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신성 로마 제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은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으로 시작되어 1806년 해체된 중앙유럽의 다민족 정치체였다. 처음에는 '로마 제국'으로 불리다가, 1254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명칭이 굳어졌다. 1512년에는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변경되었다.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니다"라고 평했고, 18세기 말에는 공식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800년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면서 부활했고, 이후 카롤루스 왕조의 분열을 겪었다.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토 왕조가 시작되었고,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을 포함했다. 중세 성기에는 선거 왕위 계승이 사실상 세습되었고, 제국 교회 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서임권 투쟁으로 황제 권력이 약화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는 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지만,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대공위 시대를 겪으며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룩셈부르크 왕조가 등장했고, 1356년 카를 4세는 황금칙서를 발표하여 선제후 제도를 확립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 왕을 배출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15세기에는 제국 개혁을 통해 제국 관구와 제국사법실이 설치되었고, 1512년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거치며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30년 전쟁을 통해 영방국가들의 독립이 강화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독독대결체제가 형성되었고, 1806년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패배 후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고,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매우 복잡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는 선출되었고, 제국의회, 제국 관구, 제국 법원, 군대 등 다양한 제도가 존재했다. 인구는 17세기 초 2,500만 명, 1800년 경 2,700만~2,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가톨릭이 지배적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 칼뱅주의가 인정되었고, 유대인도 존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위스의 역사 - 중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성립되어 북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했으나, 분열과 국경 변동을 겪다가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되었다.
  • 스위스의 역사 - 슈바벤 공국
    슈바벤 공국은 알레만니족 영역에 기반하여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공작위를 차지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핵심 공국으로 존속했으나 콘라딘 사망 후 해체, 여러 영지로 분열되어 현재는 바이에른 슈바벤 행정구역으로 남아있다.
  • 서방 기독교 -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제정을 기념하는 중요한 축일로, 줄리아나 드 코르니용의 노력과 교황 우르반 4세의 제정을 거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와 성체 행렬,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작곡한 찬미가 등을 통해 기념하며 많은 국가에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 서방 기독교 - 불가타
    불가타는 히에로니무스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전을 참고하여 옛 라틴어 성경을 수정 및 번역하고, 이후 여러 학자들의 개정을 거쳐 트렌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인정받았으며, 서구 기독교와 여러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친 라틴어 성경이다.
  • 옛 제국 -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통치한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키며,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대량 학살과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 옛 제국 - 만주국
    만주국은 1931년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으로 세운 괴뢰국가로, 푸이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일본 관동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고,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내세웠지만 일본 침략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다 1945년 일본 패망으로 멸망 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지도 정보
신성 로마 제국 최대 영토
신성 로마 제국 최대 영토 (1200–1250년경), 현대 국경에 표시됨
기본 정보
공식 명칭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독일 민족

일반 명칭신성 로마 제국
시대중세 ~ 근대 초기
존속 기간800년/962년 – 1806년
건국일962년 2월 2일
해체일1806년 8월 6일
해체 사건프란츠 2세의 퇴위
이전 국가동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
카롤링거 제국
이후 국가라인 연방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구 스위스 연방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 공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깃발
황제 깃발 (1430년경–1806년)
신성 로마 제국 국장
15세기 디자인
사두매수리
사두매수리 (1510년)
수도다중 중심
수도 (법적)로마
수도 (800–1562년)아헨
수도 (1508–1519년)인스브루크
수도 (1550년대–1583년, 1612–1806년)
수도 (1562–1806년)프랑크푸르트
수도 (1583–1612년)프라하
수도 (1594–1806년)레겐스부르크
수도 (1689–1806년)베츨라어
공용어독일어
중세 라틴어
다양한 언어
민족다민족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1054–1806년)
루터교 (1555–1806년)
칼뱅주의 (1648–1806년)
통화탈러
굴덴
그로셴
라이히스탈러
입법부제국의회
국가원수황제
초대 황제카롤루스 마그누스
초대 황제오토 1세
황제카를 5세
마지막 황제프란츠 2세
면적 (1150년경)1,100,000 km²
인구 (1700년경)23,000,000명
인구 (1800년경)29,000,000명
정치 체제
정부 형태선거군주제
혼합 군주제 (제국 개혁 이후)
역사적 사건
이전 사건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로마 황제로 대관
건국 사건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 황제로 대관
사건 1콘라트 2세가 부르고뉴 왕국의 왕관을 획득
사건 2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사건 3베스트팔렌 조약
사건 4내각 전쟁
사건 5아우스터리츠 전투
해체 사건프란츠 2세의 퇴위
언어
일반 언어독일어
중세 라틴어 (행정/전례/의례)
다양한 언어
기타 언어저지 독일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폴란드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프리지아어
로망슈어
슬로베니아어
소르브어
이디시어
기타 언어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1054–1806년)
루터교 (1555–1806년)
칼뱅주의 (1648–1806년)
기타
국가










2. 국호와 인식

카롤루스 이후, 제국의 영역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라고 불렸다.[533] '신성'(sacrumla, Heiligesde, holy영어)이라는 용어는 1157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신성 제국'(Holy Empire영어)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신성'이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와 교황권을 지배하고자 하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야망을 드러내기 위해 추가되었다.[533]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1254년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533]

1512년 쾰른 제국의회의 법령에 따라 제국의 공식적인 국명은 1474년 처음 사용된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변경되었다.[533] 새로운 국명은 제국이 15세기 후반에 남부, 서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의 영토 대부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 개혁으로 인해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 있어 독일의 제국 영지의 새로운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되었다.[533] 헝가리에서 제국을 부르는 명칭 '독일 로마 제국'(Német-római Birodalomhu)은 이 국명을 줄인 것이다.[533]

18세기 말에는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명이 공식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533]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533]

3. 역사

카롤루스 이후, 제국의 영역은 단순히 '로마 제국'이라고 불렸다.[533] 1157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신성 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신성'(sacrumla)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는 이탈리아와 교황권을 지배하고자 하는 프리드리히 1세의 야망을 드러내기 위해 추가되었다.[17]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1254년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533]

13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정확한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 이전에는 '우주 왕국'(''universum regnum''), '기독교 제국'(''imperium christianum''), '로마 제국'(''Romanum imperium'') 등으로 불렸다.[533] 황제의 정당성은 항상 로마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는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 개념에 의존했다.[533]

1512년 쾰른 제국의회 법령에 따라 제국의 공식 국명은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15세기 후반 제국이 남부 및 서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제국 개혁으로 독일 제국 영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에서 제국을 부르는 명칭 '독일 로마 제국'(Német-római Birodalomhu)은 이 국명을 줄인 것이다.[533] 18세기 말에는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명이 공식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다.[533]

프랑스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533] 현대에는 '독일 제국'(''Deutsches Reich''), '로마-독일 제국'(''Römisch-Deutsches Reich'') 등으로 불렸고, 독일 제국 멸망 이후에는 '구 제국'(''das alte Reich'')이라고 불렸다. 1923년부터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나치당은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 독일 제국을 '제2제국', 나치 독일을 '제3제국'으로 여겼다.[533]

데이비드 S. 배크러치는 오토 왕조하인리히 1세와 오토 1세가 카롤루스 왕조로부터 물려받은 군사, 관료 조직과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534][535][536]

15세기 말까지 신성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독일, 부르고뉴로 구성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영토가 프랑스에 넘어가고 독일 왕국과 보헤미아만 남았다. 이탈리아 영토는 제국 개혁에서 무시되었고, 사실상 독립된 영토로 나누어졌다.[537] 피에몬타-사보이 등 일부 영토는 독립적으로 변했고, 다른 영토는 합스부르크가 지배하에 놓였다. 1678년 프랑슈콩테 상실 이후, 제국 국경은 베스트팔렌 조약부터 제국 해체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독일 연방에 편입되었다.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의 자치 공국들(프랑크니아, 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로타링기아)이 다시 등장했다. 911년 카롤링거 왕 루이 유아왕 사후, 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는 작센의 하인리히 1세에게 왕위를 넘겼고, 919년 하인리히 1세는 왕으로 선출되었다. 933년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족에게 첫 승리를 거두었다.

936년 하인리히 1세 사후, 오토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공작 임명을 통제했으며, 행정에 주교들을 활용했다. 주요 동프랑크 공국 지도자들을 친척으로 교체하고, 가족의 왕권 침해를 막기 위해 주의했다.

951년, 오토 1세는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를 돕고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 왕국, 이탈리아, 교황청을 엮었다. 이는 샤를마뉴 제국 계승을 의미했고, translatio imperiila 개념으로 고대 로마 계승자로 여겨졌다. 오토 왕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오토 1세는 제국 교회 제도로 제국 교회와 대표자들을 제국에 봉사하게 했다. 오토 왕조 시대 황실 여성들은 정치, 교회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링겔하임의 마틸다, 에드기스,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테오파누, 퀘들린부르크의 마틸다 등이 대표적이다.

963년, 오토 1세는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레오 8세를 새 교황으로 임명했다. 오토 2세가 imperator Romanorumla 칭호를 사용하며 비잔티움 제국과 갈등했지만, 테오파누와 결혼하여 혼인 관계를 맺었다. 오토 3세는 세 살 때 왕위에 올랐고, 994년 성년까지 권력 투쟁과 섭정을 겪었다. 크레스켄티우스 2세가 로마와 이탈리아 일부를 통치했다.

996년 오토 3세는 그레고리오 5세를 최초 독일 출신 교황으로 임명했다. 로마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반교황 요한 16세가 잠시 로마를 장악했지만, 황제가 도시를 장악했다.

1002년 오토 3세 사망 후, 하인리히 2세가 즉위하여 독일에 집중했다. 오토 3세와 교황 실베스터의 외교는 유럽에서 기독교화와 라틴 문화 확산에 기여했다. 슬라브족을 유럽에 편입시켰고, 제국은 "교황과 황제를 로마 중심으로 한 국가들의 비잔티움식 대통령직"으로 기능했다.

하인리히 2세는 1024년에 사망하였고, 살리안 왕조의 콘라트 2세가 선출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부르고뉴 4개 왕국으로 구성되었다.

왕들은 주교들을 행정에 활용하고 종교 직책 임명을 결정했다. 클뤼니 개혁 이후 교황청은 이를 부적절하게 여겼다. 그레고리오 7세는 헨리 4세와 투르크 교황권 투쟁을 벌였다. 헨리 4세는 교황 간섭을 거부하고 교황 파문을 설득했다. 교황은 왕을 파문, 폐위하고 충성 서약을 무효화했다. 1077년 카노사의 행진으로 파문이 해제되었지만, 독일 제후들은 슈바벤의 루돌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헨리는 루돌프를 물리쳤지만, 봉기, 파문, 아들들의 반란을 겪었다. 헨리 5세는 1122년 베르름 협약으로 교황, 주교들과 합의했다. 제국 정치 권력은 유지되었지만, 통치자 권력, 특히 교회 권력 한계가 드러났고, 왕의 신성한 지위가 박탈되었다. 교황과 독일 제후들은 제국 정치 체제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다.

동방 식민으로 중앙 유럽 저인구 지역에 독일어 사용자가 유입되었다. 실레시아피아스트 공작들의 노력으로 제국 일부가 되었다. 12세기 후반 포메라니아 공국은 제국 종주권 하에 있었고, 튜턴 기사단 정복으로 독일어 사용 지역이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제국 주권에 대한 독일 열망과 지중해 패권을 꿈꾸던 노르만 시칠리아 왕들의 꿈을 물려받았다. 시칠리아와 제국 연합은 개인 동군연합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5년 이사벨라 2세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이 되었고, 알-카밀과 협상하여 베들레헴과 나사렛을 되찾았다. 1250년 프리드리히 사망으로 슈타우펜 가문 세계 제국 꿈은 끝났다.

초창기 제국은 기독교가 북, 동쪽 이교도 영토로 침투하는 수단이었다. 종교 개혁 시대 제국은 방어적이었고, 내부 평화와 안전을 원했다. 근세 초기 교회와 연관성, 중앙 유럽 방어 책임은 현실이었다. 지기스문트 시대 제국 개혁 계기는 교회가 문제 해결을 돕는다는 생각이었다.

독일 왕조들은 동유럽을 제국에 편입시키려 했다. 결혼, 상속, 전쟁이 룩셈부르크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역할을 했다. 룩셈부르크 가문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여왕 마리아와 결혼했고, 칠리의 바바라와 결혼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헝가리가 황제 개인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룩셈부르크 왕조 마지막 군주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비슷한 규모 제국을 건설했지만, 부르고뉴 왕국과 이탈리아 지배권을 상실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이 동쪽에 집중하며 발루아 왕조 출신 부르고뉴 통치자들은 독일 제후들 불만을 조장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서쪽에 관심을 집중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3세 사촌 알브레히트 2세는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왕관을 통합했지만,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1세 통치 기간 동, 서쪽 이중 초점을 맞추었다. 결혼 정책으로 성공적 확장은 제국 내 지위를 강화했고, 제국 개혁 압력을 증가시켰다. 독일 영토 자원과 도움을 받아 영토를 방어하고 적대 세력에 맞서 싸웠다. 1486년 로마 왕 이후 제국은 부르고뉴 네덜란드 활동과 보헤미아, 헝가리, 동부 정치체 관계에 도움을 제공했다.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잔여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실레시아와 보헤미아를 헝가리 운명에서 구하고 페르디난트를 통치자로 선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제국 통치는 "부와 명성 독립 원천으로 광대한 추가 영토 보유"에 의존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왕조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구분에 주의했다. 제국 개혁 제도는 독일 영토에 봉사했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제국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다른 영토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평행한 왕조 영토 제국 관리 제도"를 개발했고, 자원 우위를 제공하여 황제 칭호를 유지했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를 제국 관할권에서 분리하고 관계를 느슨하게 했다. 보헤미아 왕으로 제후 선제후 권리를 거부하여 보헤미아에 특권 지위를 부여, 제국 내 우월 지위를 확고히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헝가리에 대한 제국 지원을 동원하려 했고, 16세기 헝가리는 왕조에 총수입보다 많은 방위비를 지출하게 했다.

1542년 이후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 프랑스에 맞서 제국 보호를 위한 공통 페니 세금, ''튀르켄힐페''(튀르크 지원)를 징수했다. 헝가리는 제국에 속하지 않아 정치 요인에 달렸다. 의무는 비엔나, 제국 위협 시 효력이 있었다. 1520년대 초 라이히스타그는 헝가리 루이 2세 지원을 주저, 외국 왕자로 여겼다. 1526년 루이 사망 후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며 변화, 90년 동안 제국 과세 주요 목표는 헝가리 국경 방어 비용 보조였다. 무기, 군사 물자는 제국 기반 회사 공급, 독일 은행 자금 조달. 1683-1699년 오스만 제국 축출 병사도 마찬가지다. 1532년 제국 법전은 17세기 중반까지 헝가리 일부 지역에서 사용, 헝가리 자체 법 체계, 오스트리아 법 도입 없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1606년까지 게르만식 칭호 사용 저항, 제국 공작 지위 획득자 거의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왕조 관심사가 제국에 해를 끼친다는 견해에 대해 "왕조주의와 제국 참여 사이에 근본적 불일치 없었다." 제국 결혼 전략은 이중적 영향이었다. 스페인 관계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그리스도교 방어 동반자 제공, 카를 5세가 부르고뉴 네덜란드, 프랑슈콩테, 밀라노를 필립 2세 스페인 제국에 넘겼다.

황실 가문 외 독일 제후들 외국 땅 소유, 외국 통치자 제국 봉토 획득, 제국 제후 가능. 제국 가신 반 주권 상태, 주권 분열 기여, 독일 왕국, 제국, 덴마크, 스웨덴 등 왕국 상호 연결 강화. 스칸디나비아 왕국 17, 18세기 초 전쟁에서 제국 돕기 의무 준수. 독일 제후 가문 통치자, 직접 연합 없었다. 덴마크 제국 기관 영향력 이용, 엘베 강 따라 새 제국 봉토 획득 시도, 성공 못했다.

1806년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은 중앙 유럽 300개 이상 왕국, 공국, 자유 도시, 교회령, 후작령, 백작령 등 영방으로 구성된 국가 연합. 각 영방은 사실상 독립 주권 국가. 30년 전쟁 결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제국 전체 관련 사법, 군사, 지방 행정 구역 등 제도는 통일 국가 시절 1495년 제국 개혁부터 정비. "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 국호, 제도 범위 독일 한정.

제국 개혁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은 정체보다 고대 로마 제국 전통 계승 가톨릭 신앙 유럽 지역 개념. 세속 정점 황제 통치 독일, 이탈리아, 부르고뉴 동군연합 왕국이 정체. 가톨릭 교회 정점 교황도 황제와 동등 권위, 의존, 대립 관계. 중세 전기 로마 제국, 제국이므로 신성, 교회 싸움 신성함 흔들려 중세 후기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시작 독일 국가 파악 962년 오토 1세 즉위. 오토 1세 이후 황제 독일(구 동프랑크 왕국) 출신. 역대 황제 이탈리아 통치 열심, 본국 소홀 영방 자립. 황제 힘 약화, 이탈리아, 부르고뉴 통치권 상실. 종교 개혁, 제국 내 교회 통제 붕괴, 30년 전쟁.

제국 독일 국가 아닌 유럽 전체 권위 파악, 800년 카롤루스 대제 즉위. 프랑크 왕 카롤루스 가톨릭 사회 통일, 동로마 황제 대신 교황 추대. 로마, 게르만, 가톨릭 융합 문화권 정체 성립, 제국 1000년 계승. 동방 로마 제국 인정 못하고 중세 "프랑크" 호칭.

신성 로마 제국 교황 지지 황제 인정 국가, 지역, 800년 카롤루스 대제 즉위 시작, 계승 탄생. 이념적 고대 로마 제국, 가톨릭 교회 포함 개념. 가톨릭 교회, 교황 수호자 신성 로마 황제 최고 권위 교황 이분, 황제 권위 교회 통해 서유럽. 실권 봉건제 제한, 황제 직접 군주 지역 962년 오토 1세 즉위 독일, 이탈리아 북부 한정. "신성 로마 제국" 명칭 분열 경향 강해진 1254년, 이전 "로마 제국", "제국". 근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군주 지역 한정, 여러 민족 국가 연합, 말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 북이탈리아 종주권 상실, 독일 제후 연방. 제국 전체상 파악 어려움,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 근세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아니다" 혹평.[130]

일본 962년 오토 1세 즉위 신성 로마 제국 시작,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 견해 계승.[131] 독일 역사학계 800년 카롤루스 대제 즉위 신성 로마 제국 시작 일반적.

제국사 3개 시기 구분:


  • 프랑크 왕 카롤루스 황제 즉위-중세 전기 "로마 제국" 시대(800년-10세기)
  • 오토 1세 즉위-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제국" 시대(962년-1254년)
  • 중세 후기-1806년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 시대[132]


"로마 제국" 시대 동로마 제국 대항 힘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왕 카롤루스 1세 800년 "로마 황제" 즉위 시작. 역사학상 카롤링거 제국. 영역 당시 가톨릭 세계 전역, 고전 고대, 가톨릭, 게르만 문화 융합(카롤링거 르네상스). 843년 베르됭 조약, 870년 메르센 조약 결과,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분할. 제위 이탈리아 다툼, 924년 황제 베렌가리오 1세 암살, 황제 공위 시대.

"제국" 시대 962년 동프랑크 왕 오토 1세 황제, 제위 부흥 시작. 황제 이탈리아 왕, 동프랑크 왕 겸 군주, 1032년 프랑스 남동부 아를 왕국 부르고뉴 왕 겸. 제국 정치 중심 동프랑크 왕국(후 독일), 11세기 이후 동프랑크 왕 로마 왕 칭. 로마 왕 게르만 왕국 전통 선거 왕제 형식 선출, 작센 왕조, 살리아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삼왕조 시대 사실상 세습. 선거 원리 왕통 단절 비상시.[187][133] 로마 왕 로마 교황 즉위 황제, 독일 제후 이탈리아 반도 원정(이탈리아 정책). 황제 독립성 강한 제후 대항 수단 제국 내 교회 통치 기구 편입(제국 교회 정책).[134] 10-11세기 황제권 교황권 우세, 역대 황제 부패 교황청 개입. 그레고리우스 개혁 교회 개혁 운동 진전, 황제, 교황 대립. 11세기 후반-12세기 서임권 투쟁 황제 패배, 신권 상실, 교황 권위 황제 능가. 제후 특권 확대, 영방 지배 확립.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20년 왕권 영향력 공동화 대공위 시대, 제후 분권화 진행.[135]

"신성 로마 제국" 국호 대공위 시대 사용 시작. 대공위 시대 이후 13-15세기 로마 왕위 세습, 다른 가문 국왕 선택 도약 선거 시대. 1356년 황제 카를 4세 금인칙서 발포, 로마 왕 독일 유력 7명 선제후 선거 선택. 선제후 재판권, 화폐 주조권 등 자치권. 15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대공 합스부르크가 제위 독점.[136] 막시밀리안 1세 통치 시대 1495년 실시 제국 개혁, 신성 로마 제국 제후 연합체 새로운 역사.[149] 로마 왕 교황 제관 불필요 신성 로마 황제, 동시기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 국호. 황제 이탈리아, 부르고뉴 왕권 상실.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 시대 16세기, 황제 카를 5세 이탈리아 전쟁 발루아 왕조 프랑스 왕국, 교황 싸움 이탈리아 패권.[137] 잉글랜드 왕가 혼인 관계, 교황청 공인 중세 대학 영토 밖. 동시기 시작 종교 개혁 독일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분열. 종교 분쟁 황제 중심 가톨릭 세력 패배,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 프로테스탄트 신앙 허용, 영방 독립성 강화. 종교 대립, 1618년 시작 30년 전쟁 독일 각지 피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전쟁 종결, 제후 독자 외교권 포함 영방 고권(주권) 인정. 평화적 내분 해결 수단 정비, 제후 협력 제국 집단 방위 신성 로마 제국 특유 제도 확립.[424] 베스트팔렌 체제 18세기 제후 간 균형 붕괴, 형해화. 프로이센 왕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두각,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제국 병력 대부분 프로이센 의지. 프로이센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합스부르크가 대립 관계. 합스부르크가 외교 혁명 숙적 프랑스 동맹, 1754년 7년 전쟁 프로이센 대립.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 제국 나폴레옹 침략, 이탈리아, 라인 강 이서 사실상 프랑스 병합.

1804년 "로마=독일 제국" 개칭 제국 300개 이상 제후 40개 전후 통합・정리. 새 탄생 중규모 제후 유럽 프랑스 나폴레옹 종속 라인 동맹 편성.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 1806년 8월 1일 제국 해산 결의, 프랑스 공사 의회 "독일 제국" 해산 결의서 낭독.[138]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 1806년 8월 6일, 빈 궁정 내 예배당 발코니 전령관 짧은 제국 해산 칙서 낭독,[138] 중세 제국 해체.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 몰락기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자칭, 지금도 부르는 정체 어떤 점 신성, 로마, 제국 아니다.” 평가, 유명.[511] 17세기 법학자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 신성 로마 제국 국가론 규칙 벗어난 “요괴 같은 것” 평가.[512][513]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신문 기사 읽은 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무심 일기 당시 사람 신성 로마 제국 무관심 사례.[514] 18세기 후반 독일 법학자 신성 로마 제국 법 질서 유지 기능 적극 평가, 국가성 강조.[515]

19세기 중반 독일 제국 성립 후 독일 역사학계 권력 국가 지향, 중앙 집권화 실패 나폴레옹 패배 소멸 신성 로마 제국 민족 분열 독일 이익 지키지 못한 정치적 무능 단정. 권력 국가 건설 독일 통일 달성 프로이센 옹호 프로이센 중심주의 해석.[516] 나치 독일 경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권력 국가 개념 신뢰 상실, 신성 로마 제국 근대 국가 전환 실패 체제 해석 계속.[517]

1960년대 서독 역사학계 기존 집권적 국민 국가 유일 역사적 선택지 부정, 신성 로마 제국 수정주의적 접근 시작. 1980년대 이후 수정주의적 해석 활발, 주요 논지 신성 로마 제국 구조 황제, 제후 이원론적 이해, 제국 의회, 제국 법원, 제국 크라이스 등 구성원 제국 제도 상호 작용, 법 공동체 측면 고찰.[518][519]

수정주의적 재평가, 신성 로마 제국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독일 종교 전쟁 발생 않고 신구 양파 공존 이유, 소국 분열 소국 대부분 제국 붕괴 명맥 유지 의문 답, 막시밀리안 1세 시작 제국 개혁 지적.[520] 제국 개혁 황제 권력 독립 사법 제도, 제국 크라이스 단위 군사 제도 창설, 종교 갈등 분쟁 법원 해결, 대외 전쟁 일치 대응 주장.[520][521]

베스트팔렌 조약 부정적 측면, 이후 150년 영방 독자성 유지 독일 완전 분열 방지 법 공동체 구축 역할, 오늘날 독일 연방제 기초 평가 견해.[522][523]

3. 1. 중세 전기

서로마 제국은 5세기에 갈리아 지역을 상실했고, 이 지역에 몰려온 게르만족 부족들이 통제권을 차지했다.[538] 5세기 말-6세기 초, 클로도베쿠스 1세프랑크인 부족을 통일하고 프랑크 왕국을 세우며 갈리아 북부 및 라인강 유역에서 패권을 이룩했다. 이후 클로도베쿠스의 후손들은 메로베우스조를 이루었다.[539][540] 메로베우스조는 분할상속제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8세기가 되면 각 왕들은 권력이 심하게 축소되어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카롤루스 가문이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다.[541] 751년, 마르텔루스의 아들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프랑크인의 왕이 되었고, 교황의 사후 승인을 얻었다.[542][543] 이후 카롤루스조는 교황과 긴밀한 동맹을 유지했다.[544]

768년, 피피누스의 아들 카롤루스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카롤루스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쳐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를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이로써 교황령과 영토가 연결되었다.[545][546]

797년, 동로마 제국의 태후 이리니가 자기 아들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로마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기독교회는 남자 로마 황제를 기독교 세계의 영수로 생각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3세는 이것을 동로마의 권위를 거부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카롤루스 1세가 랑고바르드인들을 물리쳐 교황령의 방위를 굳건히 해준 바, 카롤루스 1세가 새로운 "황제"의 적임자로 여겨졌다. 그래서 800년 성탄절 날, 레오 3세는 카롤루스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어주고, 근 3세기만에 서로마 황제 제위를 부활시켰다.[547][548] 한편 동로마 여제 이리니가 802년 니케포로스 1세에게 폐위되며 동로마의 지배자가 다시 남자가 됨에 따라 동서에 두 명의 로마 황제가 있는 형국이 되었다.

814년 카롤루스 1세가 사망하자 제위는 아들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에게 넘어갔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죽자, 루도비쿠스 1세 생전에 공동지배자로 지명되었던 아들 로타리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 카롤루스 1세가 넓혀 놓은 판도는 과거 메로베우스조처럼 분할상속에 의해 여러 개의 영토들로 갈라지게 되었고, 9세기 하반기가 되면 제위를 놓고 서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조 군주들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 칼부스, 동프랑크의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가 일시적으로 제국을 재통일하기도 했으나, 888년 카롤루스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카롤루스 제국은 완전히 파탄나 버리고 두번 다시 재통일되지 못했다.[549] 카롤루스 크라수스 이후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서로마 황제의 권력이 미치는 강역은 이탈리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탈리아 카롤루스조 황제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가 924년 죽으면서 카롤루스조의 제위는 단절된다.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의 자치적인 종속 공국들(프랑크니아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작센 공국, 로타링기아)이 다시 등장하였다. 911년 카롤링거 왕 루이 아동이 후계 없이 사망하자, 동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통치자에게 왕위를 넘기지 않고 대신 공작들 중 한 명인 콘라트 1세를 동프랑크 왕(Rex Francorum Orientalium)으로 선출하였다. 콘라트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주요 경쟁자였던 작센의 하인리히 1세(919년-936년 재위)에게 왕관을 넘겨주었고, 하인리히 1세는 919년 프리츨라르 국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침입해오는 마자르족과 휴전을 맺었고, 933년에는 리아데 전투에서 그들에 대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인리히 1세는 936년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후손인 리우돌핑가(또는 오토 왕조)는 약 1세기 동안 동방 왕국 또는 독일 왕국을 계속 통치하였다. 하인리히 1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이자 지정된 계승자인 오토 1세는 936년 아헨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의 동생과 여러 공작들로부터 일어난 일련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 후 왕은 공작 임명을 통제하고 행정 업무에 종종 주교들을 고용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주요 동프랑크 공국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친척들로 교체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왕권을 침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21][22]

교황 레오 8세는 신성 로마 교회의 교황이었다.


오토 왕조 시대의 신성 로마 제국


972년부터 1032년까지의 신성 로마 제국


951년, 오토 1세는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왕비를 돕기 위해 출병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그녀와 결혼하여 이탈리아를 장악하였다. 955년, 오토 1세는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962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왕국의 운명을 이탈리아와 교황청의 운명과 엮었다. 오토 1세의 황제 즉위는 독일 왕들을 샤를마뉴 제국의 계승자로 만들었고, translatio imperiila 개념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고대 로마의 계승자로 여기게 되었다.

오토 1세는 "라익의 오토 왕조 교회 제도"라고 불리는 제국 교회 제도를 만들어 주요 제국 교회와 그 대표자들을 제국에 봉사하도록 묶어 "독일을 위한 안정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틀"을 제공하였다.[25][26] 오토 왕조 시대에는 황실 여성들이 정치 및 교회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종교 지도자와 고문, 섭정 또는 공동 통치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링겔하임의 마틸다, 에드기스,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테오파누, 퀘들린부르크의 마틸다 등이 대표적이다.[27][28][29][30]

963년, 오토 1세는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레오 8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임명하였다(요한 12세와 레오 8세는 모두 964년 요한 12세가 죽을 때까지 교황직을 주장하였다). 이는 특히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 가 imperator Romanorumla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후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의 갈등을 갱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 2세는 비잔티움 공주 테오파누와 결혼하여 동방과의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아들 오토 3세는 세 살 때 왕위에 올랐고, 994년 성년이 될 때까지 권력 투쟁과 일련의 섭정 시대를 겪었다. 그때까지 그는 독일 영내에 머물렀고, 폐위된 공작 크레스켄티우스 2세가 로마와 이탈리아 일부를 그의 대리로 통치하였다.

996년 오토 3세는 사촌인 그레고리오 5세를 최초의 독일 출신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외국 출신 교황과 외국 교황청 관리들은 크레스켄티우스 2세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킨 로마 귀족들의 의심을 받았다. 오토 3세의 옛 스승인 반교황 요한 16세가 잠시 로마를 장악했지만, 신성 로마 황제가 도시를 장악하였다.

오토 3세는 1002년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그의 사촌 하인리히 2세가 뒤를 이어 독일에 집중하였다. 오토 3세(그리고 그의 스승인 교황 실베스터)의 외교 활동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화와 라틴 문화의 확산과 일치하며 이를 촉진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 집단(슬라브족)을 유럽의 틀에 편입시켰고, 그들의 제국은 "교황과 황제를 로마에 중심으로 한 여러 국가의 가족에 대한 비잔티움식 대통령직"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오토 3세의 조기 사망으로 그의 통치는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의 이야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1024년에 사망하였고, 살리안 왕조의 초대 황제인 콘라트 2세가 공작과 귀족들 사이의 논쟁 끝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집단은 결국 선제후단으로 발전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결국 네 개의 왕국으로 구성되었다.

왕국속한 시기
독일 왕국962년부터 제국에 속함
이탈리아 왕국962년부터 1801년까지
보헤미아 왕국1002년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시작하여 1198년 왕국으로 승격
부르고뉴 왕국1032년부터 1378년까지



현재의 국경선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변천

3. 1. 1. 카롤루스 왕조

814년경 유럽 내 카롤링거 제국의 지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갈리아 지역은 게르만 부족들이 세력을 확장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갈리아 북부와 라인 강 중류 지역을 장악했다.[125] 8세기 중반, 메로빙거 왕조는 명목상 지배자로 전락했고, 샤를 마르텔이 이끄는 카롤링거 왕조가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751년, 샤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프랑크 왕이 되었고,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카롤링거 왕조는 교황청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768년,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이 되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 저지대 국가 등을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가 어머니 이레네에 의해 폐위된 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새로운 황제 후보로 선택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황제로 즉위시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3세기 만에 서방에 황제 칭호를 부활시켰다.[18] 이는 교황청이 비잔티움 제국에서 카롤링거 프랑크 왕국으로 외교적 관계를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샤를마뉴는 Renovatio imperii Romanorum|로마 제국의 쇄신l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과 서방 제국 간 '두 황제 문제'가 발생했다.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루이 경건왕이 황제 자리를 계승했고, 840년 루이 경건왕 사후에는 그의 아들 로타르에게 승계되었다. 이후 제국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서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통치자들이 황제 칭호를 놓고 다투었다. 샤를 대머리왕과 샤를 뚱보왕이 잠시 제국을 재통합하기도 했다. 9세기에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알려진 지적 부흥을 이끌었다.

888년 샤를 뚱보의 사망 후, 카롤링거 제국은 분열되었고 다시는 복원되지 않았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는 "소왕"들이 나타났고, 마지막 황제는 924년에 사망한 베렌가리오 1세였다.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자치적인 종속 공국들(프랑크니아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작센 공국, 로타링기아)이 다시 등장했다. 911년 카롤링거 왕 루이 아동왕이 후계 없이 사망하자, 동프랑크 왕국은 공작들 중 한 명인 콘라트 1세를 동프랑크 왕(Rex Francorum Orientalium)으로 선출했다. 콘라트는 임종 직전에 작센의 하인리히 1세에게 왕위를 넘겼고, 하인리히 1세는 919년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사망했지만, 그의 후손인 리우돌핑가(또는 오토 왕조)는 약 1세기 동안 동방 왕국 또는 독일 왕국을 계속 통치하였다. 하인리히 1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936년 아헨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공작 임명을 통제했으며, 행정에 주교들을 활용했다. 그는 주요 동프랑크 공국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친척들로 교체하고, 가족 구성원들의 왕권 침해를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21][22]

3. 1. 2. 오토 왕조

오토 1세는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과 이탈리아 왕을 겸임하였고, 베렌가리오 1세 이후 40년 만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제위의 세습에도 성공하였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의 두 기둥이 되는 제국 교회 정책과 이탈리아 정책을 확립하였다.

936년 동프랑크 왕국 국왕에 즉위한 오토 1세는 관대한 아버지와는 달리 제후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불만을 품은 프랑켄 공작(콘라트 1세의 동생), 바이에른 공작, 로트링겐 공작은 왕의 이복형제를 기치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복형제는 전사했지만 동생은 용서받았고, 이후 형의 오른팔로서 충성을 다했다(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 반란 진압 후, 오토는 모든 공작을 친족으로 교체했다. 모든 공작령을 왕족의 지배하에 두어 왕국의 통일을 도모하고, 국내를 안정시키려고 했다.[210][211]

951년, 오토 1세는 전년에 사망한 이탈리아 왕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 아델하이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로타리오 2세는 이브레아 변경백 베렌가리오 2세에게 독살당했고, 아델하이트 자신은 베렌가리오 2세의 아들인 아달베르트와의 결혼을 강요당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38세의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던 베렌가리오 2세를 물리친 후, 19세의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로타리오 2세의 권위를 계승하는 정당한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212] 베렌가리오 2세 부자는 이때 용서받았고, 오토의 공동 통치자로서 이탈리아의 지배를 위임받았다. 그러나 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21세의 왕세자 슈바벤 공작 리우돌프는 아버지에게 반발하여 앞서 나갔기 때문에, 부자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953년, 리우돌프는 그의 매형인 로트링겐 공작 콘라트(국왕 콘라트 1세의 딸 히키나의 아들로, 왕에게는 사위)를 비롯한 제후들과 함께 대반란을 일으켜 오토는 위기에 처했다.[213] 머저르인이 침입했지만, 왕은 이를 역이용하여 마자르족의 침입은 왕세자의 계략이라고 선언했다. 위기감을 느낀 제후들은 왕에게 복종했고, 왕세자와 콘라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또한 마자르족에 대해서도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 위협에 종지부를 찍었다.[214] 이 전투에서 콘라트는 큰 공적을 세웠지만 전사하여 마지막 충성을 보였다. 콘라트의 삭센가는 이후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그의 증손자인 콘라트 2세는 잘리어 왕조를 열게 된다.

이에 이르러 왕은 친족에 의한 통치라는 정책의 취약성을 알고, 교회 세력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주교수도원에 영지를 기증하여 특권을 부여하여 세속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주교 임명권을 장악하여 성직자의 충성을 받고, 국가 행정을 성직자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국 교회 정책[134][215][216]이라고 하며,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의 근간이 되었다.

960년, 이탈리아에서는 젊고 세상 물정 모르는 교황 요한 12세가 무모한 교황령 확장에 나서 베렌가리오 2세의 반격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듬해 961년 왕은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베렌가리오 2세 부자의 공동 왕위를 공식적으로 폐위했다. 교황을 구한 왕은 962년 2월 2일 로마에서 12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로 즉위했다 ('''오토 대제'''). 오토는 새롭게 교황령을 기증했지만, 동시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에야 교황직에 임명된다"고도 정했다. 반발한 요한 12세는 적대 관계였던 베렌가리오 2세와 손을 잡고, 동로마 제국이나 마자르족과도 제휴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고발로 요한 12세는 대제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황제권이 교황권의 상위에 서고, 교회는 제국의 관료 조직으로 이용되는 것이 된다.

973년, 오토 대제는 60세에 사망하고, 아델하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18세 전후의 '''오토 2세'''가 뒤를 이었다.

3. 2. 중세 성기

900년을 전후해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옛 게르만 부족들의 근거지를 기반으로 한 5대 부족공국들(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작센, 로타링기아)이 자치권을 획득했다. 카롤루스조 동프랑크인의 왕 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가 911년 자식 없이 죽자 동프랑크의 공작들은 서프랑크의 카롤루스조에게 동프랑크인의 왕위를 넘기지 않고, 자기들 중에 왕을 뽑기로 했다. 그래서 프랑켄 공작 콘라두스가 동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 Orientaliumla)이 되었다.[550] 콘라두스 1세는 임종을 앞두고 왕위를 유력 경쟁자인 작센 공작 하인리히에게 넘겼다. 하인리히는 919년 프리츨라어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고,[550] 국경을 노략질하던 유목민 머저르인과 휴전을 맺었다. 933년 리아데 전투에서 프랑크인 최초로 머저르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550]

하인리히 1세가 936년에 죽자 그 후손들인 리우돌프조(또는 오토조)가 대략 1세기 동안 동프랑크 왕위를 차지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며 후계 지명자인 오토가[551] 936년 아헨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552] 오토 1세는 남동생과 여러 공작들의 반란들을 진압하고, 공작 임명권을 손에 넣었으며 주교들을 행정업무에 참여시켰다.[553]

951년, 오토 1세는 이탈리아왕 로타리우스 2세의 아내로 과부가 된 아델하이트를 도와 이탈리아에서 아델하이트의 적들을 쳐부수고 아델하이트와 결혼,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다.[553] 955년, 오토 1세는 레흐펠트 전투에서 머저르인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552] 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황제의 관을 씌어 주었고,[552] 이로써 독일왕이 이탈리아와 교황령을 겸병하게 되었다. 오토의 황제 대관은 독일왕이 카롤루스 제국의 후계자임을 공인한 것이었고, 또한 제권이양론의 개념에 따라 독일왕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후계자로 여기게 되었다.

독일 왕국은 영구적인 수도가 없었다.[554] 독일왕들은 여러 거주지들을 돌아가면서 사무를 처리했는데, 이 거주지들을 황제궁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각 왕들마다 선호하는 궁정이 있었고, 오토 1세의 경우 마그데부르크 궁정을 선호했다. 왕위는 여전히 선거군주제였으나 많은 경우 왕들이 생전에 선거를 열어 자기 아들을 차기 왕으로 미리 선출되게 하여 자기 가문의 왕위 계승을 유지했다.

963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교황 레오 8세를 새 교황으로 세웠다. 오토 1세의 후계자 오토 2세가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la)"를 칭하면서 동로마 제국과의 분쟁이 재점화되었으나, 오토 2세는 동로마 황녀 테오파노와 결혼하는 등 동방과의 혼맥을 유지했다.[552] 오토 2세와 테오파노의 아들 오토 3세는 고작 3살 때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994년 오토 3세가 장성할 때까지 권력투쟁과 섭정기가 반복되었다. 어린 오토 3세는 독일에 머물렀고, 크레스켄티우스 2세가 로마와 이탈리아를, 표면적으로는 오토 3세의 대리자라는 명목으로 지배했다.

996년, 오토 3세는 자기 사촌을 교황으로 세웠으니 곧 교황 그레고리오 5세다. 그레고리오 5세는 최초의 독일계 교황이었다.[555] 로마 귀족들은 외국인 교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크레스켄티우스 2세가 그런 로마 귀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오토 3세의 옛 스승이었던 대립교황 요한 14세가 일시적으로 로마를 지배했으나, 곧 오토 3세는 로마를 되찾았다.[556]

1000년경 신성로마제국의 4대 왕국


오토 3세는 1002년 요절하고 사촌 하인리히 2세가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했다. 하인리히 2세는 독일 지역의 경영에 집중했다.[553]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죽자 여러 공작들과 귀족들 사이의 논의 끝에 잘리어가콘라트 2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오토조의 지배는 끝나고 잘리어조가 성립되었으며, 이 때 콘라트 2세를 선출한 공후들이 시간이 지나며 선제후라는 집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총 4개 왕국의 연합체로 구성되었다.

왕국제국 편입 기간비고
독일 왕국962년-1806년우측 그림의 회색
이탈리아 왕국962년-1648년우측 그림의 녹색
보헤미아 왕국1198년-1806년1002년 보헤미아 공국으로 편입, 1198년 왕국으로 승격, 우측 그림의 적색
부르군트 왕국1032년-1378년우측 그림의 청색



왕들은 종종 주교들을 행정 업무에 고용했고, 종교 직책에 누가 임명될지 결정하기도 했다.

3. 2. 1. 잘리어 왕조와 서임권 투쟁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세속 권력자인 독일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관습을 철폐하고자 했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간섭을 거부하고 교황을 파문할 것을 종용했다.[557]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에 대한 충성 서약을 무효화하며 맞섰다.[528][557] 제후들의 이탈로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교황권에 굴복하여 파문을 철회받았다.[557]

하인리히 4세가 파문된 사이 독일 제후들은 루돌프 폰 슈바벤 공작을 새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557]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를 쳐부수고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복수했지만, 그 뒤로도 반란과 파문이 반복되었고, 심지어 아들들의 난까지 겪었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 하인리히 5세는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주교 서임 문제에 관해 교황과 합의를 이루었다.[557]

서임권 투쟁은 황제의 권력,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한 권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전까지 신성 로마 황제가 누리던 세속 권력의 절대자 지위를 실추시켰다. 한편, 교황과 독일계 선제후들은 제국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다.

3. 2. 2. 호엔슈타우펜 왕조: 제국의 최대 판도

호엔슈타우펜가의 영토. 신성로마황제 제위와 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동군연합하여 일단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일했다. 다만 신성로마제국에서 호엔슈타우펜조의 직할령은 금색 부분 뿐이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죽자 잘리어조는 단절되었고, 선제후들은 로타르 3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1137년 로타르 3세 사후, 선제후들은 호엔슈타우펜가의 콘라트 3세를 선출하여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가의 1세기에 걸친 다툼이 시작되었다. 콘라트 3세는 벨프가를 숙청했으나, 1152년 그 조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벨프가와 화약을 맺고 봉읍을 돌려주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자유 군인 출신 미니스테리알리아(ministerialia)들을 신임했고, 이들은 이후 황제 권력의 기둥인 제국기사로 발달한다. 또한 향토평화령은 황제의 신하들을 형법의 관할과 공적 기소의 대상으로 묶는 법제화 시도로, 근대 법치주의의 선구적 개념으로 평가된다. 한편, 황제 및 공작들이 새로운 도시들을 만든 것도 이 시기의 일인데, 프라이부르크, 뮌헨 등 향후 경제 대도시로 발전하는 도시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55년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로마"를 강조했다. 이는 황제의 권력이 교황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158년 론카길라 의회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마법 대전을 들먹이며 황제권 복권을 시도, 왕의 특권(regalia) 내용을 상세히 정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정책은 이탈리아를 향해, 밀라노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북부 자유 도시들과 충돌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어깃장을 놓으며 대립교황을 옹립, 1177년 화약 전까지 교황청과 대립했다. 한편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하인리히 사자공을 비호해 주었으나,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 요청을 거부, 봉읍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다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익사했다.[560]

호엔슈타우펜조 시절, 독일계 제후들은 서슬라브족들이 드문드문 살고 있던 동쪽 지역으로 평화적인 진출을 꾀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동방식민운동). 포메라니아와 실레지아까지 제국의 영향권이 팽창, 튜턴 기사단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을 멸족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이 세운 튜턴 기사단국은 신성로마제국의 권역 밖에 있었다.

13세기-14세기 초 제국의 군기였던 제국기(Reichssturmfahne).


하인리히 6세 시절 호엔슈타우펜조는 절정에 달했다. 시칠리아를 손에 넣고, 리처드 1세를 포로로 잡았으며, 세습군주제를 시도하던 와중인 1197년 죽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었지만, 독일계 제후들은 성인 왕을 원했고, 필리프 폰 슈바벤 공작과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가 경쟁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교황청이 포위당하는 것을 두려워, 프리드리히 2세 편을 들어 오토 4세를 쳐부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칠리아 권력의 실세로 남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0년 황제 대관 후에도 시칠리아 상왕 노릇을 했고, 교황은 결국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파문된 상태로 제6차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 왕국을 일시 복고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는 제국 중앙집권이 해체되기 시작한 변곡점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데 열중, 독일 제후 및 주교후들에게 엄청난 특권들을 부여했다. 1220년 성직제후 조약에서 주교들에게 조세 징수, 화폐 발생, 요새화 자유를 허락, 1232년 제후우호법령에서는 이 특권들이 제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232년 문서에서 독일계 공작들을 각자 영토의 주인(domini terræla)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런 추세를 보여주는 징후였다.

카를 4세 이래의 보헤미아 왕관령.


보헤미아 공국은 중세의 강력한 지방 권력이었다. 오타카르 1세는 1198년부터 보헤미아 국왕을 칭했고, 1212년 시칠리아 금인칙서를 받아냄으로써 왕작을 확인받고,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보헤미아 국왕은 제국 추밀원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국에 대한 모든 의무를 면제받았다. 이후 카를 4세프라하로 황제의 황좌부를 옮겼다.

3. 3. 중세 후기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면서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자, 선제후들은 그의 친족 대신 이미 노쇠한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1137년 로타르 3세 사후, 선제후들은 그의 사위인 벨프가의 하인리히 교만공 대신 호엔슈타우펜가의 콘라트 3세를 선출했다. 이는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가의 1세기에 걸친 다툼의 시작이었다. 콘라트 3세는 벨프가를 숙청했지만, 1152년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벨프가와 화해하고 하인리히 교만공의 아들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봉읍을 돌려주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자유 군인 출신 미니스테리알리아들을 신임했고, 이들은 이후 제국기사로 발달하여 황제 권력의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 시절 이루어진 또 다른 중요한 제도사적 변화는 향토평화령으로, 이는 법치주의의 선구적 개념으로 평가된다. 한편, 황제 및 공작들이 새로운 도시들을 만든 것도 이 시기인데, 프라이부르크, 뮌헨 등 향후 경제 대도시로 발전하는 도시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55년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했다. 그는 황제의 권력이 교황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로마"를 강조했다. 1158년 론카길라 의회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마법 대전을 들먹이며 황제권 복권을 시도했고, 공도, 교통, 통화, 벌금 징수, 공직자 임면 등 황제의 권리들을 열거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정책은 이탈리아를 향했고, 밀라노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북부 자유도시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대립 교황을 옹립하며 대립하다 1177년 화해했다.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하인리히 사자공을 비호해 주었지만, 하인리히가 이탈리아 전쟁 지원 요청을 거부하자 분노하여 그의 봉읍을 박탈하고 추방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다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익사했다.[560]

호엔슈타우펜조 시절, 독일계 제후들은 서슬라브족들이 살던 동쪽 지역으로 평화적인 진출을 꾀하여 동방식민운동을 일으켰다. 포메라니아와 실레지아까지 제국의 영향권이 확장되었고, 튜턴 기사단프로이센 지역으로 초빙되어 프로이센 원주민들을 멸족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국은 신성로마제국 권역 밖에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 시절 호엔슈타우펜조는 절정에 달했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를 손에 넣고, 리처드 1세를 포로로 잡았으며, 선거군주제를 세습군주제로 전환하려다 1197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독일계 제후들은 성인 왕을 원했고, 필리프 폰 슈바벤 공작과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가 경쟁했다. 1208년 필리프가 살해당하고 오토 4세가 승리했지만, 그는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의해 교황청이 포위될 것을 두려워하여 프리드리히 2세를 지원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토 4세를 쳐부쉈지만, 두 영토를 별개로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0년 신성로마황제로 대관한 이후에도 시칠리아 권력의 실세였다. 교황은 결국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파문된 상태로 제6차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 왕국을 일시적으로 복고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는 제국의 중앙집권이 해체되기 시작한 변곡점이었다. 그는 시칠리아에 중앙집권국가를 만드는 데 열중하느라 독일에 특권들을 부여했다. 1220년 성직제후 조약에서 주교들에게 조세징수, 화폐발생, 요새화의 자유를 허락했고, 1232년 제후우호법령에서는 이 특권들이 제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232년 문서에서 독일계 공작들을 각자 영토의 주인(domini terræla)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추세를 보여주는 징후였다.

보헤미아 공국은 중세의 강력한 지방권력이었다. 오타카르 1세는 1198년부터 보헤미아 국왕을 칭했고, 1212년 시칠리아 금인칙서를 받아내 왕위를 확인받고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보헤미아 국왕은 제국추밀원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의무를 면제받았다. 이후 룩셈부르크조카를 4세프라하로 황제의 황좌부를 옮겼다.

3. 3. 1. 대공위 시대

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후,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다.[39]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독일 왕국은 그의 아들 콘라트 4세대립왕 빌헬름 2세 폰 홀란트 백작으로 분열되었다.[39] 콘라트 4세가 사망하면서 제국 전체의 지지를 받는 독일 왕이 선출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39]

이 시기 제후들은 자신의 봉읍에 대한 통제력과 독립성을 더욱 강화했다.[39] 1257년 이후에는 잉글랜드 왕자 리처드 콘월 백작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독일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39] 콘월 백작은 구엘프당의 지지를, 알폰소 10세는 호엔슈타우펜당의 지지를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독일 땅을 밟은 적은 없었다.[39]

1273년 리처드가 사망하고, 호엔슈타우펜당에 가까웠던 합스부르크 백작가루돌프가 만장일치로 독일 왕에 선출되면서 대공위 시대는 막을 내렸다.[39]

대공위 시대는 제국 정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귀족 봉건제에 맞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정치 권력이 증대되었고, 영토 행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39] 농업에서는 금전 지대가 보편화되었고,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게 되었다.[39] '관할' 대신 '재산'의 개념이 발생했지만,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다.[39]

영토 수준에서는 권력이 다발화되어, 토지 소유자가 해당 토지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39] 그러나 이 시기 관할권에는 입법권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중세 재판은 관습법에 의존했다.[39]

이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현대 국가들의 전신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39] 그 정도는 영토마다 달랐는데, 바이에른과 같이 고대 게르만족의 터전과 중세 봉읍이 거의 동일한 지역에서 가장 빨랐고, 자유도시들과 같이 황제 특권에 의해 유지되는 분산된 영토들에서는 지리멸렬했다.[39]

3. 3. 2. 룩셈부르크 왕조와 제국 개혁

셰델의 세계사에 실린 삽화. 가장 윗줄 중앙에 신성로마황제가, 그 왼쪽에 세 명의 성직선제후가, 오른쪽에 네 명의 세속선제후가, 그리고 아래 두 줄에 기타 제후들이 있다.


13세기 들어 귀족 봉건제에 맞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정치권력이 증대되면서 영토 행정에도 전체적 변화가 생겼다. 시대가 중세 후기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농업에서는 노동지대보다 금전지대가 보편적인 계산 수단이 되었다.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게 되었고, '관할'을 대신하여 '재산'의 개념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관할권에는 입법권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이전에는 입법권 개념 자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의 재판은 관습법에 의존했다.

1400년 신성로마제국


15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에는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1356년 금인칙서 같은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지만, 독일왕, 선제후, 공작들 사이의 협조는 왕의 인격에 따라 달라졌다. 지기스문트(1410년 독일왕 선출, 1433년-1437년 황제)나 프리드리히 3세(1440년 독일왕 선출, 1452년-1493년 황제)처럼 황제가 자신의 사유지에만 머무를 경우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이 부재한 가운데 제국의 전통적 지도부인 궁중의회(Hoftagde)는 제 기능을 잃었다. 입법부로서의 제국의회(Reichstagde)는 이 시기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공작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켰고, 이는 종종 국지전으로 비화했다.

한편, 가톨릭 교회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대립교황이 두 명이나 나타나 교황이 세 명이나 되는 사태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1418년)를 통해 겨우 해결되었고, 1419년 이후 교회는 후스파 이단을 억압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후스파는 박멸되지 않았고, 강경 후스파만 진압하고 온건 후스파의 신앙은 허용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후스 십자군의 실패는 기독교 세계를 하나의 보편적인 정치 체제로 규정하는 개념과, 그 개념을 이끄는 교회와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15세기에는 제국 자체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나타났다. 과거의 지배 방식은 당대의 사회 구조에 더 이상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향토자유령의 강화도 시급했다. 이때 '개혁(reform)'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re-formare|레포르마레la에서 비롯된 것으로, 잃어버렸던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의미였다.

1486년, 프리드리히 3세는 헝가리와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아들 막시밀리안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기에, 공작들은 황제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선제후와 공작들의 회의가 처음으로 열렸는데, 이것이 제국의회이다. 이후 제국자유도시들도 의회에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이를 거부했지만, 1493년 그가 사망한 후 막시밀리안 1세는 1495년 보름스 의회에서 공작들과 네 가지 법안을 제도화하는 데 합의했다. 이를 제국개혁(Reichsreform|라이히스레포름de)이라고 한다. 제국개혁은 와해되어가던 제국에 최소한의 구조를 부여하기 위한 법령들이었다. 이 개혁으로 제국관구(Reichskreis|라이히스크라이스de)와 제국사법실(Reichskammergericht|라이히스카머게리흐트de)이 설치되었고, 이 제도들은 1806년 제국 해체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제국사법실이 제대로 기능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걸렸다. 행정 구역의 관구화는 1512년에야 완료되었다. 한편, 황제는 자신의 궁정인 제국추밀원(Reichshofrat|라이히스호프라트de)을 제국사법실과 동시에 운영했다.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de)'이라는 새 국호가 제정된 것도 1512년이었다.

3. 4. 근세



독일 왕 선출이 어려워지고 대공위시대를 겪으면서,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라는 고정 제후단이 형성되었다. 이 금인칙서는 1806년 제국 해체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황제와 제국(Kaiser und Reichde)의 이원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였다. 이전까지 황제가 곧 제국이었으나, 이제 황제와 제국은 분리된 존재로 인식되었다. 금인칙서는 황제 선출을 만장일치제가 아닌 다수결제로 바꾸었다. 선제후 작위는 세습되었고, 화폐 발행 및 관할권 행사 권한이 주어졌으며, 아들들은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등 제국 공용어를 배워야 했다.[561][562]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 황제 권력이 약해지면서, 황제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대공위시대 이전에는 황제의 힘과 재력은 제국재산(Reichsgutde)과 제국자유도시들에서 나왔으나, 13세기 이후 제국재산은 유명무실해졌다. 1806년까지 극소수 토지만 남았고, 대부분은 황제가 지방 공작들에게 저당잡아 상실했다. 이는 재정 마련 목적도 있었지만, 공작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통제권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루돌프 1세 이후 독일 왕들은 황제 직할령보다 출신 가문의 봉읍에 의존했다. 가문 봉읍은 결집되어 통제하기 쉬웠다. 1282년,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슈타이어를 아들들에게 주었다. 1312년, 룩셈부르크가하인리히 7세가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60여 년 만에 황제위가 부활했다. 이후 모든 황제들은 가문권력(Hausmachtde)을 기반으로 삼았다. 비텔스바흐가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을, 룩셈부르크가의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와 보헤미아를 기반으로 했다. 이로 인해 각 영토들의 권력 증대와 독일 왕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13세기 동안 토지 관리 방식의 변화는 부르주아 계층으로의 권력 이동을 가져왔다. 도시의 부상과 시민 계급의 출현은 봉건제의 사회, 법, 경제 질서를 약화시켰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고, 소유권 개념이 오래된 관할권 형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토 내 권력은 토지 소유자에게 집중되었고, 다른 권력은 이로부터 파생되었다. 당시 관할권에는 입법이 포함되지 않았고, 15세기 후반까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법원 관행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존했다.

이 시기 영토는 현대 국가의 전신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지역마다 달랐으며, 바이에른과 같이 고대 게르만 부족의 영토와 거의 동일한 곳에서 가장 발전했다. 제국의 특권으로 설립된 산발적인 영토에서는 발전 속도가 느렸다.

12세기에 한자 동맹은 제국 전역과 북유럽, 중유럽 도시 상인 길드의 상업 및 방어 동맹으로 자리 잡았다. 발트해, 북해 및 연결된 수로를 따라 해상 무역을 지배했다. 가맹 도시들은 자국 법 체계를 유지했으며, 자유 제국 도시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인 자치권만 누렸다. 14세기 후반, 한자 동맹은 필요시 군사력으로 이익을 관철했고, 1361년부터 1370년까지 덴마크 왕국과의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다. 동맹은 1450년 이후 쇠퇴했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


1356년 황금칙서가 체결되었을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왕 선출 과정의 어려움은 1356년 황금칙서를 통해 선제후단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선제후단의 구성과 절차는 카를 4세에 의해 발표되었고, 1806년까지 유효했다. 이는 황제와 제국(Kaiser und Reich)이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황제는 이제 일곱 선제후의 과반수에 의해 선출되었고, 선제후 지위는 세습되었으며 주화 발행권과 사법권을 가졌다. 또한 그들의 아들들은 제국의 언어인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체코어를 배워야 했다. 카를 4세의 결정은 제국 영토에 평화를 가져왔지만, 중앙 권력에는 타격을 주었다.[46] 카를 4세는 논쟁적인 왕위 계승을 종식시키려 했고, 보헤미아 왕을 선제후 중 하나로 만들어 룩셈부르크 가문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47] 그는 보헤미아를 룩셈부르크 가문의 핵심 영토이자 왕조 기반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보헤미아 통치는 황금기로 여겨지지만, 독일 이민자 문제로 인한 종교적 긴장과 박해가 발생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의 제국 사업은 카를의 아들 바츨라프 치하에서 중단되었는데, 그는 귀족 가문의 반대에 직면했다.

황제로부터 권력이 이동한 것은 호엔슈타우펜 이후 왕들이 ''라이히스구트''에 의존하지 않고 왕조 영토에 의존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13세기 이후 ''라이히스구트''의 중요성은 쇠퇴했고, 일부는 1806년까지 남았지만 대부분 지역 공작들에게 넘겨졌다. 왕과 공작들은 ''라이히스구트''의 직접 통치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루돌프 1세부터 왕들은 왕조 영토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1282년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를 아들에게 넘겼다. 헨리 7세 이후 모든 왕과 황제들은 가문 영토(Hausmacht)에 의존했다.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에, 카를 4세는 보헤미아에 의존했다. 왕은 자신의 영토에서도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영토 권력 강화에 관심을 가졌다.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
]15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은 미정 상태였고, 지역 통치자들 간의 싸움이 빈번했다. "약탈 귀족"(''Raubritter'')이 사회적 요소로 등장했다.

동시에 가톨릭 교회는 위기를 겪었고, 제국에 영향을 미쳤다. 여러 교황청 주장자들 간의 갈등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끝났다. 1419년 이후 교황청은 후스파 진압에 집중했다. 교회와 제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통합하려는 중세적 사상은 쇠퇴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15세기에 제국에 대한 많은 논의가 등장했다. 과거의 규칙은 당시 구조를 설명하지 못했고, ''Landfrieden''(영토 평화) 강화가 필요했다.

제국과 교회의 동시 개혁 비전은 지기스문트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외부적 어려움, 실수, 룩셈부르크 남계 단절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1452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된 최초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48] 그는 제국 내 개혁 운동에 신중했고, 개혁을 황권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귀족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했다.[49] 1440년 이후 제국과 교회의 개혁은 지역 세력에 의해 지속되었다.[50] 말년에 그는 개혁 압력을 받았고, 베르톨트 폰 헤네베르크는 프리드리히가 아들 막시밀리안의 황제 선거를 확보하려는 욕망을 이용했다. 프리드리히는 제국 개혁의 초기 단계를 주재했고, 막시밀리안은 개혁에 더 개방적이었지만 황권 보존 의지를 가졌다. 프리드리히가 1488년 은퇴한 후, 막시밀리안은 제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지역 분권주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 집권화를 막았지만, 초기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도시들과 한자 도시에서는 전사 상인들이 등장하여 해상 제국을 개척했다. 이 관행은 1500년 이전에 쇠퇴했지만, 다른 해상 국가들로 확산되어 모방을 불러일으켰다.[83] 통치자들이 무역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전사 상인들은 국가 강제력을 얻었다. 이는 다른 아시아 왕국에서는 얻을 수 없었다.[84]

1450년대 남부 독일의 경제 발전은 은행 제국, 카르텔, 독점을 낳았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초기 자본주의 중심 도시로 여겨진다.[85][86] 아우크스부르크는 카이저리헤 라이히스포스트(Kaiserliche Reichspost)의 설립과 확장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74][73] 합스부르크 제국이 확장되었을 때도 막시밀리안은 아우크스부르크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고, 이 도시는 16세기 "초기 자본주의의 주요 중심지"이자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우체국이 위치한 곳"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시대부터 최초의 대륙 횡단 우편선의 "종착역"이 이동하면서 통신 시스템과 뉴스 시장이 수렴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87]

하지만 1557년, 1575년, 1607년 합스부르크 왕가 스페인 지부의 파산은 후거(Fugger) 가문에 피해를 입혔다. 인도와 신세계로 가는 수로 발견은 유럽 경제 발전의 초점을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시켰고, 강조점이 이동했다. 아메리카 광산 개발은 헝가리와 티롤 광산 부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유럽 대륙 중심지는 육상 운송 수단이 생길 때까지 내륙에 갇혀 있었고, 성장 잠재력이 제한적이었다. 신대륙에는 상품을 배출할 항구가 풍부했다. 1450년에서 1550년 사이에 독일에서 달성한 경제적 정점은 19세기 말까지 다시 볼 수 없었다.

제국의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상품 시장과 금융 중심지가 발전했다. 15세기 지형 발전은 안트베르펜을 항구 도시로 만들었다. 막시밀리안 대공에 대한 플랑드르 반란 이후 특권 덕분에 북유럽 최고의 항구 도시가 되어 "세계 무역의 40%를 차지했다".[88][89][90] 하지만 1576년과 1585년 합스부르크-스페인 정부와의 갈등으로 상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하여 결국 최고의 항구 도시로 대체되었다.[91]

막시밀리안 2세 황제와 그의 가족

3. 4. 1.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1516년,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외손자인 카를이 아라곤 왕위를 물려받고, 어머니와 공동으로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한 명의 군주 아래 통합되어 에스파냐로 발전했다. 1519년,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과 에스파냐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두 영토는 별개의 상속법에 따라 카를 5세 사후 분할 상속될 예정이었다.

카를 5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 즉위 2년 전인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독일의 많은 제후들은 이를 카를 5세의 권력에 대항할 기회로 여겨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북독일, 동독일, 그리고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등의 대도시들은 개신교로 개종했고, 남독일과 서독일은 대부분 천주교를 유지하면서 제국은 종교적으로 분열되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 패권을 두고 프랑스와 다투었고, 독일에서는 개신교 제후들과 대립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교의 자유가 공인되었으나, 칼뱅교, 재세례파, 아르미니우스파는 여전히 금지되었다.[94] 1555년, 파울루스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프랑스 편에 섰고, 지친 카를 5세는 세계 기독교 제국의 꿈을 포기했다.[95][96]

3. 4. 2. 바로크 시대와 30년 전쟁

30년 전쟁 직전 신성 로마 제국의 종교 분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제국


독일은 이후 60년 동안 상대적인 평화를 누렸다. 동부 전선에서는 튀르크인들이 여전히 큰 위협으로 남아 있었지만, 전쟁은 개신교 제후들과의 추가적인 타협을 의미했기에 황제는 전쟁을 피하려 했다. 서쪽에서는 라인란트가 점점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 이후, 제국은 중립을 유지했고, 1581년 네덜란드가 제국에서 탈퇴하는 것을 사실상 허용했다. 그 부작용으로 쾰른 전쟁이 발생하여 상라인 지역 대부분을 황폐화시켰다. 페르디난트 3세 황제는 1653년에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의 중립을 인정했고, 이 결정은 1728년 라익스탁에서 비준되었다.

1564년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황제가 되었고, 아버지처럼 개신교의 존재와 때때로 타협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막시밀리안은 1576년 루돌프 2세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는 기독교보다 고전 그리스 철학을 선호했고 보헤미아에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강제로 권력을 재확립하는 것을 행동으로 막지 못했고,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1612년 루돌프 사망 당시 제국의 권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이 황제에 반항하자, 즉각적인 결과는 제국을 황폐화시킨 30년 전쟁(1618~1648)이었다. 프랑스와 스웨덴을 포함한 외세가 이 분쟁에 개입하여 제국 권력에 맞서 싸우는 세력을 강화했지만, 상당한 영토를 스스로 차지하기도 했다. 따라서 제국은 결코 이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고,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이 "신성하지도,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라는 악명 높은 말을 하게 되었다.[97]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칼뱅주의를 허용했지만, 재세례파, 아르미니우스파 및 기타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는 여전히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고 제국이 끝날 때까지 박해를 받았다.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오스트리아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지를 통합하는 데 집중했다.

빈 전투(1683)에서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은 대규모 튀르크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서쪽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고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 군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3분의 1과 신성 로마 제국군 3분의 2로 구성되었다.

3. 4. 3.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독독대결체제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등장했을 무렵, 동쪽에서는 프로이센이 흥기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들은 세습 영지를 통해 프로이센에 대항하려 했는데, 이 영지 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5),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등 여러 유럽 분쟁에 휘말렸다.[97] 1740년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간의 독일 이중 체제로 설명된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의 코끼리 대 프로이센 왕국의 사자로 묘사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라이벌 관계

3. 4. 4.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그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92년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는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영방들과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프랑스 혁명전쟁).

1795년에서 1814년 사이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합병이라는 부신화, 세속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의 후반기는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시기와 겹친다. "부신화"란 소형 제국정치체들에게 일부 권리를 남겨주면서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이었다. 예컨대 제국기사들의 봉읍은 1803년 전까지 이미 대형 영방국가들에게 먹혔고 1806년 공식적으로 통폐합되었다(기사쇄도). 한편 "세속화"란 주교후수도원장후 같은 교권제후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봉읍을 세속제후들의 봉읍으로 통합시킨 것을 말한다.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군에게 대패를 당한 뒤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1806년 8월 6일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다.[98]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의 옛 서부 영방들을 বিচ্ছিন্ন하여 프랑스의 괴뢰국인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제국은 망했지만 프란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살아남아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 사도왕으로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인해 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될 때에야 모든 작위와 영토를 잃는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라인 동맹은 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고, 1866년 프로이센이 탈퇴하여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북독일 연방은 독일 제국의 전신이 되어 1871년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제외한 모든 독일어권 지역을 프로이센의 영도하에 통일시켰다. 그리고 이 독일 제국이 오늘날의 독일연방공화국의 전신이 된다.

현재까지 주권국가로서 명맥을 잇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영방국가는 리히텐슈타인 후국 뿐이다. 범위를 조금 넓혀 보면 독일연방공화국의 가맹주로서 존재하는 함부르크브레멘 자유시도 존속중인 영방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모든 영방국가들은 해체되거나 공화국으로 대체되어 이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4. 제도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초기에는 수십 개, 말기에는 수백 개의 정치체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 정치체마다 국왕, 공작, 후작, 백작, 주교후, 수도원장후 등 다양한 군주들이 존재했다. 이들을 통틀어 제후(Fürstde, Prince영어)라고 불렀다.[467] 신성로마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영토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황제는 단 한 번도 독단적으로 제국을 다스릴 수 없었다. 황제의 권력은 수많은 제후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중세 성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권력을 추구하는 지방 제후들과 불안정한 공존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잉글랜드보다 그 정도가 심하여, 신성로마황제는 자신들이 공식적으로 소유한 영토 밖에서는 충분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황제들은 폐위되지 않기 위해 지방에 점점 더 많은 자치권을 양보해야 했다. 이러한 황권 약화는 11세기 서임권 투쟁으로 시작되어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황제의 패배로 끝났다. 많은 황제들이 중앙집권을 시도했으나 교황청과 제후들의 견제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

제국은 다양한 구성 요소와 제도를 통해 통치되었다.


  • '''제국 정치체''': 황제의 직속 봉신들의 봉읍국으로, 세습귀족, 주교후, 자유제국도시와 제국촌락, 제국기사 및 제국백 등이 있었다.
  • '''로마인의 왕''': 9세기부터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선제후 7명이 선거권을 가졌다.
  • '''제국 의회''': 주요 사안을 협상하는 포럼으로, 선제후단, 제후단, 자유 제국 도시단으로 구성되었다.
  • '''제국 관구''': 1500년과 1512년에 설치된 지역 그룹으로, 방위, 과세, 치안 유지 등을 담당했다.
  • '''제국 법원''': 라이히스호프라트와 라이히스캄머게리히트의 두 최고 법원이 있었다.
  • '''제국군''': 1422년에 창설된 봉건 군대로, 황제군과는 별개였다.
  • '''행정 중심지''': 고정된 수도는 없었으며, 중세에는 황제가 여러 황제궁(카이저팔츠)을 순회하는 "순회 왕권" 방식이었다. 16세기 이후 프라하, 뮌헨이 영구적인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4. 1. 제국 정치체

신성로마제국은 영방국을 포함해 수만 개의 제국관구, 자유제국도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방국의 대표적인 예로는 프로이센 왕국이 있다.

제국정치체(Reichsstand)는 봉건법에 따라 신성로마황제 외의 다른 상급귀족의 봉신이 아닌, 황제의 직속 봉신들의 봉읍국들을 의미한다. 제국정치체에는 다음과 같은 형태들이 있었다.

  • 세습귀족(대공, 공작, 후작, 백작 등)이 다스리는 봉읍.
  • 주교후라고 불리는 성직자(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가 세속권세를 겸하는 봉읍. 주교후국들은 대개 교구 안에 완전히 들어왔고, 주교는 주교후국에 대해 민사와 종무 양면에 완전한 권력을 행사했다. 쾰른, 트리어, 마인츠에는 대주교후가 있었다.
  • 자유제국도시와 제국촌락. 다른 귀족 없이 황제의 직속 영토로 딸리는 읍락들.
  • 제국기사 및 제국백의 봉읍. 이들은 황제의 직속 봉신이었으나 제국의회에 출석하지는 못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참여한 국가만 해도 300여 개였을 정도로 제국정치체의 수는 매우 많았다. 이 중 소국가(클라인슈타터라이)들은 크기가 불과 수 평방마일에 불과했고, 한 국가의 영토들이 연결되지 않는 월경지 등이 널려 있어서 종종 신성로마제국은 조각보(Flickenteppich)라고 불렸다.[564] 제국정치체는 총 1,500여 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792년 기준 그 목록은 제국의회 대표자 목록 (1792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2. 로마인의 왕

독일 왕국은 9세기부터 독일왕을 선거로 뽑았다.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왕국을 구성하는 5대 게르만족(로트링겐의 잘리어 프랑크인, 프랑켄의 리푸아리 프랑크인, 색슨인, 바바리인, 슈바벤인)의 지도자들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유력 공작들과 대주교후들이 유망한 차기 황제를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렉스 로마노룸la, römischer König|뢰미셔 쾨니히de)"으로 선출했다. 피선거인은 선거권자들에게 땅이나 돈을 주어 표를 확보했다.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발표하여 황제 선거권이 있는 선제후를 7명으로 제한했다. 여기서 규정된 선거권자는 보헤미아 국왕, 라인 궁정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쾰른 대주교후, 마인츠 대주교후, 트리어 대주교후였다. 30년 전쟁 와중 바이에른 공작이 8번째 선제후로 추가되었고, 그 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9번째 선제후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이 자기편에 선 독일 제후국들을 멋대로 선제후로 승격했지만, 이 새로운 선제후들이 선거에 참여하기 전에 제국이 해체되었다.

로마인의 왕은 왕으로 선출된 후 이론적으로는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뒤에야 "황제" 작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 로마인의 왕 선출로부터 황제 대관까지 여러 해가 걸렸는데, 대개 그 원인은 북이탈리아 지방의 반란 진압이었고, 심지어 교황과 대립하면서 대관을 못 받기도 했다. 후기의 황제들은 교황의 대관식을 무시하고 "선출황제(Emperor-Elect)"라는 작호로 만족했다. 교황에게 대관을 받은 마지막 황제는 1530년 대관받은 카를 5세였다.

황제가 되려면 남성이어야 하고 또한 귀족이어야 했다. 천주교도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선제후 대부분이 천주교도였기에 개신교도 황제가 선출된 적은 없다. 피선거인이 독일인이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독일인이어야 하는지는 선제후들 사이에 종종 논쟁거리가 되었다. 중세에는 독일 출신이 아닌 왕, 황제가 독일에서 즉위하기도 했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는 독일인의 황제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독일적 유산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565]

4. 3. 제국 의회

제국의회(Reichstag|라이히스탁de)는 근현대의 의회 같은 입법부가 아니라, 대표자들이 모여 주요 사안을 협상하는 포럼과 같은 공간이었다.[566] 이론적으로는 의회가 황제보다 지위가 높았다.

1675년 제국 의회


제국의회는 3개의 급으로 나뉘었다.

  • 1급은 선제후단으로, 로마인의 왕 선출에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들로 구성되었다.

7대 선제후

  • 2급은 제후단으로, 선제후를 제외한 다른 제후들로 구성되었다. 제후단은 다시 세속 제후와 성직 제후로 나뉘었다. 고급 귀족들은 개인 표를 행사했지만, 하급 귀족들은 지역별로 모여 "선거인단"을 구성했고, 각 선거인단이 집합적으로 한 표를 행사했다.
  • 3급은 자유 제국 도시단이었다. 도시단은 슈바벤 선거인단과 라인 선거인단으로 나뉘었다. 표가 적었던 만큼 도시단은 다른 선거인단에 비해 힘이 약했다. 자유 도시들이 의회에 대표자를 내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중세 후기의 일이었다. 1648년 30년 전쟁 종전 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자유시들의 의회 참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521년에는 87개 도시가 출석권을 가졌지만, 도시 쇠퇴 등의 이유로 1803년에는 3개 도시로 줄었다.[496] 도시 의회는 다른 의회와 동등하지 않았으며, 이 의회가 캐스팅 보트를 쥐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두 의회의 결정이 내려진 후에 의견을 묻는 형식이었다.[496]

4. 4. 제국 관구

1500년 황제 개혁의 일환으로 6개의 제국 관구가 설치되었고, 1512년에 4개가 추가되었다.[504] 제국 관구는 방위, 황제 과세, 주화 감독, 치안 유지 및 공공 안전을 목적으로 제국의 다양한 국가들을 지역적으로 그룹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제국 관구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각 제국 관구는 "크라이스타크(Kreistag)"로 알려진 자체 의회와 제국 관구의 업무를 조정하는 하나 이상의 책임자를 두었다.[505] 1512년 이후에도 모든 제국 영토가 제국 관구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는데, 보헤미아 왕관령(Lands of the Bohemian Crown), 스위스, 북부 이탈리아의 제국 봉토, 제국 기사단(Imperial Knights)의 영토, 예베르 영지(Lordship of Jever)와 같은 기타 일부 소규모 영토는 제외되었다.[506]

1560년 당시 설치된 제국 관구는 다음과 같다.

지도 색상관구명
-- 바이에른 관구
-- 슈바벤 관구
-- 오버라인 관구
-- 베스트팔렌 관구
-- 프랑켄 관구
-- 니더작센 관구
-- 부르군트 관구
-- 오스트리아 관구
-- 오버작센 관구
-- 쿠어라인 관구


4. 5. 제국 법원

신성 로마 제국에는 두 개의 최고 법원이 있었다. 하나는 황제의 궁정에 있던 라이히스호프라트이고, 다른 하나는 1495년 황제 개혁으로 설립된 라이히스캄머게리히트(황실상고법원)였다.[126] 라이히스캄머게리히트는 황제와 제국의 속국들이 구성원을 임명했다.[126]

18세기의 제국 최고법원


황실평의회는 황실상고법원과 함께, 때로는 독자적으로 많은 국가적 사법 분쟁을 다루었다. 황실상고법원은 공공 질서 위반, 국고 관련 소송, 황제 칙령이나 제국 의회 법률 위반, 제국의 직속 영주 또는 다른 통치자의 신민 간 재산 분쟁 등을 담당했다. 황실평의회는 황제에게 기대에 못 미치는 통치자를 폐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도 했다.

15세기 제국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제국 최고법원(Reichskammergericht)이 1495년 설립되었다.[499][500] 막시밀리안 1세는 이에 대항하여 제국 궁내법원(Reichshofrat)을 빈에 설립했다.

제국 최고법원은 프랑크푸르트에 처음 설립된 후 여러 도시를 거쳐 베츨라어로 이전하여 1689년부터 1806년 제국 소멸 시까지 존속했다.

두 법원 모두 일반 형사, 민사 소송은 다루지 않고 상소의 최고 법원 역할을 했다.[501] 제국 법원은 제후 간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고,[502] 제국의 평화 유지와 종교 갈등 완화에 기여했다.[503]

4. 6. 군대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신성 로마 제국군)는 1422년에 창설되었으며, 각 영방 국가의 군대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봉건 군대였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제국보다 먼저 해체되었다. 제국군은 황제의 황제군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

제국군은 상비군이 아니었고, 위험이 있을 때만 소집되어 제국 군사 원정(Reichsheerfahrt|독일어 발음de)을 수행했다. 실제로 제국군은 황제보다 지역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한 경우가 많았다.[274]

4. 7. 행정 중심지

신성 로마 제국은 고정된 수도를 가지지 않았다. 중세 초기부터 중세 전성기까지 황제 겸 독일 왕은 왕국을 순회하며 통치하는 "순회 왕권"(''Reisekönigtum'') 방식을 취했다.[474][475] 황제는 여러 황제궁(카이저팔츠)을 순회하며 현지의 법률 문제, 법률 및 행정을 처리하였다. 예를 들어 샤를마뉴는 아헨, 오토 1세는 마그데부르크,[100] 프리드리히 2세는 팔레르모, 비텔스바흐 가는 뮌헨, 합스부르크 가는 프라하을 선호했다.[127]

16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들이 빈과 프라하를, 비텔스바흐 왕가의 통치자들이 뮌헨을 영구적인 거주지로 선택하면서 이러한 관행은 종식되었다.[101][102] 빈은 페르디난트 1세 치하에서 1550년대에 제국 수도가 되었고, 루돌프 2세가 프라하로 천도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도 그 우위를 유지했다.[103]

제국 의회(Reichstag)는 파더보른, 웜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등 여러 곳에서 소집되었다. 1497년에는 궁정원(Reichshofrat)이 빈에 설립되었다. 1495년에는 제국재판소(Reichskammergericht)가 설립되어 웜스,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슈파이어 등 여러 곳에 있다가 나중에 베츨라어로 영구 이전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 이후로는 합스부르크가 소유지인 이 영구적인 궁정 소재지가 되었다.[480]

5. 인구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 통계는 매우 불확실하고 다양하다. 카롤루스 제국 시절에는 인구가 2천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67] 그러나 제국 후기에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중앙에서 인구를 집계할 기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 때문에 18세기 초 제국의 인구는 17세기 초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자료에서는 1750년까지 1618년의 인구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본다.

17세기 초, 주요 선제후들이 통치하던 제국 신민의 수는 다음과 같다.[18]


  • 합스부르크 왕가: 5,350,000명 (보헤미아 왕관령 300만 명 포함)[567]
  • 작센 선제후국: 1,200,000명
  • 바이에른 공국(이후 바이에른 선제후국): 800,000명
  • 팔츠 선제후국: 600,000명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350,000명
  • 마인츠, 트리어, 쾰른 제후국: 총 300,000~400,000명[17]


선제후는 아니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다음으로 많은 신민을 통치했다. 17세기 초 부르군트 관구와 밀라노 공국에만 300만 명 이상이 살았다.

피터 윌슨은 170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를 2,500만 명으로 추정하고, 그 중 이탈리아에 사는 인구를 500만 명 정도로 보았다. 또한 1800년까지 제국의 인구는 2,900만 명(이탈리아 제외)으로 증가하고, 제국 외부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1,260만 명이 더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496]

18세기 초 오스트리아 전쟁 기록 보관소의 인구 추정(보헤미아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제외)에 따르면,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는 약 2,800만 명이었다. 이 인구는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162]

  • 65개 교회 주: 국토의 14%, 인구의 12%
  • 45개 왕조의 공국: 국토의 80%, 인구의 80%
  • 60개 도시 공국과 군주국: 국토의 3%, 인구의 3.5%
  • 60개 도시: 국토의 1%, 인구의 3.5%
  • 수백 명의 제국기사단: 국토의 2%, 인구의 1%


독일의 인구 통계학자들은 1871년이나 1914년 독일 영토 내 인구를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를 추산해왔다. 최근 자료들은 덜 오래된 자료를 사용하지만, 여전히 추측에 불과하다. 1870년 독일 인구를 기준으로 한 추정치는 1600년에 약 1,500만~1,700만 명, 1650년(30년 전쟁 이후)에는 약 1,000만~1,3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본다. 초기 근대 제국의 인구를 추정하는 역사가들은 1650년 인구가 2,000만 명에서 1,600만~1,700만 명으로 줄었다고 추정한다.

1800년경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제국의 인구를 2,700만~2,8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 시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저지대 국가와 이탈리아,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인한 라인 강 좌측 땅을 잃었다.) 자료 분석은 다음과 같다.[351]

  • 900만 명의 오스트리아 인구(실레시아와 모라비아, 보헤미아 포함)
  • 400만 명의 프로이센 인구
  • 1,400만~1,500만 명의 나머지 영토 인구


제국에 속했던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한 추정치도 있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국가별 인구[19]
국가인구
밀라노 공국 (스페인)1,350,000명
피에몬테-사보이아1,200,000명
제노바 공화국650,000명
토스카나 대공국649,000명
파르마-피아첸차 공국250,000명
모데나-레조 공국250,000명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백작령 (오스트리아)130,000명
루카 공화국110,000명
합계약 4,600,000명



18세기 후반 이탈리아 국가별 인구[197]
국가인구
피에몬테-사보이아2,400,000명
밀라노 공국 (오스트리아)1,100,000명
토스카나 대공국1,000,000명
제노바 공화국500,000명
파르마-피아첸차 공국500,000명
모데나-레조 공국350,000명
루카 공화국100,000명
합계약 6,000,000명



신성 로마 제국 주요 도시 인구 변화는 다음과 같다.

6. 종교

1555년 아우크부르크 종교 화의 이전까지 가톨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공식 종교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항상 가톨릭 신자였다.

루터교는 1555년 아우크부르크 종교 화의에서, 칼뱅주의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두 종파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프로테스탄트 종파였으며, 재세례파, 알미니우스파 등 다른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제국 내에서 불법적으로 공존했다. 재세례파는 메노나이트, 슈바르체나우 형제단, 후터파, 아미시 등 여러 그룹을 포함한 다양한 종파로 나뉘었다.[461]

아우크부르크 종교 화의 이후, 영토의 공식 종교는 통치자의 종교가 신민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cuius regio, eius religio|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la 원칙에 따라 결정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정상적인 해"로 간주되는 1624년 1월 1일의 상황을 기준으로 영토의 공식 종교를 정함으로써 이 원칙을 폐지했다. 따라서 이후로는 통치자가 다른 종교로 개종해도 신민이 개종할 필요가 없었다.[461]

또한, 가톨릭 통치자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민과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 날짜에 누렸던 권리를 보장받았다. 영토의 공식 종교 신자들은 공개 예배의 권리를 누렸지만, 다른 신자들은 (첨탑이나 종이 없는 예배당에서) 사적 예배의 권리를 허용받았다. 이론적으로는 종교를 이유로 차별받거나 상업, 무역, 수공업 또는 공공 매장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었다. 최초로 제국 기독교 교회 간의 분열의 영구적인 성격이 거의 확정되었다.[461]

신성 로마 제국에는 유대인 소수 민족이 존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국 내 모든 유대인에 대한 보호와 과세권을 주장했지만, 특히 제1차 십자군 시대와 16세기 종교 전쟁 중에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Charlemagne Holy Roman emperor https://www.britanni[...] 2023-10-16
[2] 논문 Das Reich ohne Hauptstadt? Die Multizentralitat der Hauptstadtfunktionen im Reich bis 1806 https://www.degruyte[...] 1983-12-31
[3] 서적 Beiträge zur bayerischen Geschichte, Sprache und Kultur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2021
[4] 서적 Herrschaft und Politik in Südosteuropa von 1300 bis 1800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21
[5] 서적 Hof, Regierung, Stadtverwaltung: Wien als Sitz der österreichischen Zentralverwaltung von den Anfängen bis zum Untergang der Monarchie https://books.google[...] Verlag für Geschichte und Politik 2002
[6] 서적 Werke und Briefe: historisch-kritische Ausgabe https://books.google[...] W. de Gruyter 2022-02-06
[7]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European Legal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2-06
[8] 서적 The Austrian Mind: An Intellectual and Social History, 1848–1938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9]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Reconsidered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10
[10] 웹사이트 Charlemagne https://www.history.[...] 2009-11-09
[11] 서적 Europe: the World of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Prentice-Hall 2022-02-06
[12] 서적 Representations of Power in Medieval Germany 800–1500 https://books.google[...] Isd 2022-03-09
[13] 서적 The Origins of the German Principalities, 1100–1350: Essays by German Historian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7
[14] 서적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Greenhaven Publishing 2009
[15] 웹사이트 német-római birodalom – Magyar Katolikus Lexikon http://lexikon.katol[...] 2022-08-03
[16] 서적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Ltd 2022-07-31
[17] 논문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Book Review] https://authors.libr[...] 2022-07-31
[18] 문서 Bryce
[19] 서적 The Western Experience https://books.google[...] Knopf 2022-02-06
[20] 서적 The Two Latin Cultures and the Foundation of Renaissance Humanism in Medieval Ital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2-06
[21] 서적 Itinerant Kingship and Royal Monasteries in Early Medieval Germany, C. 936–107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2-06
[22] 서적 Medieval Europe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22-02-06
[23]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6 volumes]: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https://books.google[...] ABC-CLIO 2022-02-06
[24] 서적 Medieval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Byzantine and Islamic Worlds: Interaction of Three Cultures https://books.google[...] D. C. Heath 2022-02-06
[25] 웹사이트 Otto I – Legacy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03-02
[26] 웹사이트 Otto I. – Deutsche Biographie https://www.deutsche[...] 2022-03-05
[27] 서적 The Empress Theophano: Byzantium and the West at the Turn of the First Millennium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3-09
[28] 서적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Female Rulers in Early Modern Europe https://books.google[...] Springer 2022-03-09
[29] 서적 Ottonian Queenship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3-09
[30] 서적 Mores Catholici: Books VII–IX https://books.google[...] P. O'Shea 2022-03-09
[31] 서적 A History of Eastern Europe: Crisis and Chang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05-30
[32] 서적 Nomads and Crusaders, A.D. 1000–1368 https://books.google[...]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22-05-30
[33] 서적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22-05-30
[34] 서적 Apocalyptic in History and Tradition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2022-05-30
[35] 서적 Eurasian Transformations, Tenth to Thirteenth Centuries: Crystallizations, Divergences, Renaissances https://books.google[...] Brill 2022-05-30
[36] 서적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and International Statements https://books.google[...] Ed. Atlantic-Forum 2022-05-30
[37] 서적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05-30
[38] 서적 Empire and Order: The Concept of Empire, 800–1800 https://books.google[...] Springer 2022-05-30
[39] 서적 Europas Weg in die Neuzeit: vom Weltstaat zur Staatenwelt https://books.google[...] Röhrig Universitätsverlag 2022-10-15
[40] 백과사전 Die deutschen Herrscher des Mittelalters: historische Portraits von Heinrich I. bis Maximilian I. (919–1519) https://books.google[...] C. H. Beck 2022-10-15
[41] 서적 Medieval Europe 400–15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10-15
[42] 서적 Medieval Germany, 500–1300: A Political Interpretation https://books.google[...] Macmillan International Higher Education 2022-05-25
[43] 학술지 Emperor Frederick II (1194–1250) and the political particularism of the German princes
[44] 학술지 Reasserting Power: Frederick II in Germany (1235–1236) 2006
[45] 서적 For the Common Good: The Bohemian Land Law and the Beginning of the Hussite Revolution https://books.google[...] Brill 2022-11-02
[46] 서적 The Collapse and Recovery of Europe, AD 476–1648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22-02-05
[47] 서적 The History of the Czech Republic and Slovak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22-02-06
[48] 서적 The Late Medieval Age of Crisis and Renewal, 1300–1500: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USA 2000
[49]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imited 2022-01-21
[50] 서적 Reformation and the German Territorial State: Upper Franconia, 1300–163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Rochester Press 2022-01-21
[51] 서적 Balkan Wars: Habsburg Croatia, Ottoman Bosnia, and Venetian Dalmatia, 1499–1617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22-01-17
[52] 서적 The Last Muslim Conquest: The Ottoman Empire and Its Wars in Europ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01-17
[53] 서적 Princes and Princely Culture: 1450–1650 https://books.google[...] Brill 2021-10-24
[54] 서적 The Othering of the Landsknechte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2018
[55] 서적 The Principles of Roman Law and Their Relation to Modern Law https://books.google[...] The Lawbook Exchange, Ltd. 2021-11-19
[56] 서적 Popular Sovereignty in Early Modern Constitutional Though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1-11-20
[57] 서적 German Political Philosophy: The Metaphysics of Law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1-11-20
[58] 서적 John Selden and the Western Political Tradi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11-20
[59] 서적 The Historical and Institutional Context of Roman Law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1-11-20
[60] 서적 Introduction to Public Law: A Comparative Study https://books.google[...] Brill 2021-11-20
[61] 서적 An Encyclopedia of Occultism https://books.google[...] Kensington Publishing Corporation 2021-12-12
[62] 서적 The Collected Historical Works of Sir Francis Palgrave, K.H.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12-12
[63] 서적 On Crimes and Punishments and Other Writing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21-12-12
[64] 서적 The New American Cyclopædia: A Popular Dictionary of General Knowledge https://books.google[...] D. Appleton 2021-12-12
[65] 학술지 Zur Entstehungsgeschichte von Dürers Ehrenpforte für Kaiser Maximilian https://journals.ub.[...] 2022-02-07
[66] 서적 The Origins of Nationalism: An Alternative History from Ancient Rome to Early Modern German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2-07
[67] 서적 Germania und ihre Söhne: Repräsentationen von Nation, Geschlecht und Politik in der Moderne https://books.google[...] Vandenhoeck & Ruprecht 2022-02-08
[68] 서적 Renaissance Humanism, Volume 2: Foundations, Forms, and Legac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22-02-05
[69] 서적 Francisco de Quevedo: Dreams and Discours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2-05
[70] 학술지 Whaley on Silver, 'Marketing Maximilian: the visual Ideology of a Holy Roman Emperor' https://networks.h-n[...] 2022-02-05
[71] 서적 The Habsburg Chancery Language in Perspective, Volume 114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1-09-21
[72] 학술지 Die Entwicklung der deutschen Schriftsprache vom 16. bis 18. Jahrhundert unter dem Einfluss der Konfessionen http://www.e-scoala.[...] 2021-11-08
[73] 서적 Digital Communication: Communication, Multimedia, Security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21-09-20
[74] 서적 Kommunikation und Konfrontation: Diplomatie und Gesandtschaftswesen Kaiser Maximilians I. (1486–1519)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22-01-29
[75]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Early Modern European History, 1350–175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1-12-12
[76] 서적 When Information Came of Age: Technologies of Knowledge in the Age of Reason and Revolution, 1700–185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1-12-12
[77] 웹사이트 H-German Roundtable on Smith, Germany: A Nation in Its Time Before, During, and After Nationalism, 1500–2000 https://networks.h-n[...] 2022-02-05
[78] 학술지 Forster on Brady Jr., 'German Histories in the Age of Reformations, 1400–1650' https://networks.h-n[...] 2022-02-05
[79] 학술지 Monarchs https://books.google[...] 2021-10-28
[80] 서적 Events That Formed the Modern World: From the European Renaissance through the War on Terror [5 volumes]: From the European Renaissance through the War on Terror https://books.google[...] ABC-CLIO 2022-02-06
[81] 서적 German Histories in the Age of Reformations, 1400–165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2-06
[82] 서적 Das Reich ohne Hauptstadt? Munich/Vienna 1983
[83] 백과사전 The Political Economy of Merchant Empires: State Power and World Trade, 1350–175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84] 서적 The emergence of the global political economy http://www.untag-smd[...] Routledge 2022-10-15
[85] 서적 The Political Economic Foundation of Democratic Capitalism: From Genesis to Maturation https://books.google[...] Universal-Publishers 2022-10-15
[86] 서적 Methods in Premodern Economic History: Case studies from the Holy Roman Empire, c. 1300–c. 1600 https://books.google[...] Springer Nature 2022-10-15
[87] 백과사전 The Holy Roman Empire, 1495–1806 https://perspectivia[...]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88] 서적 The Early History of Financial Economics, 1478–1776: From Commercial Arithmetic to Life Annuities and Joint Stocks https://books.google[...] Edward Elgar 2022-10-15
[89] 서적 Urban Empires: Cities as Global Rulers in the New Urban World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10-15
[90] 학술지 A troubled marriage. Maximilian and the Low Countries https://www.vr-elibr[...] Böhlau Verlag 2022-10-15
[91] 서적 Creating A World Economy: Merchant Capital, Colonialism, And World Trade, 1400–1825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10-15
[92] 서적 Holland Under Habsburg Rule, 1506–1566: The Formation of a Body Politic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22-02-05
[93] 서적 The Struggle for Power in Early Modern Europe: Religious Conflict, Dynastic Empires, and International Chang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02-05
[94] 서적 A History of Modern Germany: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02-05
[95] 서적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Penguin 2022-02-06
[96] 서적 Allies with the Infidel: The Ottoman and French Alliance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22-02-06
[97] 학술지 The Holy Roman Empire was Neither Holy, Nor Roman, Nor an Empire https://meridian.all[...] 2023-03-31
[98] 웹사이트 Erklärung Franz II. zur Niederlegung der Krone des Heiligen Römischen Reiches – Wikisource https://de.wikisourc[...] 2022-10-28
[99] 문서 Wilson
[100] 서적 Geschichte des Landes Sachsen-Anhalt https://books.google[...] Springer-Verlag 2022-02-06
[101] 서적 Maximilian I (1459–1519): An Analytical Biograph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02-05
[102] 서적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https://books.google[...] F. Watts 2022-02-05
[103] 서적 Queen's Apprentice: Archduchess Elizabeth, Empress María, the Habsburgs, and the Holy Roman Empire, 1554–1569 https://books.google[...] Brill 2022-02-05
[104] 서적 Toward an Understanding of Europe: A Political Economic Précis of Continental Integration https://books.google[...] Universal-Publishers 2022-10-15
[105] 서적 Roger II of Sicily: A Ruler Between East and West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10-15
[106] 서적 The Mediterranean World: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Rise of Napoleon https://books.google[...] JHU Press 2022-10-15
[107] 서적 The Emperor Frederick II of Hohenstaufen, Immutator Mundi https://books.google[...] Clarendon Press 2022-10-15
[108] 학술지 Mályusz (Elemér). Kaiser Sigismund in Ungarn 1387–1437 https://www.persee.f[...] 2022-07-05
[109] 서적 History of european integration in 2500 years: Ancient origins are renewed in the present aeternitas https://books.google[...] Tektime 2022-08-06
[110] 웹사이트 Sehepunkte – Rezension von: Kaiser Sigismund (1368–1437) – Ausgabe 14 (2014), Nr. 11 https://sehepunkte.d[...]
[111]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08-06
[112] 논문 Maximilian I and the Holy Roman Empire: The Authority of a King of the Romans (1486–1490) https://www.academia[...] 2022-09-06
[113] 서적 Orthodox Christianity and Nationalism in Nineteenth-Century Southeastern Europe https://books.google[...] Fordham Univ Press 2022-09-06
[114] 서적 Europe: The Struggle for Supremacy, from 1453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2022-09-06
[115] 서적 Lineages of the Absolutist State https://books.google[...] Verso Books 2022-09-06
[116] 서적 Monarchy, Aristocracy and State in Europe 1300–1800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01-17
[117] 서적 German Imperial Knights: Noble Misfits between Princely Authority and the Crown, 1479–1648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2-01-17
[118] 웹사이트 Whaley on Silver, 'Marketing Maximilian: the visual Ideology of a Holy Roman Emperor' H-German H-Net https://networks.h-n[...] 2022-02-26
[119] 서적 Isabella: The Warrior Queen https://books.google[...]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22-09-06
[120] 서적 The Renaissance of Empire in Early Modern Europ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9-06
[121] 웹사이트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http://www.historywo[...]
[122] 웹사이트 International trade and institutional change: A death in Venice http://isites.harvar[...]
[123] 웹사이트 Holy Roman Empire https://www.britanni[...] 2014-02-15
[124] 백과사전 Silesia
[125] 웹사이트 France: History, Map, Flag, Capital, & Facts https://www.britanni[...] 2023-05-16
[126] 웹사이트 Society for Imperial Chamber Court Research, Wetzlar https://grkg.wordpre[...] 2021-09-07
[127] 웹사이트 Seven German cities you never knew were once capitals https://web.archive.[...] 2019-06-20
[128] 문서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으로 한다면 800년, 샤를마뉴의 계승자를 자처한 오토 1세의 대관을 건국으로 본다면 962년이다.
[129] 문서 칙서 중 1~24조는 1월 10일, 24~31조는 12월 25일에 작성됨.
[130] 서적 Essais sur les mœurs et l'ésprit des nations
[131] 문서 예를 들어, 산카와 출판사의 학습 참고서 『상술 세계사 연구』는 샤를마뉴의 제권을 「서로마 제국의 부흥」, 오토 대제의 제권 이후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 하여 양자의 단절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산카와 출판사가 만든 전문적인 개설서 『세계역사대계 독일사』에서는 오토의 제권이 샤를마뉴의 프랑크-로마적인 제권을 계승한 것임이 강조되고 있으며, 오토의 제권이 카롤링거 지배자의 전통에 위치지어지고 있다.
[132] 문서 슈르체(2005), pp. 15-49.
[133] 문서 키쿠치(2003), pp.48-49
[134] 백과사전 제국교회정책(Reichskirchenpolitik) 일본대백과사전, 小学館
[135] 문서 슈르체(2005), p. 76.
[136] 문서 예외는 오스트리아계승전쟁 중에 단기간 재위한 카를 7세(비텔스바흐가)뿐이다.
[137] 문서 이탈리아가 독일국제에 편입되는 일은 없었고, 카를 5세가 손에 넣은 이탈리아 영토는 스페인 하프스부르크가가 계승했다.
[138] 서적 신성로마제국 講談社現代新書 2003
[139] 문서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로마 제국」의 부흥이었다.
[140] 문서 imperator Romanum gubernans imperium
[141] 문서
[142] 서적 菊池(2003)
[143] 서적 シュルツェ(2005)
[144] 서적 シュルツェ(2005)
[145] 서적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146] 서적 シュルツェ(2005)
[147] 웹사이트 【ボヘミア】 http://100.yahoo.co.[...] 2013-12
[148] 서적 シュルツェ(2005)
[149]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150] 서적 ウィルスン(2005)
[151] 서적 9世紀フランク王国の「国家」をめぐって
[152] 서적 ヨーロッパ世界の誕生 創文社 1960
[153] 문서
[154] 웹사이트 ローマ帝国にあって、中華帝国には決定的に欠けている「平和の担い手の条件」とは? https://diamond.jp/a[...] 2022-06-30
[155] 웹사이트 ビザンツ帝国(東ローマ帝国)とは?千年の繁栄と歩みをわかりやすく徹底解説!トルコ旅行・ツアー専門の人気ナンバーワン旅行会社『ターキッシュエア&トラベル』 https://turkish.jp/t[...] 2021-10-11
[156] 웹사이트 中国の五胡と欧州の蛮族(3) ゲルマン王国の脱ローマ化 http://www.peoplechi[...] 2023-08-14
[157] 웹사이트 ゲルマン民族大移動とフン族 - 歴史まとめ.net https://rekishi-memo[...] 2023-08-14
[158] 웹사이트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476 AD https://www.shorthis[...] 2016-09-28
[159] 서적 ローマ帝国衰亡史 岩波書店 1954
[160] 서적 シアグリウス 東洋書林 1999
[161] 서적 佐藤 1995a
[162] 서적 ル・ジャン 2009
[163] 웹사이트 フランス史 https://www2.yukawa.[...] 2023-08-14
[164] 서적 佐藤 1995a
[165] 서적 ル・ジャン 2009
[166] 서적 神崎
[167] 웹사이트 KarlMartell:短い伝記、改革、活動。シャルル・マルテルの軍事改革 - 歴史 2023 https://ja.vogueindu[...] 2023-08-14
[168] 서적 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169] 웹사이트 732 Battle of Tours: Charles Martel the 'Hammer' preserves Western Christianity https://www.warhisto[...]
[170] 서적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Vintage Books 2015
[171] 서적 The Cambridge Shorter History of India
[172] 서적 Early India : From the Origins to AD 1300
[173] 서적 An Atlas and Survey of South Asian History
[174] 웹사이트 5分でわかる、「なぜフランク王国は長生きしたのか?」の映像授業 https://www.try-it.j[...] 2023-08-14
[175] 웹사이트 Charles Martel https://www.britanni[...] 2023-07-12
[176] 서적 五十嵐
[177] 웹사이트 地図で読み解くフランスの歴史④ カール1世の時代におけるカロリング朝の最盛期 https://fron.tokyo/3[...] ERON 2023-08-14
[178] 서적 西欧中世史事典 ミネルヴァ書房 1997
[179] 서적 ビザンツ皇妃列伝 白水社 2009
[180] 문서 神により加冠されし至尊なるアウグストゥス、偉大にして平和的なる、ローマ帝国を統治するインペラートル;serenissimus Augustus a Deo coronatus, magnus pacificus Imperator Romanorum gubernans Imperium
[181] 문서 カールのローマ帝国皇帝即位
[182] 백과사전 世界大百科事典 平凡社
[183] 서적 カロリング帝国とキリスト教会 文理閣 2017
[184] 서적 The Crisis of the Church and State 1050-1300 トロント大学出版部 1988
[185] 서적 カール大帝 山川出版社 2013
[186] 서적 中世ヨーロッパの歴史 講談社 2006-05
[187] 백과사전 神聖ローマ帝国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188] 서적 Pagden(2008)
[189] 서적 Byzantine Empresses: Women and Power in Byzantium AD 527-1204 Routledge 1999
[190] 서적 時間の民族史―教会改革とノルマン征服の神学 勁草書房 2003
[191] 문서 シャルルマーニュの護符
[192] 서적 成瀬他(1997a)
[193] 서적 成瀬他(1997a)
[194] 백과사전 メルセン条約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195] 서적 成瀬他(1997a)
[196] 서적 木村他(2001)
[197] 서적 木村他(2001)
[198] 서적 成瀬他(1997a)
[199] 서적 木村他(2001)
[200] 서적 成瀬他(1997a)
[201] 서적 成瀬他(1997a)
[202] 서적 成瀬他(1997a)
[203] 서적 成瀬他(1997a)
[204] 서적 木村他(2001)
[205] 서적 木村他(2001)
[206] 서적 木村他(2001)
[207] 서적 成瀬他(1997a)
[208] 서적 木村他(2001)
[209] 서적 ウィルスン(2005)
[210] 서적 成瀬他(1997a)
[211] 서적 木村他(2001)
[212] 서적 成瀬他(1997a)
[213] 서적 成瀬他(1997a)
[214] 서적 成瀬他(1997a)
[215]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216] 서적 阿部(1998)
[217] 서적 木村他(2001)
[218] 서적 成瀬他(1997a)
[219] 서적 木村他(2001)
[220] 백과사전 オットー3世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221] 서적 成瀬他(1997a)
[222] 문서 皇帝としてはハインリヒ「1世」であるが、神聖ローマ皇帝は東フランク国王 ハインリヒ1世から代数を数えるのが一般的である。
[223] 서적 成瀬他(1997a)
[224] 서적 木村他(2001)
[225] 서적 成瀬他(1997a)
[226] 서적 成瀬他(1997a)
[227] 문서 神聖ローマ皇帝としては唯一の「コンラート」であるが、東フランク国王 コンラート1世との区別のため「2世」をつけることが一般的である。
[228] 문서 ルドルフ3世から見てハインリヒ2世は姪の婿、コンラート2世はいとこの婿にあたる。
[229] 서적 菊池(2003)
[230] 문서 クレメンス2世、ダマスス2世、レオ9世、ウィクトル2世
[231] 서적 成瀬他(1997a)
[232] 서적 菊池(2003)
[233] 서적 菊池(2003)
[234] 문서 帝国の関与を排してステファヌス9世を選出。菊池(2003), pp.70-71。次のニコラウス2世は教皇選挙から世俗権力の干渉を排除する教皇勅書を発して、帝国支配からの脱却を図った。菊池(2003), pp.71-72。
[235] 서적 木村他(2001)
[236] 서적 木村他(2001)
[237] 서적 木村他(2001)
[238] 문서 この協約の前には叙任権を全て放棄する代わりに教会領全没収という過激な案を通そうとしたが、暴動が起きたため阻まれた。
[239] 서적 堀越(2006)
[240] 서적 菊池(2003)
[241] 서적 堀越(2006)
[242] 서적 成瀬他(1997a)
[243] 문서 神聖ローマ皇帝としてもドイツ王としてもロタール「2世」であるが、ロタリンギア国王 ロタール2世やイタリア王ロターリオ2世との区別のため「3世」とされることが多い。
[244] 서적 成瀬他(1997a)
[245] 서적 菊池(2003)
[246] 논문 木村他(2001)
[247] 논문 菊池(2003)
[248] 논문 菊池(2003)
[249] 논문 成瀬他(1997a)
[250] 논문 成瀬他(1997a)
[251] 논문 成瀬他(1997a)
[252] 논문 菊池(2003)
[253] 논문 菊池(2003)
[254] 논문 菊池(2003)
[255] 문서 관세징수청구권, 화폐주조권, 성채건설권이라는 본래 국왕에게만 허용되는 대권
[256] 문서 1220년의 "성계제후와의 협약"(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 1232년의 "제후의 이익을 위한 협정"(Statutum in favorem principum)
[257] 논문 成瀬他(1997a)
[258] 논문 菊池(2003)
[259] 논문 菊池(2003)
[260] 논문 Weyland(2002)
[261] 논문 成瀬他(1997a)
[262] 논문 成瀬他(1997a)
[263] 논문 菊池(2003)
[264] 논문 阿部(1998)
[265] 논문 木村他(2001)
[266] 논문 成瀬他(1997a)
[267] 논문 菊池(2003)
[268] 논문 成瀬他(1997a)
[269] 논문 菊池(2003)
[270] 논문 堀越(2006)
[271] 논문 成瀬他(1997a)
[272] 논문 阿部(1998)
[273] 논문 江村(1990)
[274] 논문 菊池(2003)
[275] 논문 江村(1990)
[276] 논문 菊池(2003)
[277] 논문 成瀬他(1997a)
[278] 논문 菊池(2003)
[279] 논문 成瀬他(1997a)
[280] 문서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인민주권론 「평화의 옹호자」
[281] 書籍 成瀬他(1997a)
[282] 문서 レンス判告、帝国法「リケット・ユーリス」(Licet iuris)と皇帝命令書「フィデム・カトリカム」(Fidem catholicam)
[283] 書籍 木村他(2001)
[284] 書籍 成瀬他(1997a)
[285] 書籍 木村他(2001)
[286] 書籍 成瀬他(1997a)
[287] 書籍 菊池(2004)
[288] 書籍 堀越(2006) 1350
[289] 書籍 坂井(2003)
[290] 書籍 木村他(2001)
[291] 書籍 成瀬他(1997a)
[292] 문서 世襲制と領地不可分の確認、裁判権、関税権、貨幣鋳造権、鉱山採掘権、ユダヤ人保護権など
[293] 書籍 菊池(2003)
[294] 웹사이트 ハンザ同盟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295] 書籍 菊池(2003)
[296] 書籍 成瀬他(1997a)
[297] 문서 共同王として従弟のヨープストも選出されたが、一年で死去している。
[298] 書籍 池谷(1994)
[299] 書籍 菊池(2003)
[300] 書籍 菊池(2004)
[301] 書籍 菊池(2003)
[302] 書籍 ウィルスン(2005)
[303] 書籍 菊池(2003)
[304] 書籍 江村(1990)
[305] 書籍 木村他(2001)
[306] 書籍 江村(1990)
[307] 백과사전 フリードリヒ3世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308] 문서 この改革の基本的な考えは、主にニコラウス・クザーヌスによって提唱された皇帝と帝国等族との政治的協調論に基づいている
[309] 문서 15世紀末になると数百人規模の強盗団が犯行後に決闘状を形式的に送りつけるということが常態化する事態にまでなっていた
[310] 문서 フランクフルト・アム・マインに置かれ、1523年にシュパイアーへ移転し、最終的に1693年にヴェッツラーに落ち着いた。君主の威光を示す性質を持たず、設備は極めて簡素であった 1523
[311] 문서 帝国統治院は旧態依然の帝国議会(Reichstag)に代わって20人の聖俗諸侯と帝国自由都市の代表からなり、皇帝の財政と外交を司ることになっていた。皇帝の権力抑制を目的としたが、諸侯も統治院に縛られたため廃止された
[312] 書籍 シュルツェ(2005)
[313] 書籍 菊池(2003)
[314] 書籍 ウィルスン(2005)
[315] 書籍 木下他(2008)
[316]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17] 서적 成瀬(1978)
[318] 서적 成瀬(1978)
[319] 서적 成瀬(1978)
[320] 서적 赤井他(1974)
[321] 서적 成瀬(1978)
[322]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23] 서적 江村(1990)
[324] 서적 成瀬(1978)
[325] 서적 成瀬(1978)
[326] 서적 江村(1990)
[327] 서적 成瀬(1978)
[328] 서적 成瀬(1978)
[329] 서적 赤井他(1974)
[330]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31] 서적 赤井他(1974)
[332] 서적 成瀬(1978)
[333]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34] 서적 阿部(1998)
[335] 서적 森田(1994)
[336] 서적 阿部(1998)
[337]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38] 서적 森田(2010)
[339] 서적 菊池(2003)
[340]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41]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42] 서적 成瀬(1978)
[343] 백과사전 ニコポリスの戦い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344] 백과사전 モハーチの戦い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345] 서적 井上他(1968)
[346] 서적 赤井他(1974)
[347] 서적 成瀬(1978)
[348] 서적 江村(1992)
[349] 서적 江村(1992)
[350] 서적 江村(1992)
[351] 서적 江村(1992)
[352] 서적 森田(2010)
[353] 서적 江村(1992)
[354] 서적 江村(1992)
[355] 서적 森田(2010)
[356] 서적 阿部(1998)
[357] 백과사전 キリスト教綱要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358] 서적 森田(2010)
[359] 백과사전 カルバン http://100.yahoo.co.[...] 日本大百科全書,小学館 2013-12
[360] 서적 森田(2010)
[361] 서적 菊池(2009)
[362] 서적 森田(1994)
[363] 서적 森田(2010)
[364] 서적 坂井(2003)
[365] 서적 森田(2010)
[366] 서적 菊池(2009)
[367] 서적 坂井(2003)
[368] 서적 成瀬他(1997a)
[369] 서적 成瀬他(1997a)
[370] 서적 ウィルスン(2005)
[371] 서적 Angermeier(1991)
[372] 서적 Rovan(1999)
[373] 서적 成瀬他(1997b)
[374] 서적 坂井(2003)
[375] 서적 成瀬他(1997a)
[376] 백과사전 フェルディナント1世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377] 서적 成瀬他(1997a)
[378] 서적 Rovan(1999)
[379] 서적 成瀬他(1997a)
[380] 서적 成瀬他(1997a)
[381] 서적 大野他(1961)
[382] 서적 成瀬他(1997a)
[383] 백과사전 ルドルフ2世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電子辞書対応小項目版
[384] 서적 Rovan(1999)
[385] 서적 成瀬他(1997a)
[386] 서적 Albrecht(1998)
[387] 서적 Frisch(1993)
[388] 서적 Schillinger(2002)
[389] 서적 菊池(2003)
[390] 서적 江村(1990)
[391] 서적 成瀬他(1997a)
[392] 서적 菊池(1995)
[393]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兄弟の諍い
[394]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95] 서적 菊池(1995)
[396] 서적 菊池(2009)
[397]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398] 서적 菊池(1995)
[399] 웹사이트 CIA - The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
[400] 서적 菊池(1995)
[401] 서적 菊池(1995)
[402] 서적 菊池(1995)
[403] 서적 菊池(1995)
[404] 서적 菊池(1995)
[405] 서적 菊池(1995)
[406] 서적 成瀬他(1997a)
[407] 서적 菊池(1995)
[408] 서적 菊池(1995)
[409] 서적 菊池(2009)
[410] 서적 菊池(1995)
[411] 서적 菊池(1995)
[412] 서적 菊池(2009)
[413] 서적 成瀬他(1997a)
[414] 서적 菊池(1995)
[415] 서적 菊池(1995)
[416] 서적 菊池(1995)
[417] 서적 成瀬他(1997a)
[418] 서적 成瀬他(1997a)
[419] 서적 菊池(2003)
[420]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421] 논문
[422] 논문
[423] 논문
[424] 논문
[425] 논문
[426] 논문
[427] 논문
[428] 논문
[429] 백과사전 領邦国家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430] 논문
[431] 논문
[432] 논문
[433] 논문
[434] 논문
[435] 논문
[436] 논문
[437] 논문
[438] 논문
[439] 논문
[440] 논문
[441] 백과사전 ライスワイク条約
[442] 논문
[443] 논문
[444] 백과사전 ユトレヒト条約, ラスタット条約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445] 논문
[446] 논문
[447] 논문
[448] 논문
[449] 논문
[450] 논문
[451] 백과사전 皇帝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452] 논문
[453] 논문
[454] 논문
[455] 논문
[456] 백과사전 七年戦争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457] 서적 成瀬他(1997b)
[458] 백과사전 マリア・テレジア、オーストリア - 歴史 http://100.yahoo.co.[...] 小学館 2013-12
[459] 서적 成瀬他(1997b)
[460] 서적 成瀬他(1997b)
[461] 서적 成瀬他(1997b)
[462] 서적 成瀬他(1997b)
[463] 서적 成瀬他(1997b)
[464] 서적 成瀬他(1997b)
[465] 서적 桑原他(1975)
[466] 서적 菊池(2009)
[467] 문서 帝国内で「国王」の称号を許された諸侯はボヘミア王のみである。その他の国王の称号を有する諸侯は帝国領域外の王国の統治者である。
[468] 문서 当初は東フランク王国の政体を踏襲し、一般にはフランク王国やドイツ王国、正式にはローマ帝国と呼ばれていた。「ドイツ人の国家」という概念は後年に生まれた。
[469] 서적 ウィルスン(2005)
[470] 서적 菊池(2003)
[471] 서적 ウィルスン(2005)
[472] 서적 菊池(2003)
[473] 서적 ウィルスン(2005)
[474] 서적 シュルツェ(2005)
[475] 서적 成瀬他(1997a)
[476] 서적 シュルツェ(2005)
[477] 서적 成瀬他(1997a)
[478] 서적 シュルツェ(2005)
[479] 서적 シュルツェ(2005)
[480] 서적 成瀬他(1997b)
[481] 서적 シュルツェ(1997)
[482] 서적 シュルツェ(1997)
[483] 서적 シュルツェ(1997)
[484] 서적 シュルツェ(1997)
[485] 서적 シュルツェ(1997)
[486] 서적 成瀬他(1997b)
[487]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488] 서적 ウィルスン(2005)
[489]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0]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1]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2]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493]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4] 서적 菊池(2003)
[495]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6]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7]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8] 서적 ウィルスン(2005)
[499] 서적 木村(2001)
[500] 서적 フルブロック(2005)
[501] 서적 ウィルスン(2005)
[502] 서적 坂井(2003)
[503] 서적 ウィルスン(2005)
[504] 서적 ウィルスン(2005)
[505] 서적 ウィルスン(2005)
[506] 서적 ウィルスン(2005)
[507] 서적 ハプスブルク帝国の情報メディア革命 近代郵便制度の誕生 集英社 2008
[508] 문서 스웨덴 등을 끌고 온 프로이센으로부터의 압력을 받아 레오폴트 1세는 1666년에 영방 우편을 인정했다.
[509] 서적 検閲帝国ハプスブルク 河出書房新社 2013
[510] 서적 菊池2008
[511] 서적 ウィルスン(2005)
[512] 서적 成瀬他(1997b)
[513] 서적 阿部(1998)
[514] 서적 菊池(2003)
[515] 서적 成瀬他(1997b)
[516] 서적 ウィルスン(2005)
[517] 서적 ウィルスン(2005)
[518] 서적 ウィルスン(2005)
[519] 서적 成瀬他(1997b)
[520] 문서 개설서로는, 성세 치, 야마다 긴고, 키무라 야스지 편 세계 역사 대계 독일사 1이나, 피터 H. 윌슨 신성 로마 제국 1495~1806 등이 자세하다.
[521] 문서 그러나 이 제국 개조 운동은 궁극적으로 성과가 없었다고 해설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제국 개조 운동】(브리태니카 국제 대백과사전 전자 사전 대응 소항목판)이나【신성 로마 제국】(세계 대백과사전 권 14, 평범사, 1988년)
[522] 서적 坂井(2003)
[523] 서적 木村他(2001)
[524] 서적 Western Civilization: Ideas, Politics, and Societ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5-01-01
[525]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Reconsidered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22-02-06
[526] 웹사이트 Holy Roman Empire https://www.britanni[...] 2014-02-15
[527] 웹인용 Charlemagne https://www.history.[...] 2009-11-09
[528] 웹인용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http://www.historywo[...]
[529] 서적 Europe: the World of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Prentice-Hall 2022-02-06
[530] 서적 Representations of Power in Medieval Germany 800-1500 https://books.google[...] Isd 2022-03-09
[531] 서적 The Origins of the German Principalities, 1100-1350: Essays by German Historian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2-03-09
[532] 서적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Greenhaven Publishing LLC 2022-06-29
[533] 웹인용 német-római birodalom – Magyar Katolikus Lexikon http://lexikon.katol[...] 2022-08-03
[534] 서적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Ltd 2022-07-31
[535] 저널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Book Review] https://web.archive.[...] 2015-02
[536] 저널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Book Review] https://web.archive.[...] 2015-02
[537] 웹사이트 Italy in the 14th and 15th centuries https://www.britanni[...] 2020-12-18
[538] 서적 State and Society in the Early Middle Ages: The Middle Rhine Valley, 400–1000 https://books.google[...]
[539] 서적 1913
[540] 서적 1996
[541] 서적 1913
[542] 서적 The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751–987 https://www.questia.[...] 1983
[543] 웹사이트 France/Pippin III http://www.britannic[...]
[544] 서적 1913
[545] 서적 1996
[546] 서적 Dictionary of Wars https://books.google[...] 2007
[547] 서적
[548] 서적 1983
[549] 서적 The Birth of the West: Rome, Germany, France, and the Creation of Europe in the T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2013
[550] 서적 A history of Germany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D. Appleton & Co. 1894
[551] 서적 Europe in the Middle Ages Harcourt brace Jovanovich, Inc. 1976
[552] 서적 Dictionary of World Biography Fitzroy Dearborn 1998
[553] 서적 The Civilization of the Middle Ages Harper Perennial 1994
[554] 서적 Nuremberg: The imaginary capital https://books.google[...] Camden House 2006
[555] 서적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Publishers 2000
[556] 서적 How to See the Vatican https://en.wikisourc[...]
[557] 서적 The Origins of Modern Germany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 Inc 1984
[558] 서적 Vengeance in Medieval Europe: A Reade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9
[559]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4, C.1024-c.1198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560] 서적 The Crusades and the Military Orders: Expanding the Frontiers of Medieval Latin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01
[561] 웹인용 Goldene Bulle (Zeumer, 1908) – Wikisource https://de.wikisourc[...] 2016-04-06
[562] 웹인용 Les langues du roi. Le rôle de la langue dans la communication de propagande dynastique à l’époque de Charles IV http://ifha.revues.o[...] 2016-04-06
[56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eformation and Counter-Reformation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564] 간행물 Die Reichs-Matrikel aller Kreise Nebst den Usual-Matrikeln des Kaiserlichen und Reichskammergerichts Ulm
[565] 서적 Wettkampf der Nationen Wallstein Verlag
[566] 서적 Les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e Saint-Empire au XVIIe siècle Honoré Champion
[567]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