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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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성옛터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노래로, 망국의 슬픔을 표현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애리수가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조선총독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상징으로 불렸다. 금지곡임에도 불구하고 재발매되었고, 1961년에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영천시와 청송군에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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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 | |
---|---|
개요 | |
제목 | 황성옛터 |
장르 | 트로트 |
작사 | 왕평 |
작곡 | 이애리수 |
발표 년도 | 1928년 |
관련 정보 | |
시대적 배경 | 일제강점기 |
노래에 등장하는 고궁 | 만월대 |
특징 |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됨 |
2. 역사적 배경
〈황성옛터〉는 1928년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곡으로, 망국의 한을 담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를 금지하고 부르는 사람들을 처벌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노래를 더욱 불렀다.[3]
〈황성옛터〉의 파급력은 1933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961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곡을 좋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가수 조영남이 박정희 앞에서 〈황성옛터〉 대신 〈각설이 타령〉을 불러 심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4]
1989년 9월 26일에는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영천시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건립되었고,[5] 2009년 10월 10일에는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 두 번째 노래비가 건립되었다.[6]
2. 1. 노래의 탄생과 초기 반응
이애리수가 신일선 다음으로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노래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배우로 활동했던 이애리수는 단성사에서 〈황성옛터〉를 불렀는데, 관객들은 이애리수에게 함성을 보내는 동시에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족족 처벌하였으나,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대한 맞섬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3] 이후 이애리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로 〈황성옛터〉를 취입하게 되고, 1개월 동안 5만 장이 판매되었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의 물건이 아닌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5만 장보다 더 큰 가치이다.[3]2. 2. 일제의 탄압과 저항
이애리수가 〈황성옛터〉를 부르면서 노래는 큰 인기를 얻었다. 단성사에서 이 노래를 들은 관객들은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하고 부르는 조선인을 처벌했지만, 오히려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더욱 확산되었다.[3] 이애리수는 일본에서 레코드로 〈황성옛터〉를 취입하여 1개월 동안 5만 장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5만 장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3]〈황성옛터〉의 영향력은 다음 해인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경설은 〈고성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와 불렀으나, 발매 즉시 치안 방해를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고 회수되었다.[3] 〈황성옛터〉는 금지곡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재발매되었으며, 1961년에는 김진규, 문정숙, 황정순, 최남현 주연의 동명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하였다.
2. 3. 이애리수의 활동과 노래의 인기
이애리수가 신일선 다음으로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노래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배우로 활동했던 이애리수는 단성사에서 〈황성옛터〉를 불렀는데, 관객들은 이애리수에게 함성을 보내는 동시에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처벌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에 대한 맞섬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3]이후 이애리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황성옛터〉를 레코드로 취입하였고, 1개월 동안 5만 장이 판매되었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의 물건이 아닌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5만 장보다 더 큰 가치이다. 〈황성옛터〉의 파급력은 다음 해인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3] 1935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10대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을 때, 이애리수는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이 넘었음에도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는 이례적으로 재발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61년에는 김진규, 문정숙, 황정순, 최남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3]
3. 사회문화적 영향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 조선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단순한 노래를 넘어선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노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노래를 더욱 불렀다.[3] 또한 이애리수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데 기여를 하였다.[3]
3. 1. 금지곡 지정과 그 이후
〈황성옛터〉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 노래를 금지하고 부르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이 노래를 더욱 불렀다.[3] 1933년에는 이경설이 〈고성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와 불렀으나, 이 역시 발매 즉시 금지곡으로 처분되고 회수되었다.[3] 이는 노래의 가사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음을 보여준다.〈황성옛터〉는 금지곡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재발매되었고, 1961년에는 김진규, 문정숙, 황정순, 최남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989년 9월 26일에는 작사가 왕평의 고향인 영천시 조양공원에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5] 2009년에는 청송군에 두 번째 노래비가 건립되었다.[6]
3. 2. 이애리수의 인기와 위상
〈황성옛터〉는 이애리수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이애리수의 명성이 떨어지고 이난영, 왕수복, 선우일선 등 신예 가수들이 대거 연예계에 뛰어든 1935년, 삼천리 잡지에서 실시한 10대 가수 인기투표에서 이애리수는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이 넘었음에도 10위권 안에 들었다.[3]3. 3. 재발매와 영화 제작
〈황성옛터〉는 금지곡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재발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61년에는 김진규, 문정숙, 황정순, 최남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3]4. 현대적 재조명
현대에는 〈황성옛터〉가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조영남은 박정희가 초빙되었던 육군 본부 위문 공연에서 〈황성옛터〉를 부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다른 노래를 불러 문제가 되기도 했다.[4]
1989년 9월 26일 왕평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건립되었다.[5] 2009년 10월 10일에는 경상북도 청송군에도 노래비가 건립되었다.[6]
4. 1. 박정희와의 일화
조영남은 박정희가 초빙되었던 육군 본부 위문 공연에서 〈황성옛터〉를 부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각설이 타령〉을 불렀다. 이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졌고, 조영남은 뒤늦게 〈황성옛터〉를 세 번 정도 불렀지만 가사를 몰라 박정희는 들어가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각설이 타령〉의 가사 중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부분은 1년 전에도 육군 본부를 방문했던 박정희를 비난한다는 오해를 사 조영남이 심문을 받기도 했다.[4]4. 2. 노래비 건립
1989년 9월 26일, 왕평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건립되었다.[5] 노래비 뒷면에는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 황성옛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5]2009년 10월 10일, 청송향토문화발전회의 후원으로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31번 국도변 목계숲에 〈황성옛터〉의 두 번째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청송군은 왕평이 5세부터 7세까지 지냈고,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6]
참조
[1]
웹인용
100년 전 모던 뉘우스 - 근대의 희로애락 ‘유행가’
https://pub.chosun.c[...]
2019-08-05
[2]
웹인용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 이애리수
http://www.100ssd.co[...]
2019-08-05
[3]
웹인용
원조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경설(李景雪) - 논객닷컴
http://www.nongaek.c[...]
2019-08-05
[4]
웹인용
'라스' 조영남 "노래부르다 강제입대, 헌병대에 끌려갔다"
http://tvdaily.asiae[...]
2019-08-05
[5]
웹인용
'[명복을 빕니다]‘황성옛터’ 가수 이애리수 씨 별세'
http://www.donga.com[...]
2019-08-05
[6]
웹인용
청송 송강리 '황성옛터' 노래비 제막
http://www.kyongbuk.[...]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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