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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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초는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 인도, 중앙아시아 등을 여행한 승려이다. 727년 당나라로 돌아와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다. 이 책은 1908년 둔황 석굴에서 발견되었으며, 혜초가 한반도 출신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혜초의 생애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난 세기 초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 대략적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의 출신지는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일본의 종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일본어)와 니시혼간지의 세습 주지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에 의해 신라로 밝혀졌다. 그 전에는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삼장의 제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원조(圓照)의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瓣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을 인용하여, 혜초가 신라인으로서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 삼장을 사사하고 불경 한역에 공헌했다고 고증하였다.
2. 생애
《왕오천축국전》에 따르면,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까지 당나라의 오대산(五臺山) 금강지 대공삼장(大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54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10] 혜초는 당나라에서 밀교를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슈바카라심하에게서, 이후에는 금강지에게서 배웠다. 금강지는 혜초를 "불교 오부(五部)에 능통한 여섯 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
2. 1. 당나라 유학과 인도 여행
719년(성덕왕 18) 혜초는 남인도 출신의 밀교승(密敎僧) 금강지에게 불도를 배웠다.[10] 723년, 중국에 있던 인도인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부처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10]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719년경 광주에서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고, 722년경 금강지의 권유로 해로를 통해 인도로 향했다. 수년간 인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 당나라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다. 장안의 대선복사에서 금강지에게서 불경 번역에 종사했으며, 금강지가 사망한 후에는 불공(705년~774년)의 지도를 받았다.
2. 2. 귀국 후 활동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719년경 광주에서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로부터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의 권유로 722년경 해로를 통해 인도로 향했다. 수년간 인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 당나라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다.[1] 장안의 대선복사에서 계속 금강지에게서 불경 번역에 종사했으며, 금강지가 사망한 후에는 불공(705년~774년)의 지도를 받았다.[1]
780년 오대산에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번역한 기록이 있으며,[1] 최근 연구에서 787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1] 《당고승전》에 혜초의 전기가 없고, 그 전기에 대한 정보가 불분명한 점이 많다.[1]
3. 왕오천축국전
혜초는 723년부터 약 8년간 당나라 광저우를 출발해 수마트라, 스리랑카, 인도, 이란, 중앙아시아 등을 여행하며 중국어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다. 혜초가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20대 초반에 이 여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한반도 출신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방문한 기록이다.
오천축(五天竺)은 인도 전체(중인도, 북인도, 남인도, 동인도, 서인도)를 가리킨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달리,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둔황 문서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저자를 알 수 없었으나, 펠리오의 연구로 신라 승려 혜초의 저작으로 밝혀졌다.
8세기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중국과의 연락이 끊어졌던 인도의 상황을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며, 특히 이슬람 군의 인더스 강 유역 신드 지방 침략에 대한 동시대 기록으로 유명하다.
혜초는 카슈미르 북동쪽 세 왕국에 대해 "티베트의 종주권 아래에 있다… 국토는 좁고 작으며 산과 계곡이 매우 험하다. 사찰과 승려가 있으며, 백성은 삼보를 충실히 숭배한다. 동쪽의 티베트 왕국에는 사찰이 전혀 없고 부처의 가르침을 알 수 없지만, [위에 언급된] 국가에는 후족(胡族)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신자이다."라고 기록했다.[3] 이는 8세기 초 라다크 지역이 티베트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고, 주민들은 티베트인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 1. 내용과 구성
혜초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중국어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중국어)을 저술했다.[1] 723년에 당나라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수마트라, 스리랑카, 인도, 이란,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카슈가르, 쿠차 등을 여행한 8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여행기는 혜초가 바다를 통해 인도에 도착한 후 마가다 왕국(현재의 비하르 주)으로 이동, 쿠시나가르와 바라나시를 방문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북쪽으로 룸비니(현재의 네팔), 카슈미르, 아랍을 방문했고,[1]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 카라샤르를 거쳐[2] 729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여행기는 지역 음식, 언어, 기후, 문화, 정치 상황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혜초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소가 도시와 마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기록했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08년 폴 펠리오가 중국 모가오 굴에서 재발견했다.[1] 현재 원본 조각은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혜초의 저작 중 중요한 부분은 726년 지빈(카피사 왕국) 방문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이 나라가 돌궐 샤히로 여겨지는 돌궐 왕에 의해 통치되었고, 왕비와 고관들이 불교(삼보)를 신봉한다고 기록했다.[4][5]
오천축(五天竺)은 북인도, 남인도, 동인도, 서인도, 중인도를 가리킨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달리, 폴 펠리오가 1908년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둔황 문서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저자를 알 수 없었으나, 펠리오의 연구로 신라 승려 혜초의 저작으로 밝혀졌다.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중국과의 연락이 끊어졌던 인도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이슬람 군의 인더스 강 유역 신드 지방 침략에 대한 동시대 기록으로 유명하다.
3. 2. 재발견과 연구
혜초는 인도 여행 중에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중국어이라는 여행기를 중국어로 썼다. 이 여행기는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재발견하였다.[1] 폴 펠리오가 발견하기 전에는 혜림의 『일체경음의』에 수록된 음의만이 남아있었다. 펠리오의 연구를 통해 이 여행기가 신라 승려 혜초의 저작임이 밝혀졌다.[1]
이 여행기에는 혜초가 바다를 통해 인도에 도착하여 마가다 왕국 (현재의 비하르 주)을 거쳐 쿠시나가르, 바라나시를 방문하고, 북쪽으로 룸비니 (현재의 네팔), 카슈미르, 아랍을 방문한 기록이 담겨 있다.[1] 혜초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라샤르를 거쳐[2] 729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혜초는 여행을 완료하는 데 약 4년이 걸렸으며, 여행기에는 지역 음식, 언어, 기후, 문화,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특히 8세기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중국과의 연락이 끊어졌던 인도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슬람 군의 인더스강 유역 신드 지방 침략에 대한 동시대 기록으로도 유명하다.
폴 펠리오를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동양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최근에는 중국 장이(張毅)의 『왕오천축국전선석(往五天竺國傳箋釋)』(중화서국)이 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상산정진 편찬의 『혜초 오천축국전 연구(慧超五天竺國傳研究)』(교토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1992년)가 출판되었다.
3. 3. 역사적 가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종교적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혜초는 20대 초반인 723년부터 약 8년간 당나라 광저우를 출발해 인도, 이란, 중앙아시아 등을 여행하고 이 여행기를 작성하였다. 한반도 출신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방문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여행기는 혜초가 바다를 통해 인도에 도착하여 마가다 왕국, 쿠시나가르, 바라나시, 룸비니(현재의 네팔), 카슈미르, 아랍 등을 방문한 여정을 담고 있다.[1] 혜초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 카라샤르를 거쳐[2] 729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08년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에 의해 중국 둔황의 모가오 굴에서 재발견되었다. 현재 원본 조각은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연구되고 있다.[1]
이 책은 당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융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소가 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등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들을 담고 있다.
특히, 726년 혜초가 지빈(카피사)을 방문했을 때의 기록은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지역이 돌궐 샤히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왕비와 고관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기록했다.[4][5]
혜초의 기록은 8세기 초 라다크 지역이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주민들은 티베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3]
《왕오천축국전》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더불어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1차 사료이다. 특히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인더스강 유역 침략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3. 4. 혜초의 지빈(카피사) 방문 기록
726년 혜초는 지빈(카피사)을 방문했는데, 당시 지빈은 돌궐 샤히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돌궐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왕비와 고관들은 불교(삼보)를 신봉했다고 기록했다.[4][5]
혜초는 람파카(覽波國)를 지나 산으로 들어가 8일간 여행하여 카피사(罽賓國, 지빈)에 도착했다. 이 나라는 간다라 왕의 관할 아래 있었는데, 여름에는 왕이 카피사에 와서 시원한 기온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고, 겨울에는 간다라로 가서 따뜻한 곳에 거주했다. 겨울에는 카피사에 눈이 쌓여 추웠지만, 간다라는 눈이 없고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원주민은 후(胡, 야만인)족이며, 왕과 기병은 돌궐이었다. 이곳의 복장, 언어, 음식은 토카리스탄과 거의 비슷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남녀 모두 면 셔츠, 바지, 부츠를 착용했고, 남녀 복장에 차이가 없었다. 남자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여자는 머리카락을 유지했다. 이 땅의 생산물은 낙타, 노새, 양, 말, 당나귀, 면직물, 포도, 보리, 밀, 사프란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삼보를 매우 숭배했고, 많은 사찰과 승려가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경쟁적으로 사찰을 짓고 삼보를 지원했다. 큰 도시에는 사씨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부처의 곱슬머리(육계)와 유골 사리를 볼 수 있었다. 왕, 관리, 일반 백성은 매일 이 유물을 숭배했다. 이 나라에서는 소승 불교가 실천되었다. 땅은 산에 있었는데, 산에는 초목이 없어 마치 땅이 불에 탄 것 같았다고 혜초는 기록했다.[7]
참조
[1]
논문
1984
[2]
논문
1956
[3]
논문
The Kingdom of Ladakh
1996
[4]
학술지
The Turki Śāhis and Relevant Brahmanical Sculptures in Afghanistan
https://www.jstor.or[...]
1976
[5]
서적
The Silk Road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6-07-18
[6]
서적
The Silk Road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6-07-18
[7]
웹사이트
T51n2089_001 遊方記抄 第1卷 CBETA 漢文大藏經
http://tripitaka.cbe[...]
[8]
학술지
紹介 / 桑山正進編・『慧超五天竺國傳研究』
https://doi.org/10.5[...]
日本オリエント学会
1993
[9]
백과사전
혜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0]
백과사전
혜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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