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 (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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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예술인 강호(姜湖, 1908년 8월 6일 ~ 1984년 7월 3일)는 일제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한 예술인입니다. 미술, 연극,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생애 및 활동:
- 1908년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 1920년 서울의 사립 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 문제로 퇴학당했습니다.
- 13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빵집 심부름, 우유 및 신문 배달 등을 하며 고학으로 경도회화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 1927년 귀국하여 프로레타리아 문학예술동맹(카프, KAPF)에 가입하여 김복진의 뒤를 이어 미술부와 영화부에서 활동했습니다.
- 1932년 월간잡지 '우리 동무'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 1938년 '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42년에야 석방되었습니다.
-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서기장, 가극단 단장, 국립예술극장 총장, 조선화보사 사장, 평양연극영화대학 및 평양미술대학 교원, 무대미술학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 1984년 사망했습니다.
주요 활동 분야:
- 미술: 선전, 인쇄미술, 상업미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평양 고무공장 파업 전단지 제작, 잡지 『별나라』, 『신소년』 등의 표지 그림과 삽화, 『조선중앙일보』 연재소설 삽화 등을 그렸습니다. 1936년 조선상업미술가협회에 참여했고, 1937년에는 광고미술사를 창립했습니다.
- 영화: 1928년 남향키네마를 설립하여 농촌 영화 「암로」(1929)를 감독하고 출연했습니다. 1930년 영화제작단체 청복키노 창립에 참여했고, 「지하촌」(1931)을 감독했으나 검열로 개봉되지 못했습니다. 월북 후에는 영화 「또 다시 전선으로」(1951)의 시나리오와 미술을 담당하여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상했습니다.
- 연극: 1932년 극단 신건설에 참여했고, 1937년 조선연극협회에서 프로 연극을 상연했습니다. 1943년부터 해방 전까지 극단 고협, 예원좌 등의 연극 무대 미술 장치를 제작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했고, 월북 후에는 연극 「춘향전」(1948), 「조선의 어머니」(1959) 등의 무대 장치를 제작했습니다.
저서:
- 『라운규와 그의 예술』 (1962, 공저)
- 『무대미술의 기초』 (1963)
- 『해방 전 우리나라 살림집과 생활양식』 (1980)
- 『해방 전 우리나라 옷양식』 (1981)
강호는 일제강점기부터 북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 근현대 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강호 (예술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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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강호 |
출생일 | 1908년 8월 6일 |
출생지 | 경상남도 진주군 |
사망일 | 1984년 7월 3일 |
직업 | 화가, 무대미술가, 영화감독 |
장르 | 미술, 연극,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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