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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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멕시코의 화가로, 1883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1949년 사망했다. 그는 멕시코 혁명과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주제로 한 벽화 작품으로 유명하며,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인물로 꼽힌다. 오로스코는 멕시코 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작품에 담았으며,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의 벽화 연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을 다루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산 일데폰소 대학 벽화,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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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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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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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
출생 | 1883년 11월 23일 |
출생지 | 시우다드 구스만, 멕시코 |
사망 | 1949년 9월 7일 (65세) |
사망지 | 멕시코시티, 멕시코 |
국적 | 멕시코 |
직업 | |
분야 | 회화, 벽화가 |
사조 | 멕시코 벽화 운동, 사회주의 리얼리즘 |
교육 |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
수상 | 멕시코 국가 예술 과학상 |
2. 생애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1883년 멕시코 하리스코주 사포틀란(현 시우다드 구스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으며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4] 농업과 건축을 공부한 뒤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아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21세 때 사고로 왼손을 잃었다.[5][6]
멕시코 혁명 시기에는 입헌주의 군대의 종군 삽화가로 활동하며 혁명의 참상을 목격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8][9] 1922년 멕시코로 돌아와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지원 아래 프레스코 벽화 작업에 뛰어들며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리베라가 혁명의 이상과 영광을 주로 표현한 것과 달리, 오로스코는 혁명 과정에서 드러난 폭력성과 사회적 모순에 주목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국립 예비 학교 등지에 초기 벽화를 남겼으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갈등으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했다.
미국에서는 포모나 칼리지의 ''프로메테우스''[10][11], 다트머스 칼리지의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 등 중요한 벽화들을 남겼다. 1934년 멕시코로 귀국한 후에는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 과달라하라의 정부 궁전과 호스피시오 카바냐스 등지에 대표작들을 제작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47년에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진주'' 삽화를 그렸으며, 1948년 ''후아레스 부활'' 벽화를 완성했다.[2] 1949년 9월 7일 멕시코시티에서 심부전으로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1883년 멕시코 하리스코주 시우다드 구스만(과거 사포틀란 엘 그란데)에서 로사 데 플로레스 오로스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0년 가족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4]학교에 오가는 길에 그는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의 작업실 창문을 통해 그의 작업을 접하게 되었다. 포사다는 당시 혁명 이후의 멕시코 사회에 대해 풍자적인 판화로 질문을 던지던 삽화가였다. 오로스코는 자서전에서 포사다를 지켜본 경험이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가장 초기의 작은 그림으로 종이를 채우도록 이끈 첫 번째 추진력이었고, 이것이 내가 회화 예술의 존재를 깨닫게 된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포사다의 판화를 보며 색 사용법을 처음 접했다고 밝혔다.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국립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이후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아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21세 때 불꽃놀이용 화약을 다루다 사고로 왼손을 잃었다.[5][6]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아 재학 중이던 1911년, 동료 학생이자 훗날 멕시코 벽화 운동의 동지가 되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학생 파업에 참여했다.[7] 이후 멕시코시티 신문의 삽화가로 활동했으며, 멕시코 혁명 시기에는 "제1 수장"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이끄는 입헌주의 군대의 종군 삽화가로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 상징주의 화가 닥터 아틀의 예술관에 영향을 받았다. 1914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이 무너지고 혁명 세력이 분열되자, 오로스코는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 대항하여 카란사와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을 지지하며 닥터 아틀을 따라 오리사바로 이동했다.[8]
혁명 과정에서 목격한 폭력은 그의 삶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서전에 "세상은 우리 주변에서 찢겨져 나갔다. 병력 수송대가 학살을 향해 지나갔고, 기차가 폭파되었다"고 기록했다.[9]
그는 마르가리타 바야다레스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2. 2. 미술 교육과 초기 활동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1883년 멕시코 할리스코주 시우다드 구스만(과거 사포틀란 엘 그란데)에서 태어났다.[4] 1890년 가족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다.[4] 특히 학교에 오가는 길에 있던 인쇄소에서 작업하던 풍자 삽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의 모습은 어린 오로스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로스코는 훗날 자서전에서 포사다의 작업을 보며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회화 예술의 존재를 깨닫게 된 첫 번째 추진력"이었다고 회고했다. 포사다의 판화를 통해 처음 색의 사용법을 접했다고도 밝혔다.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국립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회화를 병행했다. 이후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아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이 시기 그는 동료 학생이자 훗날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끌게 되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1911년 국립 미술 학교의 학생 파업에 참여하기도 했다.[7] 21세 무렵에는 불꽃놀이용 화약을 다루다 사고로 왼손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5][6]
미술 아카데미 졸업 후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 신문의 삽화가로 활동했으며, 멕시코 혁명 시기에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이끄는 입헌주의 군대의 종군 삽화가로 활동하며 혁명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8] 그는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 맞서 카란사와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을 지지했다.[8] 이 시기 목격한 극심한 폭력은 그의 삶과 예술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세상은 우리 주변에서 찢겨져 나갔다"고 기록했다.[9] 또한 상징주의 화가 닥터 아틀의 예술관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오로스코가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13년 역사화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의 혼란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국내 비평에 실망하여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4년 뒤인 1920년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만화가로 활동을 재개했다. 1922년 귀국 후에는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지원을 받아 프레스코 벽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며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1922년부터 국립 예비 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서 첫 벽화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일부 작품은 보수적인 학생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이 초기 작업들은 그가 경험한 혁명의 어두운 단면과 사회 비판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2. 3. 멕시코 벽화 운동 참여

1922년 멕시코로 돌아온 오로스코는 여러 곳에서 정치적 목적을 담은 프레스코 벽화 대작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로, 이 세 명은 "빅 3" 벽화가로 불린다. 이들은 모두 프레스코 기법을 실험하며 벽화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로스코는 리베라와 함께 운동을 이끌었지만, 멕시코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리베라가 혁명의 영광과 이상을 대담하고 낙관적으로 표현한 반면, 오로스코는 혁명이 치른 피의 대가와 폭력성에 주목하며 더 어둡고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8][9] 그는 혁명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참혹한 본질을 작품에 반영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국립 예비 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 현 산 일데폰소 대학교)에서 첫 주요 벽화 연작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모성'', ''자연과의 싸움에서 인간'',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파괴한다'', ''구 질서의 파괴'', ''귀족'', ''참호'', ''삼위일체''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부 작품은 보수적인 학생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고, 오로스코 스스로 파괴한 작품도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26년 학교로 돌아와 많은 벽화를 다시 그려야 했다.[15][20]
1925년에는 멕시코시티의 타일 하우스(Casa de los Azulejos)에 벽화 ''옴니시엔시아''를 그렸고, 이듬해에는 베라크루스주 오리사바의 산업 학교에도 벽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국내의 비판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15], 오로스코는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포모나 칼리지에 멕시코 화가로서는 외국에서 그린 최초의 프레스코인 ''프로메테우스''(1930)를 남겼는데, 이는 당시의 장식적인 벽화 경향과 달리 매우 개인적이고 강렬한 표현으로 주목받았다.[10][11] 이후 뉴욕 시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와 뉴햄프셔주 다트머스 칼리지에서도 벽화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다트머스 칼리지의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1932-1934)는 24개의 패널로 구성된 대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케찰코아틀 신화부터 현대 문명까지 아우르는 서사적인 작품이다.
1934년 멕시코로 돌아온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에 기계 문명을 비판하는 벽화 ''카타르시스''를 그렸다.[13][14] 이후 과달라하라로 이주하여 정부 궁전에 ''인민과 그들의 거짓 지도자''와 이달고 신부를 그린 ''격렬한 이달고''를, 그리고 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호스피시오 카바냐스의 프레스코 연작을 완성했다. 이 외에도 미초아칸주 지킬판의 가비노 오르티스 도서관(1940), 멕시코시티의 예수 병원(1942-1944) 등에서 작업을 이어갔으며, 1948년에는 그의 마지막 대형 작품 중 하나인 ''후아레스 부활''을 그렸다.[2]
=== 산 일데폰소 대학교 벽화 ===
오로스코의 초기 벽화 활동의 중심지였던 산 일데폰소 대학교(구 국립 예비 학교)의 벽화들은 건물 3개 층과 계단 등 여러 공간에 걸쳐 있으며, 혁명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을 강렬하게 보여준다.[15][20]
- 1층: 안뜰을 둘러싼 벽에는 ''참호'', ''구 질서의 파괴'', ''모성'', ''파업'', ''삼위일체'', ''부유층의 연회'' 등이 그려져 있다.
- ''참호'': 혁명 전쟁의 비극적인 희생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얼굴 없는 세 병사의 모습을 통해 혁명 과정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중앙 인물의 자세는 십자가형을 연상시키며, 혁명의 순교자적 측면을 암시한다.[16][18][19]
- ''삼위일체'': 혁명 지도자가 붉은 모자에 눈이 가려진 채 오히려 노동자와 농민을 위협하는 모습을 통해, 혁명의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민중을 억압하는 지도부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18]
- ''부유층의 연회'': 캐리커처 기법을 사용하여 부유층의 타락과 부패를 풍자한다.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연회를 즐기는 부유층의 모습을 통해 계급 간의 착취와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다.[16][21]
- 3층: ''여인들'', ''무덤 파는 사람'', ''축복'', ''노동자들'', ''작별'', ''가족'', ''혁명가들'' 등이 그려져 있다.[16]
- ''작별'': 혁명을 위해 떠나는 남성들과 그들을 보내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가져오는 이별과 희생의 슬픔을 묘사한다. 반복되는 인물들의 모습은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놓인 개인의 운명을 불가피하고 영원한 것처럼 표현한다.[16]
- 계단 및 기타 공간: ''원주민'', ''병든 자를 돕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젊음'', ''코르테스와 말린체'', ''술 취한 사람들'', ''기술자들'' 등이 있다.[16]
- ''코르테스와 말린체'': 에르난 코르테스와 말린체의 결합을 통해 메스티소의 탄생과 멕시코의 식민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코르테스의 지배적인 자세와 말린체의 종속적인 모습은 두 문화의 불평등한 만남을 암시한다.[18][20]
이처럼 오로스코는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작가로서, 단순한 혁명의 찬미를 넘어 사회의 모순과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깊이 탐구하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2. 4. 미국에서의 활동 (1927-1934)
1927년 오로스코는 멕시코 내 비판 여론 등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1934년까지 활동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는 꾸준했다.1930년 3월부터 6월까지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 위치한 포모나 칼리지 미술과의 초청을 받아 프래리 식당 벽에 프레스코 ''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 이 작품은 "현대 멕시코 학파의 화가가 국가 외에서 그린 최초의 프레스코"로 언급되었으며,[10] 당시 일반적이던 단정하고 장식적인 벽화와 달리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으로 미국 최초의 "현대" 프레스코로 평가받았다.[11]
같은 해 말, 그는 뉴욕 시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 (현재 더 뉴 스쿨)에서도 벽화를 제작했다. 그의 미국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뉴햄프셔주 하노버에 있는 다트머스 칼리지 베이커 기념 도서관 지하에 그린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이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제작된 이 벽화는 총 24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거의 300m2에 달한다. 벽화는 ''이주'', ''인신 제사'', ''케찰코아틀의 출현'', ''옥수수 문화'', ''앵글로-아메리카'', ''히스파노-아메리카'', ''과학'', ''정신의 현대적 이주''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오로스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32년 하계 올림픽의 미술 부문에도 참여했다.[12]
2. 5. 멕시코 귀국과 후기 활동
1934년 멕시코로 돌아온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에서 벽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그렸다.[13][14] 이 시기 그는 공장의 기계 문명을 비판하는 타블로 작업도 병행했다.이후 할리스코주 과달라하라로 이동하여 정부 궁전에 벽화 ''인민과 그들의 거짓 지도자''(The People and Their False Leaders)를 그렸으며, 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오스피시오 카바냐스의 프레스코 연작을 완성했다. 1940년에는 미초아칸주 히킬판(Jiquilpan)의 가비노 오르티스 도서관에서,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멕시코시티의 예수 병원에서 벽화 작업을 이어갔다. 또한 국립 사범 학교 야외 극장의 벽화 ''국민적 우화''(National Allegory) 등 다수의 벽화를 남겼다.
1947년에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진주''의 삽화를 그렸다. 1948년에 제작된 대형 초상 벽화 ''후아레스 부활''(Juárez Reborn)은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알려졌다.[2]
오로스코는 1949년 9월 7일 멕시코시티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심부전으로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6. 사망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던 중 1949년 9월 7일 잠을 자던 중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사망하기 전 해인 1948년에 그린 대형 초상 벽화 ''후아레스 부활''은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2]3. 주요 작품 및 주제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빅 3"로 불리는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8] 세 화가 모두 프레스코 기법을 실험하며 벽화 예술을 발전시켰지만, 오로스코는 멕시코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리베라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리베라가 혁명의 영광과 이상을 강조한 반면, 오로스코는 혁명이 수반하는 폭력성과 인간적 고통이라는 어두운 측면을 주로 다루며 사회 운동의 대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9] 이러한 시각은 그가 직접 목격한 혁명의 참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오로스코는 국립 예비 학교에 ''모성'', ''자연과의 싸움에서 인간'',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파괴한다'', ''구 질서의 파괴'', ''귀족'', ''참호'', ''삼위일체'' 등의 벽화를 그렸다. 이 중 일부는 보수적인 학생들에 의해 훼손되어 1926년에 다시 그려야 했다. 1925년에는 멕시코시티의 타일 하우스(Casa de los Azulejos)에 벽화 ''옴니시엔시아''를 완성했고, 이듬해에는 베라크루스주 오리사바의 산업 학교에도 벽화를 남겼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1930년 캘리포니아주 포모나 칼리지에 그린 ''프로메테우스''는 미국 내에서 멕시코 화가가 그린 최초의 프레스코 벽화로 평가받으며, 당시의 장식적인 경향과 달리 강렬하고 개인적인 표현으로 주목받아 미국 최초의 "현대" 프레스코로 불리기도 했다.[10][11] 같은 해 뉴욕 시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도 벽화를 그렸다. 그의 가장 유명한 미국 작품 중 하나는 뉴햄프셔주 다트머스 칼리지의 베이커 도서관에 있는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 (The Epic of American Civilization, 1932-1934)이다. 이 작품은 총 24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약 300m2에 달한다. 주요 패널로는 ''이주'', ''인신 제사'', ''케찰코아틀의 출현'', ''옥수수 문화'', ''앵글로-아메리카'', ''히스파노-아메리카'', ''과학'', ''정신의 현대적 이주'' 등이 있다.
1934년 멕시코로 돌아온 후,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에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그린 벽화 ''카타르시스'' (Catharsis)를 제작했다.[13][14] 이후 과달라하라로 이주하여 할리스코 주 정부 청사에 ''인민과 그들의 거짓 지도자들'' (The People and Its Leaders)과 미겔 이달고 신부를 묘사한 ''격렬한 이달고'' (Incendiary Hidalgo) 등의 벽화를 그렸다. 특히 호스피시오 카바냐스(Hospicio Cabañas)에 그린 프레스코 연작은 그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40년에는 미초아칸주 지킬판의 가비노 오르티스 도서관,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멕시코시티의 예수 병원에서 작업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1948년에 완성된 대형 초상 벽화 ''후아레스 부활'' (Juárez Reborn)이다.[2]
1947년에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진주''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주요 작품 목록'''
작품명 | 제작 연도 | 소장처/위치 |
---|---|---|
기도하는 손 (Praying Hands) | 1900–24 | |
자연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 (Man Struggling Against Nature) | 1923–24 | 국립 예비 학교 |
추락하는 사람 (Man Falling) | 1923–24 | 국립 예비 학교 |
그의 십자가를 파괴하는 그리스도 (Christ Destroying His Cross) | 1923–24 | 국립 예비 학교 |
법과 정의 (Law and Justice) | 1923–24 | 국립 예비 학교 |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여호와 (Jehovah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 1923–24 | 국립 예비 학교 |
산 일데폰소 칼리지(San Ildefonso College) 벽화 | 1923–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출산 (Maternity)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부자들의 연회 (The Banquet of the Rich)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파업 (The Strike)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원소 (The Elements)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자유 (Liberty)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쓰레기 (Garbage)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부자들 (The Rich) | 1923–24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여성 (Women)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무덤 파는 사람 (The Grave Digger)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축복 (The Blessing)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노동자들 (The Workers)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작별 (The Farewell)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가족 (The Family)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혁명가들 (The Revolutionaries)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원주민 (Aboriginal Races)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병든 자를 돕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Franciscans Helping the Sick)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코르테스와 말린체 (Cortés and Malinche)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술꾼들 (The Drinking Men)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기술자들 (Engineers) | 1924–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참호 (The Trench) | 19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낡은 질서의 파괴 (The Destruction of the Old Order) | 1926 | 산 일데폰소 칼리지 |
옴니시엔시아 (Omniscience) | 1925 | 타일 하우스 (Casa de los Azulejos), 멕시코시티 |
지하철 (The Subway) | 1928 | |
에차테 라 오트라 (Échate la otra) | 1930 | 클리블랜드 미술관 |
부상당한 병사 (Wounded Soldier) | 1930 | 클리블랜드 미술관 |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 1930 | 포모나 칼리지, 캘리포니아 |
아메리카 문명의 서사시 (The Epic of American Civilization) | 1932-34 | 다트머스 칼리지 도서관, 뉴햄프셔 |
미국 문명: 현대의 인신 제사 (American Civilization: Modern Human Sacrifice) | 1932 | 다트머스 칼리지 도서관 |
미국 문명: 고대의 인신 제사 (American Civilization: Ancient Human Sacrifice) | 1932 | 다트머스 칼리지 도서관 |
미국 문명: 현대 세계의 신들 (American Civilization: The Gods of The Modern World) | 1932 | 다트머스 칼리지 도서관 |
카타르시스 (Catharsis) | 1934 |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 멕시코시티 |
인민과 그들의 거짓 지도자들 (The People and Its Leaders) | 할리스코 주 정부 청사, 과달라하라 | |
격렬한 이달고 (Incendiary Hidalgo) | 할리스코 주 정부 청사, 과달라하라 | |
호스피시오 카바냐스 프레스코 연작 | 호스피시오 카바냐스, 과달라하라 | |
후아레스 부활 (Juárez Reborn) | 1948 | |
죽은 자들 (The Dead) | ||
멕시코 풍경 | 나고야 시립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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