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백련사 사적비
1. 개요
강진 백련사 사적비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건립된 석비로, 백련사 대웅전에서 북서쪽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홍문관 수찬 조정저가 비문을 짓고, 낭선군 이우가 글씨를 썼으며, 낭원군 이간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승려들의 명단이 음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최자가 지은 비의 귀부를 사용하고, 비신은 새로 조성되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석비 양식을 함께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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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보물 |
|---|---|
| 지정 번호 | 1396 |
| 지정일 | 2004년 1월 26일 |
|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백련사 (만덕리) |
| 시대 | 고려시대 고종 32년(1245년) |
| 소유자 | 백련사 |
| 수량 | 1기 (총 높이 4.47m, 귀부 높이 1.1m, 비신 높이 2.34m, 비신 너비1.18m, 비신 두께 0.29m, 개석 높이 0.75m, 개석 전면너비1.7m) |
| 지도 | 대한민국 |
| 꼬리표 | 강진 백련사 |
| 문화재청 ID | 12,1396000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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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조 및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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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높이 447cm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귀부(龜趺),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된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귀부, 비신, 이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비신의 건립 연대가 서로 다르지만, 귀부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 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잘 보여준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이다. 이러한 양식상의 특성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2.1. 귀부 (龜趺)
귀부(龜趺)는 지대석(地臺石)과 함께 화강암 한 덩어리(一石)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아랫부분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있고, 눈은 삼각형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 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두 갈래(2조)로 갈라져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cm의 음각선으로 테두리(곽)를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 연화문(蓮花紋)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윗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윗면에는 118cm × 15cm 크기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cm × 190cm × 110cm이다.
2.2. 비신 (碑身)
비신은 2면비로 앞면과 뒷면에는 비문이,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어 있다. 비신 앞면 상단에는 15cm 크기의 전서체(篆書體)로 "만덕산백련사비(萬德山白蓮寺碑)"라고 새겨져 있고, 가로쓰기로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全羅道康津萬德山白蓮寺事蹟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당시 불사(佛事)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조정저(丁肇祚, 1631~1690)가 지었고, 현록대부(顯祿大夫) 랑선군(郎善君) 이우(李俁, 1639~1693)가 썼는데, 상단의 전서만은 가덕대부(嘉德大夫) 랑원군(郎原君) 이간(李侃, ?~1699)이 썼다. 끝부분의 명문에 따르면 1681년(조선 숙종 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신의 크기는 234cm×118cm×29cm이다.
2.3. 이수 (螭首)
조선 숙종 7년(1681년)에 조성되었으며, 우진각지붕 형태로 하단에는 목조건축의 겹처마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상에는 두 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형상인데, 매우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수의 크기는 170cm×75cm이다.
3. 비문 내용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정저(趙鼎著, 1631~1690)가 짓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9~1693)가 글씨를 썼으며, 상단의 전서(篆書)는 가덕대부(嘉德大夫) 낭원군(朗原君) 이간(李侃, ?~1699)이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 1행 45자로 구성되었으며, 백련사 중수(重修), 원묘국사(圓妙國師) 행적, 백련결사(白蓮結社)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비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승려 72명의 이름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가 있었으나 비신(碑身, 비의 몸돌)은 유실되었고 귀부(龜趺, 거북 모양 받침돌)만 남았다. 이후 숙종 신유년(1681)에 다른 돌로 비를 세웠는데 귀부는 옛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4. 역사적 가치
강진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석비 양식을 모두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귀부와 비신의 건립 연대가 다르지만, 각 부분이 지닌 양식상의 특징으로 인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문 내용은 한국 불교사, 특히 고려시대 백련결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높이 447cm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고,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만들어져 서로 다른 건립 연대를 보인다.
귀부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조각 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적비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데, 특히 양 측면에 양각된 초화문은 이 시대의 석비로서는 특이한 예이다. 따라서 강진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석비가 비록 시대를 달리하지만, 각 부분이 지닌 양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보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5. 현지 안내문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북서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있다. 백련사에는 이 비 외에도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의 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 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조선 숙종 7년(1681)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짓고 낭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는데,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그리고 백련결사 등에 대한 내용이다. 비의 뒷면에는 비의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 및 인명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자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가 있었으나 비신(비의 몸돌)은 유실되었고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았다고 한다. 이후 숙종 신유년(1681)에 다른 돌로 비를 세웠는데 귀부는 옛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