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혜장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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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혜장황후는 몽골 보르지긴 씨족 출신으로, 청나라 순치제의 황후이자 강희제의 황태후였다. 그녀는 순치제의 첫 번째 황후가 폐위된 후, 효장문황후의 추천으로 황후가 되었으나 순치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강희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가 되었으며, 자인궁에서 거처하다가 1717년에 사망했다. 사후 효혜인헌단의자숙공안순덕순천익성장황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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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혜장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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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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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보르지기트 알탄트체체그 (博爾濟吉特 阿拉坦琪琪格) |
씨족 | 보르지기트 (博爾濟吉特) |
출생 | 1641년 11월 5일 (숭덕 6년 10월 3일) |
사망 | 1718년 1월 7일 (강희 56년 12월 6일) |
사망 장소 | 순천부, 자금성 영수궁 |
능묘 | 효릉 |
시호 | 효혜인헌단의자숙공안순덕순천익성장황후(孝惠仁憲端懿慈淑恭安純德順天翼聖章皇后) |
만주어 시호 | 히요오šungga 풀러훈 얼덤부허 후왕허오 (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ᡶᡠᠯᡝᡥᡠᠨ ᡝᠯᡩᡝᠮᠪᡠᡥᡝ ᡥᡡᠸᠠᠩᡥᡝᠣ)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초오르지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씨 |
배우자 | 순치제 |
친척 | 증고모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 대고모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고모 폐후 박이제길특씨 동생 숙혜비 박이제길특씨 |
황후 책봉 | |
재위 기간 | 1654년 7월/8월 – 1661년 2월 5일 |
전임 황후 | 폐후 정비 |
후임 황후 | 효성인황후 |
황태후 책봉 | |
존호 | 인헌황태후 |
재위 기간 | 1661년 2월 5일 – 1718년 1월 7일 |
전임 황태후 | 황태후 소성 |
후임 황태후 | 인수황태후 |
2. 생애
효혜장황후는 몽골 보르지긴 씨족 출신으로, 청나라 2대 황제 숭덕제의 황후 효단문황후와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의 친정 조카였다. 순치제는 어머니 효장문황후의 뜻에 따라 첫 황후 폐후 박이제길특씨를 폐위하고, 1654년 효혜장황후를 새 황후로 맞이했다.[3]
그러나 효혜장황후는 순치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4] 순치제는 동악비를 총애했고, 효혜장황후는 위태로운 황후 생활을 했다.[4][5] 동악비 사망과 순치제의 급서로 강희제가 즉위하자, 효혜장황후는 황태후로 봉숭되어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강희제 즉위 후 황태후가 된 효혜장황후는 자인궁에 거처하다가 1689년 영수신궁으로 옮겼다. 1717년 76세로 사망했으며, 후사는 없었다. 시호는 "효혜"이며, 이후 남편 순치제의 시호를 더하여 효혜인헌단의자숙공안순덕순천익성장황후(孝惠仁憲端懿慈淑恭安純德順天翼聖章皇后)로 추존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효혜장황후는 몽골 보르지긴 씨족 출신으로, 증조부 채상은 청나라 2대 황제 숭덕제의 황후 효단문황후의 오빠이자 숭덕제의 후궁이자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의 아버지였다. 조부 오극선은 효장문황후와 민혜공화원비의 오빠이자 순치제의 첫 황후였던 폐후 박이제길특씨의 아버지였다.[3]순치제는 어머니 효장문황후의 압력으로 1651년에 황후로 맞이한 외사촌 누이 폐후 박이제길특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2년 뒤인 1653년에 그녀를 폐위하여 정비(靜妃)로 강등시켰다.[3] 효장문황후는 폐후가 된 조카딸을 대신하여 1654년 5월에 조카 작이제(폐후의 오빠)의 두 딸을 입궁시켜 순치제의 후궁(妃)으로 삼았다가 다음 달인 6월에 이 자매 중 언니를 황후로 책봉하였는데, 이 여인이 바로 효혜장황후이다.[4] 그러나 효혜장황후 역시 순치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4] 2년 뒤 순치제가 동악비를 총애하면서 위태로운 황후 생활을 이어갔다.[4][5]
효혜장황후는 홍타이지 재위 16년째인 1641년 11월 5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효장문황후(순치제의 생모)의 오빠였다. 여동생은 순치제의 측비 중 한 명인 숙혜비였다. 1654년 5월, 순치제에게 시집가 비가 되었고, 다음 달 황후로 승격되었다. 순치제는 황귀비 동고씨(사후 효헌황후로 추존)를 총애했기 때문에 효혜장황후는 소외되었다. 순치제는 효혜장황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황태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촤얼지(綽爾濟) | 3등 친왕(貝勒) 작위를 받음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씨(Aisin Gioro) | |
할아버지 | 차한(查罕) | 3등 친왕(貝勒) 작위를 받음 |
외할아버지 | 아바타이 | |
고모 | 민혜비 | (1609–1641) |
고모 | 효장문황후 | (1613–1688), 순치제 (1638–1661)의 어머니 |
형제 | 7명 | |
자매 | 언니 2명, 여동생 2명 | |
여동생 | 숙혜비 | (1642–1713) |
2. 2. 순치제와의 결혼과 황후 시절
순치제는 모후(母后)인 효장문황후의 압력으로 순치 8년(1651년)에 황후로 맞이한 외사촌 누이 폐후 박이제길특씨와 불화하여, 결국 2년 뒤인 순치 10년(1653년)에 그녀를 폐후하고 정비(靜妃)로 강봉하였다.[3] 효장문황후는 질녀 폐후 박이제길특씨를 대신하여 다음 해인 순치 11년(1654년) 5월에 조카 작이제(폐후의 오빠)의 두 딸을 입궁시켜 순치제의 후궁(妃)으로 삼았다가, 다음 달인 6월에 이 자매 중 언니를 황후로 책봉하였는데, 이 여인이 바로 효혜장황후이다.1653년 10월 25일, 순치제는 그의 첫 번째 황후인 얼더니 붐바를 폐위시켰는데, 그녀 또한 보르지기트 씨족 출신이었다. 1654년 6월 또는 7월, 알탄체체크는 자금성에 입궁하여 순치제의 후궁이 되었다. 1654년 7월 또는 8월, 그녀는 폐위된 얼더니 붐바를 대신하여 공식적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효혜장황후는 순치제의 사랑을 얻지 못했으며, 2년 뒤 순치제의 연인인 동악비가 등장하여 위태로운 황후 생활을 연명하다가[4] 동악비의 사망과 이어진 순치제의 급서로[5] 순치제의 서3남 강희제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후로 봉숭되어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순치 11년 5월 (1654년), 순치제에게 시집가 비가 되었다. 다음 달, 황후로 승격되었다. 순치제는 황귀비 동고씨(사후 효헌황후로 추존)를 총애했기 때문에, 효혜장황후는 소외되었다. 순치제는 볼지기트 씨의 폐위를 준비했지만, 황태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 3. 강희제 즉위와 황태후 시절
순치제는 모후(母后)인 효장문황후의 압력으로 순치 8년(1651년)에 황후로 맞이한 외사촌 누이 폐후 박이제길특씨와 불화하여, 결국 2년 뒤인 순치 10년(1653년)에 그녀를 폐후하고 정비(靜妃)로 강봉하였다.[3] 이에 효장문황후는 질녀 폐후 박이제길특씨를 대신하여 다음 해인 순치 11년(1654년) 5월에 조카 작이제(폐후의 오빠)의 두 딸을 입궁시켜 순치제의 후궁(妃)으로 삼았다가, 다음 달인 6월에 이 자매 중 언니를 황후로 책봉하였는데, 이 여인이 바로 효혜장황후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순치제의 사랑을 얻지 못했으며, 2년 뒤 순치제의 일생일대의 연인인 동악비가 등장하여 위태로운 황후 생활을 연명하다가[4] 동악비의 사망과 이어진 순치제의 급서[5]로 순치제의 서3남 강희제가 황위에 올라 황태후로 봉숭되어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강희제가 즉위하자, 적모로서 황태후가 되어 자인궁에 거처했다. 강희 28년(1689년)에 영수신궁이 건립되어 그곳으로 옮겨 거처했다.
1717년 궁전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후사는 없다. 1718년 1월 7일에 사망하여 청 동릉의 효릉에 있는 별도의 묘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효혜"이며, 그 후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효혜인헌단의자숙공안순덕순천익성장황후(孝惠仁憲端懿慈淑恭安純德順天翼聖章皇后)로 가시되었다.
3. 존호와 시호
1662년(강희 원년)에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렸고, 1665년(강희 4년)에 '''각순'''(恪順), 1667년(강희 4년)에 '''성혜'''(誠惠), 1676년(강희 15년)에 '''순숙'''(純淑), 1681년(강희 20년)에 '''단희'''(端禧)를 추가로 올렸다. 최종 존호는 '''인헌각순성혜순숙단희황태후'''(仁憲恪順誠惠純淑端禧皇太后)이다.
사후 시호는 '''효혜인헌단의순덕순천익성장황후'''(孝惠仁憲端懿純德順天翊聖章皇后)이며, 1722년(강희 61년)에 '''자숙'''(慈淑), 1735년(옹정 13년)에 '''공안'''(恭安)이 추가로 추존되었다. 최종 시호는 '''효혜인헌단의자숙공안순덕순천익성장황후'''(孝惠仁憲端懿慈淑恭安純德順天翼聖章皇后)이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채상(寨桑) |
조부 | 탁례극도친왕 오극선(卓禮克圖親王 吳克善) |
아버지 | 과이심패륵 작이제(科爾沁貝勒 綽爾濟) |
할아버지 | 차한(查罕) |
어머니 | 아이신 교로 씨(Aisin Gioro) |
외조부 | 아바타이 (1589–1646) |
고모 | 민혜비 (1609–1641) |
고모 | 효장문황후 (1613–1688) |
여동생 | 숙혜비 박이제길특씨(淑惠妃 博爾濟吉特氏, 1642 - 1713) |
남편 | 순치제(順治帝, 1638 - 1661) |
효혜장황후는 몽골 과이심 보르지긴(박이제길특) 씨족 출신이다. 증조부 채상(寨桑)은 청나라의 2대 황제 숭덕제의 정실 황후 효단문황후의 오빠이자 숭덕제의 후궁으로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의 아버지였다. 조부 오극선은 효장문황후와 민혜공화원비의 오빠이자 순치제의 첫 황후였던 폐후 박이제길특씨의 아버지였다.[3]
5. 기타
중국의 유명 작가이자 언론인인 김용의 대표작으로,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녹정기》에는 순치제가 동악비 모자를 암살한 흉수로 효혜장황후를 지목한 내용이 있다.[6]
6. 미디어
- 왕거가 《소장비사(2003)에서 연기했다.
- 양밍나가 《인생의 연대기(2016)에서 연기했다.
- 왕슈주가 《녹정기(2020)에서 연기했다.
참조
[1]
문서
順治十一年 六月
[2]
문서
順治十八年 正月 七日
[3]
서적
중국사 열전 - 后妃
달과소
2006
[4]
서적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
시그마북스
2007
[5]
서적
중국사 열전 - 皇帝
달과소
2006
[6]
서적
녹정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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