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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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야는 일본의 역사적 건축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형태가 변해왔다. 헤이안 시대에는 궁중 무사들의 대기소를 지칭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는 전투 중 무사들의 임시 군영을, 에도 시대에는 통치를 위한 거점을 의미했다. 구조는 성곽보다 간소하며, 행정과 주거 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진야는 막부의 진야와 다이묘의 진야로 나뉘며, 구축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된다. 현재 일부 진야는 건물이 현존하거나 복원되었으며, 유구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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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야 - 구로이시 진야
구로이시 진야는 1656년 하타모토 쓰가루 노부히데가 축조한 후 1809년 구로이시 번 성립과 함께 다이묘의 진야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폐성되어 현재는 초등학교 등으로 활용되고 아세이 강과 제방을 이용한 자연 요새 형태를 갖췄다. - 에도 시대의 건축 - 다카마쓰성 (가가와현)
다카마쓰성은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위치한 윤곽식 평성 해성으로, 에도 시대 다카마쓰번의 번청이었으며 일본 3대 수성 중 하나이고, 이코마 지카마사에 의해 축성 시작,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에 의해 수리, 현재는 다마모 공원으로 정비되어 일부 건물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천수각 복원 사업이 추진 중이다. - 에도 시대의 건축 - 후쿠야마성
후쿠야마성은 1622년 미즈노 가쓰시게에 의해 축성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성되고 2차 세계 대전 중 소실되었지만, 현재는 복원되어 후쿠야마 시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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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정의 | |
정의 | 일본 근세에 다이묘가 없는 영지를 다스리던 대관이나 지방관의 관청과 주거를 겸한 시설 |
구성 | |
주요 구성 요소 | 관청 주거 공간 |
특징 | |
성곽과의 차이점 | 성곽과 같은 방어 시설은 갖추지 않음 |
규모 | 규모는 작지만, 에도 시대에는 전국에 다수 존재함 |
역할 | |
역할 | 영지 내의 행정 사법 세금 징수 |
참고 | |
참고 | 지방관의 주거가 없는 경우에는 관청만을 가리키기도 함 |
2. 용어의 변천
헤이안 시대에 진야라는 말은 궁중 경호를 담당하는 무사들의 대기소를 가리켰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전투에서 무사들이 세운 임시 군영을 뜻하는 단어로 바뀌었고, 이 군영에서 유래되어 근세 에도 시대에는 통치를 위한 거점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정청이자 무사의 처소이자 창고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으며, 임시 군영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여관'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진야는 성곽과 달리 구조와 형태가 간소하며, 대개 군사 시설이라기보다 행정과 주거 기능만 가지고 있었다.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이 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 성터처럼 지대를 조금 높게 해서 만든 진야도 있고, 막부 말기에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과 토루 등을 짓거나,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흉내 낸 복층 본진을 건설한 것도 존재했다.[1]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있었다.[1]
진야는 성곽과는 달리 구조와 형태가 간소하며, 대개 군사 시설이라기보다 행정과 주거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이 거주하는 주택들이 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터처럼 지대를 조금 높게 해서 만든 진야도 있고, 막부 말기에는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과 토루 등을 짓거나,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흉내낸 복층 본진을 건설한 것도 있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있었다.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지칭한다.[7] 에도 막부 시대에는 소규모 번에서 막부로부터 성을 소유하는 허가를 받지 못해 그 대용으로 진야를 사용했다.[7]
진야는 성곽과는 달리 구조와 형태가 단순하며, 군사 시설이라기보다는 행정과 주거 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일반적으로 담장과 건물로 둘러싸인 벽 안팎에 부하들의 주택이 있었고, 중앙부에는 관청과 본진이 있었다.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이 되는 장소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다양한 형태로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7].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에도 막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한 군대나 다이칸 등의 관청[2] - 에도 초기의 간토의 다이칸 진야 등에서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의 천령에 진야가 설치되었다[1].
# 다이묘 중 가문이 국주·성주 격이 아닌 자[2](무성의 소다이묘나 교다이 요리아이)의 저택[1].
# 하타모토나 다이칸 등의 지배지에서의 거소(관청이나 저택)[1][2] 혹은 용수 담당의 보수역의 츠메소[1].
# 대번의 중신이 조카마치 밖 등에 설치한 거소[1][2].
# 번이 비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근세 후기에 에조치의 방비를 목적으로 구축된 시설을 포함)[1][2].
또한, 교토시의 "오가와가 주택"(국가 중요 문화재)은 "니조 진야"라고 불리며, 에도 시대의 마치야이지만, 사이고쿠 다이묘가 숙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에도 시대에는 이이노 진야(가즈사 국), 쓰루가 진야(에치젠 국), 도쿠야마 진야(스오 국도쿠야마 성)가 "일본 3(대) 진야"라고 불렸다[4][5].
3. 구조 및 형태
4. 종류 및 구축자
일본 근세사의 "진야"는 다의적이며, 주로 영주의 영지 거점이 되는 장소에 설치된 성곽 이외의 구축물을 다양한 형태로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7]。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에도 막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한 군대나 다이칸 등의 관청[2] - 에도 초기의 간토의 다이칸 진야 등에서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의 천령에 진야가 설치되었다[1]。
# 다이묘 중 가문이 국주·성주 격이 아닌 자[2](무성의 소다이묘나 교다이 요리아이)의 저택[1]。
# 하타모토나 다이칸 등의 지배지에서의 거소(관청이나 저택)[1][2] 혹은 용수 담당의 보수역의 츠메소[1]。
# 대번의 중신이 조카마치 밖 등에 설치한 거소[1][2]。
# 번이 비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근세 후기에 에조치의 방비를 목적으로 구축된 시설을 포함)[1][2]。
또한, 교토시의 "오가와가 주택"(국가 중요 문화재)은 "니조 진야"라고 불리며, 에도 시대의 마치야이지만, 사이고쿠 다이묘가 숙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에도 시대에는 이이노 진야(가즈사 국), 쓰루가 진야(에치젠 국), 도쿠야마 진야(스오 국도쿠야마 성)가 "일본 3(대) 진야"라고 불렸다[4][5]。
진야는 구축자에 따라 막부의 진야와 다이묘(제번)의 진야로 크게 나뉜다.[7] 막부의 진야는 1. 직할령을 통괄하는 "다이칸쇼", "다이칸 진야", "진야", 2. 하타모토가 소령의 거점으로 삼은 "진야", 3. 고록의 교대 요리아이가 소령의 거점으로 삼은 "진야"로 나뉜다.[7]
다이묘(제번)의 진야는, 성을 소유하지 않은 1만~3만 석 정도의 소규모 번이 번령의 정치적,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무감』에서 "성"에 대해 "'''자이쇼'''"라고 표기한 것을 말한다.[7] 본번을 상대로 지번이 독립적인 경우에는, 그 지번의 재지에도 진야가 설치되었다.[7]
막부는 무가 제법도에서 성의 수축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2] 일반적으로, 성은 복수의 구루와를 가진 전략상의 거점으로 즉응할 수 있는 상비 시설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며, 진야는 단곽을 기본으로 하는 재지 지배를 위한 정청으로, 해자, 토루, 석축이 있어도 전투에 즉응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도의 시설을 말했다.[6]
막부령이나 하타모토령과 번령 사이에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진 비지령 등에서는 진야의 전용도 이루어졌다.[7]
5. 소령 구조
또한, 더 큰 번에서도 소령(所領) 형태에 따라 진야가 설치되었다.[7] 소령 형태는 일원적인 형태와 분산적인 형태로 나뉜다.[7]
도자마 다이묘는 일원적인 소령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1국 1성령 때문에 기존의 지성(支城) 대신 진야를 설치했다.[7] 센다이 번에서는 "요해"나 "소", 오카야마 번에서는 "오챠야", 가고시마 번에서는 "후모토"라고 불리는 시설들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기능적으로 진야로 간주할 수 있다.[7]
후다이 다이묘는 분산적인 소령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요직에 취임하는 다이묘 가문은 원래 소령과는 별도로 묶인 토지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아 성지에서 떨어진 비지(飛地)에 진야("관청"이나 "대관소"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를 설치했다.[7]
성을 소유하지 않은 다이묘는 본거지에 진야를 설치했지만, 비지를 영유하는 경우에는 비지에도 진야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었다.[7]
6. 현존, 복원 및 유구
일부 진야는 지대를 높게 조성하기도 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천수각에 버금가는 망루나 작은 해자, 낮은 돌담, 토루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신사를 모시고 천수각을 모방한 복층 본진을 건설하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토루와 포대를 설치한 변형된 진야도 존재했다.
6. 1. 건물이 현존하는 진야
6. 2. 복원된 진야
6. 3. 유구가 일부 남은 진야
6. 4. 건물・유구가 현존하지 않는 진야
참조
[1]
논문
狭山藩の武家住宅について
https://dlisv03.medi[...]
大阪市立大学生活科学部
[2]
논문
大和国芝村藩の藩領と陣屋形態
https://nara-u.repo.[...]
奈良大学総合研究所
2002
[3]
웹사이트
京町家とその暮らしの文化
https://kyoto-bunkai[...]
京都市文化芸術都市推進室
2023-11-19
[4]
서적
飯野陣屋跡・山崎城発掘調査報告
https://sitereports.[...]
千葉県教育委員会
[5]
웹사이트
鞠山藩ゆかりの建造物
https://www.city.tsu[...]
敦賀市
2023-11-19
[6]
웹사이트
宮坂淳一「平成22年度第1回 入門考古学講座 中世城郭の歩き方」
https://www.kaf.or.j[...]
かながわ考古学財団
2023-11-19
[7]
논문
近世陣屋と町の形態に関する再検討:陸奥国南部を事例として
https://nara-u.repo.[...]
奈良大学
2009-03
[8]
웹사이트
森下陣屋跡
http://park2.wakwak.[...]
Ome.nave 青梅資料館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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