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유키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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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유키자네는 1842년에 태어나 1902년에 사망한 인물로, 우토번의 마지막 번주이다. 1861년 형인 호소카와 타츠노리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가독을 상속받았다. 1865년 학문소 주토쿠사이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참여하여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다. 폐번치현으로 우토번이 폐지된 후 도쿄로 이주했으며,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다.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가계는 양자를 통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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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유키자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호소카와 씨 |
이름 | 호소카와 유키자네 |
아명 | 신노스케 (慎之助)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메이지 시대 |
출생 | 덴포 13년 9월 2일 (1842년 10월 5일) |
사망 | 메이지 35년 (1902년 4월 9일) |
묘소 | 구마모토현 우토시 타이운지 |
관위 |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 부젠노카미 |
정치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 → 메이지 정부 |
번 | 히고국 우토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친아버지: 호소카와 유키카 |
양아버지 | 호소카와 타츠노리 |
형제 | 타츠쿠니, 타츠노리, 오다 노부타카, 유키자네, 오가사와라 나가하루, 혼조 히사토미 |
배우자 | 정실: 나카가와 히사아키의 딸 |
계실 | 사토코 (마쓰다이라 나리츠구의 딸) |
측실 | 하나요, 시모다 시케, 사토 |
자녀 | 모리 타카노리, 시즈우, 쓰가루 유키마사, 스미코 (난부 노부카타의 계실), 고이데 히데노부의 정실, 그 외 3남 2녀 |
양자 | 타츠오키 (형 타츠노리의 장남) |
2. 생애
덴포 13년(1842년) 9월 2일, 9대 번주 호소카와 유키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분큐 원년(1861년) 형 호소카와 타츠노리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인 1862년 형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아 우토번의 11대 번주가 되었다. 번주로서 학문을 장려하고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보신 전쟁에 신정부 측으로 참여하였다. 메이지 3년(1870년) 폐번치현으로 우토번이 폐지되자 도쿄로 이주하였고, 1884년에는 화족으로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형의 장남 호소카와 타츠오키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메이지 35년(1902년) 4월 9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덴포 13년(1842년) 9월 2일, 9대 번주 호소카와 유키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분큐 원년(1861년) 5월, 형인 10대 번주 호소카와 타츠노리의 양자가 되었으며, 분큐 2년(1862년) 1월 21일 형이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았다. 분큐 3년(1863년) 4월 10일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서임되었으며, 분큐 4년(1864년) 2월 10일에는 부젠노카미로 전임되었다.2. 2.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참여
게이오 원년(1865년), 학문소인 주토쿠사이(樹徳斎)를 창립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는 번내 인재 양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게이오 4년(1868년)에 발발한 보신 전쟁에서는 타카세번과 함께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오하라구치(大原口)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기여한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메이지 3년(1870년) 9월 4일, 폐번치현에 따라 우토번은 폐지되었다. 유키자네는 이전 영지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000석의 가록(家禄)을 지급받고 도쿄로 이주하였다. 폐지된 우토번의 영지는 구마모토번에 흡수되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8일, 보신 전쟁에서의 공적 등을 인정받아 화족이 되었으며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3. 폐번치현과 도쿄 이주
메이지 3년(1870년) 9월 4일, 폐번치현으로 우토번이 폐지되자 유키자네는 기존 영지 소출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천 석의 가록(家禄)을 받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때 우토번의 영지는 구마모토번에 흡수되었다. 이듬해인 1871년, 형 타츠노리에게 장남 타츠오키가 태어났는데, 유키자네는 훗날 타츠오키를 양자로 삼았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8일에는 화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2. 4. 사망
메이지 35년(1902년) 4월 9일에 사망했다. 향년 61세.3. 가족 관계
호소카와 유키자네는 정실, 계실, 측실을 두어 슬하에 6남 4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들은 다른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딸들은 다른 가문과 혼인하였다. 유키자네의 뒤는 양자로 들인 조카 호소카와 릿코(호소카와 릿소쿠의 장남)가 이었으며, 그의 가계는 다쓰노부, 오토스케로 이어졌다. 한편, 유키자네의 차남 모리 다카노리의 외손녀 고노에 아쓰코(고노에 후미마로의 딸)가 훗날 호소카와 종가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와 혼인하여, 유키자네의 혈통이 호소카와 본가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3. 1. 부모
- 친아버지: 호소카와 유키카
- 양아버지: 호소카와 타츠노리
3. 2. 정실과 측실
호소카와 유키자네는 정실 1명, 계실 1명, 측실 3명을 두었으며, 총 6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부인'''
- 정실: 나카가와 에이코(栄子) - 나카가와 히사아키의 딸
- 계실: 마쓰다이라 사토코(里子) - 마쓰다이라 나리요시의 딸
'''측실'''
- 하나요(ハナヨ)
- 시모다 시케(下田シケ)
- 사토(里)
'''자녀'''
이름 | 신분 | 비고 |
---|---|---|
모리 다카노리 | 차남 | 모리 다카요시의 양자가 됨. 그의 외손녀인 고노에 아쓰코(고노에 후미마로의 딸)는 훗날 호소카와 가문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와 혼인하였다. |
호소카와 시게요리 | 아들 | |
쓰가루 유키마사 | 아들 | 쓰가루 쓰구아키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여 사위가 됨. |
호소카와 스미코 | 딸 | 난부 노부카타의 계실이 됨. |
이름 미상 | 딸 | 코이데 히데노부의 정실이 됨. |
- 이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다 (총 6남 4녀). 유키자네의 아들들은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양자'''
이름 | 관계 | 비고 |
---|---|---|
호소카와 릿코 | 조카 (호소카와 릿소쿠의 장남) | 유키자네의 뒤를 이어 가문을 계승함. |
유키자네 사후 가문은 양자인 조카 호소카와 릿코가 이었으며, 이후 다쓰노부(1896년 ~ 1980년), 오토스케(1928년 ~ ) 순으로 계승되었다. 오토스케는 기쿠야 손스케의 아들로 다쓰노부의 사위 양자이다.
3. 3. 자녀
호소카와 유키자네는 6남 4녀를 두었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구분 | 이름 | 비고 |
---|---|---|
차남 | 모리 다카노리 | 모리 다카요시의 양자가 됨. |
아들 | 호소카와 시게요리 | |
아들 | 쓰가루 유키마사 | 쓰가루 쓰구아키의 서녀(측실에게서 태어난 딸)와 혼인하여 데릴사위가 됨. |
딸 | 호소카와 스미코(澄子) | 난부 노부카타의 계실(繼室, 후처)이 됨. |
딸 | - | 코이데 히데노부의 정실(正室, 본처)이 됨. |
양자로는 조카인 호소카와 릿코(호소카와 릿소쿠의 장남)를 들였고, 릿코가 호소카와 후작가의 뒤를 이었다. 이후 가독(家督)은 다쓰노부, 오토스케 순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유키자네의 아들들은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차남 모리 다카노리의 외손녀인 고노에 아쓰코(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총리대신의 딸)는 호소카와 종가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와 혼인하여, 유키자네의 혈통이 호소카와 본가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3. 4. 양자
양자로는 조카인 호소카와 타츠오키(호소카와 타츠노리의 장남)를 들였다. 유키자네 사후 타츠오키가 가독을 이었으며, 이후 타츠노부(1896년~1980년), 오토스케(1928년~ , 기쿠야 손스케의 아들이자 타츠노부의 사위 양자) 순으로 가계가 이어졌다. 한편, 유키자네의 친아들들은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는데, 그중 한 명인 모리 타카노리의 외손녀 고노에 아쓰코(친부는 공작이자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호소카와 종가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의 아내가 되었다.4. 가계 계승
호소카와 유키자네는 조카인 호소카와 타츠오키(호소카와 릿코)를 양자로 삼아 가독(家督)을 잇게 했다. 타츠오키의 뒤는 타츠노부(立暢, 1896년–1980년)가 이었고, 그 다음은 오토스케(於菟輔, 1928년– )가 계승했다. 오토스케는 기쿠야 손스케의 아들로, 타츠노부의 사위 양자였다.
한편, 유키자네의 친아들들은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중 한 명인 모리 타카노리는 모리 타카요시의 양자가 되었는데, 타카노리의 외손녀인 고노에 아쓰코는 호소카와 종가(宗家) 제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와 혼인하였다. 고노에 아쓰코의 친아버지는 공작이자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코노에 후미마로이다. 이를 통해 유키자네의 가계는 호소카와 종가와 다시 혈연적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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