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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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덕왕은 신라의 제33대 왕으로,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발해와 대립하며 일본의 침입을 막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다. 내정에서는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휼했으며,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치세 동안 당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도입했고, 735년에는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성덕왕은 737년에 사망했으며, 경주시 조양동에 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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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덕왕 -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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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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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성덕왕 (聖德王) |
휘 | 김흥광(金興光) (초명: 김융기(金隆基)) |
시호 | 성덕대왕(聖德大王) |
재위 기간 | 702년 ~ 737년 |
즉위 | 702년 |
전임자 | 효소왕(孝昭王) |
후임자 | 효성왕(孝成王) |
부왕 | 신문왕(神文王) |
모후 | 신목왕후(神穆王后) |
출생일 | 691년? |
사망일 | 737년 음력 2월 |
사망 장소 | 신라 |
종교 | 불교 |
왕비 | |
왕후 | 선비: 성정왕후(成貞王后), 후비: 소덕왕후(炤德王后)=점물왕후(炤德王后) |
능묘 | |
능묘 | 성덕왕릉 |
기타 정보 | |
묘호 | 없음 |
신라 왕 계보 | |
목록 | 제33대 신라 국왕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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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당나라의 무측천으로부터 위령 사절을 받고, 성덕왕은 모든 爵号를 이어받아 輔國大將軍·行左豹韜尉大將軍·雞林州都督·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현종 즉위 후 713년 10월에는 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雞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진호되었다. 721년 7월에는 발해에 대한 대책으로 북쪽 국경 지대에 장성을 쌓았으며,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산동반도)를 공격해 왔을 때에는, 당나라로부터 733년 7월에 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로 진호되고 칙령을 받아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였다. 이 출병에 대해서는 폭설이 내리고 진로가 협소했던 탓에 신라군의 대부분이 사망하고 공적을 세우지 못한 채 후퇴하였으나,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세력을 키워온 발해에 대한 대항이라는 이해관계의 일치로 당나라와의 친밀한 관계가 재구축되었고, 7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浿江중국어(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당나라에 대해서는 빈번히 조공·하정사를 파견하고, 왕자·왕제를 당나라 황제의 숙위나 국학에 들여보내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의 도입에도 기여하였다. 704년 3월의 『최승왕경』, 717년 9월의 “십철칠십이제자도” 등이 성덕왕 대에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계의 수위를 높여, 722년에는 모벌군성(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을 쌓아 일본의 왜구 침입을 막는 태세를 취하였다. 731년에는 일본의 전선 300척이 동부 해안에 쳐들어와 변방을 습격하였으나 이를 격파하였다.[7]
중앙 관료 기구에 관해서는, 713년에는 예부 아래에 전사서를 설치하고, 714년에는 조서·상표문을 직능으로 하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717년에는 의박사·산박사를 설치하는 등 세밀한 정비를 진행하였다. 또한, 신라의 중앙 귀족 대표인 상대등에 대해서는, 종래에는 왕의 재위 중의 퇴임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728년에는 성덕왕이 상대등 배부의 퇴임을 허락하여, 신라에서 상대등의 최초 해임 사례가 되었다.[8] 왕권을 지탱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가 정비됨과 동시에 귀족 연합 정체가 약화되어 간 모습으로 보인다.[8]
국내에서는 705년 10월, 706년에 이어 흉작을 만나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아, 이에 대해 크게 구휼하였다. 이 대기근과 구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양서가 전하고 있으며, 상당한 대기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대기근 외에도 재위 중에는 여러 차례의 천변지이가 있었다.
재위 36년 만에 737년 2월에 죽었다. 성덕으로 시호되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이차사의 남쪽에 매장되었다.[9] 그 왕릉은 경주시 조양동의 사적 제28호가 비정되고 있다. 사후, 당나라로부터 鴻臚少卿·太子太保의 관작을 추증받았다.
2. 1. 즉위 전
2. 2. 내정
702년 9월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 관리들에게 작 1급씩을 올려 주었으며,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12] 이를 시작으로 5년(706년) 12월과 7년(708년) 여름 4월, 6년(707년) 봄 2월, 8년(709년) 가을 8월, 9년(710년), 12년(713년) 겨울 12월, 14년(715년) 겨울 12월, 15년(716년) 여름 6월, 26년(727년) 봄 정월, 30년(731년) 여름 4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삼국유사》에는 태종 무열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이레에 걸쳐 인왕도량을 열면서도 또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안정복으로부터 「지나친 남발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3]왕의 치세에는 4년(705년)과 6년(706년)에 걸쳐 거듭 흉작이 들었고, 누리의 피해와 가뭄, 산사태 같은 숱한 천변지이가 있었다. 왕은 즉위 4년(705년) 가을 8월과 30년(731년)에 여름 4월에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 주었으며,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의 주(州)와 군(郡)에 흉년이 들어 많은 유랑민이 생기자 친히 사자를 보내어 진휼하게 했다. 5년(706년)에는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는데, 곡식이 여물지 않아 기근이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6년(707년)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한 사람에게 하루에 벼 3되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소요된 쌀은 모두 30만 5백 석에 달했다고 전한다. 2월에는 대사면령과 함께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나눠 주었다고 한다. 17년(718년) 2월에는 왕이 직접 나라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며 위문하고,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몸소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 주기도 했다. 21년(722년) 가을 8월에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나라 안의 모든 땅은 모두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백성들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에 대한 소유권을 법제상으로 추인하고,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유지를 지급하는 조치가 뒤따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713년에는 예부 아래에 전사서를 설치하고, 714년에는 조서·상표문을 직능으로 하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717년에는 의박사·산박사를 설치하는 등 세밀한 정비를 진행하였다. 또한, 신라의 중앙 귀족 대표인 상대등에 대해서는, 종래에는 왕의 재위 중의 퇴임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728년에는 성덕왕이 상대등 배부의 퇴임을 허락하여, 신라에서 상대등의 최초 해임 사례가 되었다. 왕권을 지탱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가 정비됨과 동시에 귀족 연합 정체가 약화되어 간 모습으로 보인다.[8]
704년 3월의 『최승왕경』, 717년 9월의 “십철칠십이제자도” 등이 성덕왕 대에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2. 1. 민생 안정
705년 10월과 706년에 흉작으로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아지자, 성덕왕은 백성들을 크게 구휼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대기근과 구휼에 대해 전하고 있으며, 이는 상당한 규모의 대기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성덕왕 재위 중에는 여러 차례의 천변지이가 있었다.[9]2. 2. 2. 중앙 관료 기구 정비
713년에는 예부 아래에 전사서를 설치하고, 714년에는 조서·상표문을 직능으로 하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717년에는 의박사·산박사를 설치하는 등 세밀한 정비를 진행하였다. 또한, 신라의 중앙 귀족 대표인 상대등에 대해서는, 종래에는 왕의 재위 중의 퇴임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728년에는 성덕왕이 상대등 배부의 퇴임을 허락하여, 신라에서 상대등의 최초 해임 사례가 되었다. 왕권을 지탱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가 정비됨과 동시에 귀족 연합 정체가 약화되어 간 모습으로 보인다.[8]2. 2. 3. 문화 발전
704년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계림잡전(鷄林雜傳)》·《한산기(漢山記)》·《고승전(高僧傳)]]》·《악본(樂本)》 등의 저술을 남겼다. 718년에는 누각(漏刻)을 설치하고 누각전(漏刻典)이라는 관서를 두었다. 연사전(煙舍典)이라는 관청도 이 해에 설치되었다. 732년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성곽 수리를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704년 3월의 『최승왕경』, 717년 9월의 “십철칠십이제자도” 등이 성덕왕 대에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3. 외교
712년에 당 현종이 즉위한 뒤, 당에서는 노원민을 사신으로 보내와 왕의 이름을 고칠 것을 요청했고, 이때를 전후해 왕은 이름을 융기에서 흥광으로 고쳤다.[14] 713년 10월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 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의 작위를 받았다.성덕왕은 당에 대한 조공 및 하정사절을 빈번하게 파견하고 왕자나 왕제를 당에 숙위시키고 혹은 국학에 입학시키기도 했다.[14] 703년에 당에 파견되었던 김사양은 이듬해 3월에 귀국하면서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당으로부터 들여왔고,[14] 714년에 숙위로 당에 파견된 왕자 대감(大監) 김수충은 3년 뒤인 717년 가을 9월에 귀국하여 문선왕(文宣王)과 10철(十哲) 및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쳤고 이는 신라의 태학(太學)에 안치되었다.(《삼국사기》)[14] 안정복은 이를 두고 김인문 이래로 끊어졌던 숙위가 다시 이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14]
당에 들어간 신라 사신은 현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713년 당에 파견된 사신은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접견하였으며,[14] 숙위로 간 김수충은 현종으로부터 당에서 머무를 저택과 비단을 상으로 내리고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다.[14] 714년 윤2월에 파견된 박유는 당으로부터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14] 겨울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신라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이 잔치에는 당의 재신(宰臣)과 4품 이상의 청관(淸官)들만이 참여하도록 허락된 것이었다.[14] 715년 봄 3월에 파견된 김풍후는 이듬해 원외랑(員外郞) 관직을, 718년에 파견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신은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고 한다.[14] 726년 여름 4월과 5월에는 김충신과 왕제 김근질을 당에 보내 각각 새해를 축하하고 또한 조공하였는데, 김근질은 당으로부터 낭장(郞將)의 관작을 받았다.[14] 728년 가을 7월에 파견된 왕제 김사종은 과의(果毅) 관작과 함께 당에서 숙위하였다.[14] 736년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로서 파견된 김상은 도중에 죽었는데, 현종은 애도의 뜻으로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14]
신라에서는 당에 토산물을 바쳤지만 여자를 바친 때도 있었다. 723년 봄 3월에는 나마 천승(天承)의 딸 포정(抱貞)과 대사 충훈(忠訓)의 딸 정완(貞菀) 두 사람을 당 현종에게 바쳤는데, 현종은 이들이 멀리 고향을 떠나온 것을 감안해 차마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14] 이 해 여름 4월에 다시 당에 사신을 보냈을 때, 신라에서 가져간 물품은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미발(美髢),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의 비단, 매를 아로새긴 방울[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은 등을 바쳤다.[14] 당에서 신라에 보낸 물품은 724년 봄 2월에 김무훈을 당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을 때, 귀국하는 무훈에게 현종이 부쳐보낸 글에서는 비단 두루마기[錦袍]와 금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 합쳐 2,000필이었다고 했다.[14] 또한 730년 봄 2월에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에 조회하면서, 신라산 물품으로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000량(兩), 두발(頭髮) 80량,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는데, 현종은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백 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錦細帶]를 내렸으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15] 731년 봄 2월에는 하정사로 김지량을 파견했는데, 이때 신라에서 바친 물품에는 금은과 함께 우황도 포함되어 있었다.[16]
현종은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하고 무늬없는 비단[帛] 60필을 주어 돌려 보냈으며, 따로 왕에게는 무늬있는 채색비단[綾綵] 500필과 무늬없는 비단[帛] 2,500필을 주었다.[16] 733년에는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씩과 자주색 얇은 비단에 수놓은 두루마기[紫羅繡袍],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들인 얇은 비단[五色羅綵] 등 도합 300여 단(段) 등의 물품을 당 현종이 신라왕에게 보냈다. 이를 감사하러 보낸 사신 지렴(志廉)에 대해서도 현종은 비단 다발[束帛]을 내리고 있다.[17] 7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浿江중국어(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2. 3. 1. 당과의 관계
712년에 당 현종이 즉위한 뒤, 당에서는 노원민을 사신으로 보내와 왕의 이름을 고칠 것을 요청했고, 이때를 전후해 왕은 이름을 융기에서 흥광으로 고쳤다.[14] 713년 10월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 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의 작위를 받았다.성덕왕은 당에 대한 조공 및 하정사절을 빈번하게 파견하고 왕자나 왕제를 당에 숙위시키고 혹은 국학에 입학시키기도 했다.[14] 703년에 당에 파견되었던 김사양은 이듬해 3월에 귀국하면서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당으로부터 들여왔고,[14] 714년에 숙위로 당에 파견된 왕자 대감(大監) 김수충은 3년 뒤인 717년 가을 9월에 귀국하여 문선왕(文宣王)과 10철(十哲) 및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쳤고 이는 신라의 태학(太學)에 안치되었다.(《삼국사기》)[14] 안정복은 이를 두고 김인문 이래로 끊어졌던 숙위가 다시 이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14]
당에 들어간 신라 사신은 현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713년 당에 파견된 사신은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접견하였으며,[14] 숙위로 간 김수충은 현종으로부터 당에서 머무를 저택과 비단을 상으로 내리고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다.[14] 714년 윤2월에 파견된 박유는 당으로부터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14] 겨울 10월에 당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신라의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이 잔치에는 당의 재신(宰臣)과 4품 이상의 청관(淸官)들만이 참여하도록 허락된 것이었다.[14] 715년 봄 3월에 파견된 김풍후는 이듬해 원외랑(員外郞) 관직을, 718년에 파견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신은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받아 돌아왔다고 한다.[14] 726년 여름 4월과 5월에는 김충신과 왕제 김근질을 당에 보내 각각 새해를 축하하고 또한 조공하였는데, 김근질은 당으로부터 낭장(郞將)의 관작을 받았다.[14] 728년 가을 7월에 파견된 왕제 김사종은 과의(果毅) 관작과 함께 당에서 숙위하였다.[14] 736년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로서 파견된 김상은 도중에 죽었는데, 현종은 애도의 뜻으로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14]
신라에서는 당에 토산물을 바쳤지만 여자를 바친 때도 있었다. 723년 봄 3월에는 나마 천승(天承)의 딸 포정(抱貞)과 대사 충훈(忠訓)의 딸 정완(貞菀) 두 사람을 당 현종에게 바쳤는데, 현종은 이들이 멀리 고향을 떠나온 것을 감안해 차마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14] 이 해 여름 4월에 다시 당에 사신을 보냈을 때, 신라에서 가져간 물품은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미발(美髢),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의 비단, 매를 아로새긴 방울[鏤鷹鈴], 해표피(海豹皮), 금은 등을 바쳤다.[14] 당에서 신라에 보낸 물품은 724년 봄 2월에 김무훈을 당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을 때, 귀국하는 무훈에게 현종이 부쳐보낸 글에서는 비단 두루마기[錦袍]와 금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 합쳐 2,000필이었다고 했다.[14] 또한 730년 봄 2월에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에 조회하면서, 신라산 물품으로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000량(兩), 두발(頭髮) 80량,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는데, 현종은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백 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錦細帶]를 내렸으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15] 731년 봄 2월에는 하정사로 김지량을 파견했는데, 이때 신라에서 바친 물품에는 금은과 함께 우황도 포함되어 있었다.[16]
현종은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하고 무늬없는 비단[帛] 60필을 주어 돌려 보냈으며, 따로 왕에게는 무늬있는 채색비단[綾綵] 500필과 무늬없는 비단[帛] 2,500필을 주었다.[16] 733년에는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씩과 자주색 얇은 비단에 수놓은 두루마기[紫羅繡袍],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들인 얇은 비단[五色羅綵] 등 도합 300여 단(段) 등의 물품을 당 현종이 신라왕에게 보냈다. 이를 감사하러 보낸 사신 지렴(志廉)에 대해서도 현종은 비단 다발[束帛]을 내리고 있다.[17] 7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浿江중국어(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2. 3. 2. 발해 및 일본과의 관계
721년 발해의 팽창에 맞서 신라는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정부(丁夫) 2천 명을 뽑아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다.[18] 733년 당은 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과 함께 정절(旌節)을 주어 발해를 견제하게 하였다.[20]734년 당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해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20] 당군은 폭설로 인해 얼어 죽은 병사가 반을 넘자 발해 공격을 포기했고, 신라도 출병하지 않았다. 735년 당은 패강(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완전히 승인했다.[20] 이는 신라와 당 사이에서 세력을 키운 발해에 대한 대항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과는 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22]로 초기에는 우호관계였지만, 후반에는 대립 관계로 변하였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년)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722년 10월에는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침입을 막았다.[23][24][25] 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였다.[26]
2. 4. 죽음
성덕왕은 재위 36년 만인 737년 2월에 죽었다.[9] 시호는 성덕(聖德)이며, 《삼국사기》에는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이거사를 경주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고 하였으며, 현재 성덕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성덕왕릉은 경주시 조양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성덕왕릉은 경주에서 불국사(佛國寺)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언덕 소나무숲 속에 있다. 무덤 밑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봉분을 보호하였고, 높이 90cm 정도의 면석(面石)을 두르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바깥쪽에 삼각형 모양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 받침돌 사이에는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 네 군데 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무인석 한 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한 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의 석물 조각기법은 후기 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후기 신라 시대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덕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은 경주시 조양동 666번지에 있었으나, 현재는 목이 부러진 거북 받침대(귀부, 龜趺)만 남아있고, 머릿돌(이수, 螭首)과 몸돌은 모두 사라졌다. 태종무열왕릉비처럼 육각의 거북등 무늬에 앞발과 뒷발에는 각각 다섯 개와 네 개의 발톱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고, 등 한가운데에는 몸돌을 꽂았던 네모난 홈 자국이 있다. 등에 새겨진 무늬나 당초문(唐草紋)을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35년과 1966년에 걸쳐 민간인에 의해 비석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두 조각에서만 각각 한 글자씩 판독할 수 있었다. 글씨는 약 3cm 크기의 해서체(楷書體)이며, 연꽃무늬 기왓조각과 머릿돌 조각도 함께 출토되어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덕왕 사후, 당나라에서는 무측천이 위령 사절을 보냈고, 성덕왕은 모든 작위를 이어받아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현종 즉위 후 713년 10월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특진(特進)·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사지절(使持節)·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雞林州諸軍事)·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상주국(上柱國)·낙랑군공(樂浪郡公)·신라왕(新羅王)으로 진호되었다. 사후 당나라로부터 홍려소경(鴻臚少卿)·태자태보(太子太保)의 관작을 추증받았다.
3. 가계
선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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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조부) | 자의왕후 김씨 (조모) | 신문왕 (아버지) |
신목왕후 김씨 (어머니) | 김흠운 (외조부) | 요석공주 (외조모) |
왕비와 후손 | ||
성정왕후 김씨 (왕비) | 사소부인 (딸) | 김효방 (사위, 사소부인의 남편) |
선덕왕 (외손자, 사소부인의 아들) | 김중경 (아들, 효상태자) | 김수충 (아들) |
소덕왕후 김씨 (왕비) | 효성왕(승경) (아들) | 경덕왕(헌영) (아들) |
경수왕후 김씨 (며느리, 경덕왕의 왕비) | 혜공왕 (손자, 경덕왕의 아들) | 수충 (아들) |
3. 1. 선대
조부는 문무왕(文武王)이고 조모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아버지는 신문왕(神文王)이며, 어머니는 신목왕후 김씨이다. 외조부는 김흠운(金歆運)이고, 외조모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형은 효소왕(孝昭王)이다.3. 2. 왕비와 후손
성덕왕의 왕비는 성정왕후(成貞王后 金氏)와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이다. 성정왕후는 승부령(乘府令)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로, 704년에 입궁했다가 716년에 출궁하였다. 출궁하면서 채색비단 5백 필, 밭 2백 결(結), 조(租) 1만 섬을 받았으며,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하사받았다. 성정왕후와의 사이에서는 딸 사소부인과 아들 김중경(金重慶), 김수충(金守忠)을 두었다. 사소부인은 이찬 김효방(金孝芳)에게 출가하여 선덕왕을 낳았다. 김중경은 태자였으나 717년에 사망하여 효상태자(孝殤太子)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수충은 721년 불교에 귀의하였다.소덕왕후는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로, 72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724년에 사망하였다. 소덕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효성왕(승경 承慶)과 경덕왕(헌영 憲英)을 두었다. 경덕왕은 경수왕후 김씨(만월부인)과 혼인하여 혜공왕을 낳았다.
참조
[1]
뉴스
https://www.idaegu.c[...]
2024-03-03
[2]
뉴스
https://www.idaegu.c[...]
2024-03-03
[3]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Ilchogak
[4]
논문
The Thanatochronology of Some Kings of Silla
[5]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6]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7]
문서
731년 신라-일본 전쟁
[8]
문서
井上1972
[9]
문서
삼국유사 왕력
[10]
웹사이트
효소왕 사망 당시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성덕왕 즉위 당시 나이를 12세로 보는 학계에서는 691년생으로 본다.
https://www.kci.go.k[...]
[11]
서적
삼국사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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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13]
서적
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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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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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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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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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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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유사
[20]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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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삼국사기 성덕왕 33년
[22]
서적
삼국사기
[23]
서적
삼국유사
[24]
웹인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유사
http://www.history.g[...]
국사편찬위원회
[25]
서적
삼국사기
[26]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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