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실베스테르 3세
1. 개요
실베스테르 3세는 1045년 1월에 선출되어 잠시 교황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교황 베네딕토 9세가 추방된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비나의 주교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가 로마로 돌아와 실베스테르 3세를 축출하면서 그의 교황직은 짧게 끝났다. 이후 실베스테르 3세는 수트리 공의회에서 파면되었으나, 주교직을 유지하며 활동하다가 1063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부에서 대립 교황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바티칸 공식 목록에는 정식 교황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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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2년 사망 -
포증
포증은 북송 시대의 청렴하고 강직한 정치가이자 관료로, '포청천'이라고도 불리며 부패 척결과 공정한 판결로 명성을 얻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후에는 청백리의 상징이 되었다. -
1062년 사망 -
개성후
고려 정종과 용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개성후는 문종 즉위 후 개부의동삼사에 오르고 수태위, 상서령, 상주국을 역임했으며, 1053년 사망 후 신상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왕족이다. -
1000년 출생 -
리 태종
리 태종은 리 왕조의 제2대 황제로서 삼왕의 난을 진압하고 참파를 정벌하는 등 국위를 떨쳤으며, 《형서》 편찬과 불교 장려를 통해 내치에도 힘썼으나 잦은 전쟁과 과도한 세금 부과, 지나친 불교 숭배로 비판받기도 했다. -
1000년 출생 -
로베르 1세 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는 11세기 초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으로, 리샤르 2세의 아들이며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의 아버지이고, 형 리샤르 3세의 죽음으로 공작위를 계승하여 '악마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플랑드르 내전 개입,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 관여, 예루살렘 순례 중 사망했다. -
사비나 주교 추기경 -
조반니 살비아티
조반니 살비아티는 교황 레오 10세의 외조카로, 추기경, 교황청 서기장, 주교 등을 역임했으며, 코냐크 동맹 전쟁에서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프랑수아 1세의 석방을 협상했으며, 예술가와 작곡가를 후원하다가 1553년 라벤나에서 사망했다. -
사비나 주교 추기경 -
교황 율리오 2세
율리오 2세는 1503년부터 1513년까지 재임한 교황으로, 세속 권위 견제, 교황령 중앙 집권화, 그리고 르네상스 예술가 후원을 통해 로마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2. 배경
세례명이 요한이었던 실베스테르 3세는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인 크레센티 가문 출신이었다. 1032년 10월 교황 요한 19세가 사망한 후, 교황직을 둘러싼 귀족 가문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투스쿨룸 백작 알베리크 3세의 아들 테오필락투스(교황 베네딕토 9세)는 투스쿨룸 가문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8세의 조카이기도 한 베네딕토 9세는 방탕한 생활과 자질 부족으로 인해 1044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3. 교황 선출과 축출
사비나 주교였던 요한은 1045년 1월 21일경 격렬하고 오랜 내부 갈등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실베스테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베네딕토 9세는 그를 파문했고, 3월에 로마로 돌아와 실베스테르 3세를 축출했다. 실베스테르 3세는 사비나로 돌아가 주교직을 다시 맡았다.
1046년 12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소집하고 주재한 수트리 공의회에서 실베스테르 3세는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남은 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이 형벌은 유예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계속 활동했고 적어도 1062년까지 주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063년 10월 교황 알렉산데르 2세 치하에서 사비나 교구의 후임 주교인 후발두스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요한은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실베스테르 3세를 대립교황으로 간주하지만, 바티칸 목록에는 공식 교황(1045)으로 계속 등재되어 있다. 비슷한 상황이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에게도 적용된다. 실베스테르의 교황 이름은 대립교황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다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정당한 교황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수트리 공의회와 이후 생애
1046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소집한 수트리 공의회에서 실베스테르 3세는 교황직과 성직을 박탈당하고 수도원에 유폐되는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벌은 유예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적어도 1062년까지 사비나의 주교로 계속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63년 10월, 후발두스가 사비나 교구의 주교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실베스테르 3세는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5. 교황직 정통성 논란
사비나 주교였던 요한은 격렬하고 오랜 내부 갈등 끝에 1045년 1월 21일경 교황으로 선출되어 실베스테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는 그를 파문했고, 3월에 로마로 돌아와 실베스테르 3세를 축출했다. 이후 실베스테르 3세는 사비나로 돌아가 주교직을 다시 맡았다.
1046년 12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소집하고 주재한 수트리 공의회는 실베스테르 3세에게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하고 남은 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형벌은 유예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계속 활동했고 적어도 1062년까지 주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063년 10월, 교황 알렉산데르 2세 치하에서 사비나 교구의 후임 주교인 후발두스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요한은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실베스테르 3세를 대립교황으로 간주하지만, 바티칸 목록에는 공식 교황(1045)으로 계속 등재되어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적용된다. 실베스테르의 교황 이름은 대립교황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다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정당한 교황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