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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로페스 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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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 오컬트와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의 개인 비서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엑토르 캄포라 정부에서 사회복지부 장관을 맡았고,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내각 수석 장관을 역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AAA)을 조직하여 좌익 페론주의자를 탄압했으며, 경제 정책 실패로 사임한 후 해외로 도피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사망했다. 그는 프로파간다 두에(P-2) 회원이었으며, 콘도르 작전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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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로페스 레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4년 호세 로페스 레가
1974년 로페스 레가
본명호세 로페스 레가
존칭 접미사OIC
별칭"마법사", "아르헨티나의 에볼라", El brujo, Daniel, Lopecito
출생일1916년 11월 17일
출생지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사망일1989년 6월 9일
사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녀1명
경력
소속아르헨티나 연방 경찰
복무 기간1945–1976
계급경찰서장
대위
상병
직업경찰관, 외교관
정당정의당
관직
대통령이사벨 페론
임기 시작1975년 7월 11일
임기 종료1976년 6월 18일
대통령엑토르 캄포라,
라울 라스티리,
후안 페론,
이사벨 페론
임기 시작1973년 5월 25일
임기 종료1975년 7월 11일
전임자오스카르 푸이그로스
후임자카를로스 비요네
임기 시작1973년 7월 13일
임기 종료1976년 6월 18일
전임자직함 신설
후임자직함 폐지

2. 젊은 시절

호세 로페스 레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사망했다. 마르셀로 라라키(2002)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존경심이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으며, 벽 전체를 덮는 서재와 영적인 주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7세에 결혼했다.[4]

2. 1. 오컬트와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

그의 전기에 따르면, 로페스 레가는 어렸을 때 오컬트·신비주의 따위의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1951년 그에게 신비주의를 알려준 빅토리아 몬테로(Victoria Montero)를 소개받았다. 로페스 레가는 빅토리아 몬테로의 집에서 프로파간다 두에(프리메이슨) 회원들을 만났다. 1965년 그와 같이,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진 페론의 셋째 아내 이사벨 페론을 알게 되었고, 좌익 페론주의자 베르나르도 알베르테(Bernardo Alberte)의 집에서 이사벨 페론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4] 그의 비밀주의에는 앨리스 베일리의 저작이 포함되었다. "또한 그의 [레가의] 집에서는 앨리스 베일리의 12권의 텔레파시와 코스믹 파이어에 관한 책이 발견되었다..."[2]

2. 2. 경찰 경력과 이사벨 페론과의 만남

로페스 레가는 어렸을 때 오컬트·신비주의 따위의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1944년, 27세의 나이로 연방 경찰에 입대했으며, 경찰청장 필로메노 벨라스코의 도움으로 카사 로사다를 보호하는 경비대에 병장 계급으로 합류했다.[4]

1951년, 빅토리아 몬테로를 만나 신비주의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로페스 레가는 몬테로의 집에서 프리메이슨 조직의 회원들을 만났다. 1965년에는 신비주의에 대한 공통 관심사로 이사벨 페론과 연이 닿았다.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의 셋째 부인으로, 1955년 "해방 혁명" 쿠데타 이후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사벨은 페론의 대리인이자 좌파 페론주의 운동의 후원자인 베르나르도 알베르테 소장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로페스 레가는 이 회의에 참석하며 이사벨의 신뢰를 얻었다.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페론 부부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2][4]

3. 페론의 재집권 이전

1973년 3월 11일, 후안 페론의 대리인 엑토르 호세 캄포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페론은 호세 로페스 레가를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로페스 레가는 그곳에서 에스테반 리기 등 페론주의 좌파 대표들과 대립했다. 1973년 6월 20일, 페론은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3. 1. 엑토르 캄포라 정부와 페론주의 좌우 갈등

엑토르 캄포라가 1973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로 당선되자, 후안 페론은 호세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 사회복지부 장관을 맡도록 했다. 1973년 6월 페론이 귀국하기 이전, 로페스 레가는 몬토네로스에 대해 총격을 가한 에세이사 학살 사건을 일으키면서 페론주의 좌우익간 폭력을 부추겼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아르헨티나 인민혁명군 지도자 마리오 로베르토 상투초는 대량학살 혐의로 로페스 레가와 호세 마누엘 오신데 대령을 고발하려고 했다.

후안 페론과 로페스 레가는 스페인 망명 시기에는 좌익 페론주의자들을 지원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냉혹하게 돌아섰고, 로페스 레가도 내각 회의에서 엑토르 캄포라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군부와 페론주의 우익단체 CGT의 사무총장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와 접촉한 뒤, 대통령 엑토르 캄포라와 부통령 비센테 솔라노 리마는 사임했다. 로페스 레가의 양아들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이 됐으며, 임시 정부는 차기 대선을 준비했다.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 동안 로페스 레가는 정의당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들을 축출하고 임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를 탄압하는 조직을 설립하려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로페스 레가와 임시 정부는 후안 페론이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9월 23일 치러진 대선에서 후안 페론은 62%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3. 2. 후안 페론의 재집권과 좌익 탄압

엑토르 캄포라가 1973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로 당선되자, 후안 페론은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 사회복지부 장관을 맡도록 했다. 1973년 6월 페론이 귀국하기 전, 로페스 레가는 에세이사 학살 사건을 일으켜 페론주의 좌우익 간 폭력을 부추겼다. 마리오 로베르토 상투초는 대량학살 혐의로 로페스 레가와 호세 마누엘 오신데 대령을 고발하려 했다.

후안 페론과 로페스 레가는 스페인 망명 시기에는 좌익 페론주의자들을 지원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냉혹하게 돌아섰고, 로페스 레가도 내각 회의에서 엑토르 캄포라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군부와 페론주의 우익단체 CGT의 사무총장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와 접촉한 뒤, 엑토르 캄포라 대통령과 비센테 솔라노 리마 부통령은 사임했다. 로페스 레가의 양아들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으며, 임시 정부는 차기 대선을 준비했다.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 동안 로페스 레가는 정의당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들을 축출하고 임시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좌익 페론주의자를 탄압하는 조직을 설립하려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로페스 레가와 임시 정부는 후안 페론이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73년 9월 23일 치러진 대선에서 후안 페론은 62%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페론주의와 정부의 우경화에 불안감을 느낀 좌파 페론주의 단체인 몬토네로스는 1973년 9월 25일 CGT 지도자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를 암살했다. 이 암살은 로페스 레가가 모든 무장 단체의 금지와 좌파 신문인 ''엘 문도''의 폐쇄를 명령하는 구실이 되었다. 1973년 11월 21일, 급진 상원 의원 이폴리토 솔라리 이리고옌은 삼중 A가 주장한 첫 번째 테러 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연방 경찰청장 로돌포 알미론은 이 공격을 조직한 혐의를 받았다.

4. 페론 정부의 실세

1973년 후안 페론 정부에서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 암살 사건을 계기로 몬토네로스를 비롯한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우익 성향을 강화했다.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을 조직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3]

후안 페론 사후, 이사벨 페론 정부에서 내각 수석 장관 겸 사회복지부 장관, 연방경찰 총장을 겸임하며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1975년 셀레스티노 로드리고 경제부 장관의 급격한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해 경제 혼란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국민들의 생활고를 심화시켰다.[3]

4. 1.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AAA) 결성과 테러 활동

1973년 9월 25일, 몬토네로스는 CGT의 지도자 호세 이그나시오 루시를 암살했다. 로페스 레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무장 게릴라 그룹을 제거하고 좌익 성향의 언론 '엘 문도(El Mundo)'를 폐쇄했다. 1973년 11월 21일부터 로페스 레가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AAA)이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이 날, AAA는 급진시민연합의 상원의원 이폴리토 솔라리 이리고옌을 목표로 첫 번째 테러를 가했다.[3] AAA는 로페스 레가가 사회복지부 기금에서 횡령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했고, 로페스 레가의 부하인 연방경찰 총장 로돌포 알미론이 조직했다.[3]

1975년 6월,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이 일으킨 정치 테러 활동의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혐의로 고발당했다.[3] 로페스 레가와 로돌포 알미론이 함께 조직한 이 테러 단체는 사회복지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1,500명의 사망과 수백 명의 망명을 초래했다.[3] 1973년 6월 20일 에세이차 학살을 시작으로, 이는 아르헨티나에서 "더러운 전쟁"을 시작했고, 이는 나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군사 ''후타''(1976-83)에 의해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약 3만 명이 "강제 실종"되었다.[3]

4. 2. 이사벨 페론 정부와 권력 강화

1973년 9월 25일, 몬토네로스는 루시 CGT 지도자를 암살했다. 로페스 레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무장 게릴라 그룹을 제거하고 좌익 성향 언론 '엘 문도(El Mundo)'를 폐쇄했다. 1973년 11월 21일부터 로페스 레가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이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급진시민연합 상원의원 이폴리토 솔라리 이리고옌을 목표로 첫 테러를 가했다.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은 로페스 레가가 횡령한 사회복지부 기금으로 무기를 구입했고, 그의 부하인 연방경찰 총장 로돌포 알미론이 조직했다.[3]

후안 페론은 취임 직후 페론주의 좌익을 "국가변란", "폭동" 기도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좌익 페론주의자와 후안 페론 사이의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 소속 의원 8명이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4년 6월 1일 후안 페론이 사망하자, 이사벨 페론은 로페스 레가에게 대통령 권한을 맡기고 내각 수석 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새 내각을 구성하면서 사회복지부 장관직을 유임하고, 연방경찰 총장으로 승진해 겸임했다.

이사벨 정부의 수상 겸 사회복지부 장관으로서, 로페스 레가는 인기 없는 보수적인 재정 정책을 실행했다. 1975년 그의 부하 셀레스티노 로드리고 경제부 장관은 페소화 가치를 50% 평가절하하고 물가제한 정책을 폐지했다. 이는 경제 혼란, 인플레이션, 중산층과 서민의 생활고를 유발했다.[3]

로페스 레가는 정의당 좌익 페론주의자 의원으로부터 반혁명주의자, 파시스트라는 공격을 받았다. 1975년 6월, 그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의 정치 테러 활동 책임자라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1973년 6월 20일 에세이차 학살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은 1,500명의 사망과 수백 명의 망명을 초래했다. 이는 아르헨티나에서 "더러운 전쟁"의 시작이었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군사 정권(1976-83)으로 이어져 약 3만 명이 "실종"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은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22,000명의 실종을 인정했다.[3])

4. 3. 경제 정책 실패와 몰락

후안 페론은 취임 직후, 페론주의 좌익을 "국가변란", "폭동"을 기도하는 세력이라고 지칭하면서 더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좌익 페론주의자와 후안 페론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에 속한 의원 8명이 사임하는 사태로 나타났다.[3] 후안 페론이 1974년 7월 1일에 사망하자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로페스 레가에게 대통령 권한을 맡기면서 내각 수석 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새 내각을 구성하면서 원래 맡았던 사회복지부 장관직을 유임하고, 연방경찰 총장으로 승진해 사회복지부 장관직과 겸임했다.[3]

이사벨 정부의 수상 겸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인기없는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실행했다. 1975년 그의 부하 셀레스티노 로드리고(Celestino Rodrigo) 경제부 장관은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를 50% 평가절하하고 물가제한 정책을 폐지했다. 이는 경제혼란·인플레이션·중산층과 서민의 생활고를 유발했다.[3]

로페스 레가는 정의당의 좌익 페론주의자 의원으로부터 반혁명주의자·파시스트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75년 6월 그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이 일으킨 정치 테러 활동의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혐의로 고발당했다.[3]

5. 해외 도피와 죽음

1975년 7월 11일, 호세 로페스 레가는 셀레스티노 로드리고가 추진한 경제 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스페인으로 도피했다.[5] 그는 1982년까지 스위스에서 도피 생활을 했고, 이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바하마를 거쳐 1986년 미국 마이애미로 도피처를 옮겼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로 인도되어 납치 및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판결을 기다리던 중 1989년 6월 9일 당뇨병으로 사망했다.[5]

5. 1. 도피 생활과 체포

1975년 7월 11일, 로페스 레가는 자신이 임명한 경제장관 셀레스티노 로드리고의 경제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었다.[5] 그는 스페인으로 도피했고, 1982년까지 스위스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이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바하마로 도망가서 살았으며, 1986년에는 미국 마이애미로 도피처를 옮겼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로 인도되어 납치 및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판결을 기다리던 중 1989년 6월 9일 사망했다.

로드리고의 경제 정책에 대한 거센 비판으로 인해, 로페스 레가는 1975년 7월 11일 사임을 강요받았다. 이사벨 페론은 그를 서둘러 스페인 주재 대사로 임명했고, 로페스 레가는 로돌포 알미론과 함께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도피했다. 알미론은 이후 인민동맹의 지도자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의 경호 실장이 되었지만, 2006년 12월 스페인에서 체포되었다.

1976년 3월 24일,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군사 훈타에 의해 축출되었고, 군부는 이른바 "국가 재건 과정"을 조직하고 "더러운 전쟁"을 확대했다. 로페스 레가는 이후 10년 동안 해외에서 기소를 피하며 도망 다녔다. 스페인을 떠나 제네바 근처에서 1982년까지 스위스에서 살았다. 사진 작가에게 발각되자 바하마로 도망쳤다. 1986년까지 마이애미와 바하마 사이를 오가며 살다가 여권 갱신을 시도하던 중 미국에서 체포되었고, 부패, 음모, 다수의 살인 혐의로 아르헨티나로 인도되었다. 그는 재판을 기다리던 중 1989년 6월 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감옥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5. 2. 사망

로페스 레가는 1975년 7월 11일, 그의 부하 셀레스티노 로드리고가 추진한 경제 정책의 실패로 사임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이후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스페인으로 떠났으며, 1982년까지 스위스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5] 체포를 피하기 위해 바하마로 도망갔고, 1986년에는 미국 마이애미로 피신했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로 인도되어 납치 및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판결을 기다리던 중 1989년 6월 9일 당뇨병으로 사망했다.[5]

6. 의혹

호세 로페스 레가는 프로파간다 두에(P-2) 회원 및 콘도르 작전 주도 의혹을 받았다.[6]

6. 1. 프로파간다 두에(P-2)와의 연관성

프로파간다 두에(P-2)는 아르헨티나 군 정보국 수뇌부와 정치권, 경제계는 물론 이탈리아의 반공 인사들을 망라한 거대한 프리메이슨 사조직으로, 반공산주의와 반페론주의를 설립 목표로 한 친군부세력이었다. 1981년 발견된 리치오 젤리의 P-2 회원 목록에 따르면 호세 로페스 레가와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는 P-2의 회원이었다.

2007년 아르헨티나 사법부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의 테러 행위가 로페스 레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로페스 레가가 다른 남미 국가와 연계해 콘도르 작전을 주도했다고 보았다.[6]

6. 2. 콘도르 작전 주도 의혹

프로파간다 두에(P-2)는 아르헨티나 군 정보국 수뇌부와 정치권, 경제계는 물론 이탈리아의 반공 인사들을 망라한 거대한 프리메이슨 사조직으로, 반공산주의, 반페론주의를 설립 목표로 한 친군부세력이었다. 1981년 발견된 리치오 젤리의 P-2 회원 명단에는 호세 로페스 레가와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가 P-2 회원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2007년 아르헨티나 사법부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의 테러행위가 로페스 레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로페스 레가가 다른 남미 국가와 연계해 콘도르 작전을 주도했다고 판단했다.[6]

참조

[1] 웹사이트 José López Rega https://www.britanni[...]
[2] 서적 The Times of the Americas https://books.google[...] Times of Havana Publishing Company 1978-01-01
[3] 뉴스 El Ejército admitió 22.000 crímenes - LA NACION https://www.lanacion[...] 2019-02-11
[4] 기사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에 대한 해묵은 오해 풀리나 http://member.pressi[...]
[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edant.clarin.[...] 2010-12-13
[6] 기사 '테러와의 전쟁'의 원조는 남미 http://korea.pre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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