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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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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야는 일본의 역사적 건축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형태가 변해왔다. 헤이안 시대에는 궁중 무사들의 대기소를 지칭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는 전투 중 무사들의 임시 군영을, 에도 시대에는 통치를 위한 거점을 의미했다. 구조는 성곽보다 간소하며, 행정과 주거 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진야는 막부의 진야와 다이묘의 진야로 나뉘며, 구축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된다. 현재 일부 진야는 건물이 현존하거나 복원되었으며, 유구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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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야 - 구로이시 진야
    구로이시 진야는 1656년 하타모토 쓰가루 노부히데가 축조한 후 1809년 구로이시 번 성립과 함께 다이묘의 진야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폐성되어 현재는 초등학교 등으로 활용되고 아세이 강과 제방을 이용한 자연 요새 형태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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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야
개요
정의
정의일본 근세에 다이묘가 없는 영지를 다스리던 대관이나 지방관의 관청과 주거를 겸한 시설
구성
주요 구성 요소관청
주거 공간
특징
성곽과의 차이점성곽과 같은 방어 시설은 갖추지 않음
규모규모는 작지만, 에도 시대에는 전국에 다수 존재함
역할
역할영지 내의 행정
사법
세금 징수
참고
참고지방관의 주거가 없는 경우에는 관청만을 가리키기도 함

2. 용어의 변천

헤이안 시대에 진야라는 말은 궁중 경호를 담당하는 무사들의 대기소를 가리켰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전투에서 무사들이 세운 임시 군영을 뜻하는 단어로 바뀌었고, 이 군영에서 유래되어 근세 에도 시대에는 통치를 위한 거점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정청이자 무사의 처소이자 창고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으며, 임시 군영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여관'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이 되는 장소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다양한 형태로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7].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에도 막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한 군대나 다이칸 등의 관청[2] - 에도 초기의 간토의 다이칸 진야 등에서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의 천령에 진야가 설치되었다[1].

# 다이묘 중 가문이 국주·성주 격이 아닌 자[2](무성의 소다이묘나 교다이 요리아이)의 저택[1].

# 하타모토나 다이칸 등의 지배지에서의 거소(관청이나 저택)[1][2] 혹은 용수 담당의 보수역의 츠메소[1].

# 대번의 중신이 조카마치 밖 등에 설치한 거소[1][2].

# 번이 비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근세 후기에 에조치의 방비를 목적으로 구축된 시설을 포함)[1][2].

또한, 교토시의 "오가와가 주택"(국가 중요 문화재)은 "니조 진야"라고 불리며, 에도 시대의 마치야이지만, 사이고쿠 다이묘가 숙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에도 시대에는 이이노 진야(가즈사 국), 쓰루가 진야(에치젠 국), 도쿠야마 진야(스오 국도쿠야마 성)가 "일본 3(대) 진야"라고 불렸다[4][5].

3. 구조 및 형태

진야는 성곽과 달리 구조와 형태가 간소하며, 대개 군사 시설이라기보다 행정과 주거 기능만 가지고 있었다.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이 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 성터처럼 지대를 조금 높게 해서 만든 진야도 있고, 막부 말기에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과 토루 등을 짓거나,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흉내 낸 복층 본진을 건설한 것도 존재했다.[1]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있었다.[1]

4. 종류 및 구축자

진야는 성곽과는 달리 구조와 형태가 간소하며, 대개 군사 시설이라기보다 행정과 주거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이 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터처럼 지대를 조금 높게 해서 만든 진야도 있고, 막부 말기에는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과 토루 등을 짓거나,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흉내낸 복층 본진을 건설한 것도 있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있었다.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의적이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이 되는 장소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다양한 형태로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7]。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에도 막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한 군대나 다이칸 등의 관청[2] - 에도 초기의 간토의 다이칸 진야 등에서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의 천령에 진야가 설치되었다[1]

# 다이묘 중 가문이 국주·성주 격이 아닌 자[2](무성의 소다이묘나 교다이 요리아이)의 저택[1]

# 하타모토나 다이칸 등의 지배지에서의 거소(관청이나 저택)[1][2] 혹은 용수 담당의 보수역의 츠메소[1]

# 대번의 중신이 조카마치 밖 등에 설치한 거소[1][2]

# 번이 비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근세 후기에 에조치의 방비를 목적으로 구축된 시설을 포함)[1][2]

또한, 교토시의 "오가와가 주택"(국가 중요 문화재)은 "니조 진야"라고 불리며, 에도 시대의 마치야이지만, 사이고쿠 다이묘가 숙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에도 시대에는 이이노 진야(가즈사 국), 쓰루가 진야(에치젠 국), 도쿠야마 진야(스오 국도쿠야마 성)가 "일본 3(대) 진야"라고 불렸다[4][5]

진야는 구축자에 따라 막부의 진야와 다이묘(제번)의 진야로 크게 나뉜다.[7] 막부의 진야는 1. 직할령을 통괄하는 "다이칸쇼", "다이칸 진야", "진야", 2. 하타모토가 소령의 거점으로 삼은 "진야", 3. 고록의 교대 요리아이가 소령의 거점으로 삼은 "진야"로 나뉜다.[7]

다이묘(제번)의 진야는, 성을 소유하지 않은 1만~3만 석 정도의 소규모 번이 번령의 정치적,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무감』에서 "성"에 대해 "'''자이쇼'''"라고 표기한 것을 말한다.[7] 본번을 상대로 지번이 독립적인 경우에는, 그 지번의 재지에도 진야가 설치되었다.[7]

막부는 무가 제법도에서 성의 수축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2] 일반적으로, 성은 복수의 구루와를 가진 전략상의 거점으로 즉응할 수 있는 상비 시설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며, 진야는 단곽을 기본으로 하는 재지 지배를 위한 정청으로, 해자, 토루, 석축이 있어도 전투에 즉응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도의 시설을 말했다.[6]

막부령이나 하타모토령과 번령 사이에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진 비지령 등에서는 진야의 전용도 이루어졌다.[7]

5. 소령 구조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지칭한다.[7] 에도 막부 시대에는 소규모 번에서 막부로부터 성을 소유하는 허가를 받지 못해 그 대용으로 진야를 사용했다.[7]

또한, 더 큰 번에서도 소령(所領) 형태에 따라 진야가 설치되었다.[7] 소령 형태는 일원적인 형태와 분산적인 형태로 나뉜다.[7]

도자마 다이묘는 일원적인 소령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1국 1성령 때문에 기존의 지성(支城) 대신 진야를 설치했다.[7] 센다이 번에서는 "요해"나 "소", 오카야마 번에서는 "오챠야", 가고시마 번에서는 "후모토"라고 불리는 시설들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기능적으로 진야로 간주할 수 있다.[7]

후다이 다이묘는 분산적인 소령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요직에 취임하는 다이묘 가문은 원래 소령과는 별도로 묶인 토지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아 성지에서 떨어진 비지(飛地)에 진야("관청"이나 "대관소"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를 설치했다.[7]

성을 소유하지 않은 다이묘는 본거지에 진야를 설치했지만, 비지를 영유하는 경우에는 비지에도 진야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었다.[7]

6. 현존, 복원 및 유구

진야는 성곽과는 달리 구조와 형태가 단순하며, 군사 시설이라기보다는 행정과 주거 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일반적으로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의 주택이 있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었다.

일부 진야는 지대를 높게 조성하기도 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 토루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모방한 복층 본진을 건설하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존재했다.

6. 1. 건물이 현존하는 진야


  • 사쿠라초 진야 (도치기현모오카시) - 1699년(겐로쿠 12년) 오다와라번주 오쿠보 다다토모의 셋째 아들인 쿄신이 우츠 가문을 부흥시켜 노슈 사쿠라초 4000석을 지행하여 진야를 창설했다. 초가지붕 건물이 현존한다.
  • 니라야마 대관소 (시즈오카현이즈노쿠니시) - 주택, 창고, 문, 담장 등의 건물과 소장된 고문서 등의 자료는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다카야마 진야 (기후현다카야마시) - 히다 군다이의 관청으로, 텐료 진야로서 유일하게 주요 건물이 현존한다.
  • 나바리 진야 (미에현나바리시) - 다이묘 진야, 정확히는 도도씨 일문의 나바리 도도가의 진야. 어전을 구성한 건물 일부(중오쿠 등)가 현존한다.
  • 소노베 진야 (교토부난탄시) - 막말에 세워진 망루와 문, 번소가 현존한다. 막말에 진야에서 성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성곽 형태의 진야이다.
  • 니시에 가 주택 주택 외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 - 텐료의 진야로 정면 27m의 누문과 3단으로 된 돌담, 주택과 향장·된장 창고·낟알 창고·도구 창고·재목 창고, 어백주 터·구리 계산소·글쓰기 강습소·역택·마장 등이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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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요츠 진야 (후쿠오카현미야코군미야코정 도요츠) - 고쿠라번(후의 도요츠번)의 번청으로 메이지 유신기에 설치되었다.
  • 이사하야 진야 (나가사키현이사하야시 히가시코지마치) - 히젠국 다카라키군 이사하야에 있었다. 사가번 나베시마 가문 가로 이사하야 씨의 진야. 어서원이 현존한다.
  • 진다이 진야 (나가사키현 운젠시 구니미마치 진다이) - 사가번 진다이 영지 영주 나베시마 씨의 진야. 나가야몬이 현존한다. 어전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신축, 증축된 것이다.
  • 시마바라 영지 호슈 진야 (오이타현분고타카다시 타마츠 아자 혼마루) - 1669년에 마쓰다이라 씨 시마바라령의 비지배지를 지배하기 위해 분고타카다성터에 설치되었다.
  • 요카이치 진야(부젠국) (오이타현 우사시 요카이치) - 부젠국나카츠번령에서 징발되어 막부 직할령으로서 다이칸 진야가 설치되었다. 문이 현존한다.
  • 모리 진야 (오이타현 쿠스군쿠스마치) - 분고국쿠스군 모리에 있었다. 쿠루시마 씨 모리번의 번청. 찻집, 진야터 석축이 현존한다.

6. 2. 복원된 진야


  • 미즈하라 다이칸쇼(水原代官所) (니가타현아가노시) - 덴료(천령)의 다이칸 진야. 평면도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 사도 부교쇼(니가타현사도시) - 게이초 8년(1603년) 도쿠가와 막부의 덴료였던 사도섬을 관리하기 위해 아이카와에 세워진 부교쇼. 아이카와 진야라고도 불렸다.
  • 이이즈마 진야(나가노현이이지마정) - 덴료의 다이칸 진야. 고문서와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혼진이 복원되어 역사 민속 자료관이 되었다.
  • 야마다 부교쇼( 미에현이세시 미소노초) - 이세 신궁의 수호, 조영 수리 및 제례, 센구, 몬젠마치의 지배, 이세·시마에서의 소송, 토바항의 경비·선박 점검 등을 담당했던 에도 막부의 부교쇼.
  • 미카즈키 진야(효고현사요정) - 하리마국사요군 번청의 나가야몬과 다리가 복원되었다. 부속하는 망루는 현존 건물이다.

6. 3. 유구가 일부 남은 진야


  • 도요츠 진야(후쿠오카현 미야코군 미야코정 도요츠) - 고쿠라번(후의 도요츠번)의 번청으로 메이지 유신기에 설치되었다.
  • 이사하야 진야(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히가시코지마치) - 히젠국 다카라키군 이사하야에 있었다. 사가번 나베시마 가문 가로 이사하야 씨의 진야. 어서원이 현존한다.
  • 진다이 진야(나가사키현 운젠시 구니미마치 진다이) - 사가번 진다이 영지 영주 나베시마 씨의 진야. 나가야몬이 현존한다. 어전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신축, 증축된 것이다.
  • 시마바라 영지 호슈 진야(오이타현 분고타카다시 타마츠 아자 혼마루) - 1669년에 마쓰다이라 씨 시마바라령의 비지배지를 지배하기 위해 분고타카다성터에 설치되었다.
  • 요카이치 진야(부젠국)(오이타현 우사시 요카이치) - 부젠국 나카츠번령에서 징발되어 막부 직할령으로서 다이칸 진야가 설치되었다. 문이 현존한다.
  • 모리 진야(오이타현 쿠스군 쿠스마치) - 분고국 쿠스군 모리에 있었다. 쿠루시마 씨 모리번의 번청. 찻집, 진야터 석축이 현존한다.

6. 4. 건물・유구가 현존하지 않는 진야


  • 나가토로 진야 (야마가타현 히가시네시) - 데와국 무라야마군에 있었던 나가토로번의 진야.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오테몬으로 전해지는 문 2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이즈미 진야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이즈미마치) - 무츠국 키쿠타군에 있었던 이즈미번의 번청.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뒤문 1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호바라 진야 (후쿠시마현 다테시) - 무츠국에 있었던 마쓰다이라씨 시라카와번의 진야(다이칸쇼). 문 1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아사카와 진야 (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 아사카와정) - 무츠국 이시카와군 아사카와촌에 설치된 에치고 다카다번 아사카와 영의 봉행소·막부령의 다이칸소.[8]
  • 하나와 다이칸 진야 (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 하나와정) - 무츠국 시라카와군 하나와촌에 설치된 막부령의 다이칸소.[8]
  • 야나가와 진야 (후쿠시마현 다테시 야나가와마치) - 무쓰국 다테군에 있던 야나가와 성 터를 이용하여 축조된 진야. 야나가와번 마쓰다이라씨、마쓰마에씨 등이 들어갔으며, 막부가 다이칸소로 이용했다.[8]
  • 다지마 진야 (후쿠시마현 미나미아이즈군 미나미아이즈정) - 간에이 20년(1643년) 에도 막부가 직할령인 난잔 오쿠라이리 5만 5천 석의 관리를 위해 축조한 다이칸 진야. 간세이 2년(1790년)부터 아이즈번이 관리했다.[8]
  • 후추 진야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이시오카) - 히타치 국 후추에 있던 후추 번의 번청.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문이 1동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시시도 진야 (이바라키현 가사마시 히라마치) - 미토 도쿠가와 가의 친족인 시시도 번의 번청.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정문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우시쿠 진야 (이바라키현 우시쿠시 조추마치) - 우시쿠 번의 번청. 토루와 해자 일부가 현존하며, 문 1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야타베 진야 (이바라키현 쓰쿠바시 야타베) - 히타치 국 쓰쿠바 군 야타베에 있었던 야타베 번의 번청. 현관 1동과 문 1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마카베 진야 (이바라키현 사쿠라가와시 마카베정) - 당초에는 마카베번의 번청이었으며, 이후 가사마번에 의한 마카베 지배를 위한 진야.[8]
  • 아시카가 진야 (도치기현 아시카가시 유키와마치) - 시모쓰케 국 아시카가 군 아시카가에 있었던 우쓰노미야 번의 지번 아시카가 번의 번청. 우물과 이나리 신사가 현존하며, 문이 1동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사노 진야 (도치기현 사노시 우에시타마치) - 시모쓰케 국 아소 군에 있었던 사노 번의 번청.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오테몬, 우라몬, 주몬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기레가와 진야 (도치기현 사쿠라시) - 시모쓰케 국 시오야 군 기레가와에 있었으며, 문 1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닛코 봉행소(도치기현 닛코시) - 겐로쿠 13년(1700년) 8월, 에도 막부가 설치한 봉행소.[8]
  • 마시코 진야 (도치기현 하가군 마시코정) - 게이초 9년(1604년) 시모쓰케국 나스군의 구로바네번주 오제키 스케마스의 진야가 되어, 마시코촌, 이타메촌, 가미오바촌, 후카사와촌, 나나이촌, 시미즈촌의 6개 촌을 통치했다.[8]
  • 오바타 진야 (군마현 칸라마치) - 고즈케 국 칸라 군에 있었으며, 진야의 정원 "라쿠잔엔"이 현존한다. 부속된 다실과 문이 복원되었다.[8]
  • 요시이 진야 (군마현 다카사키시 요시이마치) - 고즈케 국 타코 군에 있었던 요시이 번의 번청. 토루의 일부가 현존하며, 정문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이세사키 진야 (군마현 이세사키시) - 이세사키 번의 번청. 건물 일부와 문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나나카이치 진야 (군마현 도미오카시 나나카이치) - 고즈케 국 칸라 군에 있었던 나나카이치 번의 번청. 어전과 주몬이 현존하며, 문 3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기류 진야 (군마현 기류시 니시큐가타마치) - 에도 막부가 직할령인 기류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진야.[8]
  • 오카베 진야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 오카베 번의 번청이 있었으며, 사이타마현 지정 구적이다. 나가야몬과 통용문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마쓰야마 진야 (사이타마현 히가시마쓰야마시) - 무사시국 히키군 마쓰야마정에 있던 마에바시번의 진야. 히가시마쓰야마시 지정 사적.[8]
  • 나마미 진야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 - 시모사 국 지바 군에 있던 나마미 성의 자리에 세워진 나마미 번의 정청. 토루와 해자의 일부가 현존한다.[8]
  • 가네가사쿠 진야 (지바현 마쓰도시 도키와다이라 진야마에) - 시모사국 가쓰시카군 가네가사쿠에 설치된 에도 막부의 진야. 주로 고가네 목장 등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되었다.[8]
  • 다카오카 진야 (지바현 나리타시) - 다카오카 번의 진야.[8]
  • 다코 진야 (지바현 가토리군 다코마치) - 다코 번의 진야.[8]
  • 오리토 진야 (지바현 산무시) 오리토 - 하타모토 야마구치씨의 진야.[8]
  • 가이부치 진야(사쿠라이 진야) (지바현 기사라즈시 가이부치) - 가이부치 번 및 사쿠라이 번의 진야. 폐번치현 후에 기사라즈현의 현청이 설치되었다.[8]
  • 이이노 진야 (지바현 후쓰시) - 이이노 번의 번청이 있던 진야이다. 발굴이 실시되고 있다.[8]
  • 이치노미야 진야 (지바현 조세이군 이치노미야정) - 나가사군 이치노미야에 존재했던 일본의 성. 통칭은 "조야마"라고 불렸다. 중세 말기에 일단 폐성되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 이치노미야 번의 진야로 재건되었다.[8]
  • 무쓰라 진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 무쓰라) - 무사시 국 구라키 군에 있었던 무쓰라 번(무슈 가나자와 번)의 번청. 진야 입구의 돌계단이 현존한다.[8]
  • 오쓰 진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 사가미 국 미우라 군 오쓰에 있었으며, 에도만 방비를 위해 가와고에 번 마쓰다이라 가문이 축조한 진야. 석교가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오기노야마나카 진야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시모오기노) - 사가미 국 아이코 군 나카오기노 촌에 있었던 오기노야마나카 번의 번청. 아쓰기시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해지는 우라몬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오카츠 진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즈미구 오카츠마치) - 사가미국 가마쿠라군에 있던 진야. 오카츠 다이칸소라고도 칭하며, 부근의 덴료(天領) 지배를 위해 설치되었다.[8]
  • 고스기 진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나카하라구 고스기진야초 2초메) - 에도 시대 초기의 하타모토 덴료 다이칸, 용수 봉행 고이즈미 지다유 요시쓰의 진야.[8]
  • 우라가 부교소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 교호 5년 (1720년)에 에도 만 내의 경제 활동의 활발화에 따라 부교소가 이즈 시모다에서 이전. 우라가 항의 경비, 선박의 감독, 화물 검사, 현지의 민정이 역무였다.[8]
  • 모리시타 진야(森下陣屋) (도쿄도 오메시 모리시타 정) - 하치오지 진야의 출장소. 현재는 쿠마노 신사 경내.[8]
  • 하치조지마 대관소(八丈島代官所) (도쿄도 하치조마치) - 후호조 씨와 에도 막부가 대관소를 설치한 곳은 섬의 중심지인 오가고(大賀郷)이며, 대관소 터는 현재 진야라고 불리며 아름다운 옥석담이 남아있다.[8]
  • 요이타 진야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요이타마치 요이타) - 에치고국 미시마군 요이타에 있었던 요이타 번의 번청으로, 후에 번주 이이 가문이 성주격이 되었기 때문에 요이타 성(與板城)이라고도 불린다. 오테몬과 깃테몬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니가타 정 봉행소 (니가타현 니가타시 주오구 니시보리도리) - 나가오카 번이 엔포 4년 (1676년)에 설치한 봉행소.[8]
  • 가시와자키 진야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오쿠보) - 구와나 번이 에치고의 영지를 통치한 진야.[8]
  • 오지야 진야 (니가타현 오지야시 모토마치) - 오지야는 천령이었기 때문에 진야가 커져서, 대관 저택 등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8]
  • 다카야나기 진야 (니가타현 묘코시 다카야나기) - 다카야나기 번이 영지를 통치한 진야.[8]
  • 다이쇼지 진야 (이시카와현 가가시 다이쇼지) - 가국 에누마군에 있었던 다이쇼지 번의 번청. 번주 별저(초류테이) 외에, 토루의 일부가 현존한다.[8]
  • 나나오 진야 (이시카와현 나나오시) - 마에다 도시이에의 처의 조카인 히지카타 타케히사가 엣추 신카와군에서 1만 석을 영지로 받았고, 후에 노토국으로 이봉되었다. 히지카타 타케히사는 야마자키 촌(나나오시)에 진야를 설치했다. 히지카타 타케히사에서 타케시게, 타케나오로 이어졌고, 4대째인 타케타카는 엔포 9년 (1681년), 자신의 영지의 일부를 동생 타케가에게 주었고, 타케가는 그 일부(150석)를 차남 쵸쥬로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타케타카가 오가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쿄 원년 (1684년), 영지를 몰수당해 천령이 되었고, 막부는 시모무라에 대관소를 설치하고, 테다이를 상시 배치하여 직접 지배했다.[8]
  • 사바에 진야 (후쿠이현 사바에시 야카타마치) - 에치젠국 이마다테군에 있던 사바에 번의 번청. 문 2동이 이전되어 현존한다.[8]
  • 혼보 진야 (후쿠이현 에치젠시 혼보마치) - 에치젠국 니뉴군 혼보촌에 있던 천령·하타모토령을 통치한 진야. 메이지 시대 초기에 혼보현 현청이 설치되었다. 해자 터로 여겨지는 수로가 남아 있으며, 부지는 공원화되어 있다.[8]
  • 와카이노 진야 (후쿠이현 가쓰야마시) - 에치젠국 오노군 와카이노촌에 있던 미노국 고리야마 번의 비지 진야. 우물 및 대관의 묘소가 남아 있다.[8]
  • 마쓰오카관(마쓰오카 진야, 후쿠이현 요시다군 에이헤이지정 마쓰오카 아오이) - 에치젠국 마쓰오카번의 번청. 50년 정도 만에 폐지되었으며, 진야가 있었던 당시에는 오야카타(마쓰오카 오야카타)라고 불렸다. 관련된 동백나무가 남아 있다.[8]
  • 모토보 출장 진야 (후쿠이현 에치젠시) - 교호 6년(1721년) 에도 막부의 히다 다카야마 진야의 출장소로서 축조되었으며, 에치젠국에 있는 막부 직할령을 관리하는 덴료 진야.[8]
  • 센푸쿠 진야 (후쿠이현 에치젠시) - 에치젠국 난조군 센푸쿠촌에 있었으며, 미노 구조번의 비지 관리를 위한 진야.[8]
  • 쓰루가 진야(마루야마 진야, 후쿠이현 쓰루가시) - 에치젠국 쓰루가군에 있었던 마루야마번 (쓰루가번)의 번청이 놓였다. 일본 3대 진야 중 하나이며, 진야 터는 정지되어 민간 기업의 휴양소가 세워졌지만 현재는 빈터. 사유지이므로 출입할 수 없다. 인접한 마루야마 신사는 번조 사카이 타다시게를 모신다. 진야 다이묘이며 당주는 정부였던 쓰루가번은 후에 성주격이 되었고, 동시에 산킨코타이의 의무가 부과되었다.[8]
  • 이치카와 진야 (야마나시현 이치카와미사토정) - 메이와 2년(1765년), 코우야마치 진야(시즈오카시)의 주장소로서 축조되어 고마군과 야시로군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된 진야(대관소). 문만 남아있다.[8]
  • 다니무라 진야 (야마나시현 쓰루시) - 니라야마 다이칸쇼의 업무를 보조하는 출장 기관.[8]

참조

[1] 논문 狭山藩の武家住宅について https://dlisv03.medi[...] 大阪市立大学生活科学部
[2] 논문 大和国芝村藩の藩領と陣屋形態 https://nara-u.repo.[...] 奈良大学総合研究所 2002
[3] 웹사이트 京町家とその暮らしの文化 https://kyoto-bunkai[...] 京都市文化芸術都市推進室 2023-11-19
[4] 서적 飯野陣屋跡・山崎城発掘調査報告 https://sitereports.[...] 千葉県教育委員会
[5] 웹사이트 鞠山藩ゆかりの建造物 https://www.city.tsu[...] 敦賀市 2023-11-19
[6] 웹사이트 宮坂淳一「平成22年度第1回 入門考古学講座 中世城郭の歩き方」 https://www.kaf.or.j[...] かながわ考古学財団 2023-11-19
[7] 논문 近世陣屋と町の形態に関する再検討:陸奥国南部を事例として https://nara-u.repo.[...] 奈良大学 2009-03
[8] 웹사이트 森下陣屋跡 http://park2.wakwak.[...] Ome.nave 青梅資料館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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