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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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1868년(고종 5년) 독일인 상인이자 학자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에른스트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사건 배경19세기 후반 조선은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오페르트는 통상 요구를 위해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부장품을 탈취하고, 이를 빌미로 조선과 통상 협상을 하려 했다.
사건 경과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 프랑스 신부 페롱 등과 함께 도굴단을 꾸렸다. 1868년 5월, 오페르트 일행은 두 척의 기선을 이끌고 충청도 덕산(현재의 예산군 덕산면)에 도착했다. 그들은 남연군 묘를 찾아 밤에 도굴을 시도했지만, 묘가 매우 견고하여 실패했다. 날이 밝아오자 도굴단은 철수했다.
사건의 영향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 박해도 더욱 심해졌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을 포함한 세 차례의 조선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을 출간했다.
추가 정보
- 남연군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마전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현재의 위치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되었다.
- 흥선대원군은 묘를 이장하면서 대덕사라는 절을 불태우고, 묘 자리에 쇠를 녹여 붓는 등 도굴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 오페르트는 도굴 실패 후, 인천 영종도에 들러 프랑스 제독 알리망의 명의로 흥선대원군에게 교섭을 요구하는 글을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 일부에서는 오페르트가 단순히 통상을 위한 목적이 아닌, 조선인 천주교도들의 복수심을 이용하여 도굴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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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분쟁 |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
날짜 | 1868년 5월 11일~5월 18일 |
장소 | 충청도 행담도 ~ 충청도 덕산 일대 |
결과 | 도굴꾼 일당의 도굴 미수,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 강화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center|80px]] |
교전국 2 | |
지휘관 | |
지휘관 2 | [[파일:Flag of Hamburg.svg|22px]] 실행책 에른스트 오페르트 [[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867-1877).svg|22px]] 물주 프레더릭 젠킨스 [[파일:Flag of France.svg|22px]] 앞잡이 스타니슬라 페롱 |
병력 | |
사상자 |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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