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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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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라다 지로는 1915년에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법무 대위로 종전을 맞았다. 이후 교토지방재판소,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등을 거쳐 1982년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 1표의 격차 문제 해결에 관여하고, 헌법기념일 전날 기자회견에서 위헌심사에 대한 견해를 밝혔으나, 헌법제한해석론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5년 정년 퇴직 후 1987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으며, 2002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데라다 이쓰로 또한 최고재판소 장관이 되어 부자가 모두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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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 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종2위훈1등
이름데라다 지로
원어명寺田 治郎 (てらだ じろう)
출생일1915년 11월 4일
출생지아이치현
사망일2002년 3월 17일 (향년 86세)
출신 학교도쿄 제국대학법학부
자녀데라다 이쓰로
경력
직책최고재판소 판사
임기 시작1980년 3월 22일
임기 종료1982년 10월 1일
임명제2차 오히라 내각
직책제10대 최고재판소 장관
임기 시작1982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85년 11월 3일
임명쇼와 천황 ( 스즈키 젠코 내각이 지명 )
이전 장관핫토리 다카아키
다음 장관야구치 고이치

2. 생애

데라다 지로는 1915년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구제 히메지 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1938년에 졸업했다. 사법관 시보가 되었으나 곧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법무 대위로 복무하다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법조계에 복귀하여 1947년 교토지방재판소를 시작으로, 1949년 최고재판소 민사국 등에서 근무했다. 이후 최고재판소 사무총무국장, 오쓰지방재판소장, 도쿄고등재판소 판사를 거쳐 1974년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3] 1977년1978년에는 각각 나고야고등재판소 장관과 도쿄고등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1980년 3월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었고, 취임 시 "재판관은 아무리 이론이 훌륭하더라도 결론이 현실과 동떨어져선 안 된다. 서민적인 부분을 앞으로도 마음에 새기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1982년 10월에는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취임했다.[3] 장관 재임 중에는 당시 사회적 문제였던 1표의 격차 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상고된 지 6개월 만에 대법정 판결을 통해 국회의 조속한 시정을 촉구했다.[2][3] 또한 1984년 헌법기념일 기자회견에서 위헌 심사와 관련하여 '헌법 한정 해석론'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이는 현상 유지를 추인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5년 11월 정년 퇴임했으며, 1987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4] 2002년 급성 심부전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데라다 이쓰로 역시 훗날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하여,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부자(父子)가 최고재판소 장관을 지낸 기록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5년 아이치현에서 태어났다. 구제 히메지 고등학교를 거쳐, 193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사법관 시보가 되었지만, 곧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법무 대위 계급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2. 2. 법조 경력

1938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사법관 시보가 되었으나, 곧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법무 대위로 종전을 맞이했다. 복원 후 1947년에 교토 지방 법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며, 1949년에는 최고재판소 민사국에서 일했다.

이후 최고재판소 사무총무국장, 오쓰 지방 법원 소장, 도쿄 고등 법원 판사를 거쳐, 1974년에 최고재판소 사무총장에 취임했다.[3] 1976년 5월, 일본 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이 국회에서 거론되었을 때 국회에 출석하여 "국정 조사권이 확정 판결의 당부, 사실 인정, 죄형의 당부 등을 조사하는 것은 사법권 침해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데라다는 1948년 최고재판소 재판관 회의의 결정을 언급하며 "확정 판결의 당부를 조사하기 위해, 국회가 증인 소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답변했다.

1977년 11월에 나고야 고등 법원 장관, 1978년 7월에 도쿄 고등 법원 장관을 역임했다.

1980년 3월 22일에 최고재판소 재판관에 취임했다. 취임할 때 "재판관은 아무리 이치가 훌륭해도, 결론이 실감에서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서민적인 부분을 앞으로도 유념하겠다"라고 말했다. 1982년 10월 1일에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3]

최고재판소 장관 시절에는 1표의 격차 문제에 매달렸다. 당시 총선에서 선거구별 표의 격차 문제로 소송이 제기되었고, 전국 4곳의 고등 법원에서 판단에 차이가 있었다. 이것들이 상고된 지 불과 반년 만에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을 내리고, 국회에 대해 태만을 시정하고 조기 시정을 강력히 촉구했다.[2][3] 1984년 5월 헌법기념일을 앞두고 한 기자 회견에서 최고재판소의 위헌 심사에 대해 "일반론이지만, 법률의 합헌성에 조건을 붙여, 법을 제한 해석함으로써, 장래, 법의 해석 운용이 실제로 움직여, 나아가 입법에 발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하나의 위헌 법령 심사권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데라다의 "헌법 한정 해석론"은 한편으로는 결과적으로 현상 추인형이 되어, 제도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는 당사자에게는 강한 불만을 남겼다.

또한, 1971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던 사법 수습 수료식을 1983년 4월에 거행했다.

1985년 11월 4일 정년 퇴관했다. 1987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4] 2002년, 급성 심부전으로 86세로 사망했다.

아들인 데라다 이쓰로도 재판관이 되어 최고재판소 판사를 거쳐, 2014년 4월 1일, 제18대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 이로써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부자(父子)가 나란히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 3. 최고재판소 장관 재임 시절

1982년(쇼와 57년) 10월 1일에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3]

최고재판소 장관 재임 시절에는 1표의 격차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당시 이 문제는 전국 4곳의 고등법원에서 서로 다른 판결이 내려진 상태였는데, 데라다는 관련 소송이 상고된 지 불과 반년 만에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판결을 통해 국회의 입법 지연을 지적하며 조속한 시정을 강력히 촉구했다[2][3]

1984년 5월 헌법기념일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최고재판소의 위헌 심사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일반론이지만, 법률의 합헌성에 조건을 붙여 법을 제한 해석함으로써 장래 법의 해석 운용이 실제로 움직이고 나아가 입법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하나의 위헌 법령 심사권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데라다가 제시한 이러한 '헌법 한정 해석론'은 결과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이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또한, 1971년 이후 중단되었던 사법 수습 수료식을 1983년 4월에 다시 거행하는 결정을 내렸다。

1985년 11월 4일 정년으로 퇴임했다.

2. 4. 퇴임 이후

1985년 11월 4일 정년 퇴임했다. 1987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4] 2002년 급성 심부전으로 86세로 사망했다.

아들인 데라다 이쓰로도 재판관을 거쳐 2014년 4월 1일 제18대 최고재판소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부자(父子)가 최고재판소 장관을 역임한 기록을 세웠다.

2. 5. 가족

아들인 데라다 이쓰로도 재판관이 되어 최고재판소 판사를 거쳐, 2014년 4월 1일 제18대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했다. 이로써 데라다 지로와 데라다 이쓰로는 일본 역사상 유일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최고재판소 장관을 지낸 기록을 세웠다.

3. 주요 판결

연도사건명역할
1981년닛산 자동차 사건제3소법정 재판장
1981년전과 조회 사건제3소법정 재판장
1981년오사카 공항 소송대법정 재판관
1982년호리키 소송대법정 재판관
1984년삿포로 세관 검사 사건대법정 재판장
1985년후쿠오카현 청소년 보호 육성 조례 사건대법정 재판장
1985년샐러리맨 세금 소송대법정 재판장


참조

[1] 웹사이트 Former Justices {{!}} 裁判所 - Courts in Japan https://www.courts.g[...] 2023-05-26
[2] Kotobank 2022-05-08
[3] Kotobank 2022-05-08
[4] 뉴스 秋の叙勲に4575人 女性が史上最高の379人 読売新聞 198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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