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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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차석은 190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여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이종락과 함께 화성의숙에서 김일성과 함께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정의부에서 국민부로 개편된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30년 군자금 모집 활동 중 경찰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37년 가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김일성의 귀순 공작에 관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박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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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박차석(朴且石)은 1909년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교구정(橋口町) 40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회고록에 이종락과 박차석이 자기와 같이 정의부에서 만주 화전현(樺甸縣)에 세운 군사교육 기관 화성의숙(華成義塾)을 다녔다고 나온다.
:原文중국어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김일성과 같이 1926년 무렵 화성의숙을 다닌 것이 된다.

박차석은 정의부국민부로 개편되면서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73083 최효일(崔孝一, 1904~1932)] 및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등과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 중에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豊山郡安山面內中里)에서 1박하고 8월 14일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 송산저삼(松山猪三) 순사부장을 만나자 그를 사살하고, 단원들을 나누어 일부는 후치령(厚峙嶺)에서 통행하는 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일부는 홍원(洪原)읍으로 들어가서 최모(崔某)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도주한 정웅(鄭雄, 본명 정계빈[鄭桂㻞])은 이듬해 1931년 2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주동자 최효일은 사형, 김형권은 15년, 박차석과 정계빈은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의 2심 판결에서도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김형권은 수형 도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박차석은 형기 만료 전인 1937년 11월 23일 가출옥했다. 1938년 5월 17일에 조선 밖으로 이주 허가를 신청했으나 보류된 기록이 있다. 이후 만주로 간 것으로 보이며, 전향하여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과 함께 김창영이 주도하는 만주국 경찰의 김일성 귀순공작에 중재인으로 투입된다. 김일성은 귀순 협상에 응할 뜻을 보였으나,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이 지연된다. 1940년 1월에 이종락은 김일성 부대에 협상차 들어갔다가 보고를 받고 들이닥친 김일성의 상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에게 붙잡혀 사살 당하고, 귀순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뒤 2월 23일 전사한다.

그 이후의 박차석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2.1. 초기 생애 및 항일 무장 투쟁

박차석(朴且石)은 1909년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교구정(橋口町) 40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회고록에 이종락과 박차석이 자기와 같이 정의부에서 만주 화전현(樺甸縣)에 세운 군사교육 기관 화성의숙(華成義塾)을 다녔다고 나온다.
原文중국어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김일성과 같이 1926년 무렵 화성의숙을 다닌 것이 된다.

박차석은 정의부국민부로 개편되면서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73083 최효일(崔孝一, 1904~1932)] 및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등과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 중에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豊山郡安山面內中里)에서 1박하고 8월 14일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 송산저삼(松山猪三) 순사부장을 만나자 그를 사살하고, 단원들을 나누어 일부는 후치령(厚峙嶺)에서 통행하는 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일부는 홍원(洪原)읍으로 들어가서 최모(崔某)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도주한 정웅(鄭雄, 본명 정계빈[鄭桂㻞])은 이듬해 1931년 2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주동자 최효일은 사형, 김형권은 15년, 박차석과 정계빈은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의 2심 판결에서도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김형권은 수형 도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박차석은 형기 만료 전인 1937년 11월 23일 가출옥했다. 1938년 5월 17일에 조선 밖으로 이주 허가를 신청했으나 보류된 기록이 있다. 이후 만주로 간 것으로 보이며, 전향하여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과 함께 김창영이 주도하는 만주국 경찰의 김일성 귀순공작에 중재인으로 투입된다. 김일성은 귀순 협상에 응할 뜻을 보였으나,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이 지연된다. 1940년 1월에 이종락은 김일성 부대에 협상차 들어갔다가 보고를 받고 들이닥친 김일성의 상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에게 붙잡혀 사살 당하고, 귀순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뒤 2월 23일 전사한다.

그 이후의 박차석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2.2. 체포 및 투옥

박차석은 정의부국민부로 개편되면서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73083 최효일(崔孝一, 1904~1932)] 및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등과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을 하였다.

1930년 8월 14일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 송산저삼(松山猪三) 순사부장을 사살하고, 단원들을 나누어 일부는 후치령(厚峙嶺)에서 통행하는 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일부는 홍원(洪原)읍으로 들어가서 촤모(崔某)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도주한 정웅(鄭雄, 본명 정계빈[鄭桂㻞])은 이듬해 1931년 2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주동자 최효일은 사형, 김형권은 15년, 박차석과 정계빈은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의 2심 판결에서도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김형권은 수형 도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박차석은 형기 만료 전인 1937년 11월 23일 가출옥했다.

2.3. 김일성 귀순 공작 관여 및 이후 행적

박차석은 1909년 평안남도 평양부 교구정 40번지에서 출생했으며,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회고록에 따르면, 박차석은 이종락과 함께 정의부에서 만주 화전현에 세운 군사교육 기관인 화성의숙을 다녔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박차석은 1926년 무렵 김일성과 함께 화성의숙을 다닌 것이 된다. 이후 정의부국민부로 개편되면서 여기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차석은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등과 군자금 모집 결사대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풍산경찰서 내중주재소 송산저삼 순사부장을 사살하고, 후치령에서 자동차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박차석은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 2심에서도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박차석은 형기 만료 전인 1937년 11월 23일 가출옥했다. 1938년 5월 17일 조선 밖으로 이주 허가를 신청했으나 보류되었고, 이후 만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향하여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과 함께 김창영이 주도하는 만주국 경찰의 김일성 귀순 공작에 중재인으로 투입되었다. 김일성은 귀순 협상에 응할 뜻을 보였으나, 귀순 후 안전 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협상이 지연되었다. 1940년 1월 이종락은 김일성 부대에 협상차 들어갔다가 김일성의 상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에게 붙잡혀 사살당했고, 귀순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 박차석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3.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