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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이르 누리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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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라이르 누리캰은 불가리아의 역도 선수로, 1972년과 197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그는 1948년 불가리아 슬리벤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농구를 하다가 역도 코치 이반 아바지예프의 눈에 띄어 역도를 시작했다. 1972년 올림픽에서 불가리아 역도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메달을 획득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며 불가리아 역도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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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이르 누리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 (한국어)노라이르 누리캰
원어명 (불가리아어)Норайр Нурикян
원어명 (아르메니아어)Նորայր Նուրիկյան
본명Норайр Арам Нурикян
로마자 표기Norair Aram Nurikyan
출생일1948년 6월 26일
출생지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슬리벤
신장155cm
선수 정보
국적불가리아
종목역도
세부 종목밴텀급, 페더급
소속팀아카데미크 소피아
메달 기록
올림픽 반지
올림픽 반지
올림픽 (금메달)1972 뮌헨 (-60kg)
1976 몬트리올 (-56kg)
세계 선수권 대회 (은메달)1973 아바나 (-60kg)
세계 선수권 대회 (동메달)1971 리마 (-60kg)
1974 마닐라 (-60kg)
유럽 선수권 대회 (금메달)1976 베를린 (-56kg)
유럽 선수권 대회 (은메달)1972 콘스탄차 (-60kg)
1973 마드리드 (-60kg)
유럽 선수권 대회 (동메달)1969 바르샤바 (-56kg)
1974 베로나 (-56kg)
발칸 선수권 대회 (금메달)1973 아테네 (-60kg)
1974 부르가스 (-60kg)
1975 솜보르 (-60kg)
불가리아 선수권 대회 (금메달)1971 소피아 (-60kg)
1972 소피아 (-60kg)
1975 얌볼 (-60kg)
불가리아 선수권 대회 (은메달)1967 소피아 (-56kg)
1968 소피아 (-56kg)
1970 소피아 (-56kg)
1974 비딘 (-60kg)
불가리아 선수권 대회 (동메달)1969 소피아 (-56kg)

2. 생애

(내용 없음)

2. 1. 유년 시절과 초기 경력

누리캰은 불가리아 슬리벤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르메니아어 이름은 '''노라이르 아라미 누리캰'''(Նորայր Արամի Նուրիկյանhy)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빵사였으며 매우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리캰은 아버지의 힘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다.

슬리벤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처럼 누리캰도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그의 선생님 중 한 명은 그의 강인한 외모를 보고 "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수 없을 거야. 복서가 되는 게 낫겠어."라고 말했다.[3]

누리캰이 처음으로 시작한 스포츠는 농구였다. 그는 불가리아 농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멤버가 된 보이초 브란조프와 함께 농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리캰은 농구에서 성공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았다.

여가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역도 훈련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전설적인 역도 코치 이반 아바지예프의 눈에 띄었다. 아바지예프는 누리캰의 재능이 역도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함께 훈련할 것을 제안했다. 누리캰은 아바지예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바지예프는 1년 안에 큰 발전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정확히 1년 후, 누리캰은 스포츠 마스터가 되었다.[3]

2. 2. 선수 경력

노라이르 누리캰은 군 복무를 마친 후 스포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역도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소피아의 연맹 코치였던 이반 아바지에프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초기에는 아타나스 키로프에 이어 불가리아 국가대표팀 내 2인자였으나, 아바지에프 코치의 꾸준한 믿음과 격려 속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실력을 키워나갔다.[3]

1969년, 누리캰은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해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5위에 올랐다. 이후 꾸준히 기량을 발전시켜 1971년에는 유럽 선수권 대회 2위, 세계 선수권 대회 3위를 기록하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훈련하던 중, 1972년 1월 오른쪽 손목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훈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아바지에프 코치는 누리캰에게 바벨을 이용한 스쿼트 훈련에만 집중하도록 지도했다. 다른 선수들이 인상과 용상 훈련을 할 때 누리캰은 스쿼트만 반복했고,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약 3개월간 이 훈련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스쿼트 기록은 200kg에서 230kg으로 향상되었다.[3]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첫날, 선수들을 경기장으로 이동시키던 버스에 화재가 발생하는 아찔한 사고가 있었지만, 다행히 다른 버스를 통해 제시간에 계체량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약 늦었다면 실격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3]

다음 날 열린 누리캰의 체급 경기에서는 소련의 디토 샤니제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누리캰과 샤니제는 군사 프레스(Military Press) 종목에서 나란히 올림픽 기록을 세웠으나, 인상에서는 샤니제가 근소하게 앞섰다. 아바지에프 코치는 누리캰에게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선수가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 누리캰은 용상에서 157.5kg을 들어 올려야 했는데, 이는 당시 새로운 세계 기록에 해당했다. 누리캰은 바벨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고, 균형을 잡기 위해 세 걸음을 내디뎠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흰색 램프 3개)으로 성공이 인정되면서 누리캰은 총합 402.5kg을 기록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금메달은 불가리아 역도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자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3]

1972년 올림픽 이후 누리캰은 결혼했고, 한동안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유럽 및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2위와 3위를 기록하는 등 다소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다. 1975년에는 아바지에프 코치와 함께 더 낮은 체급으로 변경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으나, 그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합계 기록을 내지 못하며 실패했고, 이 결정으로 아바지에프 코치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

하지만 1976년, 누리캰은 새로운 체급에 완벽히 적응하여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열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이로써 누리캰은 불가리아 최초로 올림픽에서 두 번의 금메달을 딴 선수가 되었다. 누리캰의 아내는 당시 아바지에프 코치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3]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누리캰은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 전향하여 불가리아 역도 국가대표팀에서 아바지에프의 조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이후 수석 코치를 맡기도 했다.[3]

3. 개인적인 삶

누리캰은 1972년 하계 올림픽 이후 메리라는 아내를 만났다. 그들은 이후 결혼했고, 1974년에 아들을 낳았다.[3]

4. 주요 역도 업적

누리캰은 1972년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1972년 1월 오른쪽 손목 골절 부상을 당해 훈련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회에서는 합계 402.5kg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1976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같은 체급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주요 대회 메달 기록
대회금메달은메달동메달
하계 올림픽1972, 1976--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1972, 197619731971, 1974
유럽 역도 선수권 대회19761972, 19731969, 1974



선수 생활 동안 총 4개의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참조

[1] Sports-Reference Norayr Nurikyan https://www.sports-r[...]
[2] 웹사이트 Weightlifting Hall Of Fame http://www.iwf.net/f[...] www.iwf.net 2013-01-25
[3] 웹사이트 The Little Big Man From Sevlievo http://www.chidlovsk[...] www.chidlovski.net 201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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