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알료시코프
1. 개요
세르게이 알료시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전쟁 전 가족과 함께 살던 중 부모를 잃고 척후병에게 구조된 후, 1942년 입양되어 조국전쟁 최연소 병사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법학을 전공하고 검찰청에서 근무했으며, 1990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전쟁 경험은 영화 '솔저 보이'에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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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루가주 출신 -
게르만 티토프 (아이스하키 선수)
게르만 티토프는 소련 리그와 NHL에서 활약하며 우승과 메달을 획득하고 러시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한 은퇴한 아이스하키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
칼루가주 출신 -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는 러시아의 인민주의 사상가이자 문학 평론가로, 영웅과 군중 이론을 통해 개인의 역할과 대중의 심리적 영향력을 강조하며,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
소련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김일성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치했으며,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개인 숭배를 조장한 정치인이다. -
소련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장남으로 소련 유학 및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죽음은 논란을 낳았고 중국과 북한에서 기리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1936년 출생 -
달릴라 (무용가)
달릴라는 스페인 출신의 무용가로 발레, 플라멩코, 벨리댄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1950년대 이집트에서 벨리댄서로 공연하고 멕시코와 미국에서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다 2001년에 사망했다. -
1936년 출생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으며, 미디어셋 설립, 포르차 이탈리아 창당, 친미 외교 정책, 탈세 및 성 스캔들 등 여러 법적 문제와 논란에 휘말렸다.
2. 생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세르게이 알료시코프는 가족과 함께 칼루가주 울리야노프스크 구역(현재)의 그린 마을에 살았다. 세르게이의 아버지는 전쟁 전에 사망하여 이반, 안드레이, 표트르, 그리고 막내 세르게이 4형제가 고아가 되었다.
1941년 가을, 나치에 점령된 마을은 빨치산 분견대의 거점이 되었고, 주민들은 빨치산이 되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와 10세의 형 페차도 빨치산 활동에 가담했다가 나치에 붙잡혔다. 페차는 교수형을 당했고, 아들을 구하려던 어머니는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했다. 1942년 8월, 마을 빨치산 거점이 나치에 습격당하면서 주민들은 도망쳤고, 세르게이도 실종되었다. 며칠 뒤, 깡마른 모습의 세르게이는 47친위소총사단 142친위소총연대 척후병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소년 시절 세르게이는 자신의 성을 잘못 알고 알료시킨(Алёшкин)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942년 9월 8일, 그는 당시 아직 아이가 없는 독신이던 제510친위소총연대 부대장 미하일 다닐로비치 볼로비노프에게 정식 입양되었다. 조국전쟁 사상 최연소 병사로 꼽힌다. 1942년 11월 초, 연대와 함께 그는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했다. 그래서 포화 속에서 도움을 청했고 연대장과 몇몇 장교들과 함께 매몰된 호 파기에 참여해 양아버지를 구했다. 이 공적으로 1943년 4월 26일자 명령 제013호로 전투공로상을 수여받았다.
전투 중 세르게이는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고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1944년 폴란드에서 바실리 추이코프 사령관의 요청으로 툴라 수보로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 최연소 생도가 됐다. 스포츠에는 열심이었지만 건강 상태가 안 좋고 상처와 흡연 습관도 있어 수보로프 학교에 잘 다니지 못했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세르게이는 하르키우에서 법률 학위를 받고 양부모 가족이 살던 첼랴빈스크에 살면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찰청에서 수사관을 지냈고, 이후 검찰관을 지냈고, 후에 첼랴빈스크에서 플렉시글라스 공장 법률고문을 지냈다. 그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1990년 2월 1일, 통근 도중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세르게이 알료시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가족과 함께 칼루가주 울리아노프스크 구역(현재)의 그린 마을에 살았다. 세르게이의 아버지는 전쟁 전에 사망하여 이반, 안드레이, 표트르, 그리고 막내 세르게이 4형제가 고아가 되었다.
1941년 가을, 나치에 점령된 마을은 빨치산 분견대의 거점이 되었고, 주민들은 빨치산이 되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와 10세의 형 페차도 빨치산 활동에 가담했다가 나치에 붙잡혔다. 페차는 교수형을 당했고, 아들을 구하려던 어머니는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했다. 1942년 8월, 마을 빨치산 거점이 나치에 습격당하면서 주민들은 도망쳤고, 세르게이도 실종되었다. 며칠 뒤, 깡마른 모습의 세르게이는 47친위소총사단 142친위소총연대 척후병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소년 시절 세르게이는 자신의 성을 잘못 알고 알료시킨(Алёшкин)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942년 9월 8일, 그는 당시 아직 아이가 없는 독신이던 제510친위소총연대 부대장 미하일 다닐로비치 볼로비노프에게 정식 입양되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세르게이 알료시코프는 가족과 함께 칼루가주 울리아노프스크 지구의 그린 마을(현재)에 살았다. 아버지 없이 이반, 안드레이, 표트르, 세르게이 4형제가 남겨졌다.
1941년 가을, 나치 점령 하의 마을은 빨치산 분견대의 거점이 되었고, 세르게이의 어머니와 10세 형 페차를 포함한 주민들은 빨치산이 되었다. 이들은 임무 중 나치에 붙잡혔고, 페차는 교수형, 어머니는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했다. 1942년 8월, 나치의 빨치산 거점 습격으로 주민들은 도망쳤고, 세르게이는 실종되었다. 며칠 뒤 47친위소총사단 142친위소총연대 척후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소년 시절 세르게이는 자신의 성을 알료시킨(Алёшкин)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1942년 9월 8일, 그는 미하일 다닐로비치 볼로비노프에게 정식 입양되어 조국전쟁 사상 최연소 병사가 되었다. 1942년 11월 초, 연대와 함께 스탈린그라드에 도착, 포화 속에서 도움을 청해 양아버지를 구했다. 이 공적으로 1943년 4월 26일 전투공로상을 수여받았다.
전투 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 생명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던 세르게이는, 1944년 바실리 추이코프의 요청으로 툴라 수보로프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져 최연소 생도가 되었다. 스포츠에 열심이었으나 건강 문제와 흡연 습관으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4년 폴란드에서 바실리 추이코프 사령관의 요청으로 툴라 수보로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 최연소 생도가 되었다. 스포츠에는 열심이었지만 건강 상태가 안 좋고 상처와 흡연 습관도 있어 수보로프 학교에 잘 다니지 못했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하르키우에서 법률 학위를 받고 양부모 가족이 살던 첼랴빈스크에 살면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찰청에서 수사관을 지냈고, 이후 검찰관을 지냈고, 후에 첼랴빈스크에서 플렉시글라스 공장 법률고문을 지냈다. 그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1990년 2월 1일, 통근 도중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