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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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케 요시쓰마는 무쓰국 소마 나카무라번주 소마 마스다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키타 신덴번주 사타케 요시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양자 사타케 요시노리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거했으며,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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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미츠타네의 아들로 태어나 사타케 요시노부의 양자가 된 사타케 요시사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귀족원 의원과 국광 생명 보험 회사 사장을 역임한 일본의 화족이자 실업가이다. - 막말 구보타번 (데와국) 사람 - 사타케 요시타카 (18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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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나가는 에도 시대 무장으로, 형에게 영지를 분여받아 아키타 신덴 번(후의 이와사키 번)을 세운 초대 번주이며, 문학에는 무지했으나 이와사키 번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타케 요시쓰마 | |
---|---|
기본 정보 | |
씨족 | 소마 씨 → 사타케 씨 |
출생 | 덴포 8년 1월 5일 (1837년2월 9일) |
사망 | 메이지 3년 4월 16일 (1870년5월 16일) |
다른 이름 | 도고 주고 구마 (통칭) |
묘소 | 도쿄도이타바시구 아즈사와 총센지 |
개명 | 구마가와 나가아키 → 사타케 요시치카 |
가명 (통칭) | 구마 |
관직 | |
관위 | 종5위하・이키노카미, 하리마노카미, 증종4위 |
가문 관계 | |
아버지 | 소마 마스타네 |
어머니 | 이케다 씨 |
양아버지 | 구마가와 나가모토 → 사타케 요시카즈 |
형제자매 | 소마 미쓰타네 요시노리 요시카즈 요시치카 야스타네 아오야마 유키노리 계실 이토코 소마 타네나오 실 쓰나코 소마 타네자네 실 |
배우자 | 정실: 히사 (사타케 요시시게의 양녀) |
자녀 | 요시나가 외 3남 1녀 |
양자 | 요시미치 |
정치 경력 |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사다 → 이에모치 → 요시노부 |
번 | 데와이와사키번 번주 |
막부 | 에도 막부 |
아키타 신덴 번 번주 | |
대수 | 8대 |
임기 | 1857년 ~ 1869년 |
전임 | 사타케 요시자네 |
후임 | 사타케 요시사토 |
2. 생애
사타케 요시쓰마는 소마 나카무라번주 소마 마스다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이케다 씨이며, 정실은 아키타번주 사타케 요시시게의 양녀 구마카와 씨이다. 사타케 가문의 기록에는 요시쓰마가 오카다 도요타네의 양자가 되어 오카다 야스타네로 칭했다고 하나, 소마 가문 기록에는 구마카와 나가모토의 양자가 되어 구마카와 나가아키로 칭했다고 기록되어 차이를 보인다.[1] 소마 가문은 사타케 요시쓰마와 오카다 야스타네를 다른 인물로 본다.[1]
안세이 4년(1857년), 친형 사타케 요시미가 본가를 상속하게 되면서 아키타 신덴 번의 번주 자리가 비게 되었다. 요시쓰마는 같은 해 9월 16일 요시미의 양자로 가독을 이어받아 아키타 신덴 번주가 되었다.[1]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 발발하자, 요시쓰마는 데와국 가와베 군 쓰바키다이에 진야를 건설하고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쇼나이 번과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다.[1] 이전까지 아키타 신덴 번은 특정 영지 없이 에도에 머물렀다.[1]
메이지 2년(1869년) 5월 25일, 양자인 사타케 요시노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메이지 3년(1870년) 4월 16일 34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도쿄도 이타바시구 아즈사와 3초메의 소센지에 있으며, 메이지 41년(1908년) 9월 9일 종4위에 추증되었다.[1]
2. 1. 출생과 가계
소마 나카무라번주 소마 마스다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인 이케다 씨이다. 정실은 아키타번주 사타케 요시시게의 양녀인 구마카와 씨이다.사타케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요시쓰마는 처음 나카무라번사 오카다 도요타네의 양자가 되어 오카다 야스타네라고 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마 가문의 기록에는 요시쓰마(고노스케)는 나카무라번사 구마카와 나가모토의 양자가 되어 구마카와 나가아키라고 칭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소마 가문은 사타케 요시쓰마를 마스다네의 넷째 아들, 오카다 야스타네를 마스다네의 다섯째 아들, 즉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1]
2. 2. 아키타 신덴 번주
안세이 4년(1857년) 7월 20일, 친형인 아키타 신덴 번주 사타케 요시미(후의 사타케 요시타카)가 본가를 상속하게 되면서, 요시치카는 아키타 신덴 번 사타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갈 것을 요청받았다. 같은 해 9월 16일, 요시미의 양자로서 가독을 상속받아 아키타 신덴 번의 번주가 되었다.[1]2. 3.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게이오 4년(1868년) 3월,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요시쓰마는 데와국 가와베 군 쓰바키다이에 진야를 건설하였다.[1] 그 전까지 아키타 신덴 번 사타케 가문은 특정 영지를 소유하지 않고 에도에 머무르고 있었다.[1] 요시쓰마는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야지마구치에서 쇼나이 번과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다.[1]2. 4. 은거와 죽음
메이지 2년(1869년) 5월 25일, 양자인 요시노리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거했다.[1] 메이지 3년(1870년) 4월 16일에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묘소는 도쿄도 이타바시구 아즈사와 3초메의 소센지에 있다.[1] 메이지 41년(1908년) 9월 9일, 종4위에 추증되었다.[1]3. 가계
요시쓰마는 1796년 소마 마스다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측실인 이케다 씨이다.[1] 무쓰국 소마 나카무라 번의 무사인 구마가와 나가모토에게 입양되었다가,[1] 이후 1825년 사타케 요시카쿠에게 다시 입양되었다.[1] 정실은 사타케 요시시게의 양녀이자 구마가와 씨의 딸인 고토(1835년 출생)이다.[1] 요시쓰마는 생모 불명의 3남 1녀를 두었으며,[1] 소마 미쓰타네의 3남인 사타케 요시리(1858년 출생)를 양자로 들였다.[1] 장남인 사타케 요시나가(1854년 출생)는 사타케 요시타카의 데릴사위로 사타케 종가 31대 당주가 되었으나,[1] 후에 종가에서 구 이와사키 번 가문 분가로 이적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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