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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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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코트는 18세기 영국의 제철 기술자이다. 그는 선철을 정련하는 퍼들 제련법을 개발하여, 당시 영국이 수입에 의존하던 양질의 봉강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코트는 반사로와 홈이 있는 롤러를 이용한 퍼들링로에 대한 특허를 받았으며, 이 기술은 철강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코트는 사업 자금 문제와 특허 분쟁으로 인해 파산했고, 그의 기술은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정부 연금을 받으며 말년을 보냈으며, 그의 기술은 영국 철강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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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코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헨리 코트
인물 정보
이름헨리 코트
출생1740년경
사망1800년 5월 23일 (금요일)
국적잉글랜드
직업발명가, 철강 산업 개척자
자녀리처드 코트
알려진 업적철 생산에서 교반법 및 압연 관련 발명

2. 초기 생애와 배경

헨리 코트의 초기 생애는 랭커스터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적다.[1][14] 젊은 시절 런던에서 영국 해군 관련 대리인(naval agent영어)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14][3] 당시 영국의 철강 산업은 에이브러햄 다비 등이 코크스를 이용한 제련 기술을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된 선철을 철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정련 제철소에서의 추가 공정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영국산 철근은 발트해 지역에서 수입된 철근보다 가격 경쟁력이 낮은 상황이었다.[3] 이러한 산업적 배경 속에서 1768년, 코트는 엘리자베스 헤이샴(Elizabeth Haysham영어)과 재혼했다.[4][14] 그녀의 삼촌인 윌리엄 앳윅(William Attwick영어)이 고스포트에서 영국 해군에 철물 제품을 납품하는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기에[5][14], 코트는 이를 계기로 제철업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처삼촌의 사업에 투자하고 관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철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마련했다.[14]

2. 1. 초기 생애

헨리 코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는 원래 랭커스터 출신으로 추정되지만[1],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 일각에서는 아버지가 켄달 시장을 역임한 동명이인 헨리 코트(Henry Cort영어, 1747년 사망)일 가능성을 제기한다.[14] 그의 출생 연도는 전통적으로 1740년으로 알려져 왔으나[2],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1764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브라운(Elizabeth Brown영어)과 결혼할 당시 코트 스스로 22세라고 밝힌 기록에 근거하여, 『옥스퍼드 영국 인명 사전』은 그의 출생 시기를 1741년 4월 21일과 5월 23일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14]

코트는 1757년 런던에서 서기로 일했으며[14], 1761년에는 영국 해군으로부터 일을 위탁받는 해군 대리인(naval agent영어)의 파트너십인 배티 앤 코트사(Batty and Cort영어)의 일원이 되었다.[14] 1763년에 독립하여[14], 1765년경에는 런던 올드게이트 근처 크루치드 프라이어스에 사무실을 두고 영국 해군의 지불 대리인(Navy Agent영어)으로 활동하며 반액 급여와 미망인 연금 관리 수수료를 받았다.[3] 당시 영국 철강 산업은 에이브러햄 다비가 코크스를 고로 연료로 사용하는 기술을 개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된 선철은 여전히 정련 제철소에서 탈탄 과정을 거쳐야만 철근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발트해에서 수입된 철근이 영국산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은 상황이었다.[3]

1768년, 코트는 엘리자베스 헤이샴(Elizabeth Haysham영어, 1816년 사망)과 재혼했다.[4][14] 그녀의 아버지는 롬지 변호사이자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의 관리인이었고[4][14], 삼촌인 윌리엄 앳윅(William Attwick영어)은 고스포트에서 해군에 닻, 닻줄 등 철물 제품을 공급하는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5][14] 이를 계기로 코트는 해군 철기 제조에 관여하게 되었고, 앳윅의 사업에 투자하다가 1776년에는 사업 자체를 인수하여 관리하며 확장을 모색했다.[14] 코트는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14]

2. 2. 제철업 진출 배경

헨리 코트는 1757년 런던에서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761년에는 영국 해군으로부터 일을 위탁받는 해운업자(naval agent영어)의 파트너십인 배티 앤 코트사(Batty and Cort영어)의 조합원이 되었다가 1763년에 독립했다.[14] 1765년까지는 런던 올드게이트 근처 크루치드 프라이어스에 사무실을 두고 영국 해군의 지불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반액 급여와 미망인 연금을 수수료를 받고 관리했다.[1]

당시 영국산업 혁명 시대로, 18세기 초 에이브러햄 다비 1세와 2세 부자가 코크스를 이용한 코크스 제철법을 발명했다.[12] 하지만 이 방법으로 생산된 선철은 질이 낮아 양질의 봉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목탄을 사용하는 정련 제철소 공정을 거쳐야 했다.[3][12] 이 때문에 단철 생산량 증가는 더디었고, 영국은 여전히 많은 양의 봉강을 스웨덴이나 러시아 제국에서 수입해야 했다.[12][3] 따라서 국내에서 양질의 봉강 생산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트는 1768년 엘리자베스 헤이샴(Elizabeth Haysham영어, 1816년 사망)과 재혼했다.[14][4] 그녀의 아버지는 거물 정치인 제3대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의 집사였고, 삼촌인 윌리엄 앳윅(William Attwick영어)은 고스포트에서 영국 해군에 닻, 닻줄 등 철물을 공급하는 철공소를 소유하고 있었다.[14][5] 코트는 처삼촌 앳윅의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1776년부터는 직접 사업을 관리하며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14] 이것이 코트가 본격적으로 제철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코트는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14]

3. 퍼들 제련법 개발

헨리 코트는 햄프셔의 펀틀리(Funtley) 제철소에서[14] 기존의 반사로와 피터 어니언스의 교반(puddling)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새로운 제련법을 개발했다.[14] 그는 1783년 선철 정련용 반사로, 1784년에는 홈이 있는 롤러를 이용한 퍼들링로 특허를 취득하여[13][11] 수작업 공정을 기계화했다. 이 퍼들 제련법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면서도 연료의 불순물이 철에 섞이는 것을 막고[12][13], 해머링과 롤러 압연을 통해[11] 양질의 연철을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초기에는 숯 선철에 맞춰져 있었으나, 리처드 크로셰이 등에 의해 코크스 선철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개선되었다. 이 기술은 빠르게 인정받아 1789년 영국 해군은 코트의 특허 방식으로 제조된 봉강만을 납품받기로 결정했으며,[14] 이후 약 100년간 단철 생산의 핵심 기술로 사용되며 산업 혁명을 뒷받침했다.[14]

3. 1. 기술 혁신의 과정

산업 혁명 시대의 영국에서는 18세기 초 에이브러햄 다비 1세와 2세 부자가 코크스 제철법을 발명했지만[12], 이 방법으로는 질 낮은 만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선철에서 양질의 봉강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목탄을 사용해야 했고, 이는 단철 생산량 증가의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영국은 18세기에도 많은 양의 봉강을 스웨덴이나 러시아 제국에서 수입해야 했으며[12], 양질의 봉강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코트는 햄프셔의 펀틀리(Funtley)에 있는 자신의 제철소(티치필드 해머에서 이름을 바꾼 곳)에서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다.[14] 그는 크레인지 형제의 반사로(열이 아래에서 강제 공기를 통해 가해지는 대신 위에서 가해지는 방식)와, 피터 어니언스가 개발한 철을 저어 불순물을 분리하는 퍼들링 공정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코트는 1783년에 선철을 정련하기 위한 개량된 반사로에 대한 특허를 받았고, 1784년에는 홈이 있는 롤러를 사용하는 퍼들링로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여 이전까지 힘들었던 수작업 공정을 기계화했다.[13][11] 이 기술은 "패들법" 또는 교반 정련법으로 불리게 되었다. 코트가 개발한 반사로는 화상(연료가 타는 곳)과 로상(철이 놓이는 곳)이 분리되어 있어, 연료인 석탄과 선철이 직접 접촉하지 않고 용해 및 정련이 가능했다.[12] 이는 석탄을 사용해도 연료의 유황 성분이 철에 섞일 우려를 없앤 획기적인 발전이었다.[13]

퍼들링 공정은 주철 장입물의 탄소 함량을 산화를 통해 낮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작업자("퍼들러")는 긴 철 막대("래블링 바")를 사용하여 로 안의 철 덩어리를 휘저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연철 덩어리를 추출했다. 이렇게 추출된 금속 덩어리는 해머링 기계로 두드려 불순물(광재)을 제거하는 "싱글링" 과정을 거친 후, 홈이 파인 롤러 압연기에서 압연되어 최종 제품인 봉강으로 만들어졌다.[11]

하지만 코트의 초기 공정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코크스 용융 선철 대신 숯으로 만든 선철을 사용했기 때문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리처드 크로셰이를 비롯한 머서티드필 지역의 제철업자들이 코크스 선철에 맞게 공정을 개선하면서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코트의 기술은 빠르게 채택되어, 1789년 4월 영국 해군 위원회가 봉강 공급 계약 입찰을 공고했을 때 코트의 특허 기술로 제조된 봉강만을 받겠다고 명시할 정도였다.[14] 패들법은 이후 오랫동안 단철 생산의 주요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제강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14]

3. 2. 퍼들 제련법의 원리와 의의

산업 혁명 시기 영국에서는 18세기 초 에이브러햄 다비 1세와 그의 아들이 코크스 제철법을 발명했지만[12], 이 방법으로는 질 낮은 만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양질의 봉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비싼 목탄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해야 했다. 이는 단철 생산량 증가의 걸림돌이 되었고, 영국은 18세기에도 많은 양의 봉강을 스웨덴이나 러시아 제국 등에서 수입해야 했다.[12] 이러한 상황에서 양질의 봉강을 국내에서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기술 개발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코트는 햄프셔의 펀틀리(Funtley)에 위치한 자신의 제철소(이전 티치필드 해머)에서 실험을 거듭했다.[14] 그는 크레인지 형제의 반사로와 피터 어니언스가 개발한 교반(puddling) 공정의 기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14]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코트는 1783년에 선철 정련을 위한 반사로에 대한 특허를, 1784년에는 홈이 있는 롤러가 있는 퍼들링로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13][11] (일부 자료에서는 이 기술들이 1785년과 1783년의 두 개의 특허로 이루어졌다고도 한다[13][11]).

코트가 개발한 퍼들 제련법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반사로 사용: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반사로에서 선철(주철)을 녹인다.[12] 반사로는 연료가 타는 곳(화상)과 철이 녹는 곳(로상)이 분리되어 있어, 연료(석탄)가 철에 직접 닿지 않고 열만 전달된다.[12] 이 구조 덕분에 석탄에 포함된 유황과 같은 불순물이 철에 섞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3]

2. 퍼들링(교반): 반사로 안에서 녹은 선철을 '퍼들러(puddler)'라고 불리는 작업자가 긴 쇠막대기("래블링 바")를 이용해 휘젓는다(교반). 이 과정에서 선철은 공기 중의 산소와 접촉하여 산화되고, 탄소 함량이 낮아지며 다른 불순물들이 분리된다. 점차 선철은 점성이 높은 반고체 상태의 연철 덩어리로 변한다.[12]

3. 후처리 (싱글링 및 압연): 로에서 꺼낸 뜨거운 연철 덩어리를 해머로 두드려(해머링) 내부의 광재(슬래그)와 같은 불순물을 제거한다("싱글링"). 이후, 다시 가열하여 홈이 파인 롤러 사이로 통과시켜 원하는 모양과 크기의 봉강으로 압연한다.[11] 코트가 도입한 롤러 압연 공정은 이전의 단순 해머링 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봉강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코트의 초기 공정은 숯으로 만든 선철을 사용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코크스 용융 선철에는 즉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리처드 크로셰이를 비롯한 다른 제철업자들이 이 공정을 개선하면서 코크스 선철에도 널리 적용될 수 있게 되었다.

퍼들 제련법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첫째, 비싼 목탄 대신 저렴하고 풍부한 석탄을 제철 연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 생산 비용을 크게 낮추었다.[13] 둘째, 양질의 단철을 이전보다 훨씬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영국의 철강 수입 의존도를 크게 낮추고 산업 혁명을 더욱 가속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트의 기술은 빠르게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1789년 4월 영국 해군 위원회는 해군에 납품할 봉강 입찰에서 코트의 특허 기술로 제조된 제품만을 받겠다고 명시할 정도였다.[14] 퍼들법은 이후 약 100년간 가장 중요한 제철 방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19세기 후반에 베세머 법이나 평로 제강법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점차 대체되었다.[14]

4. 사업적 어려움과 말년

헨리 코트는 1780년대 초반 제철 사업에 뛰어들어 압연 공장을 인수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으나, 곧 자금난에 부딪혔다.[6] 그는 영국 해군 급여 사무소의 아담 젤리코(Adam Jellicoe)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이 관계는 젤리코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공금 유용 문제로 인해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7][14] 젤리코의 채무 문제에 연루되어 코트는 결국 1789년 파산을 선고받고 모든 사업 기반을 잃었다.[7][10][14]

파산 이후 코트는 친구들의 도움과 정부로부터 받는 소액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14] 다시는 산업계에 복귀하지 못했다.[10] 그가 개발한 혁신적인 제철 공정은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13] 특허 문제와 로열티 분쟁 등으로 인해 정작 본인에게는 경제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10] 코트는 1800년 5월 23일, 여전히 파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14]

4. 1. 아담 젤리코와의 관계와 파산

1780년, 영국 해군의 급료 위원회와 계약을 맺은 코트는 Attwick의 사업을 인수하여 고철 철제 밴드를 개조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티치필드(Titchfield)에 있는 기존 제철소의 압연 공장을 인수하여 봉강 생산에 활용했다.[6] 그러나 자금 부족 문제에 직면하자, 당시 영국 해군 급여 사무소의 수석 서기였던 아담 젤리코(Adam Jellicoe)에게 재정적 지원을 의존하게 되었다. 젤리코는 코트가 주철을 봉강으로 변환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주기로 했고, 이후 10년간 지원된 금액은 사업 가치 외 별다른 담보 없이 거의 5.8만파운드에 달했다. 당시 급여 사무소 서기들이 공금을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것이 용인되는 관행처럼 여겨졌으나[7], 젤리코의 자금 지원은 공금 횡령에 해당했고 이는 1788년 7월에 드러났다.[14] 이 거래의 일환으로 젤리코의 아들 새뮤얼(Samuel Jellicoe)이 Fontley Works의 파트너로 참여했으며, 이는 훗날 코트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7]

1789년 8월, Treasurer of the Navy영어(해군 회계 장관)은 소송을 통해 코트로부터 2.75만파운드를 회수하려 했다.[14] 같은 해 8월 30일 아담 젤리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코트가 빌린 막대한 자금을 상환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결국 영국 왕실은 아담 젤리코의 모든 재산과 코트 및 새뮤얼 젤리코의 공동 사업체 재산을 압류했다. 코트는 젤리코의 채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고, 다른 채무자들에게 변제할 능력을 상실하여 1789년 10월 파산을 선고받았다.[7][14] 이후 왕실은 티치필드와 고스포트의 작업장을 새뮤얼 젤리코에게 돌려주었다.[7]

파산 후 코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채무를 일부 변제하여 1790년 4월에 '적합 증명서'(certificate of conformity)를 취득하고 파산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14] 1794년부터는 정부로부터 연간 200GBP의 연금을 받게 되었으나, 파산 상태가 정식으로 해소되지는 못했다. 그는 1800년 5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시의 Devonshire Street (Westminster)영어(데본셔 스트리트)에서 사망했다.[14]

코트의 특허는 파산과 함께 국가에 몰수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특허료를 징수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국의 제철업계는 로열티 부담 없이 코트의 혁신적인 기술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의 주요 제철업자들은 1811년, 코트의 미망인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14]

4. 2. 특허 분쟁과 쓸쓸한 죽음

코트의 선철 제조 공정 개선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786년 셰필드 경은 코트의 공정이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발명과 함께 미국 독립 전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8] 1787년, 코트는 사우스 웨일스의 제철업자 리처드 크로셰이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특허를 사용하여 생산된 철강 1톤당 10 실링의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9]

그러나 코트의 사업 자금은 해군 지불 부관(deputy paymaster of the navy)이었던 아담 젤리코(Adam Jellicoe)에게서 나왔는데, 젤리코는 공금을 횡령하여 코트에게 자금을 대주었고, 이 사실이 1788년 7월에 드러났다.[14] 설상가상으로 1789년 8월 30일, 아담 젤리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코트에게 빌려준 5.8만파운드를 회수할 수 없게 되자 영국 왕실은 법적 조치를 취했다. 1789년 8월, 해군 회계 장관(Treasurer of the Navy)은 소송을 통해 코트로부터 2.75만파운드를 회수했고,[14] 왕실은 아담 젤리코의 모든 재산과 코트와 새뮤얼 젤리코(아담 젤리코의 아들)의 공동 사업체 재산까지 압류했다. 결국 코트는 젤리코의 채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고, 다른 채무자들에게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어 1789년 10월 파산 선고를 받았다.[14][10] 왕실은 나중에 새뮤얼 젤리코에게 티치필드와 고스포트의 작업장을 돌려주었다.

파산 후 코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1790년 4월 적합 증명서(certificate of conformity)를 받아 파산하지 않은 사람처럼 생활할 수는 있었지만,[14] 다시는 산업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10] 그가 개발한 퍼들링(Puddling) 공정은 1820년까지 8,200개의 로가 사용될 정도로 널리 퍼졌지만,[13] 많은 제철업자들이 그의 공정을 약간 수정하여 로열티 지불을 피했기 때문에 정작 코트 자신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다.[10]

1794년, 코트는 정부로부터 연간 200GBP의 연금을 받게 되었지만,[14] 파산 상태는 공식적으로 해소되지 않았고, 결국 1800년 5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시의 데본셔 스트리트(Devonshire Street)에서 파산한 상태로 사망했다.[14] 그는 런던 세인트 존 앳 햄스테드 교회 묘지에 묻혔다.

코트가 파산하면서 그의 특허는 국가에 몰수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특허료를 징수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국의 제철업은 로열티 부담 없이 코트의 발명을 활용하여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국의 주요 제철업자들은 1811년, 코트의 미망인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14]

5. 평가 및 영향

헨리 코트가 개발한 퍼들링 공정과 홈이 파인 롤러 압연 기술은 산업 혁명 시기 영국 철강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8] 그의 혁신적인 제철법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면서도 양질의 연철을 대량 생산하는 길을 열었으며, 이를 통해 영국은 철강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철강 생산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12][13]

코트의 기술은 개발 초기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셰필드 경은 이를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발명과 비견할 만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했으며[8], 영국 해군 위원회는 코트의 특허 기술로 제조된 봉강만을 사용하겠다고 명시할 정도로 기술의 우수성과 신뢰성을 인정했다.[14] 이 기술은 철강 생산 비용을 낮추고 생산량을 크게 늘려 철도, 교량, 선박 건설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발전에 필수적인 소재를 공급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기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코트 개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동업자의 공금 유용 문제에 연루되어 파산했으며[10], 그의 기술이 널리 퍼져 영국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허 사용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파산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으며[10], 이는 당시 기술 개발자의 권리 보호가 미흡했던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5. 1. 기술적, 산업적 유산

산업 혁명 시기 영국에서는 18세기 초 에이브러햄 다비 1세와 그의 아들 에이브러햄 다비 2세가 코크스 제철법을 개발했지만[12], 이 방법으로는 질 낮은 만 생산할 수 있었다. 양질의 봉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전히 목탄을 사용해야 했기에 생산량 증대에 한계가 있었고, 영국은 스웨덴이나 러시아 제국에서 많은 양의 봉강을 수입해야 했다.[12] 따라서 국내에서 양질의 봉강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 개발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코트는 햄프셔의 폰틀리(Funtley) 제철소에서 연구를 거듭하여[14], 크레인지 형제의 반사로(열이 아래에서 강제 송풍으로 가해지는 대신 위에서 가해지는 방식)와 피터 어니언스의 퍼들링 공정 등 기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1783년 선철 정련용 반사로 특허, 1784년 퍼들링 공정과 홈이 있는 롤러 특허를 취득하여[13][11] 기존의 힘든 공정을 기계화했다.

코트의 퍼들링 공정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반사로에서 선철을 녹이고, 긴 막대("래블링 바")를 이용해 로 안의 철을 저어주며(교반) 산화를 통해 탄소 함량을 낮추고 불순물을 제거하여 연철 덩어리를 만드는 방식이었다.[12] 이렇게 얻어진 연철 덩어리는 해머로 두드려 광재를 제거하는 "싱글링" 과정을 거친 뒤, 뜨거운 상태에서 홈이 파인 롤러 압연기를 통과시켜 원하는 형태의 봉강으로 만들었다.[11] 코트가 사용한 반사로는 연료 연소 공간과 제련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석탄을 연료로 사용해도 유황과 같은 불순물이 철에 섞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획기적인 장점이 있었다.[12][13] 코트의 초기 공정은 으로 만든 선철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코크스 용융 선철에는 바로 적용하기 어려웠고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이후 사우스 웨일스의 제철업자인 리처드 크로셰이와 다른 머서티드빌 제철업자들이 상당한 수정을 가한 후에야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코트의 제철 공정 개선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1786년 셰필드 경은 이를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발명과 함께 미국 독립 전쟁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8] 이 기술은 빠르게 보급되어, 1789년 4월 영국 해군 위원회는 봉강 공급 계약 입찰에서 코트의 특허 기술로 제조된 제품만을 받겠다고 명시할 정도였다.[14] 코트의 퍼들링법은 이후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더 발전된 제강법으로 대체되었다.[14]

1787년 코트는 리처드 크로셰이와 특허 사용 계약을 맺고, 생산된 철강 1톤당 10실링의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9] 하지만 1789년 동업자이자 자금 제공자였던 아담 젤리코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젤리코는 해군성 관리였는데, 그가 코트에게 빌려준 돈이 공금 유용으로 밝혀지자 왕실은 코트에게 대출금 회수를 위한 법적 조치를 취했고, 결국 코트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10] 이후 재정 상황을 일부 개선했지만, 다시는 산업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가 개발한 퍼들링 기술은 널리 퍼져 1820년까지 8,200개의 퍼들링로가 가동될 정도로 성공했지만, 많은 제철업자들이 그의 공정을 일부 수정하여 특허 사용료 지불을 회피했기 때문에 정작 코트 본인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말년에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지만, 결국 파산 상태로 사망하여 런던 세인트 존 앳 햄스테드 교회 묘지에 묻혔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early life and times of Henry Cort https://salthistory.[...]
[2] 간행물 Cort, Henry (1741?–1800) http://www.oxforddnb[...] 2010-08-05
[3] 논문 'Baltic iron and the British iron industry in the eighteenth century'
[4] 웹사이트 The early life and times of Henry Cort https://salthistory.[...]
[5] 웹사이트 History of Henry Cort http://www.fareham.g[...] Fareham Borough Council 2012-06-06
[6] 웹사이트 The early life and times of Henry Cort https://salthistory.[...]
[7] 웹사이트 The early life and times of Henry Cort https://salthistory.[...]
[8] 서적 Great Engineers https://books.google[...] Books for Libraries; Reprint edition 1970-06-01
[9] 문서 Espinasse (1877), p. 233
[10] 웹사이트 Henry Cort ; a revised biography https://issuu.com/je[...]
[11] Kotobank 平凡社
[12] Kotobank 小学館
[13] Kotobank
[14] ODNB Cort, Henry 2006-09-28
[15] 문서 訳註:「満60歳没」と「人生の60年目に死去」の2通りの解釈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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