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
1. 개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세 차례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했다. 밀라노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한 후 건설업과 미디어 산업에 진출하여 기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1994년 포르차 이탈리아를 창당하며 정계에 입문, 반공주의와 친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논란과 재판에 휩싸였으며, 언론 장악, 부패 혐의, 성 추문 등 다양한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2023년 사망 후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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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
| 로마자 표기 | Silvio Berlusconi |
| 이탈리아어 발음 | /ˈsilvjo berluˈskoːni/ |
| 출생일 | 1936년 9월 29일 |
| 출생지 | 밀라노, 이탈리아 왕국 |
| 사망일 | 2023년 6월 12일 |
| 사망지 | 밀라노, 이탈리아 |
| 거주지 | (미제공) |
| 국적 | 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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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실업가 |
|---|---|
| 주요 사업체 | 피닌베스트 메디아세트 AC 밀란 AC 몬차 |
| 정당 | 포르차 이탈리아 (1994–2009) 자유민중당 (2009–2013) 포르차 이탈리아 (2013년부터) |
|---|---|
| 기타 정당 | 자유의 극 (1994–1995) 자유를 위한 극 (1996–2000) 자유의 집 (2000–2008) 중도우파 연합 (1994–2013; 2017년부터) |
| 직책 | 이탈리아의 총리 |
|---|---|
| 대통령 |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조르조 나폴리타노 |
| 제1차 임기 시작 | 1994년 5월 11일 |
| 제1차 임기 종료 | 1995년 1월 17일 |
| 제1차 총리 전임자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 제1차 총리 후임자 | 람베르토 디니 |
| 제2차 임기 시작 | 2001년 6월 11일 |
| 제2차 임기 종료 | 2006년 5월 17일 |
| 제2차 총리 전임자 | 줄리아노 아마토 |
| 제2차 총리 후임자 | 로마노 프로디 |
| 제3차 임기 시작 | 2008년 5월 8일 |
| 제3차 임기 종료 | 2011년 11월 16일 |
| 제3차 총리 전임자 | 로마노 프로디 |
| 제3차 총리 후임자 | 마리오 몬티 |
| 부총리 | 잔프란코 피니 마르코 폴리니 줄리오 트레몬티 로베르토 마로니 주세페 타타렐라 |
| 상원 의원 | 2013년 3월 15일 - 2013년 11월 27일 (몰리세주) 2022년 10월 13일 - 2023년 6월 12일 (몬차) |
|---|---|
| 하원 의원 | 1994년 4월 21일 - 2013년 3월 15일 (롬바르디아주, 라치오 1, 캄파니아 1, 몰리세) |
| 유럽 의회 의원 | 1999년 7월 20일 - 2001년 6월 10일 (북서이탈리아 선거구) 2019년 7월 2일 - 2022년 10월 12일 (북서이탈리아 선거구) |
| 경제 개발부 장관 대리 | 2010년 5월 5일 - 2010년 10월 4일 |
| 보건부 장관 대리 | 2006년 3월 10일 - 2006년 5월 17일 |
| 경제 재정부 장관 대리 | 2004년 7월 3일 - 2004년 7월 16일 |
| 외무부 장관 대리 | 2002년 1월 6일 - 2002년 11월 14일 |
| 배우자 | 카를라 달롤리오 (1965–1985) 베로니카 라리오 (1990–2010) |
|---|---|
| 파트너 | 프란체스카 파스칼 (2013–2020) 마르타 파시나 (2020년부터) |
| 자녀 | 마리나 베를루스코니 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 루이지 베를루스코니 |
| 형제 | 파올로 베를루스코니 |
| 모교 | 밀라노 대학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 수상 | 노동 기사 훈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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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인 -
주세페 마로타
주세페 마로타는 이탈리아의 축구 경영인으로, 여러 클럽을 거쳐 유벤투스와 인테르에서 단장 및 CEO를 역임하며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고 다수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24년에는 인테르 밀란의 회장 겸 스포츠 부문 CEO로 선임되었다. -
유럽 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
샤를 미셸
샤를 미셸은 벨기에 정치인으로, 벨기에 총리와 유럽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며 연금 및 노동법 개혁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적 현안에 대처하며 유럽 연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
유럽 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
도날트 투스크
도날트 투스크는 폴란드의 정치인으로, 총리와 유럽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시민 연단을 창당하여 이끌었고 유럽 연합 내 통합을 지지하는 중도우파 성향의 현재 폴란드 총리이다.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메디아셋
메디아셋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설립한 이탈리아 주요 미디어 그룹으로, 전국 지상파 채널 운영, 디지털 채널 및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 국제적 사업 확장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정치적 영향력, 법적 분쟁 등의 문제점도 안고 있다.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
붕가붕가
붕가붕가는 어원과 관련하여 호주 원주민 지명 유래설과 드레드노트 사기극 유행어설이 있으며, 인터넷 유머 소재로 쓰이다가 이탈리아 전 총리 스캔들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얻고 대중문화 전반에서 활용되는 단어이다.
2. 가족 배경 및 사생활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 루이지 베를루스코니는 은행원, 어머니 로사 보사는 주부였다. 형제자매로는 파올로 베를루스코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안토니에타 베를루스코니가 있다. 살레시오회 계열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후 밀라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며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훗날 AC 밀란과 포르차 이탈리아의 구단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다. 첫 번째 부인 칼라 엘비라 돌로글리오와의 사이에서는 마리나 베를루스코니와 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두 번째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와의 사이에서는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 루이지 베를루스코니를 두었다. 2009년 라리오는 베를루스코니의 여성 편력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베를루스코니는 49세 연하의 프란체스카 파스카레와 교제하기도 했다.
2.1. 가족 배경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이지 베를루스코니(1908년~1989년)는 은행원이었고, 어머니 로사 보사(1911년~2008년)는 주부였다. 그는 세 자녀 중 첫째였으며, 여동생 마리아 프란체스카 안토니에타 베를루스코니(1943년~2009년)와 남동생 파올로 베를루스코니(1949년~)가 있었다.
1965년, 베를루스코니는 칼라 엘비라 돌로글리오와 결혼하여 마리나 베를루스코니와 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두 자녀를 두었다. 1980년, 배우 베로니카 라리오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1984년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 1986년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 1988년 루이지 베를루스코니 세 자녀를 낳았다.
1985년 베를루스코니는 돌로글리오와 이혼하고, 1990년 라리오와 결혼했다. 당시 베를루스코니는 이미 유명한 기업가였고, 그의 결혼식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신랑 들러리 중 한 명은 전직 총리이자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였던 베티노 크락시였다.
2009년 5월, 라리오는 "저질 여자들과 놀아나는 이런 남자와 살 수 없다"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8세 소녀 노에미 레티자와의 관계로 알려졌다.
2.2. 교육
살레시오회 계열 기숙학교인 "리체오 산타브로지오"를 졸업하고 밀라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 광고업 관련 법률을 전문 분야로 삼아 1961년 "우등"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의 징병 제도 하에서 병역 의무를 회피했다는 스캔들이 보도되기도 했다. 재학 중에는 음악에 열중하여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커뮤니티에 참여했으며, 이 그룹에서 사귄 친구들은 이후 베를루스코니의 사업과 관련된 인맥이 되었다. 현재도 음악에 대한 취미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이 소유한 축구 클럽 AC밀란의 응원가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2.3. 결혼 및 자녀
1965년, 베를루스코니는 칼라 엘비라 돌로글리오(Carla Elvira Dall'Oglio)와 결혼하여 슬하에 마리나 베를루스코니와 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두 자녀를 두었다.
1980년, 베를루스코니는 배우 베로니카 라리오(미리암 바르톨리니 출생)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슬하에 바르바라 베를루스코니(1984년생),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1986년생), 루이지 베를루스코니(1988년생) 세 자녀를 낳았다. 그는 1985년 돌로글리오와 이혼하고 1990년 라리오와 결혼했다. 이 시기 베를루스코니는 유명한 기업가였으며, 그의 결혼식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들러리 중 한 명은 전직 총리이자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였던 베티노 크락시였다.
2009년 5월, 베로니카 라리오는 "저질 여자들과 놀아나는 이런 남자와 살 수 없다"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8세 소녀 노에미 레티자와의 관계로 알려졌다. 2012년 12월 28일, 베를루스코니는 이혼 합의금으로 라리오에게 연간 48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세 자녀와 함께 살던 100짜리 집은 계속 소유할 수 있었다.
2012년부터는 49세 연하의 전 쇼걸 프란체스카 파스카레와 교제했다.
2.4. 음악 활동
베를루스코니는 대학 시절 페데레 콩팔로니에리와 함께 그룹을 결성하여 더블 베이스를 연주했고, 유람선 가수로도 활동했다. 이후 토니 레니스와 함께 AC 밀란의 구단가를, 레나토 세리오와 함께 포르차 이탈리아의 구단가를 작곡했다. 마리아노 아피첼라와 함께 두 장의 나폴리 민요 앨범(Meglio 'na canzone(2003년), L'ultimo amore(2006년))을 발표했다.
3. 기업가 시절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 건설업으로 기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60년대 후반, 3500여 개 아파트로 구성된 밀라노 2를 구상하여 밀라노 동쪽 외곽 세그라테에 건설했다. 이 사업 자금 조달 방식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73년,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밀라노를 설립하며 미디어 산업에 뛰어들었다. 텔레밀라노는 1974년 9월 송출을 시작했고, 이후 두 개 채널을 더 인수한 베를루스코니는 1977년 방송국을 밀라노 중심부로 이전, 지상파 방송을 시작했다.
1978년, 베를루스코니는 첫 미디어 그룹인 피닌베스트(Fininvest)를 설립했다. 핀인베스트는 113 (1997년 기준 260 상당)의 수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자금 조달 구조는 복잡한 지주회사 형태로 인해 여러 검사들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핀인베스트는 텔레비전망을 이탈리아 전국으로 넓혔다. 베를루스코니는 1980년 이탈리아 최초의 민영 전국 방송 카날레 5를 설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1(1982년 인수), 레테 4(1984년 인수) 등의 방송국을 추가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이탈리아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 (이탈리아 사회당 사무총장)의 후광을 이용해 성장했다. 1984년 10월 20일, 이탈리아 정부는 베를루스코니의 전국 송출을 합법화하는 긴급 명령을 결의하여,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최초이자 유일한 상업 TV 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주요 회사인 메디아셋은 전국 시청률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3개 채널과 이탈리아 최대 광고 홍보 에이전시인 '퍼블리탈리아'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최대 출판사인 아르놀도 몬다도리 에디토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파노라마'를 발행했다. 그는 영화 및 홈비디오 배급 회사(메두사와 펜타), 보험 및 은행(메디오라넘과 메디오방카) 등 다양한 분야에도 사업을 확장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동생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친 베를루스코니 성향의 중도 우파 신문인 《일 지올날레》를 소유 및 경영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전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 역시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클럽 AC 밀란의 구단주였으며, 이 구단을 통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3.1. 밀라노 2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에 기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960년대 후반, 3500여 개 아파트로 구성된 가든 시티인 밀라노 2를 구상하여 밀라노 동쪽 외곽 세그라테에 건설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이 사업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968년 9월 사업 시작 당시 법적 서류에는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명목상 소유자로 대체되었다가 1975년에야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많은 언론인들이 자금 조달 과정을 조사했지만, 해외 조세피난처와 중국 자금책 등을 이용하는 복잡한 방식 때문에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산 거래 시 세금을 줄이기 위해 문서상 실제보다 적은 액수를 적는 관행이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1970년대 건설업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밀라노 동쪽에 4,000세대 주택을 건설하는 밀라노 두에(Milano Due) 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이 주거 단지는 베를루스코니 소유 회사이자 피닌베스트(Fininvest) 그룹과 연관된 에딜노르드(Edilnord)에서 건설했다. 공사는 1970년에 시작되어 1979년에 완료되었다. 이 사업의 이익은 그의 광고 회사 설립 자금이 되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라지니(Ragnini) 은행 고객인 피에트로 카나리(Pietro Canali)가 경영하는 건설회사에서 일했지만, 졸업 후 독립했다. 마셜 플랜에 따른 재건으로 경제 성장이 진행되던 이탈리아에서, 아버지가 근무하는 라지니 은행과 카나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여러 건설회사를 설립하고 주택 사업을 수주하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특히 재건 중이던 밀라노에서 주택 공급 계획인 "밀라노 두에(밀라노 두에)"를 발표하고, 인접한 세그라테 시를 밀라노의 베드타운으로 만들기 위해 1만 5000채의 아파트를 새로 건설했다. "밀라노 두에"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주택 단지 판매로 베를루스코니의 건설회사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초기에 설립한 여러 건설회사에서는 대표이사에 취임하지 않고, 항상 친척을 명목상 대표로 임명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이 대표이사에 취임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이사로 재직하고 자신도 많은 자금을 지원받았던 라지니 은행은 살바토레 리이나(Salvatore Riina)와 베르나르도 프로벤차노(Bernardo Provenzano) 등 마피아가 많은 예금을 하고 있었던 사실이 당국의 조사로 밝혀지면서 마피아의 돈세탁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3.2. 텔레밀라노
베를루스코니는 1973년 세그라테 아파트에 방송을 공급하기 위한 작은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인 '텔레밀라노'를 설립하면서 미디어 산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 9월, 텔레밀라노는 송출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베를루스코니는 자코모 프로페르지(Giacomo Properzj)와 알체오 모레티(Alceo Moretti)로부터 세그라테(Segrate) 부동산 단지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소규모 케이블 방송사인 텔레밀라노(TeleMilano)를 인수했다. 텔레밀라노는 이탈리아 최초의 민영 방송 채널 중 하나였으며, 나중에 이탈리아 최초의 민영 전국 방송국인 카날레 5로 발전했다.
이후 두 개의 채널을 더 인수한 후, 베를루스코니는 1977년 방송국을 밀라노 중심부로 이전하고 무선 방송을 시작했다.
3.3. 핀인베스트
1978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첫 미디어 그룹인 핀인베스트(Fininvest)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113 (1997년의 260에 상당)을 벌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자금 조달 구조는 지주회사의 복잡한 형태로 인해 여러 검사들에 의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핀인베스트는 텔레비전망을 이탈리아 전국으로 넓혀서 결국 하나의 전국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핀인베스트의 행동은 후에 철폐된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 RAI의 독점 구조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첫 민영 전국 방송 카날레 5를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코니 가문으로부터 1982년에 사들인 이탈리아 1과 몬다도리로부터 1984년 사들인 레테 4 등의 방송국을 더 갖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사무총장이자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와의 후광을 이용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1984년 10월 20일 이탈리아 정부가 베를루스코니의 전국 송출을 합법화하는 긴급 명령을 결의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최초의 유일한 이탈리아 상업 TV 제국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84년 10월 16일 페스카라, 로마, 토리노의 사법부에서 RAI의 전국 방송에 대한 독점을 강제하는 법을 근거로 민영 텔레비전망이 송출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정치적 혼돈 뒤에 이 명령은 결국 승인되었다. 하지만 몇 년간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3개의 채널들은 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뉴스나 정치적 언급 등이 금지되는 등의 제한을 받았다.
3개의 채널들은 1990년이 되어서야 소위 마미법이라 불리는 법에 의해 전국 TV 채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995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미디어 지주회사의 주식 일부를 독일 미디어 그룹 레오 키르쉬 (현재 파산함)와 국가에 매각했다.
3.4. 현재 자산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 신문, 출판, 영화, 금융, 은행, 보험 및 스포츠 분야에서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2012년 포브스지는 베를루스코니를 순자산 5900로 이탈리아 6위 부자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2023년 여름, 이탈리아 언론은 베를루스코니의 유산을 4로 추산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주요 회사인 메디아셋은 총 국가 텔레비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세 개의 전국 텔레비전 채널을 운영하며, 이탈리아 최대 광고 및 홍보 대행사인 Publitalia '80이탈리아어를 소유하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최대 출판사인 아르놀도 몬다도리 에디토레의 지배 지분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형제인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정치에 대해 베를루스코니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중도우파 신문인 일 조르날레를 소유하고 운영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우파 신문 중 하나인 일 폴리오는 그의 전 부인인 베로니카 라리오가 일부 소유하고 있었다. 라리오가 2010년 지분 일부를 매각한 후,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이 신문의 과반수 지분을 인수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최대 민간 기업 중 하나인 피닌베스트를 설립하고 주요 주주였다. 그는 엔니오 도리스와 함께 이탈리아 최대 은행 및 보험 그룹 중 하나인 메디오라눔을 설립했다. 그는 영화 및 홈 비디오 배급(메두사 필름과 펜타 필름)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1986년부터 2017년까지 축구 클럽 AC 밀란을 소유했고, 2018년부터 AC 몬차를 소유했다.
유언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는 피닌베스트의 지배 지분을 두 아들과 세 딸에게 상속했고, 그의 동거인인 마르타 파스키나에게는 개인 재산 100, 그의 형제 파올로 베를루스코니에게는 100, 오랜 동료인 마르첼로 델루트리에게는 30를 상속했다.
4. 정치인 시절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경력 동안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등 반공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실정과 실언, AC 밀란 승부조작 스캔들 등으로 2006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4월, 우파 연합의 압승으로 이탈리아 최초로 3선 총리에 임명되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은 언론 장악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여론을 조종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정치적 성공은 '언론 장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방송을 정치에 이용한 최초의 이탈리아 정치인으로 거론된다. 그가 소유한 민영방송사 미디어셋은 2008년 총선에서 '총리 만들기' 역할을 수행했다. 미디어셋은 집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보도로 불안감을 조성하여 보수 표심을 흡수하고, 나폴리의 '쓰레기 대란'과 '다이옥신 치즈' 문제 등을 집중 보도하여 좌파 지지 기반을 흔들었다.
2004년 이전까지 이탈리아 방송시장은 공영방송 RAI가 45%, 베를루스코니 소유 3개 민영채널이 44%를 점유하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RAI 이사의 2/3을 정부 및 여당이 선임하도록 규정한 '가스피리법'을 추진하여 방송의 여론 기능을 독점 및 통제하고자 했다. 수상 취임 후 RAI를 장악하여 전체 방송시장의 90%를 점유했으며, 더 나아가 방송사업자가 신문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여 언론 시장 지배를 강화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샌드위치 뉴스'가 등장했다. 이는 시청자들이 마지막 입장을 옳게 느끼는 심리를 이용한 것으로, 정부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당시 공영방송 RAI의 생중계가 중단된 사건은 언론이 정부 권력에 사유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베를루스코니는 신자유주의 정치인으로, 마거릿 대처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하는 등 EU 내에서도 친미적인 자세를 보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4.1. 정계 입문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에 정계에 입문했는데, 인드로 몬타넬리와 엔조 비아지에게 투옥을 피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초, 마니 푸리테 사건으로 인해 펜타파르티토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좌파 민주당의 진보 연합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낳았다.
1994년 1월 26일, 베를루스코니는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는 것을 중심으로 한 강령을 가지고 자신의 정당인 포르차 이탈리아이탈리아어를 발표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마니 푸리테 스캔들에 충격을 받은 펜타파르티토 유권자들에게 포르차 이탈리아이탈리아어가 신선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추구해 온 친서방 자유 시장 정책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정한 직후, 마니 푸리테 사건을 수사하던 조사관들은 베를루스코니와 그의 사업 그룹 고위 임원들에 대한 체포 영장 발부에 근접했다고 한다. 정치 경력 동안 베를루스코니는 마니 푸리테 조사가 이탈리아에 소련식 정부를 세우려는 공산주의 검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사업가로서 풍부한 자금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신정당 포르차 이탈리아를 결성하여 정계 개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중도우파 계열 의원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4.2. 총리 재임 (1994-1995, 2001-2006, 2008-2011)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정책을 적극 지지한 반공주의 성향의 유럽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실정과 실언, 자신이 대주주인 AC 밀란이 연루된 승부 조작 스캔들로 인해 2006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좌파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4월, 자신이 이끄는 우파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이탈리아 최초로 세 번째 총리 임기(2008년 5월~2011년)를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리직에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지상파 방송, 신문, 인터넷 등 자신이 소유한 막강한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이탈리아인들이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까지 조종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유당은 2001년 총선과는 달리 2003년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다른 많은 유럽 여당들과 마찬가지로, 200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는 43.37%의 지지를 얻었다. 포르차 이탈리아(Forza Italia)의 지지율 또한 29.5%에서 21.0%로 감소했다 (1999년 유럽 선거에서 포르차 이탈리아는 25.2%를 얻었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선거 결과가 더 좋았던 다른 연정 정당들은 베를루스코니와 포르차 이탈리아에게 정부의 정치적 방향에 대한 더 큰 영향력을 요구했다.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주요 계획 중 하나는 이탈리아 헌법 개정이었는데, 베를루스코니는 이 헌법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에 대해 연정 내 당들의 의견은 처음부터 상당히 달랐다. 북부동맹(Lega Nord)은 연정에 남는 조건으로 연방제 개혁(지역에 대한 권한 분권 강화)을 주장했고, 국가연합은 강력한 총리 권한(총리 권한 강화)을 주장했다.
2003년 협상 과정의 어려움으로 베를루스코니 정부 내부에 불안이 일었지만, 대부분 극복되었고, 지역 권한 분권, 연방 상원, 강력한 총리 권한을 포함한 법안이 2004년 4월 상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은 2004년 10월과 2005년 10월 하원에서 약간 수정되었고, 2005년 11월 16일 상원에서 간신히 가결되었다. 이탈리아 헌법을 개정하려면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6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61.3%의 유권자가 반대표를 던져 헌법 개정안이 부결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건설업과 방송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기업가였다. 특히 방송 사업에서는 “이탈리아의 미디어 왕”이라 불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국내 민영 방송국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 무렵, 많은 테러에도 관련된 반공 단체 “프리메이슨 조직 P2(ロッジP2)”의 회원이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탕겐토폴리(タンジェントポリ) 이후의 정계 재편에서는 포르차 이탈리아를 창당하여 냉전 이후의 정계를 주도하는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파시스트 정권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1900년대 전반에 5기에 걸쳐 왕국 총리를 역임한 조반니 조릿티에 이어 이탈리아 정계에서 장기 집권을 수립했다. 공화제 이행 후 최초로 수상이 된 알치데 데 가스페리보다도 베를루스코니의 수상 재임 기간은 더 길다.
정계 재편의 혼란 속에서 정권을 획득했지만 단명에 그친 제1차 정권(1994년-1995년), 정권 탈환 후의 제2차 정권(2001년-2006년), 그리고 양당제를 맞이한 제3차 정권(2008년-2011년) 등 세 차례 정권에서의 수상 경험 년수는 9년을 넘는다. 또한, 선진국 정상회의(G7)를 의장국 정상으로서 세 차례 주최한 유일한 정상이기도 하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사업인 신문·텔레비전·인터넷 등을 통해 유리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주 비난받았다. 또한 수상으로서의 권한을 사용하여 미디어 통제를 진행했다고도 여겨지며, DDL intercettazioni(통신 감청법) 가결에 반대하여 이탈리아어판 위키피디아가 일시적으로 업데이트를 중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부정부패 의혹, 성 스캔들 등의 문제 행위도 거론되고 있다.
사업가로서 풍부한 자금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신정당 “포르차 이탈리아”를 결성하여 정계 개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중도우파 계열 의원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포르차 이탈리아는 극우 정당 “국민동맹”(구 이탈리아 사회운동당)과 지역 정당 연합체 “북부동맹” 등과 연정을 구성하여 제1차 베를루스코니 정권(1994-1995)을 수립했다. 몇 년 만에 거물 정치인들을 제치고 총리가 된 것은 큰 화제를 모았지만, 국민동맹과 북부동맹의 대립으로 정권은 1년도 채 못 가 붕괴되었다.
1996년 4월 임시 총리 선거에서 로마노 프로디에게 패배했지만, 이후에도 야당 세력으로서 정권 탈환 의지를 버리지 않고, 2001년 야당 연합 “자유의 집”을 결성하여 총선에서 승리했다. 두 차례의 총리 지명을 포함한 제2차 베를루스코니 정권(2001-2006)은 이전의 반성을 바탕으로 연정 내 권력 균형에 주의를 기울여 5년간 장기 집권을 유지했다. 특히 이민 문제에 대해 강경 노선을 채택한 것이 특징이었다.
4.3. 정계 은퇴와 복귀
유럽 정치인 중에서는 드물게 반공주의 신봉자였고, 미국의 이라크 전쟁 정책을 적극 지지하여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실정과 실언, 자신이 대주주인 AC 밀란이 연루된 승부 조작 스캔들로 인해 2006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좌파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4월, 자신이 이끄는 우파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2008년 5월 이탈리아 최초로 3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리직에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지상파 방송, 신문, 인터넷 등 자신이 소유한 막강한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이탈리아인들이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까지 조종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06년 4월, 여당이 일방적으로 작성하고 야당의 강한 비판을 받은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 연합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하원에서는 중도우파 연합 자유의 집에 대해 49.8% 대 49.7%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상원에서는 2석 차이(연합 158석, 자유의 집 156석)로 승리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투표 절차를 승인하고 선거 과정이 합헌적이라고 판결했다.
새로운 선거 규칙에 따라, 베를루스코니에게 "소련"이라는 별명을 얻은 연합은 3,800만 명이 넘는 유권자 중 25,224표 차이로 승리하여, 다수당 보너스 제도에 따라 하원 의석 348석(자유의 집 281석)을 차지했다.
베를루스코니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 직전에 승인한 이 선거법은 오히려 연합의 패배로 이어졌고, 프로디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기회를 주었다. 프로디의 연립 정부는 많은 소규모 정당들로 구성되었다. 연합을 구성한 9개 정당 중 하나라도 프로디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더라면 그의 정부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민주당 연합과 같은 중도 정당들은 즉시 연합의 승리를 인정했지만,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와 북부 연맹과 같은 다른 정당들은 2006년 5월 2일 베를루스코니가 당시 대통령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에게 사임을 제출할 때까지 그 승리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5. 베를루스코니즘
베를루스코니즘(Berlusconismo)은 이탈리아 언론과 정치 분석가들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1980년대에 기업가적 낙관주의를 나타내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백과사전 연구소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즘은 베를루스코니라는 인물과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정치 운동, 즉 "사상 운동"에서 비롯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회 현상"과 그의 기업가적, 정치적 인물과 관련된 "관습의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그가 지지하는 특정한 자유방임주의적 시각, 즉 경제와 시장이 아닌 정치와 관련된 시각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된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기업가적 반대자들은 베를루스코니즘이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여러 측면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과 비교될 수 있는 일종의 선동 정치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는 인종 선언, 파시스트 인종법,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비판했지만, 2013년 무솔리니를 가장 큰 실수가 이탈리아의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것이었던 훌륭한 지도자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반대로 그의 지지자들은 베를루스코니즘을 프랑스의 골리즘과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에 비유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을 중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인물로 규정했다. 그는 또한 종종 포퓰리스트 또는 보수주의자로 묘사되기도 했다. 2011년 사임 후 베를루스코니는 점점 유럽회의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자주 비판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주요 지도력 전략 중 하나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당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복잡한 구조가 부족하여 경당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사용한 정치 전략과 비교될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2001년 "이탈리아인과의 계약"으로 요약된 "자유주의 혁명"에 대한 강조였다.
베를루스코니가 제안한 개혁안은 "이탈리아인과의 계약"에 추가되었는데, 주로 이탈리아 헌법과 국가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의 전환, 더 높은 선거 기준, 이탈리아 상원 폐지, 이탈리아 하원 의원 수 절반 감축, 이탈리아 주 폐지, 판사와 판사의 책임 보험 간 경력 분리를 포함한 사법부 개혁 등이 포함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34건의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이 판사들에게 박해받고 있다고 선언하고, 그들을 좌익 세력이 조종한 것으로 비난하며 사법 오류의 희생자인 엔초 토르토라와 자신을 비교했다. 2013년 베를루스코니는 시민 연합에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형제들(FdI)과 북부연맹/연맹과 같은 극우 정당을 정당화하고 제도화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 그는 이를 인정했지만, 중도우파 연합 내에서 이들을 정당화함으로써 극우파가 되어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브로더를 포함한 비평가들은 FdI의 조르자 멜로니와 연맹의 마테오 살비니가 아니라 베를루스코니 자신이 그들을 정당화하고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1994년 베를루스코니의 첫 번째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초의 우익 연정이었고, 1945년 이후 유럽 최초로 신파시스트를 포함했다. 신파시스트들은 2009년 그의 당과 합병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말년에 그의 당과 지도력은 마테오 살비니의 연맹과 조르자 멜로니의 FdI에 의해 압도당했다.
많은 작가와 정치 평론가들은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성공을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전례로 간주했으며, 대부분 베를루스코니의 비판받는 총리 재임 기간을 언급하며 비교를 했다. 뉴욕 타임스의 로저 코헨은 "널리 조롱받고, 끝없이 논의되고, 그의 명백한 여성혐오와 다양한 법적 문제에도 오랫동안 무사했던 베를루스코니는 테플론 정치인임을 증명했다... 베를루스코니를 알고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라고 썼다. 데일리 비스트에서 바비 라차 나데우는 "만약 미국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직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베를루스코니가 마음대로 한 후 이탈리아의 피폐해진 잔해만 보면 된다."라고 썼다.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동안 폴리티코는 베를루스코니를 역사 속에서 트럼프와 가장 유사한 지도자로 묘사했다. 2017년 4월 슬레이트에 게재된 기사에서 로렌조 뉴먼은 두 사람의 경력 궤적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2015년 당시 체코 재무장관이었던 안드레이 바비시는 언론 매체 소유, 사업 활동,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그에게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는 법적 문제로 인해 베를루스코니와 비교되었다. 포린 폴리시는 두 사람 사이의 유사점을 제시하며 바비시에게 "바비스코니"라는 별명을 붙였다. 영국 역사가 페리 앤더슨은 베를루스코니가 유럽 우파의 enfant terrible영어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정책 기록은 "미국에서 아칸소주에서 사형 집행, 워싱턴에서 복지 삭감 등의 정책으로 많은 경력을 쌓은 빌 클린턴보다 좌파적"이며, 이는 "이탈리아 총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썼다.
6. 외교 정책
베를루스코니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외교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이라크 전쟁 파병 등 EU 내에서도 친미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전통적인 친아랍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및 터키와의 우호 관계를 강화했다. 이는 지중해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균형하여 '동등한 친밀성'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를루스코니는 터키의 EU 가입을 지지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역 안정을 위한 중요한 세력으로 묘사했다.
2023년 그는 "중국은 21세기 서방의 체제 경쟁자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라고 경고했다.
일본 방문은 2005년 예정이었으나 총선 준비로 취소되었다. 2008년 5월 총리 복귀 후, 7월 주요 8개국 정상회의(도야마코 써밋) 참석차 처음으로 방일했다. 2008년 후쿠다 야스오의 이탈리아 방문은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회의 참석을 위한 비공식 방문이었다.
6.1. 미국과의 관계
베를루스코니와 그의 내각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외교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들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베를루스코니 집권 당시 이탈리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로 미국과 굳건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2003년 1월 30일, 베를루스코니는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 준비를 지지하는 "8개국 서한"에 서명했다. 이탈리아는 이라크 남부에 약 3,200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이는 미국과 영국군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로마노 프로디가 총리가 된 후 이탈리아군은 점차 철수했다.
6.2. 러시아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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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 기업 에니(Eni)는 러시아 국영 기업 가스프롬(Gazprom)과 사우스 스트림(South Stream) 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 의회 조사 결과, 센터렉스 그룹(Centrex Group)의 일부인 이탈리아 중앙 에너지 가스 홀딩(Central Energy Italian Gas Holding) (CEIGH)이 이 계약에서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드러났다. 베를루스코니의 측근인 브루노 멘타스티-그라넬리(Bruno Mentasti-Granelli)는 CEIGH의 지분 33%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의회는 계약을 저지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에니-가스프롬 계약에 사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비난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러시아와 유럽 연합 간의 긴밀한 관계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5월 26일 이탈리아 언론 기사에서 그는 러시아의 서방 통합 심화의 다음 단계는 EU 가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지도자는 종종 서로의 관계를 깊은 우정으로 묘사했으며, 2011년 11월 베를루스코니의 사임 이후에도 양자 회담을 계속했다.
2015년 베를루스코니는 1년 전 러시아에 의해 불법적으로 합병된 크림 반도를 방문하여 얄타에서 세바스토폴로 이동해 푸틴과 만났다. 이 때문에 그는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3년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표했다. 2022년 이탈리아 총선을 앞두고 그는 "군대가 진입하여 일주일 만에 키이우에 도착하고 젤렌스키 정부를 훌륭한 사람들로 교체한 후 일주일 후에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2022년 9월, 베를루스코니는 베네토에서 열린 포르차 이탈리아 대회에서 푸틴을 옹호하는 또 다른 발언을 했는데, 이탈리아 언론은 이 발언을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사실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푸틴이 "공산당 동료들"의 압력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2022년 10월, 유출된 음성 녹음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비난하는 내용이 드러났다.
그는 독선적인 정치가라는 특징이 일치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유럽 각국이 우려를 표명하는 러시아의 체첸 정책에도 비교적 관용적이었고, 2008년 여름 남오세티야 분쟁에서도 대러 비판을 미묘하게 억제하는 발언을 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보였다.
6.3. 이스라엘과의 관계
베를루스코니 집권 당시 이탈리아는 이스라엘의 동맹국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네타냐후 총리와 매우 가깝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네타냐후는 베를루스코니를 "가장 위대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스라엘이 EU 회원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이스라엘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퇴임 후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계속했다. 그는 가자-이스라엘 분쟁 당시 이스라엘의 행동을 옹호하고 "효과적인" 이란에 대한 제재를 촉구했다. 그러나 점령된 서안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실수"이며 "평화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 집권 당시 이스라엘과 이탈리아는 이스라엘이 이탈리아를 위해 정찰 위성을 건설하고 이스라엘이 자국 공군을 위해 M-346 훈련기를 구매하는 1000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6.4. 기타 국가와의 관계
베를루스코니는 2009년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를 방문했는데, 이는 1994년 루카셴코 집권 이후 최초의 서방 지도자 방문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기자회견에서 루카셴코를 칭찬하며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국민들에게 행운을 빕니다"라고 말했다.
7. 논란 및 법적 문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 공모, 위증, 탈세, 경찰 및 법관 부패 등 다양한 혐의로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으나, 대부분 공소시효 만료나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법 개정으로 인해 무죄를 선고받거나 재판 절차가 중지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판을 "법적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저항이 이탈리아 사법 시스템을 더 공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1981년, 베를루스코니는 비밀 프리메이슨 조직 프로파간다 두에(P2) 회원 명단이 공개되면서 스캔들에 휩싸였다.
그는 P2 회원임을 부인했으나, 법원은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이후 수상 면책법으로 재판을 중지시켰다.
그는 기업가로서의 경력, 특히 1960년대 건설업에서의 급속한 성장과 관련하여 불법 자금 수수 의혹을 받았다. 또한, 1980년대 전 사회당 총리 베티노 크락시와의 "호혜적 거래" 의혹도 제기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성 추문, 성적 발언, 성차별적 발언으로도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2009년에는 18세 모델과의 관계가 드러났고, 붕가붕가 파티에서 매춘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부인과 이혼 소송을 겪었다. 2011년에는 미성년자 매춘 및 직권 남용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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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론 장악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미디어 기업 미디어셋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고, 공영 방송 RAI를 장악하여 언론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베를루스코니는 잦은 막말로 논란을 일으켰다. 9.11 테러 직후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유럽 의회에서는 독일 의원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 간수 역할을 제안하고, 여성 정치인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등 잦은 실언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다음은 베를루스코니의 재판 및 의혹을 요약한 표이다.
| 재판 상황 | 심리 내용 | |
|---|---|---|
| 불기소 처분 | 공소시효 | |
| 심리 중단 | ||
| 무죄 | 법률 개정에 의한 무죄 | |
| 기타 | ||
| 보류 | 법률 개정에 의한 보류 | |
| 기타 사유 | ||
| 진행 중 | ||
| 유죄 | ||
7.1. 부패 및 탈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 공모, 위증, 탈세, 경찰 및 법관 부패 등 여러 형사 재판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12번 재판을 받았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공소시효 만료,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법 개정 등으로 무죄를 선고받거나 재판 절차가 중지되었다. 그는 "이것은 명백한 법적 학살이지만, 나는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나의 저항과 희생이 이탈리아인들에게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법 시스템을 만들어줄 것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라고 주장했다.
2008년, 베를루스코니는 대통령, 총리 등 4명의 최고위급 공무원이 재직 중 기소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정치 경력 동안 20건 이상의 소송에 연루되었다. 2013년 5월 8일, 700만 유로 탈세(및 2억 8천만 유로의 선거 자금 비자금) 혐의로 항소법원에서 징역 4년과 공직 추방 5년을 선고받았고, 2013년 8월 1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일반 사면으로 징역형은 1년으로 감형되었고,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집행유예 또는 사회봉사로 대체될 수 있었다.
2013년 6월 24일, 베를루스코니는 미성년 매춘부와 성관계를 맺고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 7년형과 종신 공직 추방을 선고받았으나, 2014년 7월 18일 이탈리아 항소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마르코 트라바글리오와 엔조 비아지 기자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회사를 파산으로부터 구하고 자신을 유죄 판결로부터 구하기 위해 정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 지지자들은 그를 "신인(novus homo)"으로 칭송하며, 공공 관료 조직에 새로운 효율성을 가져오고 국가를 쇄신할 외부 인사라고 주장했다.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조세 사기 관련 법정형을 단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6년 베를루스코니를 물리친 로마노 프로디는 이 법안들이 베를루스코니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 맞춤 법(ad personam laws)'이라고 주장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시칠리아 마피아와 관련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마피아 변절자들은 그가 시칠리아 범죄 조직과 연줄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1973년 베를루스코니의 친구 마르첼로 델루트리가 비토리오 망가노를 베를루스코니에게 소개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와의 연계를 부인했다.
2004년, 포르차 이탈리아이탈리아어의 공동 창립자인 델루트리는 팔레르모 법원에서 "마피아와의 외부 결탁"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팔레르모 항소 법원은 형량을 7년으로 감형했지만, 1992년까지 델루트리가 베를루스코니와 마피아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96년, 마피아 정보원 살바토레 칸체미는 베를루스코니와 델루트리가 1980년대와 1990년대 시칠리아 마피아의 두목 살바토레 리이나와 직접 접촉했다고 진술했다. 칸체미는 피닌베스트가 코사 노스트라에 연간 100~200를 지불했다고 밝혔다. 2년간의 수사 끝에 검찰은 기소 없이 수사를 종결했다.
또 다른 마피아 변절자 안토니노 지우프레(2002년 4월 16일 체포)에 따르면, 1990년대 초 마피아는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이탈리아어당에 마피아의 이익을 챙겨달라고 요청했다. 지우프레는 델루트리가 중개자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변호사는 지우프레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일축했다.
2009년 10월, 마피오소 변절자 가스파레 스파투짜는 지우프레의 진술을 확인했다. 스파투짜는 그의 두목 주세페 그라비아노가 1994년 자신에게 베를루스코니가 마피아와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스파투짜에 따르면 델루트리가 중개자였다. 베를루스코니의 변호사 니콜로 게디니는 스파투짜의 진술이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의 기업가로서의 경력은 비판자들에 의해 자주 의심을 받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건설업에서 그의 활동이 극도로 빨리 증가한 것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불법적인 출처로부터 자금을 받았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1980년대 베를루스코니와 전 사회당 총리 베티노 크락시 사이의 이른바 "호혜적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깨끗한 손" 수사에서 크락시를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밀라노 검찰은 기업인들이 이탈리아 국영 기업과 정부 자체와의 헐값 거래를 대가로 수억 달러를 정당이나 개별 정치인에게 지불하는 뿌리 깊은 시스템을 폭로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크락시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인정했다.
2013년 11월 27일, 베를루스코니는 의원직 박탈 투표가 가결되어 1994년 초선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온 의석을 잃었다. 의회 재출마도 6년간 정지될 전망이었다. 하지만 자산가로서의 지위는 변함없었고, 포르차 이탈리아 당수직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정치 생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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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베를루스코니는 탈세 관련 형기를 마쳤다. 2019년, 시민권 정지 처분이 해제되어 유럽 의회 선거에 포르차 이탈리아 후보로 출마하여 유럽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2022년 9월 29일, 86세 생일에 베를루스코니에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보드카 20병이 선물로 전달되었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EU 제재에 따라 러시아산 제품 수입 금지 대상에 보드카가 포함되어 있으며, 선물도 예외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인 “탄젠토폴리”를 계기로 부상했지만, 정치인이자 사업가로서 수많은 의혹에 휩싸여 있다. 뇌물, 탈세, 분식회계, 마피아와의 유착 등으로 수사 대상이 되었으며, 일부 의혹은 기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직 중에 통과시킨 총리 면책법에 따라 재임 기간 동안 모든 형사 수사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많은 사건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거나, 장기 집권으로 인한 면책 기간 중 장기 재판으로 이어져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취하되었다. 그는 경찰 수사와 민사 소송을 “정치적 탄압”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8월 대법원은 방송 프로그램 방영권 구매와 관련된 탈세 사건에서 미디어셋(Mediaset)에 징역 4년(특사법에 따라 1년 감형)을 선고한 하급심 판결을 확정하여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고, 같은 해 11월 상원 의원직을 상실했다.
| 재판 상황 | 심리 내용 | |
|---|---|---|
| 불기소 처분 | 공소시효 | |
| 심리 중단 | ||
| 무죄 | 법률 개정에 의한 무죄 | |
| 기타 | ||
| 보류 | 법률 개정에 의한 보류 | |
| 기타 사유 | ||
| 진행 중 | ||
| 유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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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베를루스코니는 극우 비밀결사 ‘로지 P2’의 멤버임이 공표되었다. ‘로지 P2’는 1976년에 프리메이슨으로서의 인정을 취소당했고, 이후 극우 비밀결사로 은밀하게 활동했다.
1981년 3월, ‘로지 P2’의 회원 명단이 압수되면서 이탈리아 정계를 뒤흔든 ‘P2 사건’이라는 대형 스캔들이 발생했다. 회원 명단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 왕세자, 이후 베를루스코니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안토니오 마르티노를 포함한 30명의 고위 군인, 38명의 국회의원, 4명의 현직 각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로지 P2’의 멤버임을 부인했고, 법원은 그를 위증죄로 유죄 판결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수상 시에 통과시킨 수상 면책법으로 재판을 중지시켰다.
7.2. 성 추문
베를루스코니는 성적인 스캔들, 성적인 발언,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혼과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09년 5월, 18세의 속옷 모델 노에미 레티치아(Noemi Letizia)와의 친밀한 관계가 드러났다. -- 2009년 7월경에는 "붕가붕가 파티"라 불리는 난교파티에서 42세의 파트리치아 다다리오(Patrizia D'Addario)와 매춘을 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고, 매달 350만 유로(약 460)의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도가 뜨거워졌다.
2011년에는 2010년 자택에서 열린 "붕가붕가 파티"에서 당시 17세였던 모로코인 카리마 엘 마흐루그(Karima El Mahroug)와 매춘을 하고, 범죄를 저질러 밀라노 경찰에 체포된 엘 마흐루그의 석방을 당국에 요청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미성년자 매춘 및 직권 남용 혐의를 받았다.
2009년 1월, 이탈리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강간 사건에 대한 대책을 의회로부터 요구받았을 때, "이탈리아에는 예쁜 여자아이들이 많으므로 강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발언했다. 그는 비판에 대해 "이탈리아 여성을 칭찬한 것뿐이다"라고 해명했다.
2006년 4월, 베를루스코니는 채팅걸에게 자신과 그의 정적이었던 프로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당원들에게 "9명의 채팅걸 중 7명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나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놀라운 뉴스일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당시 신문들은 경제 위기 관련 문제(세금 또는 공공 지출)에 대한 기사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발언이 각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프로디 진영의 한 관계자는 "총리를 아첨한 채팅걸들은, 음란 채팅에 전화를 걸어온 필사적인 남자를 이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3년 6월 24일, 베를루스코니는 미성년 매춘부와의 성매매 및 직권 남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검찰이 요청한 것보다 1년 더 많은 7년형을 선고받았고, 종신토록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항소했고, 1년 후인 2014년 7월 18일에 그의 유죄 판결은 무효화되었다.
7.3. 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성공은 '언론 장악'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방송을 정치에 이용한 이탈리아 최초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소유한 민영 방송사 미디어셋은 2008년 총선에서 '총리 만들기' 역할을 수행했다. 미디어셋은 집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보도로 '불안감'을 조성하여 보수 표심을 흡수하고, 나폴리의 '쓰레기 대란'과 '다이옥신 치즈' 문제 등을 집중 보도하여 이탈리아 좌파의 텃밭인 남부 농업 지역의 표를 분산시켰다. 이는 '이탈리아를 쓰레기처럼 망친 좌파 정권'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자신이 소유한 민영 방송을 통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는 '최초의 3선 총리 탄생'의 비결이 되었다.
2004년 이전까지 이탈리아의 방송 시장은 공영 방송 RAI가 45%, 베를루스코니 소유 3개 민영 채널이 44%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를루스코니는 RAI 이사의 2/3을 정부 및 여당이 선임하도록 규정한 2004년 '가스피리법'을 추진하여 방송의 여론 기능을 독점 및 통제하고자 했다.
수상 취임 후, 베를루스코니는 가스피리법을 통해 RAI를 장악하여 전체 방송 시장의 90%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방송 사업자가 점유율에 상관없이 신문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여 여론 시장 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이탈리아 우파 연합은 이러한 법 개정에 대해 '언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언론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한다'며 지지를 표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샌드위치 뉴스'라는 새로운 뉴스 보도 방식이 나타났다.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야당의 입장도 보도되지만 시청자들은 '마지막 입장'을 옳게 느끼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공정한 보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고, 정부 권력에 '사유화'된 방송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2003년 베를루스코니는 이라크에 3천 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반전 여론이 거세지면서 로마에 300만 명이 운집했다. 공영 방송 RAI는 '반전 시위' 생중계를 준비했지만, 총리의 측근들로 구성된 경영진이 기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방송을 중단시켜, 국민 여론을 전달해야 할 공영 방송의 역할이 '베를루스코니 산성'에 막혀버렸다.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 장악은 언론 자유 단체들과 이탈리아 내외의 여러 언론, 야당 지도자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프리덤 하우스는 2004년 베를루스코니의 RAI 장악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언론 자유 순위를 '자유'에서 '부분적 자유'로 강등시켰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04년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그의 광대한 미디어 제국이 연루된 이해 상충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뉴스 다양성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4년 4월 국제 언론인 연맹은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전국 미디어 90% 장악을 비판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소피아(불가리아)에서 기자 엔초 비아지와 미켈레 산토로, 코미디언 다니엘레 루타치를 "텔레비전을 범죄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했고,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 발언은 "불가리아 칙령"으로 불렸다.
2003년 11월, 코미디언 사비나 구잔티가 베를루스코니 미디어 제국을 비판한 후 RAIot이라는 풍자 프로그램이 검열되었다. Mediaset은 구잔티의 프로그램을 두고 RAI를 고소하여 20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비바 사파테로!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베를루스코니는 Mediaset을 통해 7개의 전국 TV 채널 중 3개 (Canale 5, Italia 1, Rete 4)를 소유했다. Mediaset은 모든 주요 정당에 적절한 가시성을 부여하는 데 있어 공영 방송 RAI와 동일한 기준을 사용한다고 밝혔지만, 이는 종종 반박되었다.
2009년 6월, 베를루스코니는 광고주들에게 Gruppo Editoriale L'Espresso이탈리아어가 발행하는 잡지와 신문, 특히 [[la Repubblica]]이탈리아어와 L'espresso에 대한 광고 계약을 중단하거나 거부할 것을 촉구하며, 이 출판사를 "뻔뻔하다"고 비난했다.
2009년 10월, 국경 없는 기자회 사무총장 Jean-François Julliard프랑스어는 베를루스코니가 "언론 자유 포식자 목록에 추가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선언했다.
베를루스코니의 강력한 비평가 중 하나는 이코노미스트였는데, 베를루스코니는 이 잡지를 "이코노미스트"(The Ecommunist)라고 불렀다. 2001년 4월 26일, 이코노미스트는 '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를 이끌 자격이 없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코노미스트를 고소했지만, 2008년 9월 5일 밀라노 법원은 베를루스코니의 주장을 기각하고 이코노미스트의 소송 비용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1년 6월, 이코노미스트는 "한 국가를 망친 남자"(The man who screwed an entire country)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사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통해 유리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주 비난받고 있다. 또한 수상으로서의 권한을 사용하여 미디어 통제를 진행했다고도 여겨지며, 통신 감청법 가결에 반대하여 이탈리아어판 위키피디아가 일시적으로 업데이트를 중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7.4. 막말 논란
베를루스코니는 무례한 발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정치 경력 동안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다음은 그 예시이다.
| | 사건 및 발언 내용 | |
|---|---|
| 2001년 | 9.11 테러 직후, "우리는 우리 문명의 우월성을 인식해야 한다"며 서구 문명이 이슬람 국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 이는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큰 논란을 일으킴. |
| 2003년 |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인터뷰에서 무솔리니가 "상대를 살해하지 않고 '휴가'를 보내게 했던 온화한 독재자"였다고 주장. 2013년에는 무솔리니를 유대인 학살에 동참한 것이 실수였지만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다시 언급. |
| 2003년 7월 | 유럽 의회에서 자신을 비판한 독일 의원 마르틴 슐츠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 간수 역할을 제안하며, 그를 "민주주의의 악의적인 관광객"이라고 비난. 이 사건은 이탈리아와 독일 관계를 악화시킴. |
| 2003년 9월 | 뉴욕 증권거래소 연설에서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할 이유 중 하나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서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여성 국회의원들의 항의를 받음. |
| 2005년 | 핀란드 요리를 비판하고 핀란드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을 설득하기 위해 "플레이보이 매력을 발휘해야 했다"고 주장. 할로넨은 베를루스코니가 "자신의 설득력을 과대평가했다"고 응수. |
| 2006년 3월 | 마오쩌둥 시대 중국 공산당이 "아이들을 삶아서 들판에 비료로 사용했다"고 주장. |
| 2008년 | 2008년 이탈리아 총선을 앞두고 우익 여성 정치인들이 "더 아름답다"고 말하며 성차별주의로 비난받음. 또한 스페인 정부의 각료회의 구성이 남녀 수가 같다는 이유로 너무 '핑크빛'이라고 비판. |
| 2008년 |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기자 회견에서 푸틴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질문한 기자에게 총을 쏘는 흉내를 냄. |
| 2008년 11월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젊고, 잘생기고, 심지어 햇볕에 그을렸다"고 언급. 2009년에는 자신이 오바마보다 창백한 이유는 오랫동안 일광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함. |
| 2009년 1월 | 이탈리아 여성들이 강간으로부터 안전하려면 "아름다운 여성만큼 많은 군인이 필요하다"고 말함. |
| 2009년 4월 | 2009년 라퀼라 지진 이틀 후,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캠핑 주말로 여기라고 제안. |
| 2010년 10월 | 신성 모독적인 농담을 한 영상이 공개되어 바티칸 신문의 비난을 받음. |
| 2010년 11월 | 미성년자 매춘 혐의를 받은 후 "게이인 것보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낫다"고 말함. |
| 2011년 7월 | 유출된 전화 감청 기록에서 "나를 병들게 하는 이 쓰레기 같은 나라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함. |
| 2013년 1월 |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1938년 반유대 법을 제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를 위해 "좋은 일"만 했다고 말함. |
8. 사망 및 장례
2023년 6월 9일 재입원한 베를루스코니는 6월 12일 아침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탈리아 내각은 장례식 당일을 국가 애도일로 선포하고 3일간 조기를 게양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중도좌파 연정의 일부 구성원과 일부 법률가 및 정치학자들의 항의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망 몇 시간 후, 베를루스코니의 시신은 아르코레에 있는 그의 저택인 빌라 산 마르티노로 옮겨졌고, 저택의 개인 예배당에서 안치되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만 조문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르코레 담당 사제인 지안도메니코 콜롬보 신부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배당에서 고인을 위한 개인 미사를 집전했다.
베를루스코니의 국장은 6월 14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밀라노 대주교 마리오 델피니가 집전하는 암브로시오 전례에 따라 거행되었다. 델피니 대주교는 삶의 의미에 대한 강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삶(사업, 공직, 정치)의 일부 요소들을 언급하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인간이었고 이제 하느님을 만날 것이라는 점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강론은 논란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일 파토 콰티디아노는 "냉담한" 강론이라고 묘사했고, 반면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베를루스코니 가족이 매우 감명받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어떤 위선도 없는 완벽한 묘사"라고 평가했고, 일 폴리오는 "훌륭한 강론"이라고 불렀다. 일 메사제로는 이 강론이 공동체와 해방의 창립자 루이지 지우사니 신부의 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장례식에는 대성당에 2,300명, 대성당 밖 광장에 15,000명이 참석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지지자들은 관이 대성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 "C'è solo un presidente!"('오직 한 명의 대통령만 있다!')라고 외치며 박수를 쳤다. 반공산주의 구호도 외쳐졌다는 보고가 있다.
종교 의식 후, 베를루스코니의 시신은 빌라 산 마르티노로 옮겨졌고, 그 후 알레산드리아의 템피오 크레마토리오 발렌지아노 판타 레이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그의 유골은 저택의 성 마르티노 예배당에 있는 그의 부모 루이지와 로사, 그리고 그의 누이 마리아 안토니에타의 묘 옆에 안치되었다.