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평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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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평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에 의해 축조된 돈대이다. 굴암돈대 북쪽 1,440보에 위치하며, 정포보에 배속되었다. 장방형 평면에 전면에 곡을 주어 배부르게 쌓았으며, 현재 내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서남쪽 포좌 부분이 붕괴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잘 보존되어 있다. 석축 붕괴가 진행 중이며, 문지 및 좌우 석벽이 붕괴되었으나 현존 상태는 양호하다. 서북쪽 전면 석축은 곡선을 이루어 구조적 안정성을 높였고, 누조, 여장 판석 흔적, 4좌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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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평돈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명칭 | 건평돈대 |
로마자 표기 | Geonpyeong dondae |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번지 |
상세 정보 | |
종류 | 기념물 |
지정 번호 | 38 |
지정일 | 1999년 3월 29일 |
시대 | 조선시대 |
이전 지정 정보 | |
종류 | 향토유적 |
지정 번호 | 21 |
지정일 | 1986년 4월 1일 |
해제일 | 1999년 3월 29일 |
2. 역사
건평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설치하였으며, 정포보 소속으로 조운 감시와 국토 방위 임무를 맡았다.[1]
2. 1. 건립 배경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건평돈대를 설치하였다.[1] 건평돈대는 정포보 소속으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漕運) 감시와 국토 방위 임무를 겸하였다.[1]3. 유적 현황
건평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축조한 것으로, 굴암돈대 북쪽 1,440보에 위치하며, 둘레가 88보, 치첩(雉堞)이 40개이고 정포보에 배속되어 있다.[1] 건평돈대는 선박 출입이 불가능하며, 해안선이 돌출된 곳에 위치하여 바다 쪽으로 시야가 잘 확보되어 있다. 돈대 전면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 지형이고 후면은 바위가 많다.[1]
3. 1. 구조 및 형태
건평돈대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앞면에 곡(曲)을 두어 배부르게 쌓았다. 서북쪽 전면 석축은 약간 곡선을 이루는데, 이는 직선 석축보다 외부 압력에 잘 견딜 수 있는 구조적 안정성을 고려한 것이다.[1] 석벽 측면에는 토축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하기 위한 누조(漏槽)가 설치되어 있다.[1] 문지(門址) 근처에는 여장(女牆) 판석 흔적이 남아 있다.[1] 포좌는 전면에 2좌, 좌우 측면에 각 1좌씩 모두 4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지형을 고려하여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1] 포좌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폭을 줄였으며, 내부에는 포탄 등을 수납하는 공간인 이방(裡房)은 없다.[1]이 돈대는 배부름 현상으로 토압을 이기지 못해 석벽 면석의 배열이 흩어질 수 있다.[1]
3. 2. 보존 상태
현재 돈대 내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서남쪽 포좌 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돈대는 잘 남아있는 편이나, 석축은 토압에 의해 붕괴가 진행되고 있어 보완책이 필요하다.[1]문지 및 좌우 석벽이 붕괴되었으나, 전체적인 현존 상태는 양호하다. 배부름 현상으로 인해 석벽 면석 배열이 흩어질 위험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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