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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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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는 조선시대 왕실 농업 문화의 중심지였던 전농동에서 제작된 무신도이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 지역 농악 관련 풍속화로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ㆍ' 자모로 쓰인 방제가 특징이며, 존격의 존명과 특정 장면의 도해에 대한 기술이 담겨 있어 무신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무신도는 대취타 행렬, 일산 행렬, 잡색의 연희 등 농악의 다양한 장면을 묘사하며, 밝고 산뜻한 색채와 개성 있는 인물 표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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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정 사유

조선시대 전농동 일대는 농사와 친경의식과 그 행렬 등으로 대변되는 왕실 농업문화의 중심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 또한 서울지역 농악관련 일종의 풍속화로서 미술사적인 가치 역시 뛰어나다.[1] ‘ㆍ’ 자모로 쓰여진, ‘존격의 존명’과 ‘특정 장면의 도해(圖解)에 대한 기술(記述)’이 있는 방제는 무신도 연구사에 큰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1]

3. 상세 규격

(거사도걸입안위)11점102 × 6320세기 초②일산 행렬
(만방쳥일산도국긔)③삼불제석
(삼불제셕안위)④강남국 호국 별상 마마
(강남국호구별상마마)⑤정열부인 송씨마누라
(정열부인숑씨마누하)⑥조선국 공신 조씨대감
(죠션국공신죠씨대감)⑦대사마 대장군 왕신
(사마장군왕신안위)⑧취타 행렬
(젼취주도국긔)⑨마부1
(마두하쳥도국긔 1)⑩마부2
(마두하쳥도국긔 2)⑪매사냥 걸립
(외응만사도쳥걸입)


4. 조사 보고서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는 기년명은 없지만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서울 지역 무신도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작품군에 속한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점이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11점의 무신도에는 아래 'ㆍ' 자모를 병기(倂記)해 흘려 쓴 방제(傍題)가 있다.

이 가운데 '존격의 존명'이 기록된 5점은 일반적인 무신도의 존명 표기 예시에 속하지만, 나머지 6점은 '특정 장면의 도해(圖解)에 대한 기술(記述)'이어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6점의 무신도 도상은 현재는 살펴볼 수 없는 서울 지역 농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농동 부군당의 주신은 '부군할아버지'인 조선 초의 공신 조반(趙胖)이다. 고려 말 토지 개혁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던 조반이 전농동 부군당의 주신으로 모셔진 것은 농사와 무관하지 않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었던 조선시대에 전농동 일대가 왕실의 동적전(東籍田)에 속하고, 1909년에 순종 황제가 마지막으로 거둥해 소를 끌고 친경(親耕) 의식을 행한 것을 보면, 비록 무신도 범주 내에서의 도해이지만, 농악의 한 단면이 엿보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왕의 거둥이나 신임 현감(사또) 행차에 영향을 받은 농악은 일반적으로 앞부분이 행렬음악으로 시작하고 뒷부분은 연희 중심이다. 이를 토대로 전농동 부군당의 무신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악의 후배(後陪) 즉, 뒷부분인 후배치에 해당하는 잡색(雜色)의 연희는 거사와 사당이 등장하는 ‘거사도걸입안위[居士徒 乞粒 安位]’, 그리고 매사냥꾼인 양반 수알치와 꿩을 모는 털이꾼이 등장하는 ‘외응만(방)사도쳥걸입[外鷹坊師 都廳 乞粒]’이다. 방제와 도상으로 보면, 잡색을 맡은 이들이 사설을 주고받는 걸립농악에 해당한다.

전농동 부군당의 무신도는 배경을 채색하지 않고 등장인물 위주로 단순히 그려졌지만, 감각적인 색채 운용을 엿볼 수 있다. 초록색이 주조색인 화면에 짙은 청색을 사용하면서도 채도가 높은 노란색과 적색을 적절히 대비시켜 전체적으로 밝고 산뜻하다. 종교화에서는 잘 쓰지 않는 기하학적인 당초문의 사용이나 무신도임을 의식해 눈동자의 위치를 임의로 달리한 것도 눈에 띈다. 과거의 전통적이고 익숙한 색채나 문양을 일신해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고자 한 화사의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실내가 아닌 야외를 배경으로 한 무신도 도상들은 인물 표현에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고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연희적(演戱的) 요소와 함께 해학성도 갖추고 있어서 흥미롭다.

전농동 부군당 무신도가 도상의 구성이나 방제의 내용으로 보면 고격의 것도 담고 있어서 이전의 무신도를 모본으로 다시 제작되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현재의 무신도가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기량 있는 노화사에 의해 그려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시대에 부군당이 있는 전농동 일대가 ‘농사’와 ‘친경(親耕) 의식과 그 행렬’ 등으로 대변되는 왕실 농업 문화의 중심에 있었고, 일부 무신도의 방제와 도상에 반영되어 있는 특징들은 서울 지역 농악 관련 무신도로서 그 가치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일종의 풍속화로서 미술사적인 가치 역시 뛰어나다. 또한 아래 ‘ㆍ’ 자모로 쓰여진, ‘존격의 존명’과 ‘특정 장면의 도해(圖解)에 대한 기술(記述)’이 있는 방제는 무신도 연구사에 큰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 중요 자료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4. 1. 방제(傍題)

4. 2. 도상(圖像)

4. 3. 회화적 특징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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