 헨리 2세는 노르망디에서 왕실 및 교회 법정 개혁에 시간을 보냈는데, 이후 잉글랜드에 도입된 일부 조치는 이미 노르망디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4]

1163년, 헨리 2세는 왕실 법정 개혁을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와 범죄를 단속하고 순회 판사를 파견했다.[15] 1166년 이후, 웨스트민스터의 국고 법정은 민사 사건도 다루기 시작했다.[16] 1176년에는 대순회 재판을 만들어 왕실 판사들이 잉글랜드 전역을 순회하며 민사 및 형사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17] 헨리 2세는 배심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1176년부터 소액 회의에, 1179년부터는 대회의에서 배심원이 활용되었다.[18] 결투 재판과 신의 재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19] 1166년 클랜든 대회 이후, 왕실 사법은 ''신규 점유침탈'', ''선조 사망'' 등 새로운 형태의 회의를 통해 토지 점유, 상속권, 미망인의 권리 등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었다.[20] 이러한 개혁은 귀족들의 전통적인 권리에 도전하고 봉건 원칙을 강화했지만,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21]

2. 6. 상속 갈등과 반란

헨리 2세가 머물렀던 시농성


헨리 2세의 마지막 군사활동 (1189년)


말년에 헨리 2세는 상속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을 겪었다. 왕비 엘레오노르의 배신과 루이 7세의 이간질까지 겹쳐 더욱 고통받았다. 1170년대 초, 헨리 2세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고, 그는 장성한 세 아들에게 상속을 결정했다. 그러나 권력을 내려놓지 않아 1170년에 공동 통치자로 임명된 왕세자 헨리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가 되어 불만을 품었다.[14]

1173년, 왕세자 헨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평소 헨리 2세의 여성 편력에 앙심을 품고 있던 왕비 엘레오노르는 리처드를 부추겨 왕위 찬탈을 도모했다.[14][15] 제프리는 자신의 영지를 아버지 헨리 2세가 막내 존에게 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형 리처드와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16]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도 헨리 2세에 대항했다.

1174년까지 이어진 반란은 헨리 2세의 영토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나, 헨리 2세의 군사력과 지역 영주들의 협력 덕분에 진압되었다. 헨리 2세는 왕비 엘레오노르를 감금했지만, 자식들은 용서했다.[17] 그러나 아들들은 여전히 반항적이었고 갈등은 지속되었다. 1181년, 장남 헨리와 리처드가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을 두고 싸우면서 두 번째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란은 1183년 6월 장남 헨리가 갑자기 죽으면서 종결되었다.[17]

1186년, 제프리마저 죽자 리처드와 존만 남아 상속 문제가 단순해지는 듯했다.[10] 그러나 리처드가 잉글랜드, 앙주, 노르망을 상속받게 되자, 막내 존이 아키텐을 요구했고, 헨리 2세는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다.[18]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어 아버지 헨리 2세를 배신했다.[19][20]

리처드는 1189년에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8]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1174년 반란 실패 후 구금 상태에 있던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구출하기 위함이었다.[21] 또한 아버지 헨리 2세가 자신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앨리스와 스캔들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배신감도 작용했다.[22][23][24]

헨리 2세는 르망에서 포위당하는 등 연패하며 도망쳤다.[25] 막내 존마저 배신하여 리처드 편에 섰다.[26] 존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헨리 2세는 1189년 7월 투렌 시농에서 사망했다.[25][27][28]

2. 7. 사망

1186년에 제프리가 사망하자, 리처드와 존만이 남아 상속 문제가 단순해지는 듯했다.[10] 그러나 리처드가 잉글랜드, 앙주, 노르망을 상속받게 되자, 존은 아키텐을 요구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고,[18] 리처드는 이에 반발하여 1188년 11월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헨리 2세를 배신했다.[19][20]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8]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1174년 반란 실패 후 구금된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구출하기 위함이었다.[21] 또한 헨리 2세가 자신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앨리스와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한 원인이었다.[22][23][24] 헨리 2세는 르망에서 포위당하는 등 연패했고,[25] 막내 아들 존마저 리처드 편에 서서 반란에 가담했다.[26]

존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헨리 2세는 1189년 7월 투렌 시농의 Château de Chinon|시농성프랑스어에서 사망했다.[25][27][28] 헨리 2세 사후 리처드 1세가 즉위했고, 엘레오노르는 실질적으로 왕국을 통치했다. 존은 아일랜드 영주가 되었다.[29] 리처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고,[30] 원정에서 돌아온 후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지켜냈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한 후 존이 즉위했으나, 필리프 2세와의 영토 분쟁에서 패배하여 대륙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31] 이는 백년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2]

1188년 11월, 지소르에서 열린 헨리 2세와 필립 2세의 평화 협상 중, 리처드는 아버지 앞에서 필립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공개적으로 적대 관계를 선언했다. 헨리 2세 곁을 신하들이 떠났고, 윌리엄 마셜 등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만 남았다. 1189년 전투에서 르망에 틀어박힌 헨리 2세는 리처드와 필립 2세의 추격을 피하려 했지만, 그가 태어난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었던 헨리 2세는 시농 성으로 후퇴했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르망을 포기해야 했다. 배신자 명단의 맨 앞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존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본 헨리 2세는 1189년 7월 6일에 서거했다. 향년 56세였다.

임종을 지킨 것은 충신 마셜 등 시중드는 사람들과, 아들 중에서는 서자이자 성직자인 조프루아였다. 시신은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치되었고, 앙주 제국을 계승한 리처드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유폐 중이던 엘레오노르를 석방하고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3. 유산

헨리 2세는 기록에 따르면 잘생긴 외모에 붉은 머리카락과 주근깨, 큰 머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말을 타서 생긴 O자형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23] 그는 종종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다녔으며,[23] 짧은 안주 망토를 선호하여 "단망토(Curtmantle)"라는 별명을 얻었다.[24]

헨리는 어머니처럼 내성적이지도 않았고, 아버지처럼 매력적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유명했다.[25] 그는 무자비했지만 악의적이지는 않았다.[26] 그는 또한 날카로운 시선, 괴롭힘, 욱하는 성질, 그리고 때때로 말을 전혀 하지 않는 침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27] 이러한 폭발적인 행동 중 일부는 연극적이었고 효과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28] 헨리는 영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를 이해했다고 전해지지만, 라틴어와 프랑스어만 사용했다.[29] 젊은 시절 헨리는 전쟁, 사냥, 기타 모험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사법 및 행정 업무에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더 신중해졌지만, 평생 동안 그는 활동적이고 빈번하게 충동적이었다.[30] 그의 분노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적으로 불같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재치 있는 대화와 설득력 있는 논쟁을 펼쳤고, 지적인 사고방식과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너먼트나 음유시인의 오락보다는 사냥의 고독이나 책과 함께 방에 은퇴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31] 그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걱정했는데, 그의 통치 초기에 조난당한 사람들이 잘 대우받도록 명령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기록자 랄프 오브 다이세토는 1176년 앙주와 메인에 기근이 들었을 때 헨리가 자신의 개인 저장품을 비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2]

헨리는 할아버지 헨리 1세가 한때 통치했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재건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토를 되찾고, 영지를 되찾고, 한때 역사가 존 길링엄이 핵심 영토 주변의 "보호막"이라고 묘사한 것을 제공했던 소규모 영주들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립했다. 그는 아마도 영국의 왕 중 처음으로 문장 디자인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표범이나 사자를 새긴 반지였다. 이 디자인은 후대에 변경되어 영국 왕실 문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13세기 헨리 2세와 그의 적출 자녀들 묘사: (왼쪽에서 오른쪽) 윌리엄, 젊은 헨리, 리처드, 마틸다, 제프리, 엘레오노르, 조안, 그리고 존


헨리 2세의 부는 유럽에서 아마도 가장 큰 ''쿠리아 레기스''(curia regis) 혹은 왕실 법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법정은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끌었으며, 일반적으로 여러 명의 주요 귀족과 주교들, 기사들, 가정부들, 서기관들, 말들, 그리고 사냥개들로 구성되었다. 법정 내에는 그의 관리들(''ministeriales''), 그의 친구들(''amici''), 그리고 그의 측근과 신뢰하는 신하들로 구성된 소규모 내부 핵심 인물들(''familiares regis'')이 있었다. 헨리 2세의 ''familiares''는 정부의 계획을 추진하고 공식적인 구조와 왕 사이의 간극을 메웠기 때문에 그의 가정과 정부 운영에 특히 중요했다.

헨리 2세는 사냥과 술자리에 세계적인 문학적 논의와 궁정의 가치를 결합한 세련된 가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열정은 사냥이었고, 법정은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 헨리 2세는 그의 영지 전역에 여러 개의 선호하는 왕실 사냥터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고, 요새로서의 실용성과 왕실 권력과 위신의 상징으로서 왕실 성에 많은 투자를 했다. 법정은 스타일과 언어 면에서 비교적 형식적이었는데, 아마도 헨리 2세가 백작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권력 상승과 비교적 겸손한 출신을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평화 시 무장한 기사들의 그러한 모임이 초래하는 안보 위험 때문에 기사 대회 개최에 반대했다.

앙주 제국과 궁정은 "가족 회사"였다. 그의 어머니 마틸다는 그의 초기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수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헨리 2세와 그의 아내 엘레오노르의 관계는 복잡했다. 헨리 2세는 1154년 이후 몇 년 동안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것을 신뢰했고, 나중에는 그녀가 아키텐을 다스리는 것에 만족했다. 실제로 엘레오노르는 결혼 생활 대부분 동안 헨리 2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연대기 작가들과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결국 헨리 2세를 버리고 1173-1174년 반란에서 장남들을 지지하게 된 원인에 대해 추측해왔다. 그럴듯한 설명으로는 아키텐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간섭, 1173년 툴루즈의 레이몽으로부터의 충성 맹세를 엘레오노르가 아닌 헨리 2세가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의 거친 성격 등이 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적출 자녀를 두었다. 그는 또한 여러 명의 장기적인 정부를 두었고, 여러 명의 서출 자녀도 있었다. 헨리 2세는 아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딸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의 적출 자녀들의 미래를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가족은 당시 다른 왕실 가족들, 특히 비교적 단결된 프랑스 카페 왕조보다 더 심한 경쟁과 폭력적인 적대감으로 분열되었다. 헨리 2세 가족의 격렬한 분쟁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는데, 매슈 스트릭랜드와 같은 역사가들은 헨리 2세가 가족 내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 합리적인 시도를 했으며, 그가 더 젊은 나이에 죽었다면 계승이 훨씬 더 원활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중부 퐁트브로 수도원에 있는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묘비상


헨리 사후 곧바로 리처드는 아버지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차지했고, 나중에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미망인이 된 엘레오노르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아키텐의 통치권을 되찾아 리처드를 대신하여 통치했다. 헨리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막내 아들 존 치세 동안 무너졌는데, 필리프 2세가 가스코뉴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앙주 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붕괴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특히 헨리 제국의 불안정하고 가족적인 성격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헨리가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도입한 많은 변화는 장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법 개혁은 일반적으로 잉글랜드 관습법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지며, 국고원은 후대의 웨스트민스터 공동 법정의 전신이었다. 헨리의 순회 판사들 또한 그의 동시대인들의 법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헨리가 브르타뉴, 웨일스, 스코틀랜드에 개입한 것 또한 그들의 사회와 정부 시스템 발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헨리 2세는 당대, 심지어 자신의 궁정 내에서도 널리 비판을 받았다. 걸프리드 오브 웨일스는 그의 저서 『아일랜드 묘사]』에서 헨리를 "서방의

3. 1. 앙주 제국

헨리는 9세기 카롤링거 왕조 이후 어떤 통치자보다도 더 많은 프랑스 영토를 지배했다. 이 영토들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나중에는 아일랜드 일부 지역의 그의 소유지와 결합하여 역사가들이 종종 앙주 제국이라고 부르는 광대한 영토를 형성했다.[1] 이 제국은 일관된 구조나 중앙 통제력이 부족했다. 대신, 느슨하고 유연한 가족 관계와 토지 네트워크로 구성되었다.[2] 헨리의 각 영토마다 서로 다른 지역 관습이 적용되었지만, 이러한 지역적 차이 중 일부는 공통된 원칙에 기반했다.[3]

헨리는 제국 전역을 끊임없이 여행했으며, 존 에드워드 오스틴 졸리프 역사가는 이를 "도로와 길가의 통치"라고 묘사했다.[4] 그의 여정은 지역 정부 개혁과 기타 지역 행정 업무와 일치했지만, 사절들은 그가 어디를 가든 모든 영지와 그를 연결할 수 있었다.[5] 그가 부재중일 때는 영지는 집사대법관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들 아래 각 지역의 지역 관리들이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기능의 상당 부분은 헨리 자신에게 집중되었고, 그는 종종 결정이나 호의를 요청하는 청원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7]

때때로 헨리의 왕실 법정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되기도 했던 ''대평의회''가 되었지만, 많은 귀족과 주교들이 왕에게 참석할 때마다 이 용어는 느슨하게 사용되었다.[8] 대평의회는 왕에게 조언하고 왕실 결정에 동의해야 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헨리의 의도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누렸는지는 불분명하다.[9] 헨리는 입법을 할 때도 법정과 상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그들의 견해를 얼마나 고려했는지는 불분명하다.[10]

강력한 통치자였던 헨리는 신하들에게 귀중한 후원을 제공하거나 파괴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11] 그는 12세기 왕실 행정의 핵심 부분인 교회를 포함하여 유능한 관리들을 찾고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12] 교회 내의 왕실 후원은 헨리 치하에서 승진에 효과적인 통로를 제공했으며, 그의 선호하는 성직자 대부분은 결국 주교와 대주교가 되었다.[13] 반면에 잉글랜드의 백작령 수는 상당히 줄어들어 많은 전통적인 귀족들의 승진 가능성을 제거했다.[14] 헨리는 특정 귀족이나 성직자를 처벌하거나 재정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묘사하는 용어인 ''ira et malevolentia''(분노와 악의)를 보여줄 수도 있었다.[15]

잉글랜드에서 헨리는 처음에 노르망디에서 데려온 그의 아버지의 전 고문과 헨리 1세의 남은 관리들, 그리고 1153년에 헨리와 화해한 스티븐의 고위 귀족들에 의존했다.[16]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헨리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독립적인 부와 토지가 없는 소규모 귀족인 "신흥 귀족"을 잉글랜드의 권력 있는 지위로 점점 더 많이 승진시켰다.[17] 1180년대까지 이 새로운 왕실 관리 계급은 헨리 가족의 여러 사생아들의 지원을 받으며 잉글랜드에서 우세했다.[18]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귀족 간의 유대는 12세기 전반기에 약해졌고 헨리 치하에서 계속 약해졌다.[19] 헨리는 노르망디 주교들 중에서 가까운 고문을 선발했고, 잉글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신흥 귀족"을 노르망디 관리로 임명했다. 노르망디의 대지주 중 몇몇만이 왕의 후원을 받았다.[20] 그는 종종 정략결혼이나 상속 처리를 통해 노르망디 귀족에게 개입했는데, 공작으로서의 권위나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그곳 토지에 대한 영향력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는 지역 행정이 덜 발달했다. 앙주는 루아르 강을 따라 그리고 서부 투렌에 기반을 둔 ''프레보''와 집사로 구성된 관리들을 통해 통치되었지만, 헨리는 이 지역 다른 곳에는 관리가 거의 없었다.[21] 아키텐에서는 헨리 통치 기간 동안 상당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권위는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이는 주로 1170년대 후반 리처드의 노력 덕분이다.[22]

3. 2. 코먼 로와 법 개혁

헨리 2세 시대에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중요한 법적 변화가 있었다. 12세기 중반까지 잉글랜드에는 여러 교회법과 민법 법정이 존재했는데, 헨리 2세는 왕실 사법의 역할을 확대하여 더욱 일관된 법 체계를 만들었다. 이 법 체계는 초기 법률 안내서인 글랜빌 논고에 요약되어 있다.[1][2] 이러한 개혁은 꾸준하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헨리 2세는 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사법 집행을 왕의 핵심 과제로 보았다.[3][4]

잉글랜드에서는 스티븐 왕 시대의 혼란 이후 토지 관련 법적 사건들이 많았다. 많은 수도원들이 토지를 잃었고,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다.[5] 헨리 2세는 대부분의 사건을 전통적인 지역 법정에 의존했지만, 직접 소수의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 그는 교회법과 민법 절차를 모두 개선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7] 노르망디에서는 헨리 2세가 공국 전역의 관리들이 운영하는 법정을 통해 사법을 집행했고, 칸(Caen)에는 왕실 수입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국고 법정(exchequer court)을 운영했다.[8][9]

1163년 헨리 2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실 법정의 역할을 개혁했다. 범죄를 단속하고 순회 판사들을 파견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국고 법정은 더 광범위한 민사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10][11] 1176년에는 대순회 재판(General Eyre)을 만들어 왕실 판사들이 잉글랜드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하여 민사 및 형사 사건을 다루도록 했다.[12] 지역 배심원은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헨리 2세는 이를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했다.[13] 결투 재판(trial by combat)과 신의 재판(trial by ordeal)도 계속 사용되었다.[14] 1166년 클랜든 대회(Assize of Clarendon) 이후, 왕실 사법은 ''신규 점유침탈(novel disseisin)'', ''선조 사망(mort d'ancestor)'' 및 ''unde nichil habet''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회의를 통해 토지 관련 분쟁을 다루는 영역으로 확장되었다.[15] 이러한 개혁은 잉글랜드에서 왕권을 강화했다.[16]

헨리 2세의 은화

3. 3. 토머스 베켓과의 갈등

헨리 2세는 1161년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가 사망하자, 영국 교회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할 기회로 보았다. 1162년, 헨리 2세는 자신의 대법관이자 친구였던 토머스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헨리 2세는 베켓이 정치적으로 약화되어 자신에게 의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베켓은 대주교가 되자마자 국왕과의 관계를 끊고 교회 권리의 수호자로 나섰다.

헨리 2세와 베켓은 여러 문제로 갈등했는데, 특히 세속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 처리에 대한 이견이 컸다. 헨리 2세는 국왕이 성직자들에게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베켓은 교회 재판소만이 재판할 수 있다고 맞섰다. 1164년 1월, 헨리 2세는 클라렌던 헌장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고, 베켓은 압력에 굴복하여 일시적으로 동의했지만 곧 입장을 번복했다.

이 논쟁은 점차 개인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헨리 2세는 격렬한 성격으로 원한을 품었고, 베켓은 허영심 많고 야심 찬 인물이었다. 양측은 알렉산데르 3세 등 국제 지도자들의 지지를 구하며 대립했다. 1164년, 베켓은 루이 7세에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도망쳤다. 헨리 2세는 베켓의 협력자들을 괴롭혔고, 베켓은 국왕을 편든 이들을 파문했다. 교황은 베켓을 지지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문제 해결을 위해 헨리 2세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중재를 시도했다.

1170년, 헨리 2세는 아들 젊은 헨리를 공동 왕으로 즉위시키려 했으나, 캔터베리 대주교의 동의가 필요했다. 베켓 문제는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었고, 헨리 2세는 베켓과 화해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요크 대주교를 통해 즉위식을 강행했다. 교황은 베켓에게 교황령 금지령을 허가했고, 결국 1170년 7월 양측은 합의했다. 베켓은 12월 초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헨리 2세의 지지자 3명을 파문하여 왕을 격분시켰다. 헨리 2세는 "내 집안에서 얼마나 비참한 게으름뱅이와 배신자들을 길러 승진시켰는가! 그들은 그들의 군주가 천한 서기관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무시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네 명의 기사가 캔터베리로 가서 베켓을 체포하려 했으나, 베켓이 교회 안에서 체포를 거부하자 1170년 12월 29일 그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세계를 경악시켰고, 베켓은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헨리 2세는 교황청과의 합의를 통해 클라렌던 헌장의 논란 조항들을 무효화하고 십자군 참여를 명령받았다. 헨리 2세는 이후에도 교회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왕권은 더욱 미묘하게 행사되었다. 헨리 2세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켓 숭배"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4. 가계도

헨리 2세의 가계도
부모조프루아 5세 (1113년-1151년)마틸다 (1102년-1167년)
배우자알리에노르 (1122년-1204년)
자녀기욤 9세 (1153년-1156년)청년왕 헨리 (1155년-1183년)
마틸다 (1156년-1189년)리처드 1세 (1157년-1199년)
제프리 2세 (1158년-1186년)엘레오노르 (1162년-1214년)
조안 (1165년-1199년) (1166년-1216년)
사생아Geoffrey (archbishop of York)|제프리 (요크 대주교)|제프리영어 (1152년 이전-1212년)William Longespée, 3rd Earl of Salisbury|윌리엄 롱에스페 (제3대 솔즈베리 백작)|윌리엄 롱에스페영어 (1176년경-1226년)


참조

[1] 서적 Henry the Young King, 1155-1183 Yale University Press
[2] 학술지 The Idea of the Angevin Empire
[3] 서적 Henry II : new interpretations https://www.worldcat[...] Boydell Press 2007
[4] 서적 King Stephen, 1135-1154 https://www.worldcat[...] Longman 1977
[5] 서적 Henry II : a medieval soldier at war, 1147-1189 https://www.worldcat[...] Brill 2007
[6] 서적 イングランド憲法史 創文社
[7]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8] 서적 옥스퍼트 영국사 한울아카데미
[9]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0] 서적 옥스퍼트 영국사 한울아카데미
[11] 백과사전 마틸다 [Matilda]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12]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3] 서적 King Stephen Yale University Press
[14]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5] 백과사전 리처드 1세 [Richard I] - 만용과 탐욕의 왕 https://terms.naver.[...] 영국 왕가
[16]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7]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8]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9] 서적 Henry II Yale University Press
[20] 백과사전 리처드 1세 [Richard I] - 만용과 탐욕의 왕 https://terms.naver.[...] 영국 왕가
[21] 백과사전 리처드 1세 [Richard I] - 만용과 탐욕의 왕 영국 왕가
[22] 서적 불멸의 여인들 청아출판사 2009-03-02
[23] 웹아카이브 Chronica Monasterii de Melsa https://archive.org/[...]
[24] 문서 리처드 1세 결혼
[25] 서적 영국사 기린원 1996-04-15
[26]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27] 백과사전 헨리 2세 [Henry Ⅱ] - 플랜태저넷 왕조를 개창 https://terms.naver.[...] 영국 왕가
[28] 서적 Henry II Yale University Press
[29] 백과사전 존 왕 [John] - 권력욕과 음모의 화신 https://terms.naver.[...] 영국 왕가
[30] 서적 불멸의 여인들 청아출판사 2009-03-02
[31] 백과사전 부빈전투 [Battle of Bouvines] 두산백과
[32] 백과사전 존 왕 [John] - 권력욕과 음모의 화신 영국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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