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권
1. 개요
김형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김형직의 동생이자 김일성의 삼촌이다. 그는 만주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다가, 정의부에서 확대 개편된 국민부 소속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1930년 8월 국내에서 경찰 주재소 습격 사건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지도를 받은 혁명가로 칭송받으며, 량강도 풍산군은 그의 이름을 따 김형권군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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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혁명렬사 -
김일성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치했으며,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개인 숭배를 조장한 정치인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혁명렬사 -
김영주 (1920년)
김영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자 김정일의 삼촌이며, 한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김정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고,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북측 대표,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
전주 김씨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전주 김씨 -
김설송
김설송은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김정일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몰타와 유럽에서 유학하며 외국어를 배웠다. -
1905년 출생 -
지그메 왕축
부탄의 제2대 국왕인 지그메 왕축은 교육 및 인프라 개선, 사법 제도 개혁 등 국내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영국령 인도 및 인도와 우호 관계를 맺으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
1905년 출생 -
마해송
마해송은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언론인으로, 방정환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 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에는 작품을 통해 사회상을 비판하는 등 대한민국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2. 생애
김형권은 최효일(崔孝一, 1904~1932), 박차석(朴且石) 등과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을 했다. 이들은 평안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豊山郡安山面內中里)에서 1박 후 이동하던 중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 송산저삼(松山猪三) 순사부장을 사살하고, 단원들을 나누어 후치령(厚峙嶺)에서 통행하는 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일부는 함경남도 홍원읍으로 들어가 최모(崔某)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도주한 정웅(鄭雄, 본명 정계빈[鄭桂㻞])은 이듬해 1931년 2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검거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형권을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대성산혁명렬사릉에 그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흉상이 세워져 있다. 량강도 김형권군은 1930년 8월 14일 김형권이 무장 부대를 이끌고 파발리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0년에 개칭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누리에 붙는 불》(1977)이 김형권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2.1. 초기 생애
평안남도 평양부 고평면(현 평양)에서 김형직의 막내 남동생으로 태어났다. 큰조카인 김일성과는 7세 차이가 난다.
그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큰 형 김형직을 따라 일찍부터 만주에서 산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일제 법원의 판결문에 그의 직업이 의사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만주에서 한의사를 하던 큰 형 김형직이 1926년 사망한 후 병원을 물려받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형권(金亨權)이 조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아 활동했다고 하지만 허황된 주장이고, 진실은 당시의 신문 보도에 나와 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민족계열독립운동 단체 정의부 소속이었고, 삼촌 김형권은 정의부가 확대 개편한 국민부 소속으로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
2.2. 독립운동과 체포
김형권은 김형직의 막내 남동생으로 평안남도 평양부 고평면(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큰조카인 김일성과는 7세 차이가 난다.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형직을 따라 만주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그의 직업은 의사였으며, 이는 1926년 사망한 큰 형 김형직에게서 병원을 물려받아 운영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는 김형권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아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민족계열독립운동 단체 정의부 소속이었고, 김형권은 정의부가 확대 개편된 국민부 소속으로 공산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김형권은 최효일(崔孝一, 1904~1932), 박차석(朴且石)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결사대(軍資金募集决死隊)를 조직하고 1930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豊山郡安山面內中里)에서 1박 후 이동하던 중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 송산저삼(松山猪三) 순사부장을 사살하고, 단원들을 나누어 후치령(厚峙嶺)에서 통행하는 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다른 일부는 홍원(洪原)읍으로 들어가 최모(崔某)의 집에 유숙하다가 9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도주한 정웅(鄭雄, 본명 정계빈[鄭桂㻞])은 이듬해 1931년 2월 3일 강원도 춘천에서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주동자 최효일은 사형, 김형권은 15년, 박차석과 정계빈은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의 2심 판결에서도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김형권은 수형 도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2.3. 재판과 옥사
1931년 10월 21일 함흥 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서 주동자 최효일은 사형, 김형권은 15년, 박차석과 정계빈은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1932년 4월 4일 경성 복심법원의 2심 판결에서도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되었다. 김형권은 수형 도중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김형권은 1930년 중국 길림성에서 김일성이 조직했다고 알려진 조선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 활동( 마적 )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1936년 1월 12일 경성부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옥사한 시신을 인수하라는 연락이 본가에 왔지만, 가족들은 돈이 없어 아무도 인수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