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 지진
1. 개요
산조 지진은 1828년 12월 18일에 발생한 규모 6.9의 지진으로, 현재의 니가타현 산조시를 중심으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혔다. 사망자는 1,443명에서 1,559명, 부상자는 2,666명에 달했으며, 가옥 9,808채에서 12,859채가 붕괴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산조시의 많은 가옥이 소실되었고, 액상화 현상도 관측되었다. 지진 발생 전 우물물 탁해짐, 천연 가스 분출 중단 등의 전조 현상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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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12월 -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앤드루 잭슨과 존 퀸시 애덤스의 대결로, 잭슨의 압승과 민주당의 형성, 네거티브 캠페인,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특징지어진다. -
에치고국 -
주에쓰 지방
주에쓰 지방은 일본 니가타현의 지역으로, 산, 강, 온천 등의 지형적 특징을 가지며, 나가오카시 등을 포함하고, 간토, 도호쿠, 호쿠리쿠 지방의 절충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의류 무역으로 번성했으며, 조에쓰 신칸센 등 교통망이 발달했다. -
에치고국 -
겐닌의 난
겐닌의 난은 1201년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려는 조 씨 가문의 반란으로, 조 나가모치의 교토 습격이 실패하고 저항군이 진압되었으며, 한가쿠 고젠의 용맹함이 알려진 사건이다. -
일본의 지진 -
간토 대지진
1923년 9월 1일 간토 지방 남부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은 대규모 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 여진, 쓰나미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으며, 간토 대학살과 같은 비극을 낳고 일본의 재해 예방 및 도시 계획에 큰 영향을 준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이다. -
일본의 지진 -
일본 해구
일본 해구는 태평양판과 오호츠크판의 수렴경계에 위치한 깊고 활발한 지진 활동을 보이는 해구로, 잦은 지진과 쓰나미 위험을 야기하며 지질학적 및 해양생물학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다.
2. 피해 기록
1828년 12월 18일, 규모 6.9 MK의 산조 지진이 발생하여 산조시를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다. 문헌에 따라 피해 규모에 대한 기록은 차이가 있으나,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당시 발행된 엽서에는 "야히코 산이 크게 무너져 바다 속으로 밀려들어가 산조 마을·쓰바메 마을·히가시미카도 제키 미도·다이몬 등 남김없이 흔들려 쓰러지고, 논밭·산천이 무너져 사람과 말의 피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여진이 14일까지 빈발한 고금에 드문 대지진"이라고 보도되었다고 한다.
2.1. 주요 피해 내용
산조 지진으로 인한 주요 피해는 다음과 같다.
지진 당일 산조에서는 시장이 열리고 있어 이른 아침부터 부뚜막에 불을 지피던 중 지진이 발생하여, 오마치(혼초 2초메)·3노초·4노초(혼초 5초메)·5노초(혼초 6초메), 이웃의 우라타테 촌 등 13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불은 무너진 가옥에 번져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히가시 혼간지 산조 별원의 기록에 따르면, "대 가람의 본당 등이 일제히 와르르 무너졌다. 방에 있던 승려·관리·중간에 이르기까지 놀라 간도 마음도 잃고 멍하니 있는 사이에 우라타테 촌에서 악화가 날아와 불교 사찰은 남김없이 소실되었다"(《주고쿠 대변 지진록》)고 한다.
피해 상황은 고제 구설(口説)에 절절하게 묘사되었으며, 한때는 "산조 멸망설"마저 돌았다. 미쓰케 마을 부근의 작은 호리미조 강이 막혀 수위가 상승하여 붕괴 위험이 예측되었고, 영주가 눈을 치우고 토사를 걷어내어 붕괴로 인한 피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2.2. 산조시의 피해 상황
지진 당일 산조시 3노초(현재의 혼초 5초메)에서는 2·7의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뚜막에 솥을 걸어 끓이던 중 지진이 발생하여, 오마치(혼초 2초메), 3노초, 4노초(혼초 5초메), 5노초(혼초 6초메), 이웃의 우라타테 촌 등 13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불길은 잔해로 변한 가옥에 번져 마을 전체를 뒤덮었고, 산조 마을에서는 1,742채 중 1,202채(약 70%)가 붕괴되었다.
혼지코지에 있는 히가시 혼간지 산조 별원 걸이소에서도 "대 가람의 본당 등이 일제히 와르르 무너졌다. 방에 있던 승려·관리·중간에 이르기까지 놀라 간도 마음도 잃고 멍하니 있는 사이에 우라타테 촌에서 악화가 날아와 불교 사찰은 남김없이 소실되었다" (《주고쿠 대변 지진록》)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조 지진 소식은 에도까지 전해져 엽서로 만들어질 정도로 큰 사건으로 다루어졌다.
피해는 고제 구설(口説)에 절절하게 묘사되었으며, 한때는 "산조 멸망설"마저 돌 정도로 심각했다.
3. 지진 관련 전승
니가타현 신바타번 영내의 피해 기록인 『조(組)별 기록장』에 따르면, 흔들림이 전해져 오는 방향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높은 지대에서는 50km 정도를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진파의 통과에 따른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으로 인해 '흔들림이 보였다'고 전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4. 진원 위치 논란
당시 무라카미 번주였던 사카키바라 가문의 『에도 저택 일기』(조에쓰 시립 다카다 도서관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기록 중의 '4만 석'은 당시 무라카미 번이 사용하던 지방 명칭(광의의 가미카와 지방 중 4만 석 지구)이었지만, 우사미 타츠오 등 저명한 지진학자들은 '석고'(근세 일본에서 토지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단위)로 잘못 해석하여 실제보다 50km나 동쪽인 후쿠시마현 경계 부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취급된 적이 있다.
5. 지진의 과학적 특징
최근 조사에 따르면, 1964년 니가타 지진에서 주목받았던 액상화 현상이 산조 지진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문헌에 모래와 물이 분출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지질 조사에서도 이 사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니쓰 구릉 서쪽 가장자리 단층이 진원 단층이라는 설도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 상황으로 추정하면, 평야 동쪽에 단층이 존재할 경우 동쪽으로 경사진 역단층을 상정할 수 있지만, 서쪽으로 경사진 역단층을 상정하면 피해 분포와 일관성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과의 일관성은 맞는다.
고스도 - 구로사키 사이가 융기하여 시나노강의 유로가 변화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국토교통성의 분석에 따르면 지진으로 말라버린 하천은 1592년부터 1597년의 "나오에 공사"에 의한 인위적인 치수 공사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