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필리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샤를 필리퐁은 프랑스 언론인이자 풍자 만화가로, 1830년대 프랑스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풍자 신문을 발행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리옹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했으며, 석판화 기술을 익혀 정치 만화가로 활동했다. 필리퐁은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와 일간지 《르 샤리바리》를 창간하여, 루이 필리프 1세의 통치를 비판하는 만평을 게재했다. 특히 국왕의 얼굴을 배로 표현하는 풍자는 널리 알려졌다. 정치적 풍자 활동으로 인해 언론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동시대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풍자 만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풍자 만화가 - 트리나 로빈스
트리나 로빈스는 미국의 만화가, 작가, 저술가, 페미니스트 운동가로서 언더그라운드 코믹스에서 여성 만화가로 활동하며 여성 만화 제작 및 홍보에 기여했고, 여성 만화가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 서적을 저술하는 등 업적을 인정받았다. - 풍자 만화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다재다능한 천재로, 미술, 과학,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 회화로 유명하다. - 프랑스의 판화가 - 오귀스트 로댕
오귀스트 로댕은 인체의 역동성과 감정 표현에 주목하여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조각 작품을 창조하고 미완성 기법을 통해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프랑스의 조각가이자 근대 조각의 선구자이다. - 프랑스의 판화가 - 테오도르 제리코
테오도르 제리코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로, '메두사의 뗏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말과 군인의 역동적인 묘사, 사회 비판, 인간 고통에 대한 통찰을 통해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만화가 - 장 지로
장 지로는 뫼비우스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진 프랑스의 만화가, 삽화가, 영화 제작자로, 독특한 공상과학 및 판타지 만화와 사실적인 서부 만화 《블루베리》 시리즈로 유명하며, 다양한 미술 기법과 누보 레알리즘의 영향으로 세계 여러 아티스트와 영화 제작에 영향을 미치고 아이즈너 상, 하비 상 등을 수상했다. - 프랑스의 만화가 - 장자크 상페
장 자크 상페는 프랑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독특한 화풍과 꼬마 니콜라 시리즈의 성공, 뉴요커 표지 장식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샤를 필리퐁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클로드 샤를 기욤 필리퐁 |
출생 | 1800년 4월 19일 |
출생지 | 리옹, 프랑스 |
사망 | 1861년 1월 25일 (향년 60세) |
사망지 | 파리 |
국적 | 프랑스 |
직업 |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만화가, 석판화가, 기업가, 화가, 삽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
교육 | 리옹 국립 고등 미술 학교 |
2. 생애
샤를 필리퐁은 1830년부터 1835년까지 정치 만화와 풍자 신문 발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라 카리카튀르와 르 샤리바리라는 두 개의 주요 풍자 신문을 통해 7월 왕정과 루이 필리프 1세를 비판하고, 공화주의 이념을 전파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필리퐁은 새 정권에 대한 기대를 품고 라 카리카튀르를 창간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비판을 자제했지만, 정부의 언론 탄압 정책에 반발하며 점차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냈다. 특히, 루이 필리프 1세를 풍자한 만화 '비누 방울'(1831)과 '화장 보수'(1831)는 큰 논란을 일으켰고, 필리퐁은 국왕 모독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필리퐁은 오노레 도미에, 장 이냐스 이지도르 제라르 그랑빌, 폴 가바르니 등 당대 최고의 만화가들과 협력하여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만평을 제작했다. 이들의 작품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필리퐁은 "석판화 공작, 그림 후작, 목판화 백작, 풍자 남작, 캐리커처 경"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4]
1832년, 필리퐁은 르 샤리바리를 창간하여 더 넓은 대중에게 풍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르 샤리바리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며 19세기 프랑스에서 유일한 일간 풍자 신문으로 자리 잡았다.[4]
필리퐁은 공화주의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1834년 리옹과 파리에서 발생한 봉기를 지지하는 석판화를 발행했다. 특히 오노레 도미에의 '트랑스노냉 거리'(1834)는 군대의 잔혹한 학살을 고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19]
1835년, 주세페 피에스키의 루이 필리프 1세 암살 시도 이후, 정부는 언론 탄압을 강화했고, 라 카리카튀르는 폐간되었다. 르 샤리바리는 판매되었지만, 필리퐁은 1838년까지 운영에 참여했다. 그는 "1830년 11월 4일 자유주의적 환상으로 시작하여 1835년 9월 가장 슬픈 현실의 왕국에 도달했다"고 회고하며, 7월 왕정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21]
1835년 이후, 필리퐁은 정치 만화에서 사회 풍속 만화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로베르 마케르 시리즈 등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그는 오노레 도미에와 협력하여 탐욕스러운 자본가 로베르 마케르를 풍자하며,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 희극과 비견되는 작품을 남겼다.
필리퐁은 귀스타브 도레 등과 협력하여 다양한 유머 잡지를 출판하며, 대중에게 즐거움과 오락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2. 1. 초기 생애 (1800-1830)
샤를 필리퐁은 리옹의 작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티엔 필리퐁은 모자와 벽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매우 열렬히 환영했다. 피에르 라루스[1]에 따르면 그의 조상 중에는 마농 롤랑, 아르망 필리퐁, 루이 필리퐁 드 라 마들렌이 있었다.필리퐁은 리옹과 빌프랑슈쉬르손에서 학교를 다닌 후, 리옹 국립 고등 미술 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819년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화가 앙투안 그로 밑에서 일했지만, 1821년 아버지의 요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가족 사업에 참여하여 직물 디자인을 했다. 이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1824년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그는 리옹 카니발 퍼레이드에 참여했는데, 이는 선동적인 것으로 여겨져 체포되었지만 결국 기소는 취하되었다.
필리퐁은 결국 리옹을 떠나 파리로 가서 그로 작업장의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그 중 한 명인 유명한 예술가 니콜라 투생 샤를레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1820년대 프랑스에 퍼지고 있던 석판화 기술을 소개했다. 필리퐁은 석판화가이자 그림책 및 패션 잡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 일자리를 구했다. 그는 납으로 된 굴뚝을 석판화 기계로 개조하는 발명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당시 자유주의자 및 풍자 작가들과 유대감을 형성했고, 그랑빌 작업장(1827)에 참석했으며, 2년 후 신문 라 실루에트의 제작자들과 합류하여 편집자 및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필리퐁의 회사에 대한 재정적 기여는 작았지만, 그의 편집 기여는 석판화 부서의 조직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삽화에 텍스트와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했기에 이 신문의 독창성을 부여했다. 라 실루에트는 이전에는 뚜렷한 정치 노선이 없었지만, 1830년 7월까지 더욱 공격적인 접근 방식을 개발했다. 1830년 4월 1일, 필리퐁은 이 신문에 최초의 정치 만화 "샤를 10세 예수회"를 게재했다.
1829년 12월 15일 필리퐁은 아들이자 사업 파트너인 가브리엘 오베르를 파리로 보내 오베르 출판사를 설립하게 하여 파리의 다른 인쇄소와 경쟁하게 했다.

2. 2. 풍자 신문 발행 (1830-1835)
1830년 11월 4일, 7월 혁명 직후, 샤를 필리퐁은 삽화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를 발행했다.[2] 이 신문은 구독자 전용으로 판매되었으며, 4페이지 분량의 텍스트와 두 개의 석판화로 구성되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창간호에 글을 기고했고, 1832년 2월까지 다양한 필명으로 30개의 기사를 썼다.[3] 처음에는 비정치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1832년 봄부터 7월 왕정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1832년 12월 1일, 필리퐁은 ''르 샤리바리''라는 삽화 일간지를 발행했다.[4] ''라 카리카튀르''보다 작은 형식의 4페이지로 구성되었으며, 더 다양하고 대중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정치 풍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샤리바리''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유일한 일간 풍자 잡지였다.[4] 창간호에 따르면, ''샤리바리''는 "만화경 같은 세상의 다양한 측면, 연필과 펜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를 제공하고자 했다.[4]
필리퐁은 이 두 신문의 소유주로서 모든 글과 석판화 내용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졌다.[6] 그는 협력자를 선택하고, 공급업체와 거래하며 재정을 관리했다. 1862년 부고에서 나다르는 필리퐁의 "사업에 대한 놀라운 명석함"과 "고갈되지 않는 발명과 수단"을 칭찬했다.[5] 그는 예술가 친구들을 고용하여 목표를 정의하고, 주제를 제안하며, 텍스트와 석판화를 조정했다. 또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변경을 요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편집 일관성을 위해 글쓰기는 소수의 헌신적인 언론인 팀(1834년 2월에는 필리퐁 포함 7명)으로 제한되었다.[6]
7월 혁명의 지지자였던 필리퐁은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컸다. 《라 카리카튀르》의 첫 호에는 정치적 비판이 없었다.[9] 그러나 1830년 12월 말부터 1831년 초까지 신문 검열과 인지세를 부활시킨 법률을 비판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10] 필리퐁에 따르면, 풍자는 예술가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13]
필리퐁은 루이 필리프가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거품으로 부는 모습을 묘사한 만화 《비누 방울》(1831년 2월 26일)을 통해 정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14] 국왕 모독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왕을 석공으로 묘사한 《화장 보수》(1831년 6월 30일)를 발표하여 다시 재판을 받았다.[15]

필리퐁은 "국왕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6개월 징역형과 2,000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15] 1832년 6월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발생한 6월 봉기 이후, 필리퐁은 파리에 숨어 지내다가 1833년 2월 5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군주제와 양립 가능한 자유주의"를 희망했지만, 이후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1832년 12월 27일 라 카리카튀르에 게재된 필리퐁 선언은 "우리는 12년 전과 같은, 솔직하고 순수한 공화주의자임을 반복한다."라고 그의 신념을 밝혔다.
루이 필리프 즉위 3개월 후인 1830년 11월 4일, 필리퐁은 주간 풍자 신문 『카리카튀르』를 창간했다.[25] 1832년 12월 1일에는 일간 『샤리바리』를 발행하여 유럽 만화 신문 유행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영국의 『펀치』 등의 창간을 촉진했다.[25] 『샤리바리』는 예약 구독자 수가 300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26]
『카리카튀르』에서 오노레 도미에 등이 그린 필리프 왕의 '배 머리' 풍자화는 여러 차례 비판받았고,[26] 결국 『카리카튀르』는 1835년에 발행 금지 처분되었지만, 『샤리바리』는 필리퐁 사후에도 1927년까지 간행되었다.[25]
2. 3. 공화주의 활동과 언론 탄압 (1833-1835)
필리퐁은 첫 정치 만화를 그릴 당시 이미 공화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예술가들은 공화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동조자들이었다. 1831년 11월부터 1832년 3월까지 ''라 카리카튀르''에서 구독자 명단이 시작되었고, 1년 뒤 ''르 샤리바리''에서 두 번째 모집이 있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당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18] 1833년부터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 해 4월 11일 ''라 카리카튀르''에서 필리퐁은 그랑빌과 데스페레의 '푸른 수염, 흰색과 빨간색'을 출판했는데, 이는 노골적인 선동적인 석판화였다. 페로의 이야기 방식처럼 공화국의 도래가 발표되었다. "자매인 언론이여,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 보이는가?". 루이 필리프가 돌아오려 할 때(검열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 헌법을 찌르려고 할 때, 언론을 상징하는 전령은 "공화국"이라는 단어와 자신의 나팔, 공화당 야당의 두 신문 제목인 내셔널 트리뷴을 배너에 들고 있었다.1834년, 이러한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르 샤리바리는 여러 공화주의 협회를 위한 기금 모금을 했다.[18] 같은 해 필리퐁은 주식을 소유한 ''공화주의 저널''(1834년 2월)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르 샤리바리의 사무실이 위치한 콜베르 호텔에는 내셔널과 커먼 센스라는 두 개의 공화주의 신문도 있었다.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저명한 공화주의 인쇄업자였던 그레고리가 있었던 곳으로, 오베르와 필리퐁은 주주로 연관되었다.
이러한 연대감의 표현은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이 여러 캐리커처의 중심에 있는 석판화에 반영되었다. 벤자민 루보의 작품(르 샤리바리, 1833년 12월 1일)인 '아픔,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여!'와 필리퐁이 자발적인 구독을 통해 준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부록인 월간 협회(1834년 6월 20일)에 게재된 오노레 도미에의 '문지르지 마시오!'. 필리퐁은 이 석판화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정치적 스케치 중 하나"로 여겼는데, 선두에 있는 강력한 인쇄업자가 루이 필리프와 샤를 10세의 연약한 모습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필리퐁은 1789년의 전통에 따른 공화주의 "애국자"로 남아 있었으며, 노동 대중의 정치적 자유에 더 민감했다.
1834년 4월 9일 리옹과 4월 13일 파리에서 혹독하게 진압된 봉기에 대한 헌신은 부인할 수 없다. 트라비에의 '헤라클레스 승리자'(''라 카리카튀르,'' 1834년 5월 1일)와 특히 도미에의 '트랑스노냉 거리'(월간 협회, 1834년 9월 24일)를 포함한 여러 석판화가 등장했으며, 이는 1834년 4월 15일 이 거리 주민들을 군대가 학살한 사건을 언급한다.[19] 필리퐁은 "이것은 캐리커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부담이 아니라, 강한 손으로 그려지고 낡은 분노에 의해 쓰인 우리 현대사의 피 묻은 페이지이다"(''라 카리카튀르'', 1834년 10월 2일).
1835년 7월 28일, 피에스키의 폭탄 테러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콜베르 호텔에서 아르망 카렐 체포, 르 샤리바리 사무실 습격, 필리퐁에 대한 체포 영장 발부, 데누아이에(Desnoyers)는 도망쳐 숨었다. 공격 전날, 필리퐁은 1830년 이후 군대와 국민 방위군에 의해 살해된 남성, 여성, 어린이 목록을 기사로 한 르 샤리바리의 빨간색 호를 출판했다. 이 기사에는 트라비에가 아이러니하게 '가장 달콤하고 인간적인 시스템의 인격화'라는 제목의 석판화가 동반되었는데(르 샤리바리, 1835년 7월 27일), 여기서 살해된 "애국자"들의 시신이 루이 필리프의 모습을 형성했다.[20] 필리퐁은 이 공격에 대한 "도덕적 공모" 혐의를 받게 되었다.
1835년 8월 5일, 새로운 언론법이 하원에 제출되었다. 8월 29일 회의에서 아돌프 티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명 높은 캐리커처, 선동적인 디자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으며, 공격에 대한 더 직접적인 도발은 없다"(유니버설 모니터, 1835년 8월 30일). 카리카튀르의 출판은 중단되었다. 1835년 11월, 르 샤리바리는 헐값에 팔렸지만, 필리퐁은 1838년까지 장교로 보존되었다. 5년을 되돌아보며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1830년 11월 4일 자유주의적 환상으로 시작하여 1835년 9월 가장 슬픈 현실의 왕국에 도달했다".[21]
2. 4. 정치 만화에서 풍속 만화로 (1835-1862)
"9월 법"이 정치 만화의 종말을 고했지만, 필리퐁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838년에 라 카리카튀르를 임시로 재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치적 만화"라고도 불린 이 잡지를 통해, 또한 르 샤리바리에 로베르 마케르(1836–1838), 파리의 모든 만화가를 위한 디자인을 담은 유머 박물관(1839–1840), 필리퐁 유머 박물관(1843), 파리 유머(1844), 르 주르날 푸르 리르(1848–1855)를 출판했으며, 이는 펀 저널(1856)이 되어 본질적으로 유쾌한 풍자적 습관을 다루었다.[22]이 "유머 도서관"의 목적은 "사회적 유형"의 대표, 즉 대중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생리적 특징을 창조하여 즐거움과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22] 가장 전형적인 유형은 특히 오노레 도미에(로베르 마케르), 트라비에(M. Mayeux), 앙리 모니에(Joseph Prudhomme), 가바르니(Thomas Vireloque)가 그림으로 묘사했다. 생리적 특징의 유행은 오베르 하우스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1841년 2월부터 1842년 8월까지 이 시기의 생산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32개의 서로 다른 생리적 특징을 출판했다.[23]
그러나 사회 풍자와 정치 풍자를 구분하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베르 마케르 시리즈는 매우 중요하다. 필리퐁의 아이디어와 전설에 대해 오노레 도미에가 구성하고 그린 이 모든 그림은 ''Les Cent and Robert Macaire''(1839)라는 제목으로 한 권으로 묶였다. 큰 그림은 축소되었으며 모리스 알로이와 루이 위아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유머러스하고 서술적인 내용이 함께 제공되었다. 돈 키호테와 질 블라스의 화신으로 뚜렷하게 제시된 로베르 마케르 캐릭터[24]는 순진한 베르트랑과 함께 모든 종류의 속임수를 쓰는 "플루어(floueur)"라는 용어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유형을 다양한 측면과 역할에서 구현하며, 이익과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의 상징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필리프를 "그의 왕좌 위의 로베르 마케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특히 냉소적이고 무자비한 사회의 모습을 제공하는 "고급 코미디"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을 연상시키며, 어떻게 보면 캐리커처에 대한 짝패와 같았다.
같은 시기에 필리퐁은 유머 도서관의 첫 번째 시리즈인 플루어(1850), 귀스타브 도레와 협력한 영불 박물관(1855–1857), 아제노르 알타로슈와 함께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책(1838), 그리고 외젠 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방랑 유대인 패러디(루이 위아르, 1845)를 출판했다.
3. 주요 작품 및 활동
필리퐁은 1829년 10월, 언론계에 입문하여 ''라 실루엣''을 공동 창간했다.[2] 소규모 재정 투자를 했고, 기고가로 참여했지만 최종 편집 통제권은 없었다. ''라 실루엣''은 프랑스 신문 중 최초로 판화와 삽화를 정기적으로 게재하여 텍스트와 동등하거나 더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매 호마다 당대의 정치적, 문학적 사건을 풍자했으며, 파리의 유명 그래픽 아티스트들의 석판화가 포함되었다.
''라 실루엣''은 1829년 12월 24일부터 1831년 1월 2일까지 발행되었으며, 19세기 프랑스에서 발행된 유사 간행물의 원형이 되었다. 격렬한 정치적 논쟁 시기에 온건한 저널로 알려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편집 성향은 점점 급진적으로 변했다.
엄격한 정부 검열로 인해 ''라 실루엣''은 정치인을 직접 겨냥한 캐리커처를 출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필리퐁이 제작한 국왕 (샤를 10세)의 작은 목판화가 1830년 4월 1일자 기사에 몰래 삽입되었다. 검열관들은 석판화에 집중하여 이 부분을 간과했고, 이는 혁명 이전에 정치적 캐리커처가 흔치 않았기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편집자는 6개월 징역형과 1,000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필리퐁은 캐리커처에 서명을 남기지 않아 처벌을 피했다.
이후 간행물에서는 비판적인 논평을 무해해 보이는 이미지에 첨부하는 방식으로 검열을 우회했다. 1830년 5월과 6월호에서는 JJ 그랑빌의 동물 그림을 통해 정치적 주제를 다루었고, 7월 혁명 직전에는 오노레 도미에가 특정되지 않은 전장 이미지를 기고했고, 편집자가 명시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부여했다.
필리퐁은 풍자적인 정치 신문인 ''라 카리카튀르''와 르 샤리바리의 발행인이었으며, 도미에, 가바르니 등 프랑스 최고의 캐리커처 작가들의 석판화를 포함시켰다.[2] 이들은 종종 필리퐁의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프랑스 초기 정치 만화를 만들었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필리퐁은 작가와 만화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카리스마를 지녔다.[7] 그는 석판화에 집중했으며, 그의 출판사는 1831년부터 이 유형의 출판에 거의 독점권을 가졌고, 파리에서 출판된 모든 석판화의 3분의 1이 그에게서 나왔다.[8]
1834년 4월, 리옹과 파리에서 봉기가 혹독하게 진압되자, 도미에의 '트랑스노냉 거리'(월간 협회, 1834년 9월 24일) 등 여러 석판화가 등장했다. 이는 1834년 4월 15일, 군대가 이 거리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을 언급한다.[19] 필리퐁은 이를 두고 "강한 손으로 그려지고 낡은 분노에 의해 쓰인 우리 현대사의 피 묻은 페이지"라고 표현했다(''라 카리카튀르'', 1834년 10월 2일).
1835년 7월, 피에스키(Fieschi)의 폭탄 테러 이후, 새로운 언론법이 제출되었다. 티에르(Thiers)는 "악명 높은 캐리커처, 선동적인 디자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유니버설 모니터, 1835년 8월 30일).[21] ''라 카리카튀르''의 출판은 중단되었고, 르 샤리바리는 헐값에 팔렸지만, 필리퐁은 1838년까지 장교로 보존되었다. 그는 "1830년 11월 4일 자유주의적 환상으로 시작하여 1835년 9월 가장 슬픈 현실의 왕국에 도달했다"고 회고했다.[21]
"9월 법"이 정치 만화의 종말을 고했지만, 필리퐁은 ''라 카리카튀르''를 임시로(1838) 재발행하고, "비정치적 만화" 잡지인 르 샤리바리를 통해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파리의 모든 만화가를 위한 디자인을 담은 유머 박물관(Museum to laugh designs for all cartoonists Paris, 1839–1840), 필리퐁 유머 박물관(Museum or comic store Philipon, 1843), 파리 유머(Paris comic, 1844), 르 주르날 푸르 리르(Le Journal pour rire, 1848–1855)를 출판했으며, 이는 펀 저널(1856)이 되어 유쾌한 풍자적 습관을 다루었다.
이 "유머 도서관"의 목적은 "사회적 유형"의 대표, 즉 대중에게 인기 있는 생리적 특징을 창조하여 즐거움과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22] 가장 전형적인 유형은 도미에(Ratapoil, 로베르 마케르), 트라비에(M. Mayeux), 앙리 모니에(Joseph Prudhomme), 가바르니(Thomas Vireloque)가 그림으로 묘사했다. 생리적 특징의 유행은 오베르 하우스(Aubert House)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1841년 2월부터 1842년 8월까지 이 시기의 생산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32개의 서로 다른 생리적 특징을 출판했다.[23]
같은 시기에 필리퐁은 유머 도서관의 첫 번째 시리즈인 플루어(The Floueur, 1850), 귀스타브 도레와 협력한 영불 박물관(Anglo-French Museum, 1855–1857), 아제노르 알타로슈와 함께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책(Aux proletarians, 1838) 등을 출판했다.
3. 1.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 (1830-1835)
1830년 11월 4일, 7월 혁명 이후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샤를 필리퐁은 삽화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를 발행했다.[2] 이 잡지는 구독자 전용으로 판매되었으며, 4페이지 분량의 텍스트와 두 개의 석판화로 구성되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창간호에 글을 기고했고, 1832년 2월까지 다양한 필명으로 30개의 기사를 썼다.[3]《라 카리카튀르》는 고급 삽화 잡지로, 그림은 양피지에 인쇄되었고 석판화는 별도의 텍스트와 함께 찢어진 시트에 인쇄되었다. 1832년 봄, 처음에는 비정치적 태도를 취했던 《라 카리카튀르》는 7월 왕정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1830년 가을, 7월 혁명의 지지자였던 필리퐁은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컸다. 《라 카리카튀르》의 첫 호에는 정치적 비판이 없었다.[9] 발자크는 이 시기에 다양한 필명으로 기고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反)성직주의는 텍스트와 삽화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1830년 12월 4일, 신문 검열과 인지세를 부활시킨 법률을 비판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10] 필리퐁에 따르면, 풍자화는 오랫동안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유의 적"을 드러내면서 예술가들의 중요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13]
필리퐁은 오베르 출판사(Maison Aubert)에서 발행된 만화 《7월의 거품》(1831년 2월 26일)을 통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비누 방울》로 더 잘 알려진 이 만화는 루이 필리프가 언론의 자유, 민중 선거 등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보여주는 거품을 부주의하게 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4] 국왕을 모욕한 혐의로 기소된 필리퐁은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몇 달 후 《화장 보수》(《라 카리카튀르》, 1831년 6월 30일)라는 또 다른 석판화로 다시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 작품에서 국왕은 7월 혁명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지우는 석공으로 묘사된다.[15]
필리퐁은 오노레 도미에 등에게 루이 필리프 왕을 '배 머리'로 풍자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고, 이는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26] 결국 《라 카리카튀르》는 1835년에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25]
3. 2. 《르 샤리바리(Le Charivari)》 (1832-1927)
1832년 12월 1일, 필리퐁은 수감 중에 《라 카리카튀르》보다 작은 형식의 4페이지짜리 삽화 일간지 《르 샤리바리》를 발행했다.[4] 《르 샤리바리》는 이전 잡지보다 다양하고 더 "대중적"이었으며 정치적 풍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일한 일간 풍자 잡지였다.[4] 창간호에 따르면, 《르 샤리바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만화경 같은 세상의 모든 다양한 측면, 연필과 펜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든 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를 의도했다.[4] 석판화는 《라 카리카튀르》보다 품질이 낮았지만 텍스트와 더 잘 통합되었다. 이후 《르 샤리바리》의 발표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필리퐁은 이 두 신문의 소유주로서, 신문의 모든 글과 석판화 내용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했다.[6] 그는 협력자를 선택하고, 시장의 공급업체와 거래하며 재정을 관리했다. 1862년에 출판된 부고에서 나다르는 "사업에 대한 놀라운 명석함"과 "고갈되지 않는 발명과 수단에 대한 비옥함"을 칭찬했다.[5] 그는 자신의 예술가 친구들을 고용하여 그들과 함께 목표를 정의하고, 주제를 제안하며, 텍스트와 석판화를 조정했다. 그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변경을 요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편집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글쓰기는 소수의 매우 헌신적인 언론인 팀(1834년 2월, 필리퐁을 포함하여 7명)으로 축소되었다.[6]
1830년 11월 4일, 루이 필리프 즉위 3개월 후, 샤를 필리퐁은 주간 풍자 신문 《라 카리카튀르》를 창간했다. 1832년 12월 1일에는 일간 《르 샤리바리》를 발행하여 유럽에서 만화 신문 유행의 시초가 되었으며, 영국의 《펀치》, 독일의 《플리겐데 블라터》, 《클라데라다치》 등의 창간을 촉진했다.[25] 《르 샤리바리》는 예약 구독자 수가 300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26]
《라 카리카튀르》는 1835년에 발매 금지 처분되었지만, 《르 샤리바리》는 필리퐁 사후에도 1927년까지 간행되어 파리 시민들에게 깊이 스며들었다.[25]
3. 3. '배' 만평
7월 혁명 이후, 필리퐁은 새 정권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1831년 2월 26일, 오베르 출판사에서 발행한 만화 《7월의 거품》(《비누 방울》)에서 루이 필리프가 언론의 자유 등 실현되지 않은 약속을 거품으로 부는 모습을 묘사했다.[14] 국왕 모독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이후 《화장 보수》(《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 1831년 6월 30일)에서 국왕을 7월 혁명의 흔적을 지우는 석공으로 묘사하여 다시 재판을 받았다.[15] 1831년 11월 14일 재판에서 필리퐁은 국왕의 얼굴이 배로 변하는 과정을 4단계로 그려, 모든 것이 국왕처럼 보일 수 있다는 변호를 펼쳤다.[16] 이 이미지는 혁명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17]

배는 정권과 그 관련자들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고, ''라 카리카튀르''와 ''르 샤리바리''에 자주 등장했다. 도미에의 ''평민에 매달린 거대한 배'', 그랑빌의 ''Juste-Milieu의 탄생'' 등 다양한 작품에서 배를 소재로 활용했다.
필리퐁은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배 조각상 이미지를 출판하며, 루이 16세가 처형된 곳에 "속죄적인 배"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풍자했다. 이 작품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마멀레이드 제작을 유발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4]
1835년 검열법 통과 후 ''라 카리카튀르''는 폐간되었지만, 해당 법 조항을 배 모양으로 게재하며 저항했다.[4] 필리퐁은 "국왕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6개월 징역형과 2,000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3. 4. 로베르 마케르 시리즈
"9월 법"으로 정치 만화가 쇠퇴했지만, 필리퐁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를 임시로(1838) 재발행하고, "비정치적 만화" 잡지인 르 샤리바리(Le Charivari)를 통해 로베르 마케르(Robert Macaire, 1836–1838) 시리즈를 발표했다.로베르 마케르 시리즈는 사회 풍자와 정치 풍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필리퐁의 아이디어와 설명을 바탕으로 오노레 도미에가 그림을 그리고 구성한 이 연작은 ''Les Cent and Robert Macaire''(1839)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였다. 큰 그림은 축소되었고, 모리스 알로이와 루이 위아르라는 언론인이 쓴 유머러스하고 서술적인 내용이 함께 실렸다.[24]
돈 키호테와 질 블라스의 화신으로 묘사된 로베르 마케르는 순진한 베르트랑과 함께 온갖 속임수를 쓰는 "플루어(floueur)"라는 사회적 유형을 구현했다. 그는 이익과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의 상징이었다 (마르크스는 루이 필리프를 "그의 왕좌 위의 로베르 마케르"라고 언급했다). 냉소적이고 무자비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고급 코미디"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을 연상시키며, 어떤 면에서는 캐리커처의 짝패와 같았다.
4. 영향
역사가 폴 튀로-댕쟁은 필리퐁이 국왕의 권력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는 고용된 예술가들을 규합하고, 진두지휘하며,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에게 자신의 독설과 대담함을 주입하고,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제공했으며, 기소와 유죄 판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무명의 인물은 새 국왕의 가장 위험한 적 중 한 명이 되어, 군주가 진정으로 자리를 잡는 데 필요한 권위를 얻는 것을 막았다.[4]
1835년, 루이 필리프 1세 암살 시도 이후, 한 관리는 만평보다 "더 직접적인 범죄 유발은 없다"고 선언했다. 암살 시도 이후, 추가적인 정치적 예술의 등장을 막기 위한 새로운 검열법이 시행되었다.[4]
필리퐁은 오노레 도미에, 샤를-조제프 트라비에 드 빌리에, 장 이냐스 이지도르 제라르 그랑빌, 폴 가바르니, 앙리 모니에와 같은 많은 다른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도미에는 필리퐁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필리퐁이 쟁기로 소를 몰듯이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필리퐁을 "석판화 공작, 그림 후작, 목판화 백작, 풍자 남작, 캐리커처 경"이라고 불렀다.[4]
5. 평가
역사가 폴 튀로-댕쟁은 필리퐁이 국왕의 권력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는 고용된 예술가들을 규합하고, 진두지휘하며,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에게 자신의 독설과 대담함을 주입하고,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제공했으며, 기소와 유죄 판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무명의 인물은 새 국왕의 가장 위험한 적 중 한 명이 되어, 군주가 진정으로 자리를 잡는 데 필요한 권위를 얻는 것을 막았다.[4]
1835년, 루이 필리프 1세 암살 시도 이후, 한 관리는 만평보다 "더 직접적인 범죄 유발은 없다"고 선언했다. 암살 시도 이후, 추가적인 정치적 예술의 등장을 막기 위한 새로운 검열법이 시행되었다.[4]
필리퐁은 오노레 도미에, 샤를-조제프 트라비에 드 빌리에, 장 이냐스 이지도르 제라르 그랑빌, 폴 가바르니, 앙리 모니에와 같은 많은 다른 만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도미에는 필리퐁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필리퐁이 쟁기로 소를 몰듯이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필리퐁을 "석판화 공작, 그림 후작, 목판화 백작, 풍자 남작, 캐리커처 경"이라고 불렀다.[4]
참조
[1]
서적
Grand dictionnaire universel du s-XIXe
Éd. Slatkine
1982
[2]
웹사이트
Paris.fr, site officiel de la Ville de Paris
http://www.paris-fra[...]
[3]
간행물
Balzac et Philipon associés
http://www.paris-fra[...]
Maison de Balzac
2001-06-23
[4]
서적
Censorship of Political Caricature in Nineteenth-century France
https://books.google[...]
Kent State University Press
1989
[5]
간행물
Article nécrologique repris par Champfleury dans Histoire de la caricature moderne
[6]
서적
Caricature and French political culture 1830-1848
Clarendon Press
2000
[7]
서적
Histoire de la caricature moderne
[8]
서적
Caricature and French political culture 1830-1848
[9]
서적
Grand dictionnaire universel du XIXe siècle
[10]
웹사이트
La Caricature Gallery: Liberté (Francoise Désirée)
http://greatcaricatu[...]
[11]
문서
Le Juste Milieu
[12]
서적
Le Trésor du bibliophile romantique et moderne
1846-07-07
[13]
문서
L'ordre public règne aussi à Paris
Aubert
1831-10-01
[14]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3b3b3b.free.f[...]
2014-06-16
[15]
웹사이트
In Development: Caricature vs. The Censor 1831 - 1832
http://www.greatcari[...]
[16]
웹사이트
http://www.philophil[...]
[17]
서적
Lettres du 7 juillet 1846 à Roslje
[18]
서적
Caricature and French political culture 1830-1848
[19]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ottenb.areca.[...]
2014-06-16
[20]
웹사이트
http://www.historyco[...]
[21]
서적
Lettres à Rosalje du 7 juillet 1846
[22]
웹사이트
Liste des physiologies dans les collections de la Maison de Balzac à Passy
http://www.v1.paris.[...]
2014-06-16
[23]
간행물
Charles Philipon, La Maison Aubert, and the business of caricature in Paris, 1829-41
1983
[24]
웹사이트
La maison de Balzac : Un objet, une histoire
http://www.v1.paris.[...]
2014-06-16
[25]
문서
清水
[26]
문서
長谷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