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두스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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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르두스는 프랑크 왕 피핀 3세의 이복 형제이자 샤를마뉴의 삼촌이었다. 그는 760년 교황 바오로 1세와 데시데리우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으며, 773년에는 샤를마뉴의 롬바르디 원정에 참여하여 프랑크 군대의 절반을 이끌었다. 그는 파비아 공방전에 참여했고,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치세에 활동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코르비 수도원의 아바트 아달라르를 낳았고, 알레마니 공작 아달베르트의 딸 군린디스와의 재혼을 통해 발라, 베른하르트, 군드라다, 테오드라다를 자녀로 두었다. 경건왕 루이는 베르나르두스의 가족들에게 제재를 가했으며, 딸 테오드라다를 통해 성녀 헤르츠펠트의 이다의 할아버지이다.

베르나르두스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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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베르나르두스는 프랑크 왕 피핀 단신왕의 이복 형제이자 샤를마뉴의 삼촌으로, 히에로니무스, 루앙의 레미기우스와 형제였다. 비록 아버지의 유산 상속에서는 배제되었으나, 궁정에서 교육받으며 여러 명예직을 받았다. 760년, 그는 형제들과 함께 이복 형 피핀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교황 바오로 1세와 롬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773년에는 조카 샤를마뉴를 따라 롬바르드 원정에 참여하여 생베르나르 고개를 통해 군대의 일부를 이끌고 파비아 공방전 등에 참여했다.

파시아시우스 라드베르투스에 따르면, 베르나르두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프랑크 여성이었으며, 두 번째 부인은 알레마니 공작 아달베르트의 딸 군린디스였다. 그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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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두스의 가족
배우자자녀비고
프랑크 여성 (이름 미상)아달라르코르비 수도원의 아바트
군린디스 (알레마니 공작 아달베르트의 딸)발라 (835년 사망)고위 궁정 고관, 이후 코르비의 아바트
베른하르트코르비의 수도사
군드라다푸아티에의 생트 크루아 수도원으로 보내짐
테오드라다수아송 노트르담의 수녀원장, 리푸아리아 프랑크족 공작 테오도리크의 미망인


베르나르두스는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치세에도 활동했다. 그러나 경건왕 루이는 그의 아버지 샤를마뉴가 베르나르두스와 그의 가문에 부여했던 권력과 영향력을 경계했다. 즉위 직후 루이 1세는 아달라르를 누아르무티에로 추방하고, 발라 백작을 강제로 아내와 헤어지게 한 뒤 코르비 수도원에 보내는 등 베르나르두스의 자녀들을 탄압했다. 베른하르트는 레랭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군드라다는 궁정에서 쫓겨났다. 오직 리푸아리아 프랑크족 공작 테오도리크의 미망인이었던 테오드라다만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경건왕 루이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잠재적 경쟁 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세빈 베링-굴드는 베르나르두스가 그의 딸 테오드라다를 통해 성녀 헤르츠펠트의 이다의 할아버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2.1. 초기 활동

베르나르두스는 프랑크 왕 피핀 단신왕의 이복 형제이자 샤를마뉴의 삼촌이었다. 그는 히에로니무스와 루앙의 레미기우스와 형제 관계였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어떠한 권리 주장도 거부당했지만, 궁정에서 양육되었고 다양한 명예를 받았다. 중세학자 도널드 C. 잭맨은 베르나르두스와 샤를마뉴의 어머니들이 밀접한 관계였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760년, 베르나르두스는 두 형제 히에로니무스, 레미기우스와 함께 이복 형제 피핀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그들의 임무는 교황 바오로 1세와 롬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데시데리우스에게 그가 점령한 도시 일부를 교황령에 반환하도록 설득했지만, 롬바르드 왕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773년 베르나르두스는 조카 샤를마뉴의 프랑크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롬바르드 원정에 참여했다. 샤를마뉴가 몽세니 고개를 통해 군대를 이끌었을 때, 베르나르두스는 생베르나르 고개를 통해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이후 파비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치세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2.2. 롬바르디아 원정

773년 베르나르두스는 조카 샤를마뉴가 이끈 프랑크족 군대의 절반을 지휘하여 롬바르드 원정에 참여했다. 당시 샤를마뉴는 몽세니 고개를 통해 군대를 이끌었고, 베르나르두스는 생베르나르 고개를 통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이후 파비아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2.3. 경건왕 루이 시대

베르나르두스는 샤를마뉴의 아들인 경건왕 루이 치세에 두각을 나타냈다.

3. 가문

파시아시우스 라드베르투스에 따르면, 베르나르두스는 먼저 프랑크족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아달라르를 두었다. 아달라르는 후에 코르비 수도원의 아바트가 되었다.

이후 베르나르두스는 알레마니 공작 아달베르트의 딸 군린디스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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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주요 정보
발라835년 사망. 고위 궁정 관료였으며, 이후 코르비 수도원의 아바트가 됨.
베른하르트코르비 수도원의 수도사.
군드라다푸아티에의 생트 크루아 수도원으로 보내짐.
테오드라다수아송 노트르담의 수녀원장.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의 공작 테오도리크의 미망인.


경건왕 루이는 그의 아버지 샤를마뉴가 베르나르두스의 사촌들에게 부여했던 권력과 영향력을 경계했다. 이 때문에 루이가 즉위한 직후, 베르나르두스의 가족들은 다음과 같은 처우를 받았다.
* 아달라르는 누아르무티에의 생 필리베르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궁정 복귀)
* 발라는 아내와 헤어져 형 아달라르를 대신해 코르비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복귀)
* 베른하르트는 레랭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 군드라다는 궁정에서 쫓겨났다.
* 딸 테오드라다만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세빈 베링-굴드는 베르나르두스가 그의 딸 테오드라다를 통해 성녀 헤르츠펠트의 이다의 할아버지가 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